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 序章(서장) ★★★ 序章(서장) 마황천자(魔皇天子) 등세욱(鄧世旭). 그는 이 시대가 낳은 고금불멸의 천하 제일인자였다. 약관 십구 세에 난세무림에 뛰어들어 무림 제일의 절대좌(絶代 座)에 오른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인간이되 신(神)에 가까운 인물 이라 불렀다. 마도천하(魔道天下) 육십년. 등세욱의 위업(偉業)이자 살아 있는 신화(神話)였다. 홀홀단신으로 마도 사백오십 개 방파를 굴복시키고 정도 이백육 십 개 문파를 격파하면서 시작된 이 신화는 아마도 무림사 전무후 무한 기록이 될 것이다. 그가 세운 마절궁(魔絶宮)은 육십 년 동안 천하의 생사를 관장하 는 염라부(閻羅府)이며 무림의 자금성(紫禁成)이었다. 그러나 신화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어느 날 그 위대한 마절궁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마황천자 등세욱도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천하는 의문과 경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마절궁은 스스로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와해된 것인가? 의문과 의혹 속에서 밝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시간만 흘 러갈 뿐이었다. 마절궁의 몰락과 더불어 무림엔 커다란 변화가 일 어났다. 사대벌왕(四大罰王). 막강한 힘과 신비(神秘)에 싸인 네 개의 세력이 천하를 사분하 여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목벌왕(東木罰王) 복마성(伏魔城). 서금벌왕(西金罰王) 파사철부(破邪鐵府). 남화벌왕(南火罰王) 현정금도문(顯正金刀門). 북수벌왕(北水罰王) 의성보(義星堡). 사대벌왕은 나타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천하의 악인(惡人)과 마두(魔頭)들을 일제히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고금에서 가장 찬란했던 마절궁의 잔재는 자취를 감 추었고, 날뛰던 마두의 무리들은 안개처럼 힘없이 사라지고 말았 다. 가장 신비롭게 나타난 사대벌왕의 위력은 예전의 마절궁과 비교 해도 절대 손색이 없었다. 그리하여 당금 무림은 이제 사대법왕의 천하가 된 것이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 장 (진홍의 해적 1) 진홍(眞紅)의 해적(海賊) 1. 아아아―! 범선(帆船) 한 척이 동해의 검푸른 물결 을 가르고 있었다. 동쪽에서 항주(杭州)로 향하고 있는 이 배는 대단히 화려하여 다른 범선들은 비교 가 안 될 정도였다. 날씨는 화창하여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해면(海面) 위로 짙은 안 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 록 안개는 점점 더 짙어져서 순식간에 전 해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방은 한 치 앞도 보이 지 않게 되었다. 뱃머리에 우뚝 서서 전면을 주시하고 있 는 중년의 장수(將首). 호걸다운 얼굴에 황금갑옷을 입고 붉은 수실이 달린 투구 를 썼으며 허리에 비껴 찬 삼척장검(三尺 長劍)은 그의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 다. 한동안 짙은 안개를 바라보고 있던 중년 장수의 얼굴이 침울하게 굳어졌다. "조타수장(操舵手長)을 불러라." "대명(待命)!" 옆에 서 있던 군사 한 명이 쏜살같이 선 실 쪽으로 달려갔다. 타타타탁―. 곧이어 급박한 발자국 소리를 울리며 오 십대로 보이는 장수 한 명이 나타났다. 검게 탄 얼굴, 양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살, 그리고 탄탄해 보이는 어깨에서는 바 다 사람 특유의 강인함이 내비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중년 장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동해미망무(東海迷忘霧)에 대해서 알고 있겠지?" 동해미망무! 낮과 밤의 급격한 기온 차이로 인해 갑 자기 일어나는 안개의 일종으로 일단 한 번 갇히게 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미로(迷路). 그래서 혹자들은 말한다. '동해미망무가 보이면 먼저 간 동료들을 만나게 되리라' 먼저 간 동료라는 건 바로 먼저 죽어 간 뱃사람들을 일컫는 것이고 그들을 만난다 는 것은 필히 죽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동해미망무가 서서 히 범선을 덮쳐 오고 있는 것이다. 조타수장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흐음!" 한숨 비슷한 침음성을 내뱉으며 중년 장 수는 굳어진 얼굴로 선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세한 안개의 덩어리가 촘촘이 묻어 있었고 한 줄기 긴장감이 흘 러내렸다. "지금 이 배에는 지극히 고귀한 아가씨 한 분이 타고 계시다. 우리는 내일 아침까 지 그 분을 항주에 모셔다 드려야 한다. 위재상(魏宰相)께서 내일 아침까지 필히 도착할 것을 명하셨다." 조타수장의 안색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 역시 위재상이라는 세 글자의 의미를 알고 있었으며, 그 세 글자의 위력도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자신은 없지만 길을 잃지 않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조타수장이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노력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 이것 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명황군(大明 皇軍)의 철칙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장수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조타수장을 바라 보았다. "나 진자민(陣子民)은 사십 년 동안 오직 조 타(操舵)만을 쥐어 온 네 손과 뛰어난 네 오관 (五觀)을 믿는다." "대명!" 돌아서서 조타실로 뛰어가는 조타수장의 얼 굴에는 한 줄기 불안이 스며 있었다. 사십 년 동안 바다에서 산 그였다. 그러나 동해미망무 에 만큼은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배는 한 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안개 속을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안개는 해면 밑에서 튀어나온 암초를 가리고 있었다. 선수에 고개를 내밀고 암초를 찾는 수십 명 군사들의 두 눈은 붉게 핏발이 일었다. 안개를 바라보는 조타수장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 았고 조타를 쥐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평생을 바다에서만 산 그였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배는 안개 속을 한 치 한 치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빛은 차단되어 있었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 지 안개뿐이었다. 안개만을 보면서 항로를 정한 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바다에서 안개를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나마 보통의 안개라면 안심하고 항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범선의 앞을 가리고 있는 것 은 악마의 입김과도 같은 동해미망무였으니 긴 장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다. 초조한 시간이 영겁처럼 흘러갔다. 모두가 뱃전에 나와 서서 눈을 까뒤집고 안개 속을 벗어나기만을 노심초사 바랐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앞을 보고 있던 군사 하나가 소리 쳤다. "해, 햇빛이다." 감격에 찬 목소리에 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뱃머리를 향했다. 안개 사이로 보이는 빛무리, 태양이었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 쳐졌다. "와아―, 바다다." "동해미망무를 뚫었다." 하늘이 떠나 갈 듯한 군사들의 함성이 울려퍼 졌다. 그러나 조타수장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나타 나 있었다. 동해미망무를 벗어났다는 사실만으 로 들떠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안색을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진자민만은 달랐다. 그는 대명 황군의 수군 부장이다. "조타수장!" 아니나 다를까? 진자민의 노기 띤 음성이 터 졌다. "옛!" 진자민의 앞에 선 조타수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자민의 부릅뜬 두 눈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이곳은 동북해로(東北海 路)가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얼마나 벗어났느냐?" "하루 거리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항주 에는 모레 도착할 것 같습니다.."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진자민은 눈썹 을 치켜 떴다. "모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느냐? 위 재상께 약속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로 낙인찍힐 수는 없다. 내일까지 반드시 항주에 배를 대야 한다. 이건 절대 명령이다." "그, 그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주눅이 든 조타수장의 목소리에 진자민은 난 감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 방법이 없단 말이냐?" "지름길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는 것이냐? 어서 그리 로 배를 몰아라." "안 됩니다. 그곳은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조타수장은 완강하게 말했다. 진자민의 얼굴에 의혹이 일었다. "무엇 때문이냐? 해적이라도 나타난단 말이 냐?" "그렇습니다. 그 곳은 동해의 무법자(無法者) 인 해마단(海魔團)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그들 에게 잡히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 다." "배를 몰아라. 대명의 수군이 그 따위 해적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조타수장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렇지만 저희들 인원이 사십여 명밖에 되 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전투장비도 너무 허술합니다. 보다시피 저희 배는 전투선이 아니 지 않습니까?" "상관없다. 해적 따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 다." 진자민은 호탕하게 노갈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조타수장은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는 진자민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 열여덟 에 대명 황무대(大明皇武臺)를 제일기생(第一基 生)으로 나와 화려한 가문을 배경 삼아 빠르게 진급하여 지금의 동해수군부(東海水軍府) 이인 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출세만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의 앞길에 티끌만한 오점 하나라도 남기게 되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을 사람이다. 하물며 일개 해적단 따위 때문에 자신의 경력 에 오점을 남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할 수 없군. 명령은 명령이니 이제 그들과 만 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해마단(海魔團)! 동북해로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단의 이름이 다. 그냥 듣기에는 그저 해적에 불과하니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겠지만 이곳 동북해로에서 해 마단을 무시했다가는 일생 동안 두 번 다시 잊 을 수 없는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바람처럼 나타나서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깨 끗이 털어 가고 마는 바다의 사신들. 그들을 만난다면 일단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첫째, 항복해서 젊은 여자와 재물은 몽땅 다 내어 주고 빈 배에 목숨만 겨우 건져 싣고 살아 가는 것. 둘째, 용감하게 반항하다가 처참하게 몰살당 하는 것. 셋째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반항하고 용케 살아남는다든가 그 들을 물리치고 달아난다든가 하는 요행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복한 자들 외에는 결코 살려 둔 적 이 없었고 동북해로에서 해마단을 만나서 승리 를 쟁취했다는 말은 이제까지 어느 누구의 입에 서도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동북해로에서는 어떤 배든지 간에 먼 길을 택해 빙빙 돌아서만 다녔다. 그것이 설 사 대명의 수군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는 마 찬가지였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대명의 동해수 군부 전체가 출동하여 이동할 경우가 될 것이 다. 물론 대명의 동해수군부가 일제히 출동한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스르르―. 배는 서서히 방향을 되돌려 동남간(東南間)을 향해 나아갔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태양이 기울면서 바다는 붉게 물들어 갔다. 한 순간 돛대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병 사가 소리쳤다. "해적이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 장 (진홍의 해적 2) 2. 쏴아아아아! 파도를 가르며 수평선 위로 세 척 의 쾌선(快船)들이 빠르게 질주해 오 고 있었다. 배들은 바람의 저항을 막기 위해 길쭉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뱃머리에 는 커다랗고 굵은 철침(鐵針)들이 불 쑥 불쑥 솟아 나와 있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쾌선들. 그것뿐이 아니었다. 쾌속선들 뒤를 커다란 범선 하나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범선의 갑판 위에는 세 사람이 우뚝 서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 사람 가운데 십칠팔 세 가량 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군선을 노려보 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흑발(黑髮) 아래 냉혹 한 두 눈이 쉴 새 없이 기광을 번쩍 였고, 벗어붙인 탄탄한 구릿빛 동체 (銅體)에는 격전에서 얻은 듯한 검흔 (劍痕)이 수없이 많아서 숨을 쉴 때 마다 꿈틀거렸다. 좌측의 중년인은 지극히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으나 가끔씩 가라앉아 있는 두 눈에서 안광이 번 뜩였다. 반면 우측의 중년인은 강인해 보이 는 얼굴과 장대한 체격에 넓이가 한 자나 되는 장도(長刀)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허리까지 늘어진 청년의 흑발이 바 람에 흔들렸다. 냉막한 시선으로 범선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의 얼굴에 가벼운 의혹이 일었다. "이상한 일이군. 군선(軍船)도 아닌 데 어째서 군사들이 타고 있는 것일 까?" 좌측의 중년인이 불안한 표정을 지 었다. "혹시 조정의 관리가 타고 있는 것 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물 러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측 중년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집법당주(執法堂主)! 자넨 겁이 너무 많은 게 탈이야. 우리의 목적은 노획물에 있는데, 관리면 어떻고 황 족이면 어떻다는 건가?" 좌측 중년인, 집법당주라고 불린 중년인의 얼굴에 노기가 번져 올랐 다. "형법당주(形法堂主)! 관부를 건드 리게 되면 우리는 대대적인 토벌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결코 관부를 이 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뱃머리를 돌리자는 것이냐?" "나는 다만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 자는 것뿐이다." "업어치나 메어치나 같은 말이 아 니냐?" "말이 너무 지나치다." "뭐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져 가고 마 주보는 시선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순간 청년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흘 러나왔다. "집법당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관부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러나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해마단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집법당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그럼……." 청년의 목소리가 비정하리만큼 단 호하게 흘러나왔다. "전멸(全滅)!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해적선을 바라보는 군사들은 뻣뻣 하게 굳어 있었다. 조타수장의 얼굴 역시 두려움으로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진자민의 얼굴에서는 두려 움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겁도 없는 놈들이군. 이 배가 어 떤 배인 줄 알고 달려드는가. 모두 싸울 준비를 갖추어라." 명령이 떨어지자 굳어 있던 군사들 이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 했다. 바로 그때였다. "진부장! 무슨 일이죠?" 아름다운 목소리가 낭랑하게 뱃전 을 울리며 선실 쪽에서 한 여인이 사 뿐히 걸어 나왔다. 수국(水菊)이 그려진 백의(白衣)를 몸에 걸친 여인의 모습은 마치 선녀 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아름답기 그 지없었다. 화사하게 빛나는 이마 아래 총명해 보이는 두 눈이 빛나고 있었고, 미려 한 콧날과 붉디붉은 입술은 같은 여 인들이 보아도 반해 버릴 정도였다. 얼굴이나 자태 어디에서도 그늘진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 로 보아 이 세상을 살아 오면서 슬픈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듯한 여인이었다. 진자민이 당황한 표정이 되어 여인 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바람이 차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여인은 주위를 둘러보다 그만 안색 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해, 해적이잖아요?" 그러나 진자민은 자신만만한 표정 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배에 타고 있는 군사들의 수는 적지만 모두 수 군의 정예들입니다. 해적 따위는 순식간에 물고기 밥을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그렇지만 해적들은 모두가 잔 인하고 무진장 지독하다던데……." 여인이 두려움으로 몸을 떨자 진자 민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가씨 이 진자민을 믿으십 시오. 아가씨께서는 그저 선실 안에 서 싸움이 끝날 때까지 쉬고 계시면 됩니다." 진자민의 말에 여인은 겨우 안심한 표정으로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진부장만 믿겠어요."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진자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이 진자민의 목표는 병마대원수란 말입니다. 그런 제가 해적들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는 바다를 보며 두 눈을 부릅떴 다. 쾌선들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군사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 왔다. "저, 저……." "피, 피해라!!" 쾌선들이 그대로 범선을 향해 부딪 쳐 온 것이다. 콰― 아아앙―! 커다란 철심이 범선의 뱃머리에 깊 이 박히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군사들 이 허공으로 솟구쳐졌다. "와아아아―!" 쾌선들 속에서 함성이 터져나오고 웃통을 벗어제친 해적들이 범선의 갑 판으로 뛰어 올랐다. 손에 번뜩이는 도를 들고 시퍼런 살 기를 뿜어내는 모습은 먹이를 노리는 이리 떼의 모습이었다. 진자민의 목소리가 갑판 위로 울려 퍼졌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러나 살기 어린 해적들 앞에서는 수군의 정예들이라 하는 군사들도 속 수무책이었다. 제대로 반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수 군들은 맥없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어느 새 싸움이 치열한 갑판 위에 우뚝 서 있는 청년. "죽여라! 숨통이 끊긴 것을 확인하 고 물 속에 처넣어라." 해적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 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 이었다. 진자민은 삼척장검을 뽑아 들고 닥 치는 대로 해적들을 베어 갔다. 번― 쩌― 억―. 파츠츠츠츠―! 눈부시게 새하얀 검광(劍光)이 허 공을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 다. "끄아아악!" "끄윽!" 검광의 범위 안에 들어 있던 해적 들은 전신이 양단된 채 갑판 위를 나 뒹굴었다. 날뛰던 해적들이 주춤거렸 다. 청년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솟 아올랐다. "저자는 내가 맡겠다." 청년이 앞으로 걸어나오자 진자민 은 흠칫 놀라 장검을 거두어 들였다. '대, 대단한 살기다.' 그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누구냐?" 청년의 목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해마단의 단주(團主)!" 진자민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이렇게 젊은 놈이 해마단의 단주 라니!' 하지만 그는 동해수군부의 제이인 자답게 곧 평정을 되찾으며 검을 바 로잡았다. "아무래도 좋다. 네놈부터 죽여 주 마." 진자민의 삼척장검이 눈부신 속도 로 허공을 갈랐다. 스파아아앗―! 검풍(劍風)이 찢어지게 울리고 현 란한 백색검망(白色劍網)이 청년의 가슴을 노리고 섬전(閃電) 같은 속도 로 쏘아져 들었다. 한 순간에 스물일곱 번의 변화를 그려낸 검초는 허공을 온통 무수한 검영(劍影)으로 가득 채웠다. 청년은 검을 바로 세우며 허공을 차고 진자민을 향해 날아갔다. 일체의 수비가 없는 쾌도식(快刀 式). 진자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것은 동귀어진의 초식! 같이 죽을 수는 없다.' 진자민은 당황해서 검세를 거두어 들이며 옆으로 물러섰다. 파팟! 바로 그 순간 청년의 검이 거의 직 각으로 꺾이며 진자민의 가슴을 깊숙 이 쑤셔 박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 진 일이었다. "허억!" 진자민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 리며 물러났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가 슴과 청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이, 이럴 수가……!" 청년은 냉혹한 시선으로 진자민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뜻인가?" "어, 어떻게 검이 직각으로……?" 진자민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 다. 청년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어렸 다. "네가 가장 편안한 방법으로 검을 익힐 때 나는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검을 익혔다." "……?" "일곱 살 때부터 굶주린 늑대굴 속 에 뛰어 들어 목숨을 걸고 그들을 죽 이면서 상대방이 예측할 수 없는 이 검법을 익힌 것이다." "미, 미친놈!" 미친놈.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진자 민의 신형이 썩은 고목처럼 갑판 위 를 나뒹굴었다. 바로 그때였다. "와― 아아―!" "여인이다." 시끄러운 환호성이 갑판을 뒤흔들 었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 장 (재상의 딸 1) 재상(宰相)의 딸 1. 군사들의 시체가 갑판 위에 널려 있었고, 수십 명의 해적들이 한 명의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와! 기가 막힌 미인이다." "몸에 착착 감기겠는데." 뚱뚱한 해적 한 명이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썩! 당황한 여인은 사정없이 달려드는 해적의 뺨을 후려쳤다. "이 놈! 어디에 손을 대려고 하느 냐?" 여인은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뚱뚱 한 해적을 노려보았다. 해적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노삼(魯三), 조심하라고. 장 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이니까." "노삼의 몸은 두붓살이라 푹푹 찔 리겠군." 노삼이라 불린 중년인은 손바닥으 로 얼굴을 쓱쓱 문지르다 비곗살이 덜렁거리는 배를 쑥 내밀었다. "미인의 손길이라 맞아도 황홀하 군. 어디 이번에는 전신을 때려 봐 라." 여인은 새파랗게 질려 뒤로 주춤거 리며 물러섰다. 그러나 해적들이 둘러싸고 있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여인은 당혹 감을 감추지 못했다. 노삼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는 비대한 몸집을 허공에 날려 여 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악!" 여인은 놀라며 노삼의 손길을 피해 냈다. 순간, 찌익! 노삼의 우악스런 손길에 비단 옷이 찢어지며 어깨 부근의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해적들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으흐흐! 미치게 만드는구나." "저, 저걸 만지면 은가루라도 묻 어 나겠는데!" 해적들이 저마다 침을 삼키며 여인 의 전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인의 안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 아올랐다. "이놈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 런 행패를 부리느냐?" 제법 호기를 부렸으나 그것은 해적 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히힛! 누구면 어떠냐? 어차피 우 리한테 잡힌 몸인데." 바닥에 처박혀 있던 노삼이 손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어디 고귀한 몸은 얼마나 더 야들 야들한가 볼까?" 뚱뚱보 노삼이 다시 한 번 여인에 게 덤벼들었다. 피하려고 몸을 틀었 지만 덥석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여인은 기겁해서 몸을 바둥거렸다. "이 놈! 어서 놓지 못하겠느냐?" 노삼이 놓아 줄 리는 만무하다. 그 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으핫! 주, 죽이는구나." 해적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노삼! 너만 재미보기냐? 우리도 한 번씩 안아 보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 다. 해적들에게서 받는 아픔도 아픔 이었지만……. 그때 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 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해라." 지극히 낮은 음성이었으나 은연중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토록 흉흉하던 해적들은 청년의 말 한 마디에 대꾸도 못하고 얌전히 물러섰다. 여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청년의 모습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 다. 흘러내린 흑발 사이로 보이는 창백 한 얼굴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냉막 함을 띠고 있었다. 여인은 숨막히는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 냉막한 기질을 뿜어 내는 사람을 대하기는 처음이다. 여인은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했 다. "다, 당신은 해적들 사이에서 어떤 지위에 있죠?"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 었다. 청년의 말에 해적들이 얌전히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청년의 목소리가 짤막하게 흘러나 왔다. "해마단주(海魔團主)." 순간 여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이 해적 두목이란 말인 가?' "너의 신분은?" 여인은 그제서야 기를 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의 가문 에 대한 자만심이 배어 있었다. "내 신분을 알고 나면 당신은 놀랄 거예요." "내가 놀랄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뒤집어지는 일뿐이다." 여인은 나직이 코방귀를 뀌며 청년 을 비웃었다. "흥! 무척 여유 있는 체하시는군요. 해적 두목인 주제에."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너는 지금 내 손아귀에 잡혀 있는 몸이다." 여인은 불쾌한 듯 눈을 상큼 치떴 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다니! 그렇지 만 내 신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나 를 다른 포로들처럼 취급하지 못할 거예요." 여인은 해마단주를 쳐다보며 잔뜩 거드름을 피웠다. "무척 거만한 계집이군. 천하의 모 든 사람들이 너에게 쩔쩔 맨다고 생 각하면 큰 착각이다." 여인은 해마단주의 싸늘한 눈빛에 몸을 떨었다. '무슨 사람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 는 늑대의 눈빛 같아. 그렇지만 나의 신분을 알고 나면 나를 해칠 수는 없 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인은 오히려 자신의 하인을 보듯 청년을 바라보았다. "내 이름은 위혜군(魏慧君). 위정 국(魏楨國) 재상의 딸이에요." 청년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높은 신분인 것은 예상했으나 설 마 위재상의 딸이었을 줄이야.' 위정국(魏楨國)! 이 이름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 인군상(萬人君上)의 자리에 올라 있 는 불멸의 이름이다. 황상(皇上)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으며 황실(皇室)과 인척 관계를 두 고 있는 그의 힘은 한 여름에도 서리 를 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그의 아들 위장천(魏長天)은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의 제일수장 (第一首將)의 자리에 있어 천하에 위 씨 부자의 힘을 필적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위혜군은 청년을 향해 입술을 삐죽 거렸다. "이제 두려운가요?" 사실 그녀의 말을 듣고 세상에 두 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그러나 청년의 입가에는 메마른 웃 음이 흐르고 있었다. "두 번째 말하는 것이지만 내가 두 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칫! 괜히 자존심 세우려 하지 마 세요. 당신에겐 황군을 상대할 능력 이 없잖아요?" 위혜군. 온실 속에서만 자라 온 그녀가 해 적들 앞에서도 이토록 거리낌없이 치 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 까? 그것은 위혜군 자신도 모르는 일이 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해 마단주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네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만 황군은 이 일을 영원히 모를 것이 다." 위혜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해마단주가 말하는 뜻을 정 확하게 파악했다. "그, 그럼 날 죽이겠다는 것인가 요?" "풋! 웃기는군. 우리는 여인을 죽이 는 방법을 몰라. 그렇지만 이번 일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는 너를 데리고 가야겠다." 위혜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 다. 그녀가 비록 고귀한 집안에서 자라 나 세상의 지저분한 일을 모른다고는 하나 해적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리라 는 것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위혜군은 청년에게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토벌이 겁난다면 아버님께 말씀 드려 죄를 사면받게 하겠어요. 그러 니 절 보내 주세요." 청년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난 지금까지 여인을 믿어 본 일이 없다." 위혜군은 다급한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날 보내 줘요. 그러면 영원히 입 을 다물고 있겠어요." 청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상황이 조금 불리해졌다고 비굴해 지지 마라. 내가 너를 얌전히 대한 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인보다 자 존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돌아서는 청년의 뒷모습에는 서릿 발 같은 냉기가 피어올랐다. 위혜군은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 을 넋나간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 다. 償? 못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 장 (재상의 딸 2) 2. 검푸른 바다 위로 녹색의 섬이 보 였다. 해왕도(海王島).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섬을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다른 섬보다도 크다는 점에 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왕도(王島)라고 부르기도 했다. 해왕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마 을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통나무 로 지어진 집들이 무질서하게 여기저 기 세워져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아늑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해적들이 모여 사는 본 거지라고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였 다. 그리고 그 마을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건물 하나에서 해마단주가 살고 있었다. 해마단주는 위혜군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단주님!" 십여 명의 여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녀들 중에는 벽안(碧眼)의 이국 미녀가 있는가 하면 피부가 유난히 까무잡잡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흑 인 계통의 미녀도 있었다. 그녀들은 청년을 앉히고 세수를 시 키고 안마를 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위혜군은 여인들을 바라보며 고개 를 갸웃거렸다. '저 피부가 새까만 여인은 태양 빛 에 너무 그을렸나 보다.' 그러나 그녀가 벽안의 미녀를 바라 보았을 때 하마터면 경악성을 터뜨릴 뻔했다. '귀, 귀신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 서 눈이 파란 걸까?' 해마단주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 러나왔다. "내 시비들이다!" 위혜군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빈정 거렸다. "이 여인들도 약탈당한 것인가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알아 들을 수 없을 만큼 약해져 갔다. 해마단주! 정성스레 빗질하는 머리카락 아래 로 준수 미려한 그의 얼굴이 나타났 다. 대리석을 깎아 놓은 듯한 그의 얼굴은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실로 장공(匠工)이 정성을 기울여 조각을 한다 해도 이보다 더 아름다 운 얼굴을 조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운 이 얼굴엔 어딘지 모르게 짙은 그늘 이 드리워져 있었고, 때로는 얼음보 다 더 차디찬 일면을 보이고 있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잘생겼담! 그 렇지만 해적인 걸 뭐!' 위혜군은 한동안 흔들렸던 마음을 모질게 추슬렀다. 해마단주는 공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탈이란 말은 쓰지 마라, 듣기에 거북하니까." 위혜군은 해마단주를 날카롭게 쏘 아보았다. "듣기 싫으면 이런 짓 하지 않으 면 되잖아요." 그녀가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큼 높은 목소리였다. 순간 해마단주의 얼굴에 우울한 그 늘이 드리워졌다. "세상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너 같이 귀하게 자라난 계집애가 그 것을 알려면 다시 한 번 태어나야만 할 것이다." 위혜군은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봐요! 난 당신에게 존댓말을 하 는데 당신은 왜 나에게 꼬박꼬박 반 말이죠?" "난 존댓말을 배우지 못했다." "흥! 어울려!" "반말이 듣기 싫으면 너도 반말을 하면 된다." "난 당신처럼 반말을 배우지 못했 어요." 위혜군은 토라져 몸을 돌렸다. 순간 해마단주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실로 봄바람 같이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으며 관용을 베 풀 줄 아는 현자(賢者)의 너그러운 마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약 위혜군이 이 미소를 보았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끝없는 설원(雪 原) 위에 핀 한송이 국화(菊花)를 본 것처럼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 다. 그러나 해마단주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미소는 곧바로 자취도 없이 사 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입에서 흘러나 오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너에게 최초로 자유 의사를 묻겠 다. 어디로 가고 싶으냐?"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 요." 해마단주는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 었다고 느꼈다. 하지만 일부러 고치 려고는 하지 않았다. "여인이 잡혀 오면 갈 곳은 두 군 데밖에 없다. 하나는 내 시비로 있는 경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혜군은 몸을 돌려 해마단주를 바 라보았다. "더 들을 필요도 없어요. 난 두 번 째가 어떤 것이든 그것을 선택하겠어 요." 그것은 해마단주을 지독히도 싫어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으나 해마단 주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어느 새 그의 머리는 단정히 빗겨 져 있었고 청색 끈으로 동여맨 상태 였다. "끈을 풀어라." 뒤에 서 있던 벽안의 미녀가 끈을 풀었다. 해마단주는 두 손으로 머리를 흐트 러뜨려 얼굴을 가렸다. 위혜군은 해 마단주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 었으나 다른 여인들은 만성이 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해마단주는 위혜군을 바라보았다.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라. 난 태양 아래 빛나는 보석이 되기보다는 어둠 속에 한 마리 이리가 되고 싶을 뿐이다." "……!" 위혜군은 해마단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마단주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같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말을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의식주를 해결 하기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다. 온실 속에서만 자란 네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해마단주에게는 위혜군이 반드시 처음에 말한 일을 택할 것이라는 확 신이 있었다. 그러나 위혜군의 입에 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뜻밖이었다. "난 당신의 시중을 들며 지내기는 싫어요. 허드렛일을 택하겠어요." 해마단주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 다. "내 주위에 시비들이 많다고 나를 호색한으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구 나." "필요없이 시비를 많이 두고 있는 당신의 행동이 대변해 주고 있는 거 예요." "이 여인들은 모두 고생을 모르고 자라 궂은 일이 하기 싫어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여인들을 경멸한다. 정신의 순결보다 는 육체의 편안함을 원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고도 여인들의 얼굴 에선 수치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이 남자에게서 이런 소리를 듣 고도 얼굴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밖에 없다. 하나는 그 남자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박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인들의 감정은 둘 중 어느 것이란 말인가? "그런데 너는 여인의 도리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확실히 너는 나를 놀 라게 한다." 순간 위혜군의 가슴 속에서 묘한 반발심이 일었다. "내가 당신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 나요? 이곳에 남아 있겠어요." 청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에게 모든 것을 바칠 각오란 말 이냐?" "생각해 보니 밖엔 당신 수하들이 우글거려 더 위험한 것 같아요. 이곳 에서 당신 혼자만을 상대하는 게 훨 씬 편하겠어요." 여인은 완벽하게 해마단주의 말을 받아쳤다고 생각하며 내심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해마단주도 예상했 던 것이다. 그러나 해마단주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럴 자신이 있느냐?" "사대부집의 여인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어요.." 위혜군은 품 속에서 은장도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두 눈에는 만약 서툰 짓이 라도 한다면 자결이라도 하겠다는 결 심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마음대로 해라! 이곳이 싫어지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위혜군은 해마단주의 태도에 의혹 이 일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양보를 하는 것 일까? 이 사람은 보통 해적이 아니 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때 청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 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 여인을 접해 본 적이 없다. 또한 너에게 횡 포를 부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 만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이상 나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해야 한다." "……!" "이 여인에게 기거할 방을 마련해 주어라." 해마단주는 여인들에게 일러두고 방을 나갔다. 순간 여인들이 위혜군을 둘러섰다. 그녀들의 두 눈은 적의로 빛나고 있 었다. "왜, 왜들 이래요?" 위혜군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여인들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우선 경고만 하겠어요. 당신이 다 른 곳에서는 어떤 신분이었는지 모르 겠지만 이곳에서는 우리와 같은 시비 일 뿐이에요. 당신 혼자 유별난 체하 여 우리를 단주 눈에서 벗어나게 하 지 말아요." 위혜군은 그녀의 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왜죠?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그에 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여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흘러나 왔다. "우린 그 분을 사랑해요." "사랑? 당신들은 그와 원수나 마찬 가지잖아 요? 그런데 그를 사랑하다니?" 위혜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여인들의 얼 굴에 하나 같이 잔잔한 우수가 번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분은 우리에게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어요. 그 분이 어떻게 해서 해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심 깊 숙한 곳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정 (情)이 많으신 분이에요. 우린 그 분 과 생활하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분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의 다 정한 눈길을 받으려고 애쓰는 거예 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당신 혼 자 그 분의 관심을 끄는 행동은 말아 주세요. " "걱정 말아요. 난 당신들과 연적 (戀敵)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까." 위혜군은 냉랭히 쏘아붙인 다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창 밖에는 커다란 고목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 위로 떠오르는 얼굴 하나. 치렁치렁한 흑발 사이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날카로 워 보이는 청년. 그 냉막해 보이는 얼굴이 위혜군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급히 고 개를 흔들어 청년의 영상을 지워 버 렸다. '흥! 누가 멍청하게 해적 따위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러나 가슴은 텅 빈 것같이 허전 하기만 했다. 위혜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단주의 이름은 어떻게 되죠?" "해왕도 사람들은 그를 관해영(關 海影)이라고 불러요." 관해영! 이것이 바로 해마단주의 이름이었 다. '관해영…… 관해영…….' 위혜군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뇌까리고 있었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 장 (배신과 젊은 마웅 1) 배신과 젊은 마웅 1. 만계랑군(萬計狼君)사마수(司馬秀). 해왕도의 형법당주로 군림하고 있 는 그는 자신의 침소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불안이 감 돌고 있었다. '음……, 낭패로다. 위재상의 딸이 타고 있는 배를 건드리다니…….' 그렇다면 그는 지금 위혜군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단 말인가? '딸의 실종을 알고 가만히 있을 위 재상이 아니다. 더구나 위혜군의 오 라버니인 금군대원수(禁軍大元帥) 위 장천(魏長天)은 동생을 끔찍이도 아 낀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이곳 이 은밀하다 해도 위재상이 찾겠다고 마음먹으면 발각되지 않을 리가 없 다. 위장천에게 우리의 짓임을 밝혀 낼 능력이 충분히 있을 테고……. 그 렇다면 결과는 해왕도의 전멸밖에는 없다. 이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당 한다.' 부리부리한 그의 눈에서 사악(邪 惡)하기 이를 데 없는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살기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다. 나라고 평생을 해적질로 보낼 수 는 없는 일……. 이 기회에 육지로 나가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살아 보 자.' 그는 창 밖으로 삐죽이 솟아오른 관해영이 머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오, 단주! 난 원래 그런 놈 이오.' 그는 태도를 바꾸며 밖을 향해 소 리쳤다. "단강!" 끼―익―. 문이 열리고 사십 전후의 중년인 한 명이 들어섰다. 각진 얼굴에 두 눈이 날카롭게 찢 어진 섬뜩한 안광을 내뿜는 사나이였 다. 그의 얼굴은 한 잔 걸쳤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마수는 얼굴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직도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느 냐?" 단강은 멋쩍은 듯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죽은 놈들의 얼굴이 자꾸 눈 앞에 보여서요.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사마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 렸다. '놈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라면 돈 이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 다. "넌 이 길로 섬을 빠져나가 북경 으로 가거라." "북경이라니요?" "너와 나의 생명과 부귀와 영화가 걸린 일이다." "……?" 영문을 몰라 하는 단강을 잡아끌고 사마수가 그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 다. 단강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배, 배신을 하자는 것입니까?" "쉿!" 사마수는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았 다. "목소리가 너무 크다." "전 단주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 다." 단강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사마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에 선 살기가 돌았고 얼굴은 낭패감으로 일그러졌다. "너는 의리를 지키다가 개죽음을 당할 셈이냐?" 단강은 사마수가 자신을 죽이려 한 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 다. 그의 얼굴에는 바다 사나이 특유 의 고집이 나타나 있었다. "당주님도 알다시피 전 해왕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그리로 제 아버 지의 아버지로부터 해적은 사람을 죽 일지언정 마음의 상처는 내지 않는다 고 들었습니다. 전 해적다운 해적이 되겠습니다." 사마수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보 같은 놈! 넌 의리 때문에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겠느냐? 온갖 부 귀 영화가 우릴 기다리고 있단 말이 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전 해적입니다. 배신은 저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입 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잠깐!" 단강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단강!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듣고 가거라." 단강은 사마수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돌아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만일 그를 쳐다본다면 그의 유혹을 뿌리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해적의 피가 흐르고 있 다. 하지만 그 밖에 또 무엇이 있 단 말이냐? 가슴 졸이며 사는 것도 유산이란 말이냐?" "……!" "모든 것이 운명이라 해도 너의 자 식까지 너처럼 살아야 한단 말이냐? 자식에게 그런 짐을 지운다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일이다. 자식이라도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 냐?" 단강의 몸이 한동안 움직일 줄 몰 랐다. 매일 밤 죽은 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술로 지 새우는 그였다. 그런 고통을 자식에 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단강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 다. 그러나 단강은 웃었다. "부귀와 영화……, 좋은 것이죠." 단강은 자식을 위해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을 변명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마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누구도 몰라야 한다. 섬 의 배를 이용할 수는 없으니 어둠을 틈타 배들이 지나가는 해로까지 헤엄 쳐 가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강은 사마수가 내민 서찰을 받아 쥐었다. 사마수는 방을 나가는 단강을 바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만한 정보라면 벼슬 한자리는 주겠지? 다음은 단주와 위 혜군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일만 남았 다.' 사마수는 창가에 서서 어둠이 깔려 있는 해왕도를 내려다보았다. 는 것?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 장 (배신과 젊은 마웅 2) 2. 수평선이 내려다보이는 해왕도의 언덕.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앉아 있었 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가끔씩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소리 외에는. 여인은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그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있었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화사하게 빛 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 다. 그녀는 공허한 시선으로 고기 비 늘처럼 반짝거리는 해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 온 지도 사흘이 지났다.' 여인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사 내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야 비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배에서 보았을 때에는 누구 못지않게 흉폭한 해적 같더니 이곳에서는 너무도 조용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준수한 얼 굴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인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서 떨어 질 줄 몰랐다. '거친 해적 생활에서 이만큼 절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탕이 정 명(正明)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육지에 있었으면 출중한 사람 이 되었을 텐데…….' 순간 여인은 자신의 감정이 사내에 게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 고 있는 거지? 이 사람은 나를 이곳 으로 끌고 온 장본인인데…….' 그녀는 스스로 사내와의 사이에 두 터운 벽을 쌓아 올렸다. 사내가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짙은 우수가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우수가 눈물이 되 어 흘러내릴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을 외면하고 수평 선 위에 흐르고 있는 하얀 뭉게 구름 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고 싶으냐?" "……!" "만약 이곳이 해마단의 본거지가 아니라면 네가 살고 있는 곳과 비교 해서 어느 곳이 살기가 더 좋다고 생 각하지?" 사내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여인은 그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객관적으로는 이곳도 정이 가는 곳이에요. 바다도 있고 푸른 초원과 물도 있으니까요." 여인―, 위혜군은 사내의 목소리가 그토록 쓸쓸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싫은 곳은 아니라는 뜻이 군." "그렇게 들렸나요?" "그럼 아니란 말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이곳에 정을 붙여 보도 록 하지." "그럴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네가 이 섬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혜군의 고개가 치켜들었다. 엄청난 충격 탓인지 그녀의 얼굴에 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관해 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관해영은 어두운 눈길로 이제 막 해면을 차고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고독이 앙금처럼 깔 려 있었다. 위혜군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아연한 얼굴이었다. '이, 이 사람은 나에게 사랑을 느 끼고 있었던 것일까?' 관해 영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흘러 나왔다.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 러나 내 가슴에 타오르는 불길을 숨 기고 싶지는 않다. 난 그것을 내 운 명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 "물론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있 다는 것은 알고 있다. 허나, 난 지난 삼일 동안 불같은 열정이 점점 거세 게 타올라 고백을 하지 않고는 도저 히 견딜 수가 없었다." "……!" 위혜군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관해영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 는 듯한 기색이었다. 관해영의 얼굴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여인이 지키는 침묵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지 알고 있었다. '틀렸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위재상의 딸이란 신분이 이 토록 두터운 벽이 될 줄은 몰랐다.' 위혜군은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이상해……. 이런 소리를 들었으 면 소름이 끼쳐 따귀라도 올렸어야 하는 건데……. 가슴을 잔잔히 적시 는 이 희열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곰곰이 되새 겨 보았다. '그럼 나도 모르게 이 사람에게 관 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이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 다. '그럴 수는 없어. 나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데……, 더군다나 이 사람과 나는 신분상 결합할 수 없어.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거야.' 위혜군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 다. 그리고 그 약혼자는 아버지에게 있 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 략적인 결혼이라고나 할까? 관해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만 가지. 내 얘기를 귀담아 들 을 필요는 없다. 네가 싫으면 그만이 니까." 그때였다. 툭! 두 사람 옆으로 하나의 물체가 떨 어져 내리며 자욱한 연기를 피워 올 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순식 간에 두 사람을 뒤덮었다. "누구냐?" 관해영이 소리치며 주위를 둘러보 았다. 노송이 우거진 뒤편 숲 속에서 희 끗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 다. '대단히 빠른 자다. 그 짧은 순간 에 모습을 감추다니……,' 순간 관해영이 아찔한 현기증을 느 끼며 비틀거렸다. '이, 이제 보니 이것은 환혼음정 산(歡魂淫精散)!' 환혼음정산! 독성은 없으나 그것을 접한 자는 남녀를 막론하고 교접을 못한다면 대 뇌가 마비되어 백치가 되고 마는 지 독한 춘약(春藥)의 일종이었다. 그 효력이 너무 강해 강호에서는 일찍이 환혼음정산을 쓰는 것을 절대 금기로 정해 놓고 있었다. 만일 환혼음정산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사마를 막론하고 공분 을 사서 다시는 강황에 발을 붙이지 못할 뿐더러 보는 누구나가 그를 원 한을 가진 자처럼 대하고 죽이려 한 다. 그만큼 악독한 것이 환혼음정산이 다. '누가 이런 짓을……?' 관해영이 당혹한 시선으로 위혜군 을 바라보았다. 위혜군은 벌써 환혼음정산이 온몸 에 퍼졌는지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 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얼굴에는 이성 따위는 단 한올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으음……!" 위혜군은 괴로운 듯 헐떡거리며 관 해영을 향해 덤벼들었다. "하아…… 어떻게 좀 해줘요……." 관해영 역시 의지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나도 더 이상은 참을 인내가 없 다.' 그는 위혜군의 몸을 와락 끌어안으 며 풀밭 위로 쓰러졌다. 위혜군은 처녀의 몸이라는 것이 믿 을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관해영은 그녀의 옷을 바쁘게 벗어 내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이나 태도를 읽 을 여유도 없었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둘은 급하게 옷을 벗고 풀 밭 위를 나뒹굴었다. "헉헉헉……." "하악…… 하악……." 두 사람은 서로의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격렬하게 애무했다. 그리고 힘차게 관해영의 남자가 위 혜군의 몸을 파고들었다. "허억!" 위혜군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미약에 중독되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순결을 잃는 아픔은 그녀의 전신을 가로질렀다. "아아아……." 그녀는 백옥같이 흰 나신을 관해영 의 몸에 밀착시키고 희열에 들떠서 몸부림쳤다. 관해영 역시 이미 이성을 잃고 오 로지 쾌락의 만족만을 위하여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두 남녀의 정사는 끝이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있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 장 (배신과 젊은 마웅 3) 3. 북경(北京)! 사통활달한 대로를 따라 고루거각 (高樓巨閣)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고도(古都). 그 중 유난히 우뚝 솟아 있는 장원 하나. 그 넓이만 해도 무려 수천평이 달 했고, 온통 청색 일변도인 대소전각 (大小殿閣)들은 육중한 분위기를 자 아내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대장군부(大將軍府)인 것이다. 지극히 호화로운 의사청(議事廳) 안. 팔탁선자를 마주한 채 두 명의 청 년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흑의청년 날카롭게 뻗은 검미와 이 지적인 눈동자가 상대를 잡아끄는 마 력을 가지고 있었다. 힘차게 뻗어 내린 콧날과 한일 자 의 입술은 한 치의 허점도 없는 빈틈 없는 얼굴이었다. 더군다나 이십 전후의 나이답지 않 게 은연중 상대를 압도하는 기상은 지극히 패도적이라 할 만큼 가공할 것이다. 청의청년 앞에 앉아 있는 흑의청년 보다 서너 살 더 먹어 보이는 얼굴이 었으나 기상은 육중한 바위와 같았 다. 유순해 보이는 얼굴에 두 눈은 광 명정대하게 빛나고 있었고 태산준령 인양 쭉 뻗어 내린 콧날의 선과 한일 자로 굳게 다문 입술은 만인을 포용 하는 듯한 힘이 있다. 용호가 마주해 있는 것 같이 출중 한 기상을 내뿜고 있는 두 명의 청 년. 한데 그들의 안색은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벽옥빛 술잔을 넘칠 듯이 담겨 있는 술이 응고된 듯 흔들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이 렇게 앉아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흑의 청년이 었다. "대원수(大元帥)! 금붕도를 떠난 배가 도착했어도 벌써 도착했어야 하 는데, 어째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는 말이오?" 대원수! 이 청년이 금군대원수 위장천이란 말인가? 신화의 가문에서 태어나 약관의 나 이에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의 수장 이 되어 또다른 신화를 세운 불세출 의 기재(奇才). 위장천의 안색은 침울했다. 그러나 그는 흑의청년을 향해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제!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항로 를 잠시 이탈해 늦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매제라면 위혜군의 약혼자가 아닌 가? 순간 흑의청년의 얼굴에 불만이 나 타났다. "노련한 수군이 타고 있는데 항로 의 이탈이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혹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겠소?" 자신보다 신분이 앞서거나 좀 만만 해 보이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었으 나 듣는 위장천은 전혀 불쾌한 빛이 아니었다. 다만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흔들 뿐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수하들에 게 알아보니 요 며칠간은 바다가 극 히 잠잠했다고 하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 아닙 니까?" 위장천을 낭패한 신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황실의 별장이 있는 금붕도로 피서를 보내지 않는건 데……." 흑의청년의 목소리가 냉막하게 흘 러나왔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은 어리 석은 일이오. 그보다 실종의 단서를 찾는 일이 급하오." "유능한 수하를 풀어놓았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이오." 그때였다. "대원수!"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면 한 명의 중년 장수가 의사청으로 달려 들어왔 다. 위장천의 얼굴에 의혹이 일었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황총령이 왜 저러지?' "무슨 일이냐?" 중년 장수가 무릎을 꿇으며 들뜬 목소리를 토해냈다. "아가씨의 소식을 가지고 온 자가 있습니다." 위장천의 얼굴에 회색이 만면했다. "어서 그 자를 데리고 오도록 해 라." 중년 장수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 자를 들여보내라." 그러자 황금갑옷을 걸친 젊은 장수 가 단강을 데리고 들어왔다. 단강은 오랜 길을 와서 몹시 초췌 한 모습이었고, 행색 또한 형편없었 지만 누구도 그런 걸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단강이 두 사람 앞에 오체복지했 다. 위장천의 목소리가 중후하게 흘러 나왔다. "네가 동생의 행적을 알고 있다 고?" "그렇습니다." 단강은 공손히 대답한 다음 품 속 에서 한 장의 서찰을 넘겨 주었다. 위장천은 서찰을 읽어 내려가다 안 색이 변했다. "여기 적혀 있는 내용들이 모두 사 실이냐?" "제가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아뢰 겠습니까?" 위장천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흑의청년이 물었다. "무슨 일이오?" 위장천은 말없이 서찰을 건네주었 다.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흑의청년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해적 따위가 군매를 납치하 다니……!" 위장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일갈 노호를 터뜨렸다. "출진이다! 준비를 서둘러라." "알겠습니다." 젊은 장수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위장천은 이를 갈았다. "해마단에 관한 놈이라면 개미새끼 한 마리 살려 두지 않겠다." "……!" 단강은 위장천이 내뿜는 살기에 몸 서리쳤다. 흑의청년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흘 러나왔다. "수하들을 끌고 갈 필요도 없소이 다. 해마단 따위는 이 사운악 혼자서 도 충분히 없앨 수 있소이다." 천마영존(天魔英尊) 사운악(謝雲 岳)! 홀연 사라진 마황천자(魔皇天子) 등세욱(鄧世旭)의 고명제자.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초절정의 고수들조차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 다. "길을 안내하라." 위장천의 육중한 목소리에 단강은 자신이 그토록 즐겨 보았던 붉은 노 을을 떠올리며 목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면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 장 (월광과 바다, 나신 1) 월광(月光)과 바다, 나신(裸身) "흑흑!" 위혜군은 찢어진 옷가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두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파묻은 채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나신 위에 는 마지막 잔영(殘影)이 희끗한 땅거 미로 다가와 슬픈 음영(陰影)을 만들 어 놓고 있었다. 그 우울한 그림자만큼이나 그늘진 눈길로 관해영은 수평선 저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 회색빛 어둠이 멀리서 밀물처럼 달 려오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좀 전의 정사가 악 몽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관해영은 괴로운 듯이 지그시 입술 을 깨물었다. "위소저! 미안하오." 순간, 쫘악! 위혜군의 옥수가 사정없이 관해영 의 뺨을 후려쳤다. "당신이 꾸민 일이죠? 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 그녀의 얼굴에는 끝없는 저주가 일 고 있었다. 관해영의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 왔다. "변명 같지만 나 역시 모르는 일이 오." "거짓말! 해마단의 단주인 네놈이 시킨 일이 아니라면 누가 이따위 짓 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관해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해를 얻기 위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관해영은 그녀의 상처 난 마음을 어떻게든 위로하고 싶을 뿐이었다. "위소저!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당신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뭐 든지 하겠소." 위혜군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 가 휘날렸다. "내 화가 풀리는 것은 바로 네놈이 죽는 일이다." 순간, 관해영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처 연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의 얼굴 위로 진한 아픔의 빛이 스쳤다. 문득 그가 눈을 뜨며 위혜군을 바 라보았다. "그게 당신의 진정한 뜻이라면 죽 어 주겠소." 위혜군의 전신이 흠칫 굳어졌다. 그녀는 설마 관해영이 이렇게 나오 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다. 그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위혜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죽 으라고 소리친다면 관해영은 틀림없 이 죽을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이 사람은 진실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 있던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 다. 그것은 자신이 원한다면 무슨 짓이 든 하겠다는 관해영의 말에 묘한 감 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관해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 러나왔다. "돌아갑시다. 진상을 규명해야 되 겠소." 위혜군은 어느 새 발 밑으로 다가 드는 어둠을 내려다보며 처연한 목소 리로 말했다. "먼저 돌아가요. 얼마간 혼자 있 고 싶으니까!" 관해영은 슬쩍 절벽을 바라보며 근 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목숨을 끊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시오." "그런 것까지 당신이 걱정할 필요 는 없어요. 나도 보기보다는 강하니 까!" 그녀는 차갑고 냉랭한 목소리로 쏘 아붙인 다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관해영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 다. '그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구료.' 그는 힘없이 발길을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축 쳐진 그의 어깨 위로 회색빛 어둠이 멍에처럼 지워져 있었 다. 위혜군. 그녀는 우울한 관해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갈등에 빠져들었다. 해적 따위에게 몸을 버렸다는 그런 굴욕감은 이미 그녀의 마음에서 사라 져 버리고 없었다. 그녀가 갈등하는 것은 오로지 하 나. 자신의 약혼자와 관해영,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에게 다가 올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미래에 과연 그녀 자신은 어떤 남자를 택할 것인가. 관해영의 처소. 이십여 명이나 되는 해마단의 주요 인물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관해영 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을 직시하고 있는 관 해영의 얼굴에 엄청난 노기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관해영의 두 눈에서 얼음보다 더 차가운 한광(寒光)이 폭사되어 나 왔다. "누구냐? 어떤 놈이 그따위 짓을 했느냐?" 집법당주 파해도(破海刀) 곡풍(曲 風)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해왕도의 율법을 관장하는 그의 얼굴 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솔직히 나서라, 불충한 놈이 누구 인지! 그러면 정상을 참작하겠다." 그러나 좌중의 인물들은 서로의 눈 치를 살피며 침묵을 고집하고 있었 다. 사마수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관해영의 시선이 사마수의 얼굴에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형법당주!" 사마수가 그때서야 두 눈을 뜨며 공손히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단주!" "누구의 짓이라고 생각되나?" 사마수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짐작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해마단에서 감히 나라고 생각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숙였다. "말씀을 들으니 누군가 단주님을 도우려고 한 것 같은데……, 수하들 을 이토록 핍박한다는 것이 너무 하 시는 것은 아닐는지……." 이것은 어찌 들으면 관해영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것 같지만 실지 형법당 주로서는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관해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도움?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그따 위 파렴치한 짓을 시킨 적이 있더 냐? 더구나 내 의사를 물어 보지도 않고 이런 일을 한 것은 분명한 하극 상(下剋上)이다." 하극상! 관해영의 말에 좌중의 인물들은 찬 물을 맞은 듯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곡풍이 안색을 바로 하여 좌중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친형제보다 더 사심 없이 일을 해 왔다. 정녕 단주 님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면 솔직히 말해라.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 이 아니냐?" 그러나 관해영의 입에서 하극상이 라는 말이 나온 이상 설령 집법당주 가 관용을 베푼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극상! 이는 해적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바 로 일족을 멸하는 엄청난 죄였기 때 문이다. 좌중의 인물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었다.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 장 (월광과 바다, 나신 2) 바로 그때였다. "아버님, 너무 남들만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 일은 위혜군이라는 그녀 의 소행일 수도 있잖아요."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에 이어 한 여인이 일어섰다. 십칠팔 세의 나이에 몸에는 수수한 청의(靑衣)를 걸치고 있었으나 희미 한 불빛 아래 백옥으로 빛나는 얼굴 은 놀랍도록 미려한 모습이었다. 희어진 눈썹 아래 영롱한 눈동자, 알맞게 뾰족한 콧날의 선과 도톰한 앵둣빛 입술, 청초한 수선화를 보는 듯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 지만 왠지 가냘퍼 보여 남자로 하여 금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 다. 그야말로 해왕도에 이런 미인이 있 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관해영의 눈살을 찌푸렸다. "주련(朱蓮)! 너는 피해자인 그녀 를 의심한다는 말이냐?" 곡주련(曲朱蓮)! 그녀는 바로 파해도 곡풍의 무남독 녀였던 것이다. 곡주련이 자라목을 하며 찔끔거렸 다. "전 단지! 누구든 용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관해영이 벌컥 노갈을 터뜨렸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모독하지 마 라. 그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다." 순간, 곡주련의 얼굴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단주님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도대체 그녀와 비교해 나의 어떤 점 이 모자라는 것일까!?' 갑자기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비애 (悲哀)를 느꼈다. 예전부터 미치도록 관해영을 사모 해 오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리고 어릴 때부터 관해영과 정혼한 몸으로 단지 관해영이 일방적으로 혼인을 보 류해 왔던 것이다. '그 동안 시비가 늘어도 관심을 가 지고 있지 않기에 아직 여인에 대해 서 흥미가 없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 니었어! 단주는 자신의 이상형을 기 다리고 있었던 거야!' 곡주련은 쓰디쓴 배신감을 느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왔 던 것은 언젠가는 관해영이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지금 한 여인을 사랑하는 관해영의 마음을 안 이상 그 오랜 기 다림은 배신과 좌절만을 안겨 준 것 이다. "흑!!" 그녀는 끝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 리고 내실을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 다. 그녀가 그렇게 슬픈 모습으로 떠나 가 버리자 좌중은 일제히 고개를 숙 여 버렸다. '단주님도 너무 하시지! 그 여우 같은 계집보다 주련이 훨씬 아름답건 만!' 좌중의 인물들은 곡주련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만큼이나 더 아름다 운 것은 바로 그녀의 마음이라는 것 도 알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관해영에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좌중의 분위기 때문이 었다. 관해영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 려나왔다. "아직 마음을 잡을 수 없다면 하루 의 여유를 주겠다. 그러나 내일도 범 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 너희 모두 를 문책하고 말리라, 돌아가라." 모든 사람은 무거운 마음으로 내실 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사마수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내일이라구? 이제 더 이상 내일은 없다. 내일이면 단강이 군사들을 이 끌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당신이 하극상을 운 운할 기회도 없지.!' 달빛이 교교하게 내려 비치는 바닷 가. 쏴아아― 철썩―. 파도가 백파(白波)로 부서지며 밀 려오는 백사장에 곡주련이 그린 듯이 서 있었다. 달빛 아래 화사하게 빛나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져 있고 한 줄 기 초조함마저 어려 있었다. 사박사박―. 그때 미세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 다. 곡주련의 전신이 흠칫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서지 않았다.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련!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곡주련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흘러 나왔다. "관가가는 꼭 사무를 보러 온 사람 처럼 말하는군요." 그녀가 천천히 신형을 돌려 관해영 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축축 한 물기가 번져 있었다.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울고 있는 거냐?" 곡주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관가가는… 제가 울고 있는 이유 를…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관해영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소저 때문이구나." "흑!" 곡주련이 짙은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관해영은 그녀를 위로해 주 기는커녕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곡주련이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 키고 원망 스런 눈길로 관해영을 쏘아보았다. "관가가는 어째서 자신의 사랑만을 생각하고 저의 사랑은 외면하는 것인 가요?" 관해영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 랐다. 사실 관해영 자신은 곡주련에 대해 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항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표현 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곡주련이 애원하듯 눈물에 젖은 얼 굴로 관해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 다. "지금 제 심정으로는 그 위선이라 도 받고 싶은 심정이에요." "돌아가겠다." 관해영이 냉정하게 신형을 돌리려 할 때였다. 사르르 ―. 곡주련이 가볍게 몸을 흔들자 한 겹 걸치고 있던 청의가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렸다. 순간, 실오라기 하나 걸 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해도 좋아 요. 그렇지만 내 옆에 항상 있어 준 다고만 말해 주세요." "주련! 어서 옷을 입지 못하겠느 냐?" 관해영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흘 러나왔다. 곡주련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내 사랑의 의지를 막을 수 없어요."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에는 꺾 이지 않는 완고함이 어려 있었다. 대체 그녀의 연약하기 이를 데 없 는 모습 어디에 이토록 고집스러운 면이 숨어 있는 것일까? 달빛이 반사되는 바다, 그리고 달 빛과 바다색깔 속에 현란하게 빛나는 여인의 나신. 그것은 신비롭기 이를 데 없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오늘 밤 당신의 여인으로 확인받 고 싶어요." 곡주련이 꿈결 같은 목소리를 흘리 며 관해영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 나 그녀는 관해영의 품에 안기지는 못했다. 관해영의 신형이 슬쩍 옆으로 미 끄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털썩! 곡주련의 신형이 모래 바닥에 힘없 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관해영이 이토록 냉정히 피할 줄은 몰랐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극도의 모욕감이 피어났다. 관해영이 차디찬 시선으로 곡주련 을 내려다 보았다. "주련! 날 실망시키지 마라. 이럴수 록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관해영이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걸어 사라졌다. 곡주련의 얼굴에 한 줄기 살기가 번져 올랐다. '그녀를…… 죽이고 말 거야!' 두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 장 (멸 해마단 1) 멸(滅) 해마단(海魔團) 다음날. 관해영의 처소에는 어제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관해영의 쩌 렁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루의 여유를 주었는데도 범인 은 나서지 않았다. 이젠 내 수단이 독랄하다고 원망하지 마라." 모두가 침묵할 뿐 누구도 입을 열 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수가 없었 다. "모두 검을 뽑아라." 관해영이 비장한 신색으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섬뜩한 광채가 창 문을 넘어 들어오는 햇빛에 눈부신 빛을 뿌렸다. 그것은 관해영의 얼굴 에 푸른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다. 관해영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 들었다. 그리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모두 한 팔을 자른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순간, 해마단의 인물들이 벼락에라 도 맞은 듯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들은 관해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이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번복된 적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도 범인이 나오지 않는다면 최후에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 다." 파해도 곡풍이 비통한 목소리를 토 해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단주는 해 왕도를 이끌고 나갈 책임이 있습니 다." 관해영의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집법당주! 무슨 말로든 지금의 내 심정을 위로하려 하지 마라. 그리고 단주라면 응당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관행영이 검을 높이 쳐들어 자신의 팔을 베어 갔다. 번쩍! 새파란 검광이 귀화(鬼火)처럼 번 뜩거렸다. 바로 그 순간, 쾅 하는 소 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한 명의 청년 이 뛰어들며 급박한 목소리를 토해냈 다. "큰! 큰일났습니다." 관해영의 검이 주춤거렸다. 청년은 얼마나 놀랐는지 안색이 새 파랗게 죽어 있었다. "지, 지금 수십 척의 군선들이 나 타나 해왕도를 포위했습니다." "무엇이?" 관해영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바다를 메워 버릴 듯한 빽빽한 군 선들. 선수에 꽂힌 대명(大明)의 깃발이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벼랑 위에 올라서 이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관해영의 얼굴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의심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섬에 첩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 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를 이렇게 빨리 찾을 수는 없다.' 순간, 옆에 서 있던 곡풍이 빙글 돌아서며 짙은 살기를 뿌렸다. "어느 놈이냐? 적과 내통하여 본단 을 팔아먹은 놈이!" 해마단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고개 를 푹 떨구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 이 누구의 내통에 의한 것이든 간에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관해영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곡풍! 이젠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다." 모두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가 스 쳤다. 그것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 는 절망감이었다. 관해영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 고 있는 것인지 그의 표정은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윽고 관해영이 해마단의 인물들 을 향해 무거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저들을 이길 수 없다. 싸우면 부녀자나 아이들, 그리 고 노인들까지도 죽게 된다." 곡풍의 얼굴에 경악이 일렁였다. "그, 그럼?" 관해영은 괴로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투항한다." "으음……." 모두의 입에서 침통한 탄성이 흘러 나왔다. 투항! 그것은 죽음 속에서 살아날 수 있 는 한 줄기 희망인 동시에 가슴에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닌가? 사마수의 눈꼬리가 가볍게 솟아올 랐다. '투항이라고? 그럴 수는 없다. 만 약 투항을 하게 되는 날에는 이 사마 수의 음모가 만천하에 밝혀지게 된단 말이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의 입술 꼬리 를 타고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순간, 곡풍이 울분을 참지 못해 절 규를 터뜨렸다. "단주! 싸웁시다. 목숨을 부지해 봐 야 뇌옥(牢獄)에 갇힐 것은 뻔한 일! 그 같은 치욕을 당할 바에는 차 라리 모두 죽음을 택합시다." 관해영은 우울한 얼굴로 빈 하늘을 바라보았다. "곡풍! 우리 입장만 생각하지 말자. 남들까지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 다. 인생은 유전이라 살아 있다 보면 희망도 생기는 법! 그 희망을 만들어 줄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단주!!" '나에게 있어 굴복이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 화평이 이루어지면 난 자 결할 것이오.' 그랬던가? 그래서 결국 위혜군의 사랑의 고백 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단 말인가? "당신은 가야 해요. 제가 반드시 데리고 갈 거예요." 위혜군의 얼굴에는 여자답지 않은 고집이 어려 있었다. 순간, 곡주련이 우울한 얼굴로 그 녀의 앞을 막아섰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의 고집만 내 세우는군요. 당신이 그토록 단주님을 생각한다면 어째서 이곳에 함께 남아 목숨을 같이 할 생각은 안 하나요?" 관해영이 노갈을 터뜨렸다. "주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곡주련이 더할 수 없이 슬픈 눈길 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단주님이 거절한다 해도 전 이곳 에 남아 있을 거예요. 당신이 죽는다 면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저승까지 라도 같이 가겠어요!" 위혜군은 아연한 눈길로 곡주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감탄이 한데 어루어져 나타나 있었다. '이 여인……, 지독히도 이 분을 사랑하고 있구나. 난 과연 누굴 이토 록 사랑할 수 있을까?' 모습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 장 (멸 해마단 2) 곡풍은 목이 메이는 듯 더 이상 말 을 잇지 못했다. 나이 오십 줄에 이른 그가 어찌 관 해영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치욕을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관 해영! 그는 그 치욕을 감수해 낼 만 큼 해왕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것이 곡풍의 마음을 더욱더 서럽 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관해영의 얼 굴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저들에게 가서 화평을 이루 고 오겠느냐?" 사마수가 비장한 신색으로 앞으로 나섰다. "단주!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이미 해풍에 날려 보낸 지 오래입니다." "좋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돌아서는 사마수의 널찍한 등은 구릿빛으로 완강하게 빛 나고 있었다. 해마단의 인물들은 믿 음직한 사마수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화평을 이루고 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관해영이 다시 말했다. "위소저를 데리고 와라." "예!" 청년 한 명이 대답하고 바람처럼 마을로 달려 내려갔다. 관해영은 군선을 바라보았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해왕도를 빙 둘러싸고 있는 군선들! 그 군선들의 수효가 얼마나 되었던 간에 관해영은 한 마리 불나방이 되 어 부딪혀 보고 싶은 강한 욕구가 끓 어올랐다. 그것은 오직 승부사만이 가질 수 있는 투지였다. 청년이 위혜군을 데 리고 올라왔다. 관해영이 그녀를 향 해 말했다. "위소저! 우린 항복할 거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토록 미워하던 내 목 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오." 위혜군은 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 다. '저 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도 시원치 않을 나이건만, ……왜 이리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일까?' "잘 가시오." 관해영이 다시 신형을 돌려 군선들 을 바라보았다. 휘― 이―잉―. 해풍이 불었다. 관해영의 칠흑같은 흑발이 물결처 럼 흔들렸다. 위혜군은 그 뒷모습에서 지독히도 고독한 사내의 영혼을 느꼈다. 이제 까지 보아오던 얼음 같은 관해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그 러면서도 위혜군은 무척이나 잘 어울 린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떠나지 않나요?" 그 말이 의외인 듯 관해영은 전신 을 흠칫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 소리는 여전히 차디찬 얼음이었다.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기에 난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하오." 뼈를 묻겠다니. 그렇다면 그는 자결이라도 하겠다 는 말인가? 위혜군의 목소리가 단호 하게 흘러나왔다. "그렇게는 안 돼요. 당신은 나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순간, 관해영의 전신이 가볍게 떨 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그의 신형은 바윗 덩어리 같이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 었다. "동정이라면 그냥 가시오. 그런 감 상적인 것은 딱 질색이니까." "왜 동정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의 가슴속에는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여자의 마음이 두 개라는 것을 모 르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해적 따위를 누가 사랑하겠느냐고 하던 그녀, 위혜군. 그녀는 진실로 관해영을 사랑하고 있었단 말인가? 관해영은 말이 없었다. '위소저! 당신이 조금만 일찍 그런 소리를 했다면 난 당신을 위해 평생 을 바쳤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내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오.' "같이 가요." 위혜군의 목소리가 봄바람같이 들 려왔다. 그러나 관해영은 씁쓸한 고 소를 머금었다. "난 떠날 수 없는 몸이오." "어째서 떠날 수 없다는 거예요. 투항까지 결심했다면서?" 관해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 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죽음보다 더 차디찬 고독이 어려 있었다. '묻지 마시오. 난 천성적으로 굴복 이란 심성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놈이오.' "……?" 관해영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 다. 대원수 위장천. 그는 눈부시도록 화려한 황금갑옷 을 걸치고 머리에는 공작의 깃털이 꽂혀 있는 투구를 쓴 채 호피 태사의 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사운악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무릎 을 꿇고 있는 사마수와 단강을 노려 보고 있었다. 헌데, 위장천의 손에 들 려져 있는 황금 지휘 봉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 다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이, 이 놈! 네가 말한 것이 사실이 냐?" 위장천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 기에 사마수는 진저리를 쳤다. 쾅! 그는 죽어라고 이마를 지면에다 처 박았다. "그, 그렇습니다. 관해영이란 놈은 워낙 흉악 무도해서 위아가씨를 강제로 겁탈했 습니다." "으으―. 이, 이놈을……!" 위장천이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전 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마수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더 듬거렸다. "또한 그 놈은 화평하는 척하며 기 습을 꾸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러니 조심을 해야 될 것입니다." 콰아아아! 선실 안에서 갑자기 사나운 회오리 가 몰아쳤다. 사마수가 문득 고개를 들다 두 눈을 부릅떴다. '으으―. 저, 저것도 사람이냐?' 사운악. 엄청난 분노로 떨고 있던 그의 전 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회오리를 일으 키고 있었다. "관! 해! 영!!" 그의 입에서 엄청난 폭갈이 터져나 옴과 동시, 콰쾅! 사운악의 신형이 선실벽을 꿰뚫고 해면 위를 바람처럼 질주하고 있었 다. 위장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매제는 혜군을 끔찍이도 좋아했는 데 충격이 크겠군. 매제에게 있어 충격은 곧 살심인데……!' 이어 그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전 군선에게 명한다. 상륙하라. 그 리고 해왕도를 초토화시켜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마수의 입가 에 득의의 미소가 번져 올랐다. '이것으로 내 평생의 영화는 보장 되었다.' 해왕도의 인물들은 일찍이 이토록 거대한 파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 장 (멸 해마단 3) 인간 파도.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는 군 사들은 마을로 들어서자 닥치 는 대로 살인을 자행하고 있 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해 마단의 인물들은 치를 떨었다. 관해영의 얼굴 역시 참담하 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위 혜군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 었다. "화평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오." 위혜군이 완강하게 부인했 다. "그럴 리가 없어요. 오라버니 는 투항하는 상대를 죽일 만 큼 잔인하지 못해요." 관해영의 두 눈에 허탈함이 스며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현실로 나 타나고 있지 않소?" "제가 가보고 오겠어요. 오 라버니를 설득시키겠어요." "그럴 필요없소. 원치 않는 상대에게 더 이상 목숨을 구걸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안 돼요. 싸워 봐야 이곳의 전멸 뿐이에요." 관해영이 고소를 머금었다. "아무튼 당신은 가시오. 어차 피 헤어질 사이이니 한시라도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 해 좋을 것 같소." 위혜군은 내심 서운한 생각 이 들었으나 곧 신형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싸움 을 멈추게 하겠어요." 위혜군이 그렇게 말하고 막 신형을 움직이려는 그 순간이 었다. 쐐애애액!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 리며 새파랗게 번뜩이는 검 하 나가 위혜군의 목을 노리고 쏘아져 들었다. "악!" 위혜군이 뾰족한 비명을 질 렀으나 이미 늦었다. "망천(望天)! 미쳤느냐?" 관해영이 싸늘히 소리치며 검을 뽑아 망천의 검을 퉁겨냈 다. 굴강해 보이는 중년인 한 명이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핏빛 살기가 면도날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주! 이 여인은 가족의 원수요. 죽여야 합니다." "안 돼!" 관해영의 목소리가 칼로 자 른 듯이 흘러나왔다. 망천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을을 가리켰다. "눈이 있으면 보십시오. 세 살 먹은 어린 아이까지 죽어 가고 있습니 다. 그런데도 저 여인을 살려 보내자는 말입 니까? 단주는 저 여인을 사 랑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순간, 쫘악! 관해영이 망천의 뺨을 후려 쳤다. "명심해라. 뜨거운 태양 아 래서도 괴로워해 본 적이 없었 고, 사나운 파도와 싸워서도 굴하지 않던 우리들이었다." 관해영의 음성이 격정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검푸른 바다 위를 거침없이 달리며 술 한 잔에 앞섶을 열 어 젖히며 나는 사나이다, 라 고 외치던 적을 잊었느냐? 그 런 우리들이 한 여인에게 복수를 하려 들다니! 망천, 끝까지 해적이 되어라! 죽는 그 순간까지!" "단주!!" 망천이 흐느끼듯 오열을 터 뜨렸다. 관해영이 위혜군을 돌아보았다. "가시오, 마지막 이별인 것 같구료." 위혜군의 두 눈에 뿌연 액체 가 번져 올랐다. "기다려요, 오라버니를 설득 시키겠어요." 그녀가 황망히 절벽을 달려 내려갔다. 관해영이 두 눈 가 득 아픔을 띄 웠다. '나를 위해 애쓰지 마시오.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흐르든 맺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 곡풍이 앞으로 다가왔다. "단주님!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관해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평이 깨졌으니 남은 것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길밖 에 없다. 전 인원을 해파대(海 波臺)에 모이게 해라." 해파대! 과연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대원수님! 아가씨께서 오 셨습니다." 군사의 보고를 받은 위장천 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군아가……!" 순간, 위혜군이 숨을 몰아 쉬며 선실 안으로 들어섰다. 위장천의 얼굴에 반가움이 일었다. "혜군아! 무사했구나." 그러나 위혜군의 얼굴에는 살얼음이 끼여 있었다. "오라버니. 어서 군사들을 철수시키세요. 어째서 항복하 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는 거 예요?" 위장천이 얼굴 가득 노기를 드러냈다. "그들은 화평을 이루는 척 하며 기습을 노리고 있다. 끝 내 죄를 뉘우치지 못하는 죄 인들에게 무슨 관용을 베푼단 말이냐?" "오라버니,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진정으로 화평을 원한 단 말이에요." "넌 모르면 가만히 있거라. 어째서 너를 납치했던 저 놈 들을 두둔하는 것이냐?" 위혜군이 안타까운 듯이 발 을 굴렀다. "저들이 불쌍해서 그래요. 어 서 싸움을 중단시키세요." 허나, 위장천 역시 이때만 큼은 냉랭한 신색이었다. "난 참아도 매제는 참지 못 할 것이다. 해영이란 놈이 널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 다." 위혜군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오라버니께서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죠?" 위장천이 밖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자를 들여보내라." 순간, 끼익―! 선실 한켠의 문이 열리며 사 마수가 걸어나와 위혜군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위혜군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어졌다. 그녀는 대번에 모든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사마수! 네놈이 배신을 했 구나." 사마수의 두 눈이 교활하게 번뜩였다. "배신이라기보다는 아가씨를 구출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 다." "닥쳐라! 이제 보니 음약을 뿌린 것도 네놈이었구나."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 다." 사마수가 발뺌을 하자 위혜 군은 그를 대하기를 징그러운 뱀을 보듯 몸 서리쳤다. "가증스러운 놈! 죽음으로 해적의 명예를 지키는 그들에 비한다면 네놈은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와 같은 존재로구나." 위혜군이 이렇듯이 추상 같 은 목소리로 꾸짖자 위장천이 얼굴 가득 노기를 드러냈다. "시끄럽다. 너의 일만 생각하 면 걷잡을 수 없는 노화가 들끓는다. 나 역시 도저히 용서하고 싶지 않다." 순간, 위혜군이 잘근 입술 을 깨물었다. "오라버니가 알고 있었다니 잘 된 일이에요. 오라버니는 자신의 매제를 죽일 셈인가 요?" 위장천의 얼굴에 의혹이 일 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 이냐?" "제가 그와 결혼했으니 그 사람은 저의 부군이에요." 위장천이 노성을 터뜨렸다. "닥치지 못할까? 설령 사공 자와 약혼이 파기된다 해도 해 적 따위를 매제로 삼을 수는 없다." "그, 그럼?" "잊어라. 세월이 망각의 약이 되어 금이 간 너의 가슴을 아 물게 해 줄 것이다." "그럴 수 없어요. 난 그를 사랑해요." 위혜군의 대들 듯한 목소리 에 위장천은 흠칫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동생 이 이토록 완강하게 나오는 것 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 다. 그러나 위장천은 절대 물러 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자신의 가문에 먹칠 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신화의 가문에서 태어나 또 다른 신화를 세운 불세출의 기재인그에게 있어 그 같은 일 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다. "두 번 다시 그 따위 소리를 입 밖에 냈다가는 같은 핏줄이 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위혜군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어 들었다. "오, 오라버니!"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퇴 색하기 마련이다. 잊어라, 그것 이 최선의 방법이다." 위장천이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를 토해 낸 다음 입을 다물었다. 문득, 위혜군 은 위장천의 마음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아득한 절망 속에 서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 다. 관해영! '가엾은 사내!' 있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6 장 (고금 제일인의 제자 1) 고금 제일인 (古今 第一人)의 제자(弟子) 해파대(海波臺)! 구름이 발 밑에 흐르고 파도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만장단애(萬丈斷 崖). 그곳은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 으며 정상에는 놀랍게도 방원 백여 장에 달하는 드넓은 공지가 자리해 있었다. 바로 그 넓은 공지 위에 관해영을 위시한 해마단의 전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침통하게 가라앉아 있는 안색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이 미 죽음을 초월한 바다 사나이 특유 의 굴강함이 어려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우―!"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긴 장소성이 구름을 뚫고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발 밑을 내 려다보았다. 저 멀리 구름 아래 아스 라하게 펼쳐져 있는 파도의 물결 위 로 사운악이 정정첨수의 최상승 신법 (身法)을 펼쳐 빛살 같은 속도로 달 려오고 있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입에서 경악성 이 터져나왔다. "저, 저것!" "물 위를 평지처럼 달리다니?" 관해영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 들었다. '살아날 확률은 없겠군! 무림고수 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파화아아! 사운악이 벽공착수(壁功着手)로 만 장단애를 순식간에 차고 올랐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허공에 뜬 채 가을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지 면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누가 관해영이냐?" 해마단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사운 악의 두 눈에서는 면도날 같은 새파 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의혹이 일었 다. '이 자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천천히 사운악의 앞으로 다가 갔다. 사운악의 턱 근육이 툭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가로 진 한 살소(殺笑)가 섬뜩하게 번져 올랐 다. "흐흐! 네 놈이 관해영이냐?" "나를 알고 있는 너는……?" 사운악의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울 려나왔다. "내가 바로 위혜군의 약혼자다." 관해영의 전신이 흠칫 굳어 들었 다.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었단 말인 가?' 사운악이 눈꼬리를 치켜뜨며 앞으 로 다가왔다. "나조차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보 지 못한 그녀였는데 감히 네 놈 따위 가 건드리다니! 모조리 황천으로 보 내 주마!" 관해영의 입가로 메마른 웃음이 스 쳤다. "지니고 있는 무공만큼이나 광오한 사내로군. 허나 우리를 얕보지 마라." 순간, 번쩍! 관해영이 어느 새 검을 뽑아 들고 사운악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스파앗! 눈 깜짝 할 사이에 그의 검은 사운 악의 가슴 한 치 앞에 이르러 있었 다. 쾌검식(快劍式)! 천하에 이토록 빠른 검초를 시전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사운악의 얼굴에 언뜻 감탄이 스쳤 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이미 관해영 이 펼쳐 내는 쾌검식의 범위를 벗어 나 있었다. 파르르르―! 허공을 벤 관해영의 검이 잠깐 동 안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면서 눈부신 검광을 뿌렸다. 그것도 잠깐, 쐐애애액―! 그의 검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변화무쌍하게 각도를 꺾어 물 러서는 사운악의 인후혈을 찔렀다. 사운악이 비릿한 조소를 띠었다. "감히 어린애 장난 같은 무공으로 나 사운악의 목을 노리려 하다니!" 슈욱! 그의 우수(右手)가 하나의 원을 그 리며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앞으 로 뻗어 나갔다. 콰아아아―! 엄청난 장력이 관해영의 가슴을 향 해 노도처럼 밀려 나갔다. 이것은 비단 신속할 뿐만 아니라 웅후한 내가진력을 바탕으로 하여 펼 쳐낸 것이라 탄력이 붙어 지쳐 들어 가던 관해영으로서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콰쾅! "허억!"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관해영 이 허공을 날아 지면에 곤두박질쳤 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입에서는 시 뻘건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 었다. "단주!" 해적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 왔다. 그들은 설마 관해영이 단 일초 에 패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곡풍의 눈썹이 역팔자로 솟아올랐 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라. 단주님 을 구해야 한다." "와아아아……!" 해마단의 인물들이 성난 노도처럼 사운악을 향해 덮쳐갔다. 마지막 순간까지 해적이 되라는 관 해영의 말이 그들의 가슴에 피를 끓 게 만들었다. 사운악의 검미가 꿈틀 솟아올랐다. "바라던 바다." 슈우우욱―! 그의 신형은 수풀을 헤치는 맹금과 도 같이 해마단을 향해 뛰어들었다. 단지 뛰어들었다고 생각되는 그 짧 은 순간, 번쩍! 파츠츠츠! 눈부시도록 찬란한 검광이 폭죽처 럼 터져 올랐다. 제일 먼저 피를 뿌린 것은 곡풍이 었다.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두 동강 이 된 채 피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사운악. 그의 신형이 번뜩일 때마다 해마단 의 인물들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과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관 해영이 이를 갈았다. "그, 그만!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 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부하들 이 모두 이토록 맥없이 쓰러지는 것 을 보자 그는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 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사운악이 그 를 돌아보며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관해영! 잘 보아 두어라. 가까운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고통을 충분히 맛보아 라! 나는 이보다 더한 분노를 느꼈 다." 관해영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 다. "네 놈을 결코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잘 보기나 하거라. 네놈의 동료들이 어떻게 쓰 러지는지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운악의 신형 이 번개처럼 허공을 차고 올랐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팽이 처럼 돌아가기 시작하며 가공할 검망 을 뿌렸다. 쫘아아아아―! 부챗살 같은 검광이 천지사방으로 뻗어가며 엄청난 검풍을 말아 올렸 다. 고오오―! 그것은 해마단의 인물들을 허공 높 이 말아 올리고 있었다. "끄아아아!" "아악!" 순식간에 허공 가득 인육(人肉)이 눈보라처럼 휘날리고 시뻘건 피의 폭 풍우가 뒤덮었다. 관해영은 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으으―, 이 놈!" 관해영이 노갈을 터뜨리며 지면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채 일어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다시 지면을 나뒹굴고 있었 다. 관해영의 두 눈에는 피눈물이 흘 러 내렸다. 사운악이 그의 앞에 내려 서며 음침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흐흐! 아직 멀었다. 내가 느꼈던 분노를 네놈이 알기에는!" 그때였다. 슈욱! 날카롭기 이를 데 없는 검기가 사 운악의 등을 후벼파듯 밀려오고 있 었다. "또 한 명의 불나비가 날아드는 군!" 사운악이 냉랭히 소리치며 자신의 검을 뒤로 뻗어 내려 하다 흠칫했다. '사향 냄새! 여인이 아닌가?' 그의 신형이 빙글 돌아서며 밀고 들어오는 검날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 다. 순간, 사운악의 두 눈이 급격히 부 릅떠졌다. '이,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해적의 무리 속에 끼여 있단 말인 가?' ? 그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6 장 (고금 제일인의 제자 2) 여인은 곡주련이었다. 그녀는 사운악이 자신의 검을 맨손 으로 잡아 내자 기절초풍할 듯이 놀 랐으나 사운악이 멍청히 있는 틈을 타 품에 숨겨 두었던 비수를 뽑아 득 달같이 사운악의 가슴을 쑤셨다. 사운악이 번개같이 곡주련의 손목 을 움켜쥐었다. "후후 너 같은 미인에게 검을 쓸 수는 없지!" 곡주련이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와 머릿속이 다 아찔했지만 뾰족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죽여라! 살려 두었다가는 후회할 것이다." "후회? 난 여인의 마음이 두 개라 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 가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결코 후회 따위를 할 사운악이 아니다." "흥! 넌 단주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난 그 분의 약혼자다." 순간, 사운악의 두 눈에 기이한 이 채가 빛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관해영의 약혼녀? 그렇다면 더욱 살려 두어야겠군!" "무슨 뜻이냐?" "그 놈에게 내가 받은 고통을 고스 란히 돌려주겠다." 그는 핼쑥하게 굳어 있는 곡주련의 혈도를 짚고 몇 명 남지 않은 해마단 의 인물들을 향해 재차 살수를 전개 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끄윽!" 사운악의 검초는 눈부시게 빨라 해 마단의 인물들은 대체 그가 어떻게 검을 휘둘렀는지도 보지 못하고 죽음 을 맞이하고 있었다. 관해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지 못하는 것이 한이구나, 미안 하구나! 이렇게 힘없고 무능한 내 밑 에 있었다니……!' 그는 자신이 위혜군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수하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다고 생각하자 미치도록 괴로운 심정 이었다. 문득, 그토록 처절하기 이를 데 없 는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관해영이 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사운악이 발로 자신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있다는 것을 보고 죽음보다도 더한 치욕을 느꼈다. 사운악의 얼굴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꿈틀거렸다. "관해영! 이제 네놈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가장 천천히 죽여 주마." 퍽! 그는 누워 있는 관해영을 발로 올 린 다음 가볍게 복부를 걷어찼다. 퍼펑! 관해영의 신형이 허공에서 일장(一 丈)이나 떠올랐다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는 끊어진 내장 조각들이 시뻘건 피와 섞여 흘러내렸 다. 사운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이어서 천천히 한 손으로 관 해영의 어깨를 잡아 비틀었다. 우두두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 려왔다. 관해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 져 들었다. 허나, 그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의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운악의 안색 역시 점 차 일그러 들고 있었다. "제법 기개를 부린다만은 어디까 지 버티나 보자." 푹! 그의 한 손이 관해영의 늑골을 깊 숙이 쑤시고 들었다. 관해영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 릅떠졌다. 사운악의 얼굴에 깊은 주 름이 잡혔다. 그리고 늑골을 쑤신 그 의 손이 서서히 비틀려지고 있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시퍼런 힘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사운악은 아직도 관해영의 입에서 신음소리 한 마디 흘러나오지 않자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살점을 한 가닥씩 도려내 주마."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만 둬요." 뾰족한 여인의 음성에 이어 위혜군 이 숨을 헐떡이며 두 사람 앞에 나타 났다. 그녀의 뒤로 위장천이 뒤따르 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관해영 의 얼굴에는 한 줄기 비애가 물결처 럼 번지고 있었다. '위소저!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위혜군의 얼굴에 아픔이 스쳤다. "사공자! 이 만큼 고통을 주었으니 화가 풀릴 만도 하잖아요? 이젠 그 만 두세요." 사운악의 얼굴에 노기가 끓어올랐 다. 그는 위혜군이 관해영을 두둔하 고 나서자 묘한 질투심이 끓어올랐 다. 그 질투심은 진한 살기로 그의 두 눈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아직 멀었소. 이런 놈은 가장 처 참한 고통을 받다가 죽게 해야 하 오." 위혜군이 아미를 찌푸렸다. "죽일 셈인가요?" "그럼 살려둘 줄 알았소?" "이 사람을 죽인다고 모든 것이 예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 텐데요?"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금이 간 내 상처를 아물게 할 수는 있소." "안 돼요. 전 이 사람이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어요." 위혜군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녀의 태도에 사운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 "군매! 그대는 당신의 일생을 망친 이 자가 밉지도 않다는 말이오?" 위혜군이 서릿발 같은 신색으로 사 운악을 쏘아보았다. "당신과 나의 약혼이 이제 없었던 일이 되었으니 다신 군매라고 부르지 마세요!" "파혼이란 말이오?" "그럼 청백지신을 잃은 절 아내로 맞이할 건가요?" 순간, 사운악이 당혹함을 금치 못 했다. "그…그건!" 위혜군이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날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진정 한 사랑에는 무한한 관용이 있으니까 요.' 그녀는 사운악과 관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해영을 통해 진정 아름다운 사 랑이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랑보다 소중한 것은 없 음을……. 전 아무리 삶이 고달프더 라도 사랑을 쫓기로 결심했어요.' 사운악이 심각한 안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군매! 그 문제는 더 생각해 봅시 다." 이렇게 말한 그는 신형을 돌려 관 해영 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위혜군이 관해영의 앞을 막 아섰다. "물러서요. 누구든 이 사람을 해치 려 한다면 그보다 앞서 먼저 나부터 죽여야 할 거예요!" 위장천이 앞으로 나오며 꾸짖었다. "혜군아! 어서 비켜서라. 이것은 너 의 문제이기에 앞서 나라와 국법을 어기고 해적질을 한 심판이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어요." 위혜군이 완강하게 버티고 나오자 위장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 일단 성으로 압송하 는 수밖에! 그러나 성 안에 까지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가는 아버 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마 찬가지다.' 위장천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군사 들에게 명했다. "우선 이 자를 배에 태워라. 처리 방법은 그 다음에 생각하겠다." 대여섯 명의 군사가 우르르 몰려나 와 관해영을 들쳐업고 해파대를 내려 갔다. 위장천은 불쾌한 얼굴로 우뚝 서 있는 사운악을 향해 침통한 목소리를 토했다. "사공자! 이젠 혜군과의 혼약을 잊어 주시오." 사운악의 얼굴은 침울하게 가라앉 아 있었다. '본 문이 사대벌왕(四大罰王)과의 암투에서 승리하려면 황궁의 힘이 필 요하다. 그리고 황궁을 이용하려면 위재상과 장군부를 이용하는 것이 가 장 빠르다.' 무슨 뜻인가? 사대벌왕과의 암투에서 승리하려면 황궁의 힘이 필요하다니? 그렇다면 그는 의식적으로 위혜군에게 접근한 것이란 말인가?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 시 위혜군을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야망을 위해서!' 순결을 잃은 위혜군을 아내로 맞아 들이면서까지 달성하려는 그의 야망 은 대체 무엇인가? 사운악은 정색을 했다. "대원수!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마 음이지 육체는 아니오. 난 결코 군매 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위장천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 그게 정말이오?" "그렇소. 그만한 일로 돌아선다면 그 동안 나의 사랑이 얼마나 위선적 이었겠소? 난 오직 군매와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소." "고, 고맙소. 사공자의 도량은 나 같은 범부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겠 구료." 위장천은 진심으로 감격해 마지않 았다. 순간, 사운악은 위장천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사공자라 그만 부르시오. 듣 기가 거북하오이다." 위장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걱정 마시오. 매제가 원한다 면 매제라고 하루에도 수천 번은 부 를 수 있으니까." "하하하!" 사운악 역시 흔쾌히 따라 웃었다. 문득, 주위를 바라보고 있던 위장 천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곡주련을 바라보고 두 눈을 빛냈다. "이 여인은……?" 사운악은 그녀를 들쳐업었다. "데리고 가려 하오. 내 일에 쓸모 가 있을 것 같소." 위장천이 곡주련의 얼굴을 바라보 다 내심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천하 절색이다. 황궁에 미인이 많 다고 하나 저 여인에 비한다면 만월 과 반딧불 차이……. 헌데 왜 이리 마음이 끌리는 것일 까?' 신화의 가문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기재, 그의 가슴은 한 여인으로 인해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군선은 폐허가 된 해왕도를 뒤로 하고 순풍에 돛을 높이 올렸다. 隙? 사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7 장 (사랑, 이제 안녕 1) 사랑, 이제 안녕 선실(船室)! 위장천, 사운악, 위혜군이 자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헌데, 위혜군을 바라보는 위장천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해 있었다. "혜군아! 매제는 모든 것을 잊고 널 받아들이기로 했다. 넌 이제 아픈 상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위혜군은 뜻밖이라는 얼굴로 사운 악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사운악은 엄숙한 얼굴이었다. "군매! 날 소인으로 취급하지 마시 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지 당신의 육체는 아니었소." "……!" 위혜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럼 한 가지 물어 보겠어요. 만 약 내가 당신보고 죽으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사운악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군매, 무슨 농담을! 천하에 여인 때문에 죽을 바보가 어디에 있 단 말이오?" 순간, 위혜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들었다. '역시 그렇군요. 해영은 내가 원하 는 일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는 데…….' 그녀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사운악 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당신이 어떤 목적을 가 지고 나에게 접근했음을 어렴풋이 알 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미심쩍음이 오늘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확연히 드러나는군요.' 허나, 위장천은 마냥 즐거운 듯 얼 굴 가득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으 니 해영이란 자를 없애기로 하자." 위혜군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어 들 었다. 그녀는 위장천을 향해 바늘 끝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아직 제 마음이 결정된 것은 아니에요." 위장천은 짙은 검미를 찌푸렸다. "네가 결정할 일은 없다. 넌 시키 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 가문의 명예 를 더럽히고 아버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위혜군은 주춤거렸다. 그녀는 누구 보다도 위장천의 성격을 잘 알고 있 었다. 광명정대하고 사심이 없는 성 품이나 일단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 이라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부친인 위정국의 이름을 더럽 히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부터 우러 나온 지극한 효심이었다. '더 고집을 부렸다가는 오히려 역 반응을 일으키겠다.' 위혜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내가 물러서게 된다면 해영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 뜨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 사람의 일은 더 이상 언 급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처형은 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피를 흘리는 것은 원치 않아요." 사운악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안 돼요. 그 놈은 반드시 죽 어야 할 놈이오." 위혜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운 악을 쏘아보았다. "그럼 저도 당신과 결혼할 수 없어 요." 순간, 사운악이 버럭 노성을 터뜨 렸다. "무엇 때문에 군매는 그 자의 편을 드는 것이오?" 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해 감정이 격해 있었다. 위장천이 재빨리 두 사람을 막고 나섰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위 혜군을 바라보며 안색을 침중히 가라 앉혔다. "좋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그를 죽이지는 않겠다." 사운악의 두 눈에 핏발이 일었다. "대원수! 그 같은 처사는 나 사운 악을 능멸하는 것이오." "진정하시오, 매제." 위장천은 격노해 있는 사운악을 달 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 놈을 지옥귀사역(地獄鬼 死域)으로 보낼 생각이오. 어떻소? 나는 이 방법이 매제의 마음에 충분 히 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순간, 사운악의 얼굴에 어려 있는 노기가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곧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그게 처형하 는 것보다 더 통쾌한 복수일 것입니 다." 반면 위혜군의 얼굴은 엄청난 경악 으로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지옥귀사역! 과연 그곳은 어떠한 곳이기에 좌중 의 분위기를 이토록 달라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침침 한 선실.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짐들과 귀퉁 이마다 처져 있는 거미줄은 음습한 공기와 더불어 숨통을 턱턱 막히게 하고 있었다. 관해영은 정신을 잃고 있는지 선실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기둥에 묶여 고개를 반쯤 떨구고 있 었다. 끼이이익! 그때 선실의 문이 열리며 화사한 빛무리가 문의 넓이만큼이나 관해영 을 향해 밀려 들어왔다. 관해영은 눈 까풀을 뚫고 들어오는 화사한 빛의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문이 닫히며 자신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신형이 어둠 속에 묻 혀 들었다. 그러나 관해영은 두 사람이 누구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가슴을 섬뜩하게 만드는 이 기도 는 사운악! 사향 냄새는 위혜군…….' 관해영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아니다. 주련이다. 그녀는 항상 머리에다 동백기름을 바르고 있 거든. 헌데 그녀가 왜 사운악과 이곳 엘……?' 문득 관해영의 초췌한 얼굴에 한 줄기 불안이 어렸다. 과연 그의 생각 대로 두 사람은 사운악과 곡주련이었 다. 사운악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흘러 나왔다. "관해영! 넌 이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 곳은 살아 있다는 것이 저주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혹한 곳이다." "……." "너는 그 죽음과 같은 곳에서 오늘 의 일을 떠올리며 괴로움에 몸부림칠 것이다." 사운악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곡주련의 옷을 잡아 찢었다. 찌이이익! 비단 찢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이어 백옥처럼 빛 나는 여인의 살결이 드러났다. "……!" 곡주련은 혈도를 제압당했는지 손 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잔뜩 두려움을 띠고 있었다. "관해영! 똑똑히 보아라. 너의 약혼 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사운악의 두 눈은 짙은 욕정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곡주 련의 옷을 무자비하게 찢어내고 있었 다. 찌이익! 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7 장 (사랑, 이제 안녕 2) 부욱! 부우욱―! 한동안 날카로운 마찰음이 연속적 으로 울리고 곡주련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변해 있었다. 사운악이 그녀를 안고 넘어졌다. 순간, 관해영의 입에서 노갈이 터 져나왔다. "안 돼!" 그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럴수록 사운악 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흐흐! 난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 미다. 잘 보아 두어라." 사운악이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곡주련의 몸을 더듬었다. 관해영의 두 눈이 튀어 나올 듯 부릅떠졌다. "사운악!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 냐?" 그러나 이미 욕정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운악에게 그 같은 소리가 들 릴 리가 만무했다. 그는 굶주린 이리 처럼 곡주련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더 듬고 있었다. 문득, 사운악의 육체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곡주련의 입가에서는 신음 소리 한 마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사운악이 시끄러운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까 봐 아예 아혈(啞穴) 까지 점(點)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관해영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잔인한 놈! 네놈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다.' 관해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리고 그는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눈 동자들을 떠올렸다. 것은 인간의 눈 이 아닌 늑대들의 눈이었다. 나이 일 곱 살 때라고 관해영은 생각했다. 검술을 익히기 위해 늑대 우리 속에 뛰어들어 칼을 휘둘렀다.수많은 상처 를 내고서야 간신히 늑대 한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다음 날 역시 두 마 리의 늑대와 싸워 이겼다. 그 대가로 눈을 떴을 때는 일주야의 시간이 흘 렀다. 그렇게 백 마리의 늑대들을 해 치웠을 때는 어느 덧 자신의 나이 열 셋. 그 해 처음으로 배를 타고 나가 상 대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밖았을 때는 자신 스스로가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 각했다. 해왕도로 돌아와 자신이 해적이 되 었음을 알리고 난 다음 해왕도의 패 권을 넘겨받았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오 년의 세월 동안 힘이 부족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 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그는 자신이 한낱 보잘 것 없는 해적이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관해영의 눈가로 피눈물이 흘러내 렸다. 사운악이 자신의 옷을 걸치며 만족 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계집도 쓸 만하군. 나는 이 여 자를 평생 내 곁에 두고 나의 노리개 로 삼을 것이다." 관해영이 사운악을 쏘아보았다. 그의 두 눈에서 새파란 광망이 쏟 아져 나왔다. "언젠가는 네놈의 가슴에 검을 박 아 주마." 사운악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너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 모르 겠다. 나 역시 그런 날이 오기를 바 란다. 그래야만 내 손으로 직접 네 놈을 죽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 나 아직까지 지옥귀역사에서 살아나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는 곡주련을 끌고 밖으로 걸어나 갔다. 순간, 전혀 움직일 수 없을 것 만 같던 곡주련이 주춤거리며 관해영 을 바라보았다. '관가가, 이것으로 우리의 사랑은 끝이군요!' 그녀의 두 눈에서 투명한 액체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제까 지고 관해영을 따르겠다던 곡주련. 그녀는 이것이 관해영과 마지막 이 별이라고 생각했다. 삐이이익! 선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신 형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순간, 관해영은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주련! 살아만 있어라. 꼭!" 우우욱! 관해영은 입으로 한 사발이나 되는 피를 쏟으며 의식을 잃었다. 엄청난 분노가 잠잠하던 내상을 격발시켰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 었다. 관해영은 가까스로 의식을 회 복하고 문쪽을 바라보다 흠칫 놀랐 다. 위혜군이 걱정스런 눈길로 관해영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 왔다. "날 원망하겠죠? 나 때문에 수하들 도 죽고 당신은 이런 꼴이 되었으 니!" "……." 관해영은 묵묵히 그녀의 얼굴만 바 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두 눈에는 뿌연 액체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관해영은 그 눈물 속에서 곡주련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슬픈 눈길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 것이다. 위혜군은 슬픈 목소리로 더듬거렸 다. "이젠! 당신을 만나지 못할 것 같 아요! 내가 찿아온 것은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예요." "……!" "그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는 사실이에요!" 위혜군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했 다는 듯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떨 구었다. 그러나 관해영의 얼굴에는 단 한 올의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 다. "……!" 그의 두 눈은 초점이 없는 듯 멍하 니 어둠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곡주련이 자신을 바 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기라도 하는 양 그의 두 눈은 움직일 줄 몰랐다. "난 이제 당신의 영상만 지니 며…… 살아갈 거예요!" 위혜군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선실을 뛰쳐나갔다. 순간, 관해영의 얼굴이 차디차게 굳어 들었다. '기다려라, 사운악! 네놈의 가슴에 반드시 검을 꽂아 주마.' 복수! 그것은 천하가 망한다 해도 바꾸어 질 수 없는 관해영의 의지였다. 녀의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8 장 (바람 같은 만남, 운명 1) 바람 같은 만남, 운명 천관사(千官使) 공천영(公天榮) 듣 거라. 너는 지금부터 가장 뛰어난 호반출 신(虎班 出身)의 무장(武將) 십 명 을 대동하고 한 명 의 죄인을 지옥 귀역사까지 호송하라. 가는 도중 그 의 죄명(罰名)을 물어서도 안될 것이 며 또한 그의 출신 내력을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내 명령을 어길 때에는 내 친 히 너의 죄를 다스리리라. 금군대 원수 위천.> 와두두두! 신강성(新疆省)을 향해 한 대의 마 차가 바람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마차는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로 굵 은 쇠창살이 쳐져 있었다. 마차 주위로는 십여 명의 무장들이 마차를 에워싸며 말을 달리고 있었 다. 하나같이 은빛갑옷을 걸치고 손에 는 긴 장창(長槍)을 들고 있는 모습 들은 일견 하기에도 예사 무장들이 아니었다. 실로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죄인을 호송하는 데 있어 군율을 다스리는 부장급 장수들이 대거 출정 (出征)했다는 것은 일찍이 전에 없었 던 일이었다. 더군다나 선두에서 말 을 몰고 있는 인물은 황금갑옷을 걸 친 장군이 아닌가? 부리부리한 두 눈에 고슴도치처럼 뻣뻣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그의 모 습은 맹호가 기지개를 켜는 듯 위엄 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이 사람, 만인의 죄를 다스리 는 어영대장군(御營大將軍)의 직속부 하로 그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 는 천관사 공천영이었다. 나이 열다섯 살에 뜻을 세워 그 나 이 스물에 이르러 무과에 급진한 그 야말로 야망의 화신이다. 말을 몰고 있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대원수께서 나에게 호송책임을 맡 긴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의혹스러운 얼굴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 안에 있는 세 사람. 안색이 누렇게 뜬 호색한 중년인 한 명과 청수한 기품을 풍기고 있는 노인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치렁한 흑발로 얼굴을 가리 고 있는 청년 한 명, '대체 저들 중 누가 그토록 죄인이 란 말인가? 이상한 것은 어째서 위 대원수께서 죄인을 밝히기를 꺼려하 시는 것일까?' 공천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 를 알 수 없었다. 마차는 신강성으로 접어드는 호젓 한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 채의 객잔이 눈 에 띄었다. "워어!" 공천영은 말을 세웠다. "잠시 쉬었다 간다." 장수들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그럴 것이 삼 일 동안 그들은 눈 한 번 붙여 보지 못하고 말을 달려왔 었다. 열 명의 장수들이 말에서 내려 객 잔 앞에 마련된 널찍한 걸상에 걸터 앉았다. 공천영의 우렁찬 목소리가 시뻘건 염천(炎天)을 뒤흔들었다. "여봐라! 간단히 요기할 것을 가져 오너라!" 놀란 얼굴로 한켠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십대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부리나케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이상도 하지! 주막을 한 지가 이 십 년이 넘었지만 죄인을 호송하는 데 있어, 저렇듯 위맹한 장수들이 십 명씩이나 나타난 것은 처음일세!' 태양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녹일 듯이 퍼부어져 내렸다. 지면은 불에 댄 듯이 화끈거리고 있었고 바람은 잠자듯이 죽어 있었 다. 그야말로 불볕 더위였다. 은빛갑옷을 걸친 장수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무슨 고역이람! 저 까짓 죄 인을 호송하는 데 율치십장(律治十 將)들이 모두 나와야 한다니!" "누가 아니래나? 대체 저 놈들이 뭐가 대단하다고……." "입 다물고 있어." 공천영의 목소리가 짤막하게 터져 나왔다. 율치십장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불평 어린 시선으로 공천영 을 바라보았다. 허나, 공천영의 눈길은 주막 앞에 세워둔 마차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고 두 눈은 무엇인가를 찿 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대원수께서 그토록 염 려하던 놈이……?' 한번 호기심이 나면 반드시 풀고 마는 그였다. 그의 가슴에는 의혹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점소이가 소채를 들고 나타났 다. 점소이는 장수들 앞에 그릇을 내 려놓으면서 슬쩍 공천영에게 눈길을 주었다. "중요한 죄인들인가 보군요, 나리!" 공천영이 두 눈을 부릅떠 점소이를 쏘아보았다. 점소이가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서는 곳이 하필이면 마차 쪽이었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찔렀다. 점소이가 놀라며 마차 를 바라보았다. 노인이 목쉰 소리를 토해냈다. "이보게, 수고스럽지만 물 좀 떠다 줄 수 있겠는가?" 노인의 입술은 고목나무 껍질이 벗 겨지듯이 허옇게 메말라 있었다. 점소이의 얼굴에 측은감이 어렸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부엌 쪽으로 달려가 곧 커다 란 바가지 하나를 들고 나왔다. "마셔요, 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노인의 희미한 두 눈에 생기가 감 돌았다. 순간, 팍! 번쩍이는 창날이 바가지를 꿰어 허 공 높이 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헉!" 점소이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 자 어느새 은의무장 한 명이 싸늘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인에게 물을 주지 마라." 살모사가 독기를 뿜어내고 있는 듯 한 그의 두 눈은 폭양 아래서 유리알 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점소이가 뱀을 본 쥐처럼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노인이 창살을 움켜잡고 떠듬거렸 다. "이보게, 단 한 모금만 마시게 해 주게." 은의무장의 얄팍한 입가에 비릿한 소가 어조렸다. "흥! 왕년의 한림대학사(翰林大學 士)도 별 수 없군. 물 한모금을 우리 같은 사람에게 애걸하다니!" 이때 다른 은의무장이 나무로 된 물통을 가지고 와 노인 앞에 주르르 쏟아 부었다. "자!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호반출 신을 경멸한 대가다. 마시고 싶으면 개처럼 짖어라." 노인의 얼굴에 가는 경련이 일었 다. 그것은 분노였다가 이내 치욕으 로 바뀌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노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치렁한 흑발을 늘어뜨리고 있던 청년이 싸늘한 목소리를 토해냈 다. "이봐! 우리가 너희들의 심심파적 이냐? 아무리 죄수라지만 목마름과 배고픔은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 냐?" 은의무사가 의외인 듯 서로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신기한 보물이라도 보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허! 이놈 보게? 대들 힘이 남아 있다는 말이지?" 살모사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은의무 사가 긴 창으로 청년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청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어, 그는 날쌔게 무장의 창을 낚 아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 지라 무장은 얼결에 창을 빼앗기고 말았다. 우두둑! 게다가 긴 머리의 그 죄수는 창을 빼앗자마자 무릎에 대고 단번에 부러 뜨려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은의무사의 두 눈에 핏빛 살기가 번져 올랐다. "이 놈이 반항까지?" 그는 철장의 문을 부셔 버릴 듯이 열어젖혔다. 지켜보고 있던 공천영의 눈썹이 역 팔자로 솟아올랐다. '저 놈인가? 한 번 지켜보자. 달아 날 수는 없는 몸이니까.' 이때 호색한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청년의 귀에 소곤거렸다. "이보게 덤벼 봐야 자네만 손해네. 어서 잘못했다고 빌게. 그러면 조금 이라도 덜 맞을 것일세." 청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저런 놈들에게 빌어야 할 이유가 없 소." 중년인이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 다. "쯧쯧! 혈기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네. 자넨 아직 세상을 너무 모르는군." "나와!" 은의수장이 청년의 멱살을 움켜쥐 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팍! 청년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른 은의수장이 면상을 걷어찼고, "억!" 청년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한길 이나 허공을 떠 지면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이미 피투성이였 다. 살모사의 눈을 가진 자가 쏜살같 이 덮쳐 오며 복부를 걷어찼다. 청년의 신형이 공처럼 굴러 공천영 의 발 앞에서 멈추었다. 공천영의 두 눈에서 벼락불 같은 신광이 작살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 놈!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 한 낱 거지나부랑이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어.' 그는 머리카락 사이로 뿜어져 나오 는 청년의 차가운 눈빛을 보며 형용 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좀더 두고 볼 필요가 있겠다.' 그는 발로 청년의 신형을 툭 차 은 의수장 앞으로 굴려 보냈다. 그러자 혹시나 공천영의 입에서 호통이 터지 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두 명의 은의수장은 아무 거리낌없이 청년을 후려패기 시작했다. 퍽! 퍼! 퍼억! 시뻘건 염천 아래 피가 튀어 올랐 다. 그러나 청년의 입에서는 한 마디 의 신음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때리는 은의무사가 숨을 헐떡거리 며 뒤로 물러섰다. "이놈! 이젠 잘못을 알겠느냐?" 청년이 간신히 피투성이 얼굴을 들 어 더듬거렸다. "난 너희들에게 틀린 말은 한 적이 없다." "이, 이 놈이!" 살모사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은의무 사의 두 눈이 역팔자로 솟아올랐다. 그는 다른 은의수장의 창을 빼앗아 청년의 목줄기를 찍어눌렀다. "잘못했다고 사과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설령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네놈 에게는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은의무사의 얼굴이 서슬 푸른 면도 날같이 변했다. "네 놈 하나 못 죽인다고 생각했다 면 그건 네놈의 명줄이 짧기 때문이 다." 푹! 창 끝이 청년의 목줄기를 서서히 파고들었다.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청년이 메마른 음성을 흘렸다. "후훗! 내가 죽을 목숨이 아니면 그때는 노인에게 물을 주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 "죽엇!" 은의무장이 소리치며 창 끝을 들어 올렸다. 번쩍! 싸늘한 광망이 아침 이슬처럼 번뜩 였다. 창 끝이 명주실 같은 햇살을 가르며 청년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 렸다. 그 순간이었다. "멈춰!" 공천영이 노호를 터뜨렸다. 은의무 장은 찌르려던 창을 주춤하며 고개를 돌려 공천영을 바라보았다. "하잘 것 없는 죄수에게 자존심을 상하고도 참으라고 하십니까?" 공천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대원수께서 친히 부탁하신 죄수이다." "……!" 은의무장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굳 어 들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 다는 얼굴로 청년의 얼굴을 새삼 바 라보았다. 공천영이 소리쳤다. "알았으면 어서 처넣어라!" "대체 이놈이 무슨 죄를 범했기 에!" "목이 달아나고 싶으냐?" 공천영의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에 은의무사는 찍 소리도 하지 못하고 청년을 마차 안으로 들이밀었 다. 그런데 바로 그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고 있던 한 노인이 있었다. 나 무 그늘 아래 더위를 피하며 앉아 있 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8 장 (바람 같은 만남, 운명 2) 일신에는 허름한 백의(白衣)를 걸 치고 있으나 단정히 벗겨진 허연 백 발 아래 두 눈은 무한한 현기로 충만 되어 있었고, 안색은 불그스레한 대 춧빛이었는데 얼굴에 나 있는 굵은 주름살 몇 개가 더할 나위 없이 현자 의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 신선을 방불케 하는 선풍도골 (仙風道骨)의 노인은 청년을 바라보 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아이군! 그토록 심한 고통 을 받고서도 눈이 살아 있다니!' 노인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섰 다. '마치 젊은 날의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구나. 고집 세고 누구에게든 지 기 싫어하며 야수와 같은 오기……. 왠지 마음이 끌리는 아이로고.' '죄인이 아니었다면 데리고 가서 제자로 삼아 볼 만도 한데……, 그 점이 아쉽군.' 노인은 지독히 느린 걸음으로 청년 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공천영의 눈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노인장! 마차에서 떨어지시오. 그 렇지 않으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 할 것이외다." 노인은 천천히 공천영을 바라보았 다. "지금 나에게 한 말이냐?" "그렇……." 공천영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런 그의 얼굴은 엄청난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으으! 마치 산악을 보고 있는 것 같군!' 지금 이 순간, 노인의 전신에서는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리서 리 뻗치고 있었으며, 전신에서는 대 자연의 기도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산악과도 같이 육중한가 하 면 사나운 파도가 으르렁거리는 패기 와도 같은 것이었다. 공천영은 자신이 태어나서 이토록 가공할 신위를 뿜어내는 사람을 아직 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십여 세에 문과에 급제해 수많은 인물들을 접해 보았지만, 그는 이 노 인의 기도를 따라 갈 사람을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공천영은 호랑이를 만난 쥐새끼처 럼 굳어 있었다. 노인이 다시 청년에게 다가갔다. "아이야.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관해영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흐음―, 관해영이라! 헌데 너는 절 대 죄인이 될 심성이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죄를 지었느냐?" 청년 관해영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 가 번져 올랐다. "묻지 마십시오. 오가다 만난 사이 에 얘기하기에는 너무 긴 사연입니 다." "흐음……, 세상사 많이 겪어 본 사람처럼 말을 하는군! 그나저나 너 의 눈에는 영기가 넘치고 인상이 중 후하여 절대 감옥에서 평생을 썩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격이 강직 하여 남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받겠구 나." "……!"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밝은 빛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체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너에게 몸을 튼튼하게 하는 한 가지 구결을 알려 줄 터이니 외워 두 었다가 유용히 사용하도록 하거라." 순간, 관해영의 귀로 모기소리만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기화신(氣化神) 신환허(神還虛) 정 화기(精化氣) 역욕의회(力慾意會) 변 화수심(變化隨心)……."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노인이 말 하는 대로 구결을 외워 나갔다. 구결 은 확실한 뜻을 알 만한 것은 아니었 으나 노인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 는 않아서 그대로 따라 외운 것이다. 구결이 끝나자 노인의 목소리는 평 소 때같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이 구결의 이름은 태극육합일주공 (太極六合一週功)이라 한다. 일성만 익혀도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고 오 성에 이르면 도검불침의 몸이 되니 괴로울수록 수련에 정진하면 가히 신 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 다." 관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노인은 근엄하게 생겼는데 생 각보다 허풍이 심하군. 믿고 외웠더 니…….' 허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태극육합일주공이 무림사 십대절공 의 하나임을……! 노인은 자애스러운 눈길로 관해영 을 한 차례 살펴보고 지극히 부드러 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후일 죄인의 몸에서 풀려나면 여 산(麗山) 운학곡(雲鶴谷)을 찿아 오 너라." 이렇게 말한 노인은 공천영을 바라 보았다. "너는 더 이상 이 사람들을 괴롭히 지 말고 호송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위재상에게 말씀드려 엄벌을 내리겠 다." 공천영의 얼굴에 극도의 놀람이 일 었다. "재, 재상님과 잘 아는 사이입니 까?" "오랜 친구이니라!" 공천영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 렸다. '하마터면 삼족이 화를 당할 뻔했 군!' "그럼, 갈 길이 멀어……." 공천영이 노인을 향해 허리를 깊숙 이 숙이고 은의무사들을 향해 소리쳤 다. "말을 몰아라." 와두두두두! 마차가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노인 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나도 이젠 늙은 모양이군! 단순히 호감이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 로 태극육합일주공을 전해 주다니!" 노인의 얼굴에는 진한 아픔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지만 벽경 (碧瓊)에게서 낳은 아이가 자랐다면, 저 아이의 나이가 되었을 텐데! 도대 체 임신 중인 벽경을 납치해 간 자들 이 누구란 말인가?' '지난 십 년, 나에게도 도전할 만 한 천하의 모든 문파를 뒤졌지만 하 나의 단서도 찾지 못하고 쓸쓸히 중 원으로 귀환해야 하는 이 신세……. 등세욱! 네가 못할 일도 있단 말이 냐?' 아아! 등세욱이라니! 고금 제일의 절대자라고 불리는 마 황천자 등세욱이 바로 이 노인이란 말인가? 스쳐 지나가는 인연, 그것은 결코 허공을 스치는 공허한 바람만은 아니었다. 부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9 장 (지옥귀사역 1) 지옥귀사역(地獄鬼死域) 1. 물도 아니고 땅도 아닌 사방이 오 백여 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축 축한 늪지대였다. 수많은 독충들이 우글거리고 악어가 통나무처럼 떠다 니고 있는 이곳은 바로 사흑탄(死黑 灘)이었다. 사흑탄(死黑灘). 한 번 빠지면 영혼마저도 건질 수 없다는 죽음의 오지(奧地), 사흑탄의 한가운데 온통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하나의 섬(島)이 둥실 떠 있었다. 지옥귀사역(地獄鬼死域)! 가장 흉악한 죄인들만 가두어 두는 죽음의 유배지로 한 번 들어가면 시 신조차도 나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데, 지금 지옥귀사역을 향해 다가가 는 한 척의 배가 있었다. 선수에는 공천영이 우뚝 서 지옥귀 사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수십 척의 배들이 공천영이 타고 있는 배를 은근히 조 여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거대한 그물과 같아 공천영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 중 한 척 의 배가 빠르게 다가오면서 칼칼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 신입생인가? 이번에는 어 떤 놈들인가?" 공천영이 소리쳤다. "말썽 꽤나 부릴 놈들이 타고 있 네." "하하! 어떤 놈이고 이곳에 들어오 면 양처럼 순해지지." 수십 척의 배들은 공천영의 배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선착장으로 인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안개가 자욱이 끼여 있는 선착장에 다다르자 수십 척의 배들은 다시 선수를 돌려 뿔뿔이 흩 어지는 것이었다. 공천영과 열 명의 은의무장들이 세 명의 죄인을 섬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어느 새 한 명의 털보 대한 이 공천영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앞 이마, 퀭하니 들 어간 두 눈은 시뻘건 핏발이 서 있고 음침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공천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올랐 다. "마거산(馬巨山)! 오랜만이군. 한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마거산의 짙은 눈썹이 꿈틀 솟아올 랐다. "십 년이건 백 년이건 어서 신상 명세서나 놓고 꺼져." 공천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젠장! 이 놈은 누구든지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죄인 취급을 한단 말이야. 아무튼 기분 나쁜 놈이야.' 그러나 그는 그런 기분을 전혀 내 색하지 않고 품속에서 밀봉한 하나의 서찰을 넘겨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공천영이 이렇게 다시 말을 붙여 보았으나 마거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공천영이 얼굴에 노기를 띠고 선수 를 돌렸다. '버르장머리없는 놈! 감 히 내 앞에서 저 따위 버릇없는 행동 을 서슴없이 하다니! 좌천시켜 본때 를 보여 주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이 부질없 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옥귀사역에 있는 사람은 신분 고 하를 막론하고 지옥귀사역 안에서 죽 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거산은 밀봉된 서찰을 펼쳐 들었 다. <본명(本名), 장일비(張一飛). 출신(出身) 하남(河南) 등봉현(登 封縣). 죄명(罪名) 야도(夜盜)로 칠백이 십 번의 도 둑질. 위재상의 저택을 털 다 사로잡혔음.> 마거산이 세 명을 쏘아보았다. "장일비가 어떤 놈이냐?" 호색한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비굴 한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전데요……." "대가리 박고 있어." "저…전……." 퍽! 마거산의 발이 장일비의 복부를 걷 어찼다. "우악!" 장일비가 펄쩍 뛰어올라 지면에 나 동그라졌다. "다음에는 목뼈를 분질러 버릴 테 다." 마거산의 음산한 목소리에 장일비 는 안색이 흑빛으로 굳어진 채 재빨 리 지면에다 머리를 박았다. <본명(本名) 공손중명(公孫仲明). 출신(出身) 한림원대제학(翰林院 大提學). 죄명(罪名) 기찰원주(機察院主)의 관직에 있을 때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많은 관리들이 억 울한 죽음을 당했음. 보다 못한 기찰 원의 부원주(副院主)인 악천령이 상 소를 하여 그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 극형을 받게 되었음.> "공손중명!" 마거산의 우렁찬 목소리에 노인이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왔다. 순간, 마거산의 채찍이 공손중명의 얼굴을 후려쳤다. "억!" 공손중명이 얼굴을 감싸쥐고 지면 을 나뒹굴었다. "어른이 불렀으면 신속히 대답하는 것이다. 알았느냐?" "……!" 공손중명은 선혈이 낭자한 얼굴을 들어 마거산을 쏘아보았다. "뭘 봐?" 돌연, 마거산이 수박만한 돌덩이를 집어들고 머리 높이 쳐들었다. "머리통을 내리찍기 전에 대답해 라." 공손중명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 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이 돌을 들고 있어라. 어른으로 하여금 이 돌을 들어 올리 게 한 대가다." 그가 돌덩이를 공손중명 앞에다 던 졌다. 공손중명이 비지땀을 흘리며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마거산이 곁눈질도 주지 않고 신 상명세서를 읽어 내려갔다. <본명(本名) 관해영(關海影). 출신(出身) 미상(未詳). 죄명(罪名) 미상(未詳).> "……?" 마거산의 얼굴에 처음으로 의혹이 일었다. 그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음산한 미 소를 피워 올렸다. "괴물이 한 명 들어왔군! 죄명은 묻지 않겠다. 그것은 이곳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쿠웅! 바로 그때, 공손중명이 돌덩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거산 의 얼굴에 노기가 솟아올랐다. "내 명을 거역했으니 그 대가는 죽 음이다." 그는 떨어진 바윗덩어리를 집어 공 손중명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관해영이 황급히 마거산의 팔을 움 켜잡으며 소리쳤다. "연약한 노인을 죽일 셈이오?" 쾅! 덕분에 돌덩이는 마거산의 발을 내 리 찍었다. 일순간, 마거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픔을 참는 듯이 이빨을 악물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 를 팍 꺾고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관해영을 노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크흐! 내 일에 참견하는 것은 내 명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라는 것 을 알아야 한다."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솥뚜껑만 한 손으로 사정없이 관해영을 후려패 기 시작했다. 퍼억! 퍽! 푸아아악! 둔탁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관해영 의 신형은 팽이처럼 돌아가고 있었 다. 아직 사운악에게 맞은 내상이 치 유되지 않은 관해영은 그야말로 약간 의 충격에도 기혈이 뒤틀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이윽고 관해영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었다. 마거산은 그때서야 손을 멈추며 거 친 숨을 몰아 쉬었다. "이 놈을 선도장으로 끌고 가라." 스으으윽! 옆에 있던 육중한 바위들이 양 옆 으로 갈라지며 다섯 명의 인물이 튀 어 나왔다. 하나같이 검은 장포를 걸 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죽은 자의 안색처럼 시퍼런 빛을 띠고 있었다. 그들이 관해영을 들쳐업으며 두 사 람을 바라보며 음산하기 이를 데 없 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 두 놈은 어떻게 할까요?" "같이 데리고 가. 구경을 하면 다 시는 명령을 어기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인물들은 바위 틈으로 사라지고 있는 마거산을 따라가기 시 작했다. 훅릴醮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9 장 (지옥귀사역 2) 2. 드넓은 대전(大殿). 사방 벽은 온통 시뻘건 피로 물들 어 있었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수십 개의 형틀에는 인육이 달라붙어 있어 으스스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더 군다나 대전의 한가운데 팔짱 끼고 일렬로 늘어서 있는 수많은 흑의인 들. 그들의 얼굴은 무덤 속에서 갓 튀어나온 시체처럼 푸르죽죽했으며 감정이라고는 단 한올도 찿아볼 수 없었다. 마치 시체처럼 뻣뻣이 굳어 있는 그들의 전신에는 소름끼치는 살기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중의 한 형틀 위에는 한 명의 소녀가 묶여 있 었고, 그 앞에는 두 명의 흑의무사가 혹독한 채찍질을 가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쫘악!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채찍 이 가해질 때마다 백옥 같은 살결이 갈라 터지며 시뻘건 피가 튀어 올랐 다. 그런데도 소녀의 입에서는 비명 소리가 한 마디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문득, 두 명의 흑의무사가 채찍을 멈추며 대전 입구를 향해 깊숙이 허 리를 숙였다. "속하들 총관님을 뵈옵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목소리는 지독 히도 음산했다. 대전으로 들어서고 있던 마거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 히 다가왔다. "이 년한테서는 아직도 항복을 받 아내지 못했느냐?" 흑의무사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워낙 독종이라서……." "병신 같은 놈들! 독종이 아니라 너희들의 채찍이 약해서다." 마거산이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흑란(黑蘭)! 아직도 도망을 칠 마 음이 있느냐?"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십칠팔 세의 나이에 사슴같이 투명 한 두 눈과 오똑한 콧날의 선은 시원 한 느낌을 풍기는 아름다운 얼굴이었 다. 그러나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고 있는 것은 지독한 독기였다. 흑란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곳에서 인생을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마거산의 눈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팍! 그의 발이 흑란의 얼굴을 걷어찼 다. 그녀의 얼굴은 피투성이로 변했 다. 마거산이 두 흑의인을 냉혹한 눈 길로 쏘아보았다. "형벌은 이렇게 주는 것이다, 알았 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두 흑의인의 대답은 들은 체도 하 지 않고 마거산은 자신의 뒤를 따라 온 다섯 명의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그 놈을 형틀에다 묶어라." 관해영을 들쳐업고 있던 흑의인이 그를 형틀에다 묶을 때였다. "끄응―!" 관해영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두 눈을 떴다. 마거산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관해영, 앞으로 쓸데 없는 일에 참견을 할 것이냐?" 관해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비위에 거슬리는 일은 절 대 참지 못한다." 마거산이 얼굴 가득 살기를 띠었 다. "그 말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해 주마." 그는 곧 도열해 있는 흑의인을 향 해 노갈을 터뜨렸다. "일귀(一鬼)! 이 놈을 맡아라." 스윽! 한 명의 흑의인이 미끄러지듯이 앞 으로 다가왔다. 낚시 바늘 같이 위로 치켜진 두 눈, 면도날보다 얄팍한 입술,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새파랗게 죽어 있는 얼 굴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긴 채찍을 흔 들어 보이며 지극히 음산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흐흐! 이 채찍에 맞아 죽은 사람 은 지금까지 모두 구십 팔 명에 달한 다. 네 놈이 구십 구 명째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끝났을 때는 이미 그의 채찍은 관해영의 등을 후려갈기 고 있었다. 파팍! 팍! 살점이 튀어 오르며 시뻘건 피가 터져 올랐다. 관해영의 전신이 꿈틀거렸다. 계속 되는 채찍 세례에 관해영의 안면 근 육이 푸들푸들 떨렸다. 마거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 져 올랐다. "네놈의 입에서 다시는 참견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때는 그 채찍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관해영은 이빨을 으스러져라 깨물 고 고통을 삼킬 뿐 비명소리 하나 내 지 않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런 정도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련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운악에게 끌려 나가면서 얼굴에 흘러 넘치던 그 눈물을 그는 기억했 다. 곡성. 자신보다 먼저 두 동강이가 나서 죽어 가던 그를 생각했다. 아니, 그 수많은 이들의 비명을 기 억했다. 아이들. 어린아이들과 아녀자 들……. 관해영은 이를 악물고 채찍질을 받 았다. 그럴 수록 관해영의 얼굴에는 지렁이 같은 힘줄이 툭툭 불거져 나 왔고,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인내는 한계 가 있는 법. 관해영은 점차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관해영은 무엇인가 끊임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화신! 신환허!" 그것은 바로 태극육합일주공이었 다. 일성만 익혀도 몸이 바위처럽 단 단해진다는 전설의 기공이 그의 입에 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툭! 그러던 어느 한순간, 관해영의 고 개가 푹 꺾이며 사지가 축 늘어졌다. 歌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0 장 (독기 어린 꽃, 흑란) 독기(毒氣) 어린 꽃, 흑란(黑蘭) 마거산의 두 눈에서 벼락불 같은 신광이 쏟아져 나왔다. "독한 놈! 앞으로 책임지고 괴롭혀 주겠다." 그의 얼굴에는 관해영의 고집을 꺾 지 못한 분노가 역력히 나타나 있었 다. 일귀가 살음을 토해냈다. "아예 죽여 버릴까요?" "선도장 안에서 아직까지 항복을 발하지 않은 놈이 없다. 이것이 선도 장의 규율이다. 죽이려거든 항복을 받아낸 다음에 죽여라." 마거산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반성의 소리가 나올 때까지 평생 을 족칠 것이다. 정신을 차리면 불러 라." 그가 대전을 빠져나가려 할 때였 다. "저……!" 장일비가 조심스럽게 마거산에게 다가갔다. 마거산의 눈썹이 역팔자로 솟아올랐다. "뭐냐?" "제가 잘 타일러 볼 테니 이쯤으로 끝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놈도 내 일에 간섭을 하겠다는 것이냐?" "저……, 그게 아니라 이걸!" 장일비가 우물쭈물거리면서 손바닥 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마한 황금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순간, 마거산의 얼굴에 탐욕이 번 들거렸다. "이놈 봐라, 이곳에 올 때는 몸 수 색을 철저히 하는데?" 그는 누가 볼 새라 슬쩍 황금덩어 리를 받아 품속에 찔러넣었다. 장일비가 비굴한 웃음을 흘렸다. "헤헤! 돈이란 지옥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거산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오며 더 한층 목소리를 낮추었다. "또 가진 게 있겠지?" 장일비가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었 다. "없습니다. 신입 선물로 드리려고 감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좋아! 더 있다 해도 언젠가는 내 놓을 테니까!" 그는 약간 아쉬운 얼굴로 일귀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놈을 풀어 주어라. 그리고 석옥 (石屋)을 배정해 주어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일비 가 관해영의 밧줄을 풀어 주었다. "제길! 태어나서 남을 위해 돈을 써 보기는 처음이군!" 그것은 그 혼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중얼거림이었다.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 러싸인 분지. 자욱한 구름이 중간쯤 에 머무르고 있어 영활한 유원(柔猿) 조차도 오를 수 없고, 나는 새조차도 피해 가는 절벽 아래 다섯 개의 석옥 (石屋)이 자리해 있었다. 일귀(一鬼)는 관해영을 들쳐업은 장일비와 노인을 데리고 제일 좌측의 석옥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열었 다. 침침한 회색빛 어둠이 겨울 밤 나무 그림자처럼 깔려 있고, 퀘퀘한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짙은 어둠을 이불 삼아 한 명의 노인 이 누워 연신 잔기침을 터뜨리고 있 었다. "쿨럭! 쿨럭!" 일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놈의 늙은이는 목숨이 지독히 도 끈질기군. 아직까지 살아 있다 니……!" 장일비가 관해영을 내려놓으며 노 인을 바라보았다. 노인(老人). 반백의 머리가 수세미처럼 헝클어 져 있었고 얼굴은 오랜 병고로 인해 누렇게 떠 있었다. 그러나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한 줄기 위엄이 남아 있었다. 일귀가 장일비와 공손중명을 향해 입을 열었 다. "오늘부터 이곳이 너희들의 숙소 다. 첫날이기에 특별히 일을 시키지 않겠다. 그렇지만 내일부터는 인시 (寅時)에 기상해 별이 뜰 때까지 일 을 해야 한다." 장일비가 내심 투덜거렸다. '엄청난 중노동이군!' 바로 그때였다. 노인이 벌떡 일어서며 일귀의 멱살 을 움켜잡고 악을 썼다. "동목벌왕(東木罰王)! 네 놈을 결 코 용서하지 않겠다!" 노인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고 얼굴은 부들 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헌데, 동목벌왕이라면 사대벌왕 중 의 일파가 아닌가? 일귀가 주먹으로 노인의 가슴을 후 려쳤다. 펑! 가죽북 터지는 소리에 이어 노인의 신형이 석벽에 가 부딪치며 노인은 단번에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한 번 더 개지랄을 부렸다가는 골 통을 부셔 버릴 테다." 일귀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툭툭 털 며 석벽문을 닫고 사라졌다. 헌데, 노인을 바라보는 장일비의 얼굴에는 극도의 경악이 일렁이고 있 었다. '동목벌왕 용만후(龍萬侯)! 그는 사 대벌왕 중 동쪽의 복마성주(伏魔城 主)인데 이 노인이 왜 그를 미워하 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악을 원수 처럼 미워하는 협사(俠士)들로서 지 금 천하의 악인들을 모조리 잡아 들 이고 있는데……? 순간, 완전히 혼절해 있는 줄 알았 던 노인이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목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동목벌왕! 네놈의 그 가증스런… 위선을…반드시…밝혀 내고야…말겠 다." 장일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 다. '위선? 심상치 않은 일이군!' 칠흑같은 어둠이 쇠창살 사이로 밀 려왔다. 석옥 안에는 장일비가 켜 놓 은 등유의 불빛이 시름없이 졸고 있 었다. 관해영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 고 멍한 눈길로 벽 한쪽을 바라보며 언제까지고 움직일 줄 몰랐다. "……!" 장일비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일었 다. '이상한 일이야. 그 모진 매를 맞 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라니.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죽었 어도 수십 번은 더 죽었어야 하는 건 데…….' '하여튼 괴물이야! 이 날까지 살아 오면서 저 청년처럼 꿋꿋한 기상은 처음 보는군!' 장일비가 이렇듯 깊은 생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울려 오는 것이 아닌가? 장일비는 바싹 긴장했 다. 이곳의 주인들이 오는 모양이로 군. 제발 험악한 놈들이 없어야 할 텐데……. 덜컹! 문이 열리며 이십여 명의 인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초췌한 얼굴들, 그 얼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득한 절망감뿐이었다. 그러나 가끔씩 번뜩이는 눈길에는 형용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세 사람을 힐끗 바라 보고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제각 기 자리를 골라 몸을 누이기 시작했 다. 장일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길 인정머리라고는 벼룩의 간만 큼도 없는 놈들이군! 서로 인사말 정 도는 건네는 게 예의가 아닌가?' "드르릉! 피유우!" 누군가가 벌써 코를 골기 시작했 다. 문득, 관해영은 무엇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착각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발견 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군…….' 관해영이 깊은 의혹을 느낄 때였 다. 좀 전보다 더 강렬한 시선이 모 골을 쭈뼛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의 얼굴이 점차 굳어 들었 다. '이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관해영이 재빨리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팍!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던 안광 이 소리 없이 꺼져 버리는 것이 아닌 가? 그 곳, 두 사람이 등을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관해영은 두 사람을 뚫어지 게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는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 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새파랗게 번뜩이는 안광이 눈 깜짝 할 사이에 꺼져 버렸지만 늑대를 베 어 넘기면서 몸에 밴 고도의 감각은 순간적인 변화도 놓치지 않았던 것이 다. '저들이 왜 나를 노려보는 것일 까?' 관해영은 마치 안개 속을 걷고 있 는 듯한 모호한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석옥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인영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피투성이의 여인. 그녀는 바로 흑 란이었다. 上駭?.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1 장 (뇌옥 속의 기인 1) 뇌옥(牢獄) 속의 기인(奇人) 1. 흑란이 들어와도 석옥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서로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 던 한 명의 청년만이 놀란 얼굴로 벌 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횃불 처럼 번뜩이는 준수한 얼굴이었다. 청년의 얼굴에 반가움이 일었다. "흑란, 다시 잡혀 왔구나." 그 음성에는 소녀가 다시 잡혀 들 어왔다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흑란이 코방귀를 뀌었다. "흥! 너는 내가 다시 잡혀와 기분 이 좋은 모양이구나?" "그, 그런 게 아니라……." 청년이 머쓱한 표정으로 더듬거리 자 흑란은 별 볼일 없다는 듯이 관해 영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순간, 걸레처럼 찢어진 옷 사이로 백옥 같은 살결이 드러나 보였다. 그것은 등유불빛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지만 관해영은 웬일인지 강한 슬픔을 느꼈다. 흑란이 슬쩍 관 해영을 바라보았다. "너 아까 보니 대단하더라. 마총관 이 고집을 꺾지 못한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관해영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넌 그때 정신을 잃고 있는 줄 알았는데……?" 흑란이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일부러 정신을 잃은 척 했지. 그래야 한 대라도 덜 맞으니 까." 관해영은 고소를 머금었다. 흑란 역시 좀 전보다 더 밝은 웃음 을 지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관해 영의 넓적다리를 베고 눕는 것이 아 닌가? "아. 피곤하다." 관해영은 그녀의 하품 소리를 들으 며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무슨 여자가……, 흡사 길들이지 않은 망아지 같으니.' 흑란은 관해영의 얼굴이 어떻게 변 하든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두 눈을 껌벅거리면서 관해영 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 다. "……!" 한참 동안이나 치렁한 흑발에 가려 진 관해영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 던 흑란이 감탄성을 터뜨렸다. "아! 너 대단한 미남자다. 이런 데 서 썩기에는 아까운데? 전적이 뭐 야? 혹시 혼인 빙자 사기극 같은 거 아냐? 아니지. 그런 걸로는 이곳에 올 수가 없지. 그럼 유부녀 등쳐먹는 거 그것도 아닐 테고……." "……!" 관해영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흑란의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 가고 있는 것을 분명 히 볼 수 있었다. '이 여인이 단지 잠을 자기 위해 내 다리를 빌린 것은 아니다. 무엇인 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과연 흑란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이봐! 너 탈출할 생각 없어?" 관해영의 얼굴에 가벼운 경악이 일 렁였다. '탈출! 처음 보는 나에게 무슨 목 적으로 이런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 것일까?' 그러나 관해영은 나중에 어떻게 되 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보낼 생각은 아 직 해보지 않았다." 흑란이 또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확실히 너와 나는 통하 는 데가 있나 봐. 난 지금까지 아홉 번 탈출했다가 모두 실패를 했지만 이젠 성공할 방법을 알았어. 한 사람 만 더 있으면……." 그녀의 얼굴은 그 어떤 자신감으로 꽉 차 있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라움이 일 었다. '아홉 번이나? 그렇다면 이 여인이 자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헌데 한 사람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무 슨 뜻일까?' 관해영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다가오며 무거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흑란! 내가 조금만 더 참으라고 했잖아." 흑란이 싸늘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시끄러워, 이 겁쟁이야! 네가 할 일은 꼬리를 흔들며 개처럼 짖는 일 밖에 없어." 청년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싸늘 하게 굳어졌다. "내가 떠나지 않는 것은 사부님과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시기가 좋지 않아 떠나고 있지 않을 뿐이 야." 순간, 청년은 황급히 입을 다물며 두려운 표정으로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 한 중년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청년을 쏘아보고 있었다. 강렬하게 빛나는 눈동자, 우 뚝한 콧날 아래 교룡의 수염이 자라 있고 각진 턱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 함을 띠고 있었다. 청년은 겁에 질린 얼굴로 중년인의 옆으로 가 말없이 자리에 누웠다. 흑란이 뾰로통한 목소리를 토해냈 다. "내 환심을 사려고 별 거짓말을 다 하는군. 사부라니, 이곳이 무슨 무공 을 수련하는 곳인 줄 알아?" "……!" 그러나 청년은 더 이상 아무런 소 리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의 그의 두 눈만은 관 해영을 잡아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질투의 눈빛이었다. 관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 두 사람의 이름이 뭐 지?" "겁쟁이는 동현곡(董玄谷)이고 그 옆에 사부라는 사람은 이곳 석옥의 인수장(人囚長)인 두진성(杜眞星)이 야." 관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 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을 가리 켰다. "그렇다면 저 노인은?" 흑란이 노인을 힐끗 바라보며 대답 했다. "저 사람은 호광(胡光)이라는 사람 인데 그 뭐더라……?" 그녀는 잠시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밖에 있을 때는 천하를 뒤 흔들던 거부였는데 자신의 밑에 있는 자의 가족을 모두 죽여 이곳에 왔대 나 봐!". 순간, 옆에서 잠을 청하고 장일비 는 얼마나 놀랬던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호광이라고? 천하 상권의 삼분의 일을 쥐고 있는 호광 그가 이곳 에……!' 장일비는 실눈을 떠 노인을 훔쳐보 았다. 그는 직업이 도둑인지라 가부 들에 관해서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 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듣기로는 호광과 동목벌왕 용만후 (龍萬侯)는 둘도 없는 막역지우라고 하던데……. 그런데 좀 전의 원한에 찬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상한 일이야.' 그는 무엇인가를 냄새맡고 있었다. 흑란이 팔베개를 하고 관해영의 옆 에 벌렁 드러누웠다. "내 이름은 사도흑란(司徒黑蘭)이 야." 관해영이 입 속으로 응얼거렸다. "사도흑란이라…… 내 이름은……." "관해영. 좀 전에 마총관이 네 이 름을 불렀을 때 기억해 두었지. 그건 그렇고 넌 내 옆에서 자도록 해. 아 직 내 옆에서 잔 사람은 없지만 넌 예외야. 그렇다고 손버릇이 고약했다 가는 목을 졸라 죽여 버릴 테니 알아 서 하고." 관해영은 쓴 웃음을 지었으나 생각 하는 것이 있어 그녀의 옆에 드러누 웠다. "정말 탈출한 방법이 있는 거냐?" 사도흑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실패할 때마다 한 가지 씩의 방법을 터득해 놓았으니까!" 관해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이곳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 다. 복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탈출을 해야 한다.' 탈출! 그것은 관해영에게 있어 최고의 목 표였다. 헌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 는 동현곡의 두 눈에는 질투의 빛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흑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 는 여인은 바로 너다. 그러니 너도 나만을 생각해야 된단 말이야.' 이 밤, 한 사내의 가슴은 질투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1 장 (뇌옥 속의 기인 2) 2.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사도흑란 역시 어느덧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숨을 쉴 때마 다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일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관해영이 그것을 바 라보며 깊은 수면에 들 때였다. 부스스―.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울 리며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일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두진 성과 동현곡이었다. 두 사람은 익숙 한 솜씨로 자신들이 누워 있던 벽을 더듬어 나갔다. 끼이이익―! 순간, 벽의 한쪽이 조심스럽게 열 려지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석옥 안에 저런 비밀통로가 있었 다니! 그렇다면 저들은 탈출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두 사람이 비밀통로 안으로 사라지 는 것을 보고 관해영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통로는 길 게 이어져 있다. 그 짙은 어둠 속에 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현곡! 너는 오늘 많은 실수를 했 다. 그토록 인내심이 없어서야 장차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사부님! 흑란을 생각하면 저도 자 신을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 날의 열정을 모를 사부가 아 니다. 그렇지만 너는 흑란에 대한 열 정을 한시라도 빨리 잊어라. 내가 연 공을 끝내고 이곳을 떠날 때는 오직 너밖에 데리고 갈 수가 없다." 동현곡의 목소리가 당혹하게 흘러 나왔다. "사부님, 그…그건……." 두진성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흘러 나왔다. "내가 혈사무(血死霧)를 꺾기 위해 스스로 이곳에 들어와서 무공을 연성 하다 널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너의 성품이 급하기는 하지만 충직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넌 내가 데리 고 나가도 정도의 길을 걸을 수 있지 만 이곳의 인물들은 어찌 되었건 극 형의 죄를 지은 죄인들이다." 두진성. 그는 무엇 때문에 지옥과 같은 곳 에 스스로 들어왔단 말인가? 그리고 그가 꺾고자 하는 혈사무란 무엇인 가? 동현곡의 목소리가 더할 수 없이 간곡하게 흘러나왔다. "사부님! 흑란도 사부님이 인도하 면 되지 않습니까?" "곧 건청이십팔절(乾淸二十八節)의 연공이 끝나면 난 이곳을 빠져나간 다. 그리고 혈사무를 찾아 그들을 괴 멸시키기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만 한다. 그 와중에서 내가 죽을 수 도 있고……, 흑란까지 책임질 여유 는 없다." "……!"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부지런히 실력을 쌓아 혈사무를 무너뜨린 후 흑란을 구해 가도록 하 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각별히 오늘 들어온 청년을 조심해라. 놈의 눈빛은 마치 야수처럼 번뜩이고 있 어,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놈이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성격이 강직해 보여 죄를 지을 사람 같지가 않더구나. 그런 그가 이곳에 잡혀 왔 다는 것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는 것 이 분명하다. 하여튼 그 아이를 유념 해 살펴보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관해영은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 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다 깊은 의혹을 느꼈다. '두진성은 무림의 기인이었군. 헌 데 건청이십팔절이 무엇이기에 이곳 에 스스로 잡혀 와 수련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혈사무라니……,'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달빛이 흘러 들었다. 통로는 밖으로 연결되어 있 었던 것이다. 슈우우 우우―. 두 사람의 신형이 별빛 흐르는 어 둠 속으로 신형을 쏘아 갔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로 유성이 흐르는 것같이 눈부시도록 빠른 속도였다. 절정의 경공술로 펼치고 있는 두 사람. 과연 그들은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일까? 맘年?.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2 장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교탈십팔도결 1)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교탈십팔도결(巧奪十八刀訣) 1. 며칠이 지났다. 관해영은 그동안 두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알아내었다. 첫 번째 그들은 매일 자시(子時)가 넘어서야 비밀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 간다는 것. 두 번째는 무공을 수련하는 곳이 채석장(採石場) 뒤편의 높은 절벽이 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두 사람 이 언제나 한식경 후에 다시 석옥 안 으로 돌아온다는 것 등이었다. 이런 것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맴돌 듯 일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채석장(採石場). 그곳은 천연의 절벽으로 에워싸인 분지를 지나 동쪽으로 약 삼십 마장 쯤의 거리에 자리해 있었다. 온통 흑오석(黑烏石)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야산(野山)으로 반 이상이나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고, 그 뒤편에 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산 하나가 구름 을 뚫고 우뚝 솟아 있었다. 지옥귀사역의 일은 바로 이 채석장 에서 흑오석을 캐내는 일이었다. 이것은 마치 커다란 두부판에서 칼 로 두부를 모양 있게 오려 내는 일과 같아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채취도 어려운 일이지만 건축물에 사용할 수 있게끔 돌을 다듬는 일 만 큼 어려운 중노동도 없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려쪼이는 오후. 쩡― 쩡―. 채석장에는 정을 치는 망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콰아아앙! 그러다가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터지며 지진이라도 만난 듯 땅이 미 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와르르르 이어서 자욱한 먼지가 구름처럼 피 어오르며 산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무너진 돌 덩이를 향해 백여 명이 넘는 죄수들 이 보다 좋은 돌을 고르기 위해 벌떼 처럼 달려들었다. 죄인들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는 다섯 명의 감시관들. 그들은 하나같이 긴 채찍을 들고 있었으며 그 중 우람한 체격의 얼굴 에 무수한 칼자국이 나 있는 장한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 다. "각 조는 이십 개씩의 돌을 다듬어 야 한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자에 게는 채찍이 백 대에다 저녁은 국물 도 없다." "……!" 죄수들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것은 하루에도 열두 번 이 상 듣는 것이었으며 또한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는 자신들에게 직접 적으로 가해지는 형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해영은 망치로 돌을 다듬는 한편 두진성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쩡! 쩡! 두진성은 정과 망치를 이용하여 돌 을 다듬고 있었는데 그의 손놀림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을 만 큼 빨랐다. 또한 그가 돌을 다듬는 방법은 괴 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돌을 사면이 평평하게 다듬 어야지만 되는 이 작업을 그는 마치 면도날로 무를 자르듯이 하고 있었 다. 그가 한 번 망치질을 할 때마다 그 단단한 흑오석이 쫙쫙 갈라지며 대패로 민 나무처럼 편편해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그의 손놀림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오성이 지극히 뛰어난 관해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껴 치고, 높여 치고, 그런가 하 면 정면으로 내려친다. 며칠간 지켜 보았지만 저건 분명히 무공의 일종이 다.' 관해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두진성과 똑같은 방법으로 망 치를 내리쳤다. '윽!' 순간, 관해영은 손목이 부러져 나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보기보다는 쉽지 않군. 고스란히 흉내를 냈는 데도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것은 한 가지 동작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다는 것!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자.' 그는 심각한 안색으로 두진성의 손 동작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팍! 그때, 하나의 채찍이 관해영의 등 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이었다. "요령을 피울 생각이냐?" 칼칼한 목소리는 얼굴에 무수한 칼 자국이 나 있는 감시관이었다. 관해영이 망치를 집어들며 투덜거 렸다. "빌어먹을, 조금도 쉴 여유를 안 주는군." "너 지금 뭐라고 중얼거렸느냐?" "손에 땀이 나니까 망치가 미끄러 져 당신 머리통을 깨뜨려 놓을지 모 른다고 했소." 감시관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 솟아 올랐다. "반항하는 것이냐?" "반항은 나는 단지 당신의 머리통 을 깨부수지 않기 위해서 손의 땀을 닦고 있을 뿐인데." 관해영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심사가 뒤틀리면 정말 망치 로 감시관의 머리통을 내리치겠다는 은근한 협박이 깃들여 있는 웃음이었 다. 감시관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 들었 다. '단 한번도 고분고분하지 않는군. 이젠 때리기에도 지쳐 이만한 정도는 우리가 참을 수밖에 없다.' '지난 며칠간 기를 죽이려고 수없 이 때려 보았지만 그때마다 놈은 한 시진만에 말짱히 회복하곤 했다. 괴 물……, 진절머리가 나는 놈이다.' 장한은 고개를 흔들며 관해영의 앞 을 스쳐 지나갔다. 관해영이 고소를 머금으며 완성된 흑오석 두 개를 양쪽 어깨에다 걸쳐 메었다. 두 사람이 간신히 하나를 들 수 있는 흑오석을 그는 두 개씩이나 걸쳐 메었던 것이다. 관해영의 신형 이 곧 넘어질 듯이 휘청거렸다. 감시 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만 가져 가라. 깔려 죽은 것 은 상관없지만 노동력의 손실이 온단 말이다." "걱정 마시오. 나는 일찍 죽고 싶 은 마음은 없으니까. 다만 공손노인 의 몫을 내가 대신 한다고 생각하고 좀 쉬게 하시오." 기실 공손중명과 장일비가 한 조가 되어 흑오석을 나르고 있으나 공손중 명은 힘에 부쳐 연신 비틀거리고 있 었다. 며칠만 이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가 는 골병이 들어 죽을 형편이었다. "빨리빨리 날라라!" 그때마다 감시관의 채찍이 여지없 이 두 사람의 전신을 후려쳤다. 공손중명이 제대로 힘을 못 쓰자 죽어나는 것은 장일비였다. 감시관의 목소리가 냉혹하게 흘러 나왔다. "이곳에서 예외는 없다. 네가 두 배의 일을 하든 말든 저들은 반드시 작업량을 채워야 한다. 이것은 죗값 이다." 관해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조금만 더 참자. 언젠가는 이 흑오석으로 네놈의 몸뚱이를 납작 하게 만들어 주고 이곳을 떠날 테니 까.'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서가 는 동현곡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흑오석 두 개를 나르는 인물이었다. 동현곡의 뒤를 따르던 관해영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반짝거렸다. '이것 봐라?' 그의 시선이 동현곡의 발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면(地面). 땅이 물러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 자국이 남아 있으나 동현곡의 발자국 은 남들보다 두 배 이상이나 깊이 패 이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그가 대리 석 두 개를 짊어지고 있다는 이유 때 문만은 아니었다. '동현곡도 대리석을 나르면서 무슨 무공인가를 연성하고 있다. 그것은 땅에 패이는 발자국들이 뚜렷할 뿐 아니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 관해영은 동현곡을 유심히 관찰하 는 동안 하나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 었다. 그것은 동현곡이 남들처럼 어깨로 돌을 나르지 않고 한 손에 하나씩 치 켜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관해영은 자신도 그렇게 해보았다. 그러자 관절이 떨어져 나가는 듯이 아파 오며 허리가 심하게 휘청거리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은 하마터면 돌 을 떨어뜨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버티 어 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이 자세는 대리석을 나 르는 데 제일 힘든 자세다. 어떻게 해야 대리석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 단 말인가?' 그는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동현곡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관해영은 또다른 사실 하나 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현곡의 호흡이 보통 사람 들과 판이하게 틀리다는 점이었다. 마치 심호흡을 하고 있는 듯한 그 의 숨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긴 휘파 람 소리와도 같았다. 관해영은 동현 곡과 똑같은 숨을 내쉬었으나 고통은 점점 더 심해 올 뿐이었다. 관해영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흑오석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 동현곡이 빙글 돌아서며 조 소를 터뜨렸다. "하하! 관해영,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벌써부터 관해영이 자신을 따 라오는 것을 느끼고 내심 감탄을 금 치 못했으나 관해영이 중간에서 돌을 내려놓자 네까짓 놈이 하는 식으로 마음껏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관해영은 불끈 오기가 치솟아 올랐 다. '네가 하는 데 나라고 못할 것은 없다.' 그가 내심 이빨을 갈 때였다. 동현곡은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흑오석을 허공으로 던졌다 사뿐 받아 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무림 일 류 고수들조차도 흉내내지 못하는 위 험천만한 것이었으나 그는 마치 한 장의 가랑잎을 받아 내는 것과도 같 이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헌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흑오석 이 동현곡의 손에서 반 치나 둥실 떠 있다는 것이었다. 관해영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 졌다. '이제 보니 동현곡은 힘이 아닌 진 기를 이용하여 대리석을 나르고 있었 구나. 그렇다면 그의 자세는 내공을 증진시키는 방법이란 말인가?' 관해영의 얼굴에 강렬한 결심이 어 렸다. '내공심법을 모르는 이상 동현곡을 흉내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렇 다면 무슨 수를 쓰든 내공구결을 알 아내야 한다.' '탈출을 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배 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워야 한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강해져 야 할 필요가 있다.' 창 끝?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2 장 (어깨 너머로 훔쳐 배운 교탈십팔도결 2) 2. 밤〔夜〕! 창 틈으로 달빛이 흘러드는 자시 무렵. 부스스―. 두진성과 동현곡은 어김없이 자리 에서 일어나 비밀통로를 빠져나갔다. 관해영이 잽싸게 일어나 그들을 따 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하수가 하 얗게 부서져 내리는 비밀통로의 끝에 서 두 사람의 신형은 마치 독수리처 럼 허공을 날아 사라지고 있었다. 관해영은 멍청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 감히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동현곡을 따라 잡으려면 두진성이 동현곡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을 들 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경 공술을 익히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관해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라질 때 취했 던 자세로 신형을 날렸다. 쿠웅! 순간, 관해영의 신형은 맥없이 지 면으로 거꾸로 처박히는 것이었다. '제길, 생각보다는 어렵군.' 관해영이 반복해서 똑같은 자세를 취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지면에 거꾸로 처박힐 때였다.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것인가?"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동굴 안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 다. 관해영의 전신이 흠칫 굳어 들었 다. '낭패다. 대체 누가 내 뒤를 따라 온 것일까?' 그는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인물 을 바라보다 또 한번 흠칫했다. 그는 바로 장일비였기 때문이었다. '매일 저녁 남들보다 일찍 잠자리 에 드는 줄 알았는데……. 관해영이 의혹 어린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장일비를 바라보았다. 장일비가 신비로운 웃음을 머금었 다.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지 말게. 난 자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 지 지켜보고 있었네." 그제서야 관해영이 멋쩍은 듯이 웃 음을 흘렸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리 흉내를 내도 법칙을 모르면 소용없는 법인데……." 장일비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가 않네. 내 비록 도 둑이지만 그 분야에서는 천하 제일이 라는 소리를 듣고 있네. 그렇지만 내 가 제일 처음 투도술을 배운 사람은 우습게도 삼류 도둑이었네." "……!" "그 후 나는 스스로 투도술을 창안 해 냈다네. 끊임없이 남들의 기술을 훔쳐 배우고 또 나름대로 변형도 하 며……,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실패가 많았는지 자네는 상상할 수도 없을 걸세.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기초적인 투도술을 익히려고 꼬박 일 년이 걸린 적도 있다네." 이렇게 말한 그는 품속을 뒤져 한 권의 비급을 건네주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공비급이라네." "무공비급……?" 관해영은 뛸 듯이 기쁜 얼굴로 책 자를 살펴보았다. 달빛 아래 핏빛도 선연한 글씨가 춤이라도 출 듯이 너울거리고 있었 다. 섬극탄월비(閃極彈月飛)! 그것은 바로 경신법(輕身法)으로서 극쾌(極快)의 빠름은 허공에 뜬 달을 앞지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달은 항상 자신의 앞에 있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섬극탄월비 는 그야말로 개세적인 무공비급이었 던 것이다. 관해영이 가까스로 마음 을 진정시키고 장일비를 바라보았다. "무공비급은 무림인에게 어떤 보물 보다도 소중하다던데, 이걸 왜……?" 장일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투도술에 필요할까 해서 뒤져보니 투도술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 내용이 었네. 나에게는 휴지나 마찬가지지." "그러나 이유 없이 받을 수는 없습 니다." "난 이곳에 들어왔을 때 극도의 절 망감을 맛보았지만 자네를 봄으로써 활기를 얻었네. 난 이곳을 나가는 순 간까지 내 투도술을 고금 제일로 만 들 것이네." 장일비의 얼굴에 지극히 온화한 미 소가 번져 올랐다. 그것은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 듯 나중에는 그의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자네가 이곳을 나간 후 나를 구해 주면 되네. 난 자네가 반드시 이곳을 탈출하고 내가 생각하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네." 장일비가 생각하고 있는 인물, 과 연 그것은 어떠한 형태의 인간인가? 관해영이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추측이 빗나간다면 돌아오는 것은 허무뿐입니다." 장일비가 공허로운 시선으로 빈 하 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패기 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도 더 빨리 사라지고 그는 담담한 목소 리로 말했다. "도박이란 어차피 승률이 희박한 것이네. 그러나 난 이번 도박에 확실 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네. 어떤가,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는가?" 관해영이 잠시 망설이다 승낙했다. "맹세는 맹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장일비가 쾌히 웃었다. "핫핫! 승낙할 줄 알았네. 자, 그럼 이것도 받게." 그는 다시 품 속에서 두 권의 책자 와 하나의 푸른 옥병을 건네주었다. 관해영은 그의 품속에서 이토록 많 은 물건이 나온다는 것에 새삼 놀라 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만약 장일비가 숨기고자 한다면 그 의 몸 속에는 태산이라도 숨길 수 있 다는 것을……. "좀 전의 비급은 자네의 노력이 안 타까워서 그냥 주려고 한 것이네. 그 러나 지금 것은 계약을 맺은 사이이 니 투자를 하는 것이네." "헌데 무공비급은 그렇다치고 이 옥병은……?" "그것은 만년설련실(萬年雪蓮實)의 즙이라네.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체력 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숨겨 두었던 것이네. 이젠 자네만 기다리면 되니 필요가 없는 것이지." 만년설련실! 이것은 그야말로 지고 무상한 약초 로써 무림인들이 꿈에서도 갈구하는 영초인 것이다. 한 뿌리에 무려 내공 이 이 갑자나 증진된다는 희대의 기 약. 그러나 관해영은 만년설련실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기에 그 효과에 대 해서는 별반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장일비의 마음씀이 고마 울 뿐이었다. "너무 과분한 것 같습니다." 장일비가 당치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도박에서는 투자를 많이 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은 법이니까 부담 갖지 말게. 그리고 자네에게 한 마디만 일러 주고 싶은 말이 있네." "……!" "가장 뛰어나고 가장 강한 고수가 되려면 스스로의 무공을 만들어야 한 다는 것일세. 자네가 그 세 권의 무 공비급을 아무리 완벽하게 익힌다 해 도 자넨 언제까지나 제 이인자에 불 과하네. 자기의 무공, 등세욱은 그래 서 무림 제일인자가 된 것이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 다. "그 분을 보았습니까?" 장일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부잣집을 털고 산 속으로 줄 행랑을 놓은 일이 있네. 그 산 속에 서 나는 그가 목검으로 거대한 산을 베는 것을 보았네. 그것은 환영이었 지만 그는 분명 산을 베어 넘긴 것 이네. 난 아직까지 그 엄청난 충격을 기억하고 있네." 관해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사운악의 스승 등세욱. ……과연 내가 그를 능가할 무공을 익힐 수가 있을까?' 관해영은 암담한 심정이었으나 지 그시 이빨을 악물었다. '한다. 내가 해야지만 난 내 말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주련! 살아만 있어라. 관해영은 악몽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 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얼음보다도 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원류를 창조하리라. 사운 악의 스승보다도 강한…….' 그것은 한 인간의 불타는 집념이었 다. 潔駭?.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3 장 (사대벌왕의 암투 1) 사대벌왕(四大罰王)의 암투(暗鬪) 1. 태양은 채석장을 열탕지옥으로 만 들어 놓고 있었다. "으아아악!" "끄아악!"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소리가 시뻘건 염천(炎天)을 뒤흔들었다. 흑오석을 나르던 이인 일조가 그만 돌 밑에 려 즉사한 것이다. 깔 죄수 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돌 밑에 깔려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형태를 알아볼 길조차 없이 피떡이 되어 있 었던 것이다. 쫘악! 쫙! 채찍이 죄수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어서 작업을 시작해!" "사람 죽는 거 처음 봐? 이것들 아!" 구경꾼들이 침울한 얼굴로 돌아서 자 감시관은 이내 이맛살을 찌푸렸 다. "젠장! 손수 또 피를 묻히게 생겼 는데……." "할 수 없지. 산에다 갖다 버려 늑 대 밥이나 만들어야지. 어서 치우기 나 하세." 쩌엉― 엉―. 죄수들은 울분을 토해내기라도 하 듯 망치질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관해영 역시 비지땀을 흘리며 흑오 석을 다듬고 있었다. 헌데, 그의 망치질에 따라 그 단단 하던 흑오석이 도끼로 장작을 후려패 듯이 쫙쫙 갈라져 나가는 것이 아닌 가? 물론 두진성과 비교해 많은 차이가 있었으나 거의 유사하기 이를 데 없 었다. 그것은 요 몇 주일 사이 장일 비가 건네준 세 권의 비급을 관해영 나름대로 소화시킨 데다가 만년설련 실의 약효를 융합시킨 결과였다. 쾅! 쾅! 치렁치렁한 흑발 사이로 관해영의 두 눈은 야수처럼 번뜩거리고 있었 다. '두진성의 수법은 하나의 검결이 다. 그것도 극상승의…….' 관해영을 바라보는 두진성의 얼굴 에는 극도의 경악이 일고 있었다. '저 놈! 교탈십팔도결(巧奪十八刀 訣)을 어깨 너머로 배우다니……. 일 주일 전부터 교탈십팔도결의 원리를 깨우쳐 지금은 칠성(七成)을 터득하 고 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이토록 오성이 뛰어 난 인물을 보지 못했으며, 채 한 달 도 되지 못해 자신의 교탈십팔도결을 어깨 너머로 배울 인물이라고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교탈십 팔도결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흑오석을 다듬는 자신이 아니었던 가? 그 때문에 그의 종래의 교탈십 팔도결은 여느 때보다 몇십 배나 빠 르고 강해졌던 것이다. 두진성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우스운 일이군. 잘못하다가는 저 아이가 나보다 더 빠른 시간에 더 높 은 경지에 도달하겠군. 그렇다고 훔 쳐 배우는 것을 말릴 수도 없는 것……. 다른 무공은 밤에 몰래 연성 하니 교탈십팔도결 외에는 내 무공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허나, 그가 만일 매일 밤 관해영이 그의 뒤를 따라 무공을 훔쳐보았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르긴 해도 그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졸도할 것이 분명하다. 관해영은 망치질을 멈추었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작업 목표를 빨리 채워야 한다.' 그는 곧 양어깨 위에다가 두 개씩 의 흑오석을 올려놓고 걸음을 떼어놓 았다. "저, 저것……." "위험하다!" 주위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죄수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지옥귀 사역이 생긴 이래 이것은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관해영은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다가도 묘하게 앞으로 나아 가고 있었다. "……!" 장내의 인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관해영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들은 곧 일어날 어떤 참사에 불안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관해영 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일비가 준 태허철권(太虛鐵卷) 에 의해 나는 내공의 기초를 모두 익 혔다. 그 결과 나는 태극육합일주공 (太極六合一週功)이 초상승의 내공이 며, 그 효용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극육합일주 공을 전해 준 그 노인은 누구였을 까?' 그는 막연하게나마 노인이 엄청난 신분 내력을 가지고 있음을 추측했 다. '몸을 혹사하며 내공을 익히면 운 기조식을 하는 것보다 배나 빠른 내 공의 증진을 얻을 수 있다. 동현곡이 힘들게 일하는 것은 분명 그런 연유 때문이다. 내가 태극육합일주공을 운 용하여 일을 하면 얼마 안 가서 동현 곡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관해영은 네 개의 대리석이 어깨를 누르자 몸이 가루가 될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태극육합일주공을 운용 하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동현곡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보 같은 놈! 저러다가 쓰러질 텐데……?' 그는 관해영이 내공을 운용하고 있 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의 염려와는 달리 관해영 은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줄기차게 앞 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운악! 네놈의 심장을 꺼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관해영의 전신에 땀이 비오듯이 흘 러내렸다. 그럴수록 흑발에 가려진 그의 두 눈은 용광로처럼 무섭게 타오르고 있 었다. '주련! 살아만 있어다오.' 관해영은 이빨을 으스러져라 깨물 고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태극육합일주공이 네 개의 무게에 대항이라도 하려는 듯이 끝없이 솟아올라 사지백해로 노도처 럼 밀려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태극육합일주공의 제 일단 계. 즉 외부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잠재되어 있는 태극육합일주공은 용 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것이다. 관해영은 일성의 묘리를 터득한 것 이다. 문득, 관해영은 엄청난 힘이 혈 관을 타고 용솟음쳐 오르는 것을 느 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는 네 개의 흑오석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얼음보 다 차가운 미소가 번져 올랐다. '흐흐흐, 사운악! 네놈의 가슴에 검 을 꽂을 날도 멀지 않았다.' 복수! 그것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관해영 이 지켜야 할 맹세였다. 이윽고 관해영이 네 개의 대리석을 감시관들 앞에 내려놓으면서 손을 툭 툭 털었다. "이게 오십 개째요." 그때까지 놀란 얼굴로 굳어 있던 감시관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무슨 뜻이냐?" "목표량을 채웠으니 이제 쉬겠다는 말이요." 순간, 감시관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졌다. "안 돼! 작업시간은 엄수 해야 한다." 관해영이 툴툴 웃었다. "훗, 웃기는군! 예전에는 작업시간 이 넘어도 목표량을 채워야 한다더니 오늘은 시간을 핑계대는 것인가?" "말이 많다, 시키는 대로 해라." "난 그렇게는 못한다. 오늘은 이만 끝내야겠다." "말썽을 부릴 셈이냐? 명령에 불복 종하면 어떻게 되는지 네 놈이 더 잘 알 텐데?" 스파악! 관해영의 두 눈에서 낚시바늘보다 더 날카로운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감시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 춤거리며 물러섰다. "이, 이 놈! 반항하겠다는 것이냐?" 그는 관해영이 한꺼번에 네 개의 흑오석을 짊어지고 온 데다가 야수와 같은 눈빛을 보이자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관해영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 왔다. "아이들 장난 같은 형벌로 나를 겁 줄 생각은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한 그는 곧 하늘을 꿰뚫 을 것같이 산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었다. 감시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라! 작업장에서 이탈하면 탈출 로 간주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관해영이 소리쳤다.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강한…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3 장 (사대벌왕의 암투 2) 2. 태고의 신비가 깔려 있는 산. 자욱한 운무가 귀신의 입김처럼 흐 느적거리고 있었고, 대낮인데도 승복 빛 어둠이 깔려 있었다. 산세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하늘을 가리고 있는 노송에는 푸른 이끼가 천 년을 쌓여 있었고, 그 사 이로 햇빛이 조각난 바늘 끝처럼 비 쳐 들고 있었다. 관해영은 덤불을 헤 치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태허철권의 끝부분에는 병을 치료 하는 요상법(療傷法)이 적혀 있었다. 장노인의 병을 치료하자면 몇 가지 약초가 필요하다.' 관해영이 커다란 바위 하나를 타넘 을 때였다. "으악!" 갑자기 산등성이 위에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이 터져나오는 것 이 아닌가? 관해영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일었 다. '이곳에는 죄수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인데 무슨 비명소리일까?' 그는 산등성이 위로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슈욱! 그의 몸이 물찬 제비와도 같이 나 무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흐르며 순식 간에 산등성이 위에 도착했다.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둠침 침한 골짜기. 낙엽이 한 자나 쌓여 있고 허연 장 독( 毒)이 망자의 넋처럼 흐늘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골짜기 깊숙한 괴석(怪石)과 칡넝쿨로 가려 져 있는 동굴 하나가 음침하게 뚫려 있었다. 헌데, 동굴 앞에는 한 사람이 가슴 이 갈라진 채 시뻘건 피를 쏟아 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세 사람이 팽팽히 대치해 있었다. 한 사람은 중년문사 차림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지독히 도 사악한 얼굴에 시뻘건 혈의장포를 걸치고 있는 노인들이었다. 바위 뒤 에 숨어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관해영은 중년문사의 미간에 나 있는 붉은 사마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 지 않는 지옥귀사역의 역주(域主)인 곽붕위가 아닌가?' 곽붕위! 냉철한 판단력과 면도날 같은 이성 으로 지옥귀사역이 생간 이래 단 한 명의 탈출자도 허용하지 않은 냉철한 인간. 그는 피는 얼음보다 차갑고 그의 무공에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 었다. 바늘 끝만한 허점이라도 보인다면 그의 검은 가장 독랄한 방법으로 상 대의 가스에 바람구멍을 뚫어 버린 다. 곽붕위의 얼굴은 푸르스름한 기운 이 깔려 있었다. "파사철부(破邪鐵府)의 놈들은 꽤 나 귀찮군. 아직도 겁천혈괴군을 포 기하지 않다니!" 그럼 이 두 명의 인물들은 파사철 부의 사람들이란 말인가? 파사철부(破邪鐵府)! 사대벌왕의 서금벌왕(西金罰王) 뇌 영무제(雷影武帝) 동방백인(東方伯 仁)이 거느리는 불멸의 세력. 끊어져 가는 정도의 일맥을 일으키 고 모든 악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마천루(摩天樓). 그들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사람을 풀어 겁천혈괴군( 天血怪君)이라는 인물을 찾고 있는 것인가? 겁천혈괴군( 天血怪君)! 고금 제일로 불리는 강호오패(江湖 五覇)의 일인. 그의 무공은 가히 입선지경(入仙之 境)에 이르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였다. 만약 마황천자 등세욱만 아니었다 면 그는 천하 제일이라고 불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강장오패의 나 머지 인물들 역시 대동소이한 것은 사실이었다. 혈의 장포를 걸치고 있는 두 명의 인물, 그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 사람은 대나무처럼 키가 껑충한 데 비해 다른 한 노인은 오뉴월 땡볕 에 기갈 들린 콩 잎사귀처럼 그 키가 불과 오척(五尺)에도 미치지 못했다. 두 노인 모두가 눈이 작고 입술이 얄팍해 그지없이 악독해 보였다. 키 큰 노인이 음침한 목소리를 토 해냈다. "천면수라(千面修羅) 역이행(易二 行)! 북수벌왕(北水罰王)의 밑으로 들 어가더니 실력이 늘었군. 예전 같았 으면 우리를 보고 도망가기가 바빴을 텐데." 천면수라 역이행이라니? 그럼 곽붕위는 가짜란 말인가? 그리고 사대벌왕 중의 북수벌왕 밑 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역이행의 얼굴에 언뜻 살기가 번졌 다. "오악삼살(五嶽三煞)! 지난 일을 끄집어 낼 필요는 없다. 현재가 중요 하니까!" 오악삼살. 그리고 천면수라 역이행. 이들은 모두 흉명(兇名)을 떨치던 마두들로서 사대벌왕에게 잡혀 지하 뇌옥에 갇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히려 이들이 사대벌왕의 부하들이라니? 역이행의 얼굴에 드리워진 푸른 기 운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메마른 삭풍(朔風)같 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보를 뺀 나머지 사대벌왕에서 많은 자들이 이곳으로 파견해 겁천혈 괴군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지만 아직 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아무도 없었 다. 너희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추혼단살(追魂斷煞) 적성(赤成)이 라는 호(號)와 이름을 가지고 있는 키 큰 노인의 두 눈에서 흉폭한 살광 이 쏟아져 나왔다. "흐흐……, 그 동안 잘도 남의 이 목을 속이고 이곳에다 겁천혈괴군을 숨겨 두었지만 우리에게 발각된 이상 그의 독점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역이행의 얼굴에 가벼운 경악이 일 었다. "그럼 너희들은 이미 파사철부로 연락을 보냈단 말이냐?" 색혼왜살, 혁수기(赫秀奇), 키 작은 노인의 입에서 쇠젓가락 부러지는 듯 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이다. 이곳을 발견하는 즉시 우리는 전서구를 띄웠다." 역이행의 안면이 파르르 경련을 일 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 다 더 빨리 사라지고 대신 음침한 미 소를 흘리는 것이었다. "흐흐……, 누굴 바보로 아느냐? 네놈들이 동굴 안에서 나올 때 나는 이미 도착했다. 그런데 언제 전서구 를 보낼 시간이 있던 말이냐?"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살혼왜살 혁수기의 단호한 말에 역 이행은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음! 사대벌왕들은 서로 상대의 구 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했으니 이곳에 나타나지는 않겠지만 그 밑의 일류 고수들이 나타나면 나도 견딜 재간이 없다. 빨리 이 놈들을 없애고 겁천혈 괴군에게서 모용벽경(慕容碧瓊)의 행 방을 알아낸 후 보주(堡主)에게로 가 야겠다.) 모용벽경(慕容碧瓊)! 언젠가 등세옥의 입에서도 흘러나 온 이 이름, 과연 그녀는 어떤 여인 인가? 슈아아아 아앙. 순간, 오악삼살이 비호처럼 신형을 날려 달아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결코 역이행의 상대가 될 수 없 음을 깨달은 것이다. 오악삼살의 모 습은 얼마나 빠른지 한 자나 쌓여 있 던 낙엽이 긴 꼬리를 물고 십여 장이 나 뻗어 있었다. "이제 보니 날 기만했군. 서랏!" 역이행이 노갈을 터뜨리며 탄환처 럼 오악삼살의 뒤를 쫓아 신형을 날 렸다. 쐐애애애애액! 찢어지는 바람 소리가 주위를 폭풍 이 몰아치듯이 뒤집어 놓았다. 역이 행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 다. 관해영이 바위 틈에서 살며시 몸 을 일으켜 동굴 가까이로 다가갔다. 저 동굴 안에 겁천혈괴군이란 인물 이 있단 말인가? 그는 잔뜩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동굴 안은 시커먼 어둠이 한 치 앞 도 바라볼 수 없을 만큼 깔려 있었 다. 관해영은 두 손을 더듬거리며 앞으 로 나아갔다. '좀 전에 들으니 곽붕위는 역이행 이란 자가 변장한 것 같은데……. 그 렇다면 역이행은 지옥귀사역이 남들 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적격지라고 생각하고 겁천혈괴군이란 자를 숨기 기 위해 곽붕위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점점 더 겁천혈괴군이란 자에 게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겁천혈괴군이란 사람은 어떠 한 내력을 가지고 있기에 역이행이 애써 감추려 하고 있고 남들은 악착 같이 그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일 까?' 관해영은 동굴 안으로 들어갈수록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고 몸을 떨었 다. 비록 태극육합일주공의 도리를 깨 우쳤다고는 하나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그는 갈수록 심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토 록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 는 것일까?' 관해영은 차츰 어둠에 익숙해져 가 고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더듬지 않고도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무렵, 무심코 앞으로 바라보던 관해영은 하 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 릴 뻔했다. 그의 앞 두 개의 녹광이 이글거리 며 관해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 시퍼런 녹광은 상대의 심장이라 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엄청난 살기 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어 으스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크흐흐……, 역이행. 노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생각은 마라. 네놈 의 상전인 벽력마도 낭초민(霹靂魔刀 浪超民)이 와도 마찬가지다. 오려거 든 등세욱이 직접 오라고 해라." 관해영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등세욱이라면 사운악의 사부가 아 닌가? 그가 낭초민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관해영이 대담하게 앞으로 나갔다. "나는 역이행이 아니오." 순간 어둠 속의 인물이 의외인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 이 지났을 때 예의 으스스한 목소리 가 흘러나왔다. "넌 누구냐?" 관해영은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 지 않아 예의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 다. "난 이곳 귀사역의 조수요." "넌 이곳을 어떻게 왔느냐? 역이행 의 말을 들으니 누구도 접근을 할 수 없다는데?"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되었소. 역이 행은 파사철부의 인물들을 쫓아가 지 금 이곳을 잠시 비웠소." "흠―, 좀 전에 세 놈이 기웃거리 더니 역이행이 쫓아간 자들인 모양이 군. 예전에도 그런 경우가 몇 번 있 었지." "……!" "헌데 파사철부란 이름은 처음 듣 는군. 그 놈들이 무엇 때문에 날 찾 는단 말인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다만 그 들은 서로 알고 있었고 이곳에 온 자 들은 오악삼살이라고 했소." "흠! 그래. 하여간 넌 이리로 가까 이 와 봐라." 관해영은 잠시 주춤하다가 어둠 속 으로 다가갔다. 순간 그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바로 앞, 그곳은 동굴의 끝 이었고 나이를 알아볼 수 없는 한 명 의 노인이 석벽에 묶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리까지 내려온 치렁치렁한 백발 (白髮), 겨우 치부만 가린 그의 전신 은 모진 고문을 받은 듯 흉측한 상처 투성이었다. 얼굴 역시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 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몰 골이었다. 더군다나 완맥과 비파골을 뚫고 벽 에 박혀 있는 것은 설산한철(雪山寒 鐵)이었다. 냉기는 바로 설산한철에 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 다. 문득 괴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흐흐……, 몇 년만에 역이행 외 의 사람을 보니 그 기분도 괜찮군." 관해영은 노인의 몰골이 측은해 약 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곳에서 얼마나 있었소?" 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잘은 몰라도 족히 십팔 년은 넘었을 것이다. 그 동안 본 사 람이라고는 낭초민과 역이행밖에 없 었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4 장 (겁천혈괴군과 결의형제 1) 겁천혈괴군( 天血怪君) 과 결의형제(結義兄弟) 1. 관해영이 물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당신을 이곳 에다 가두어 놓았다고 생각하시오?" 그는 거침없이 겁천혈괴군을 당신 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겁천혈괴군은 관해영이 자 신을 어떻게 부르던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흐흐……." 겁천혈괴군이 괴상한 웃음을 흘렸 다. 그것은 지독히도 자조적인가 하 면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었 다. 관해영은 그 같은 웃음을 사도흑 란에게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괴상한 사람들은 전부 다 웃음소 리가 이런가?'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 겁천혈 괴군이 심중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 리를 토해냈다. "그 놈들은 나에게 한 사람의 행방 을 대라고 지난 세월을 괴롭혀 온 것 이다. . 관해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그토 록 핍박했다는 말이오." 순간, 겁천혈괴군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침울하게 굳어 들었다. "세상일이란 남들 눈에는 하찮게 보여도 어떤 인물에게는 굉장히 중요 하게 보일 수도 있다. 등세욱이 그 여인의 행방을 알려고 하는 것은 그 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 요한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의 명예 도 생각지 않고 이토록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겠지." 관해영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마황천자 등세욱이라면 마절궁의 궁주……, 그가 이번 일과 무슨 연관 이 있단 말이오?" 겁천혈괴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렇다, 등세욱이 이번 일과 연관 이 있는 것은 벽력마도 낭초민이 등 세욱의 수하이기 때문이다. 낭초민이 나를 핍박하는 것은 분명 등세욱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십팔 년 동안 동굴 속에서만 살아 온 사람치고는 그의 생각은 논리정연 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관해영 의 의혹은 갈수록 깊어 갔다. '어찌된 일일까? 등세욱은 마도의 인물이고 낭초민은 사대벌왕의 한 사 람으로서 정도를 표방하고 있는 데……. 더구나 낭초민이 등세욱의 수하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관해영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 다. "제가 듣기에는 마절궁은 십오 년 전에 홀연 몰락하고, 그 뒤를 이어 사대벌왕이란 자들이 마절궁이 이룩 한 마도천하를 전멸시켰으며 천하의 악인들을 응징하기 시작했습니다. 비 록 우연찮게 낭초민이 이번 일에 끼 여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등세욱 과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겁천혈괴군의 전신이 엄청난 경악 으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마절궁이 몰락했다는 말이냐?" 관해영은 그의 천둥 같은 목소리에 고막이 웅웅거리고 기혈이 걷잡을 수 없이 뒤틀렸다. 그는 급히 내력을 운 용해 뒤끓는 기혈을 진정시킨 다음 말문을 열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오. 그렇 기에 아직까지 불가사의한 신비로 남 아 있는 것이오." "으음!" 겁천혈괴군이 무거운 침음성을 터 뜨리며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관해영 역시 깊은 생각을 하고 있 었다. '이 사람은 마절궁이 몰락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않는군. 그렇다면 등세욱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겁천혈괴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천하에서 등세욱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절궁이 몰락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음흉 한 놈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무엇인가 확신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세인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등세욱 에게는 사대신장(四大神將)이라는 수 하들이 있다. 낭초민 역시 그 사대신 장의 일 인이었다. 나를 비롯한 강호 오패는 등세욱을 만나러 마절궁에 몇 번 잠입하다가 사대신장과 겨루어 본 일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있 다." 관해영은 겁천혈괴군이 이토록 상 세히 얘기하자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관해영에게는 새로운 사실이었으며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 었다. "혹시 사대신장이 등세욱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요?" 관해영이 조심스럽게 물어 보자 겁 천혈괴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놈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 다. 천하의 효웅(梟雄)인 면을 지니 고 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는 졸장부들이지." '그렇다면 마절궁이 어떻게 무너질 수가 있단 말인가?' 관해영은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 로 빠져들었다. '정말 마절궁의 몰락과 사대벌왕의 등장은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란 말 인가?' 겁천혈괴군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어떤 개 수작이든 간에 등세욱만 꺾으면 되니 까." 관해영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등세욱은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 금무적이 아니오?" 순간, 겁천혈괴군은 버럭 노갈을 터뜨렸다. "누가 그를 꺾을 수 없다고 하느 냐? 이 맹환(孟幻)이 그를 꺾을 것이 다." "……!" 관해영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입장 이었다. '꼼짝도 못하는 신세면서 큰소리는 대단하군.' 겁천혈괴군이 관해영의 마음을 꿰 뚫어보기라도 할 듯이 낚시바늘 같은 눈길로 쏘아보았다. "꼬마야! 나를 비웃지 마라. 내 비 록 등세욱에게는 일곱 번 도전해 일 곱 번 모두 패했지만 누가 뭐래도 당 금에서 그를 꺾을 자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안 되겠다. 노인의 망상을 확실하 게 깨뜨려 놓아야지. 그렇지 않았다 가는…….' 관해영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토 해냈다. "당신은 등세욱을 꺾기 전에 또 한 사람을 꺾어야 할 것이오." 겁천혈괴군 맹환의 두 눈이 휘둥그 래졌다. "누굴 말하는 것이냐? 강호오패의 만상천사(萬相天邪) 사군휘(謝君輝) 말이냐?" "난 사군휘가 누군지 모르오. 내가 말하는 인물은 당신을 이곳에다가 가 둔 인물이오." 순간, 맹환이 이빨을 갈았다. "내가 낭초민, 그 개 같은 놈에게 당한 것은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암습에 의한 것이었다. 그 개 같은 놈이 독(毒)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핑계일 뿐이오. 이유가 어찌 되었건 패배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오." "크크…… 그건 인정하마. 그 여우 같은 놈은 짐작보다 강했다. 마절궁 에서 부딪쳤을 때는 나의 백초지적 (百招之敵)도 안 되던 놈이 그 날은 나와 거의 맞먹는 무공을 발휘했다." "……!" "내 비록 독에 중독되었다 해도 예 전 같았으면 능히 그를 이길 수 있었 는 데도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 놈의 무공이 어떻게 그토록 강해졌는 지도 아직도 의문이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낭초민 의 문제가 아니라 등세욱과도 겨루 어 볼 만하다. 크흐흐……, 그 놈들 내가 이곳에서 조화삼라혈공(造化森 羅血功)을 익혔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아는가? 시대에 있어 가장 강한 마인을 세 인들은 적혈존자(赤血尊子)라고 불렀 다.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화삼 라혈공 앞에서는 그 어떤 고수라도 단 일초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 버렸 다. 고금(古今)을 통틀어 이초를 시전 해 보지 않았던 개세무적(蓋世無敵) 의 마공(魔功). 바로 그것이 조화삼 라혈공인 것이다.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4 장 (겁천혈괴군과 결의형제 2) 2. 조화삼라혈공의 내력을 모르는 관 해영이 냉소를 터뜨렸다. "당신은 그토록 강하다면서 어째 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오?" 순간, 맹환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 렸다. "흐흐……, 등세욱이라도 비파골이 뚫려서 묶이면 조금도 힘을 쓰지 못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철삭은 설산한 철이라는 것으로 어떤 보검으로도 절 대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관해영은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 올 때부터 보통 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떤 보검으로도 끊을 수가 없다는 말에는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에 끊을 수 없는 쇠도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낭초민이라는 놈도 무척 악독한 놈이군.' 그러나 관해영은 세상에 끊어지지 않는 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제가 끊어 볼까요?" 순간, 맹환이 두 눈이 둥그래져 관 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동굴이 떠나 갈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흐하하하! 웃기는군. 이것은 열쇠 로 풀기 전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관해영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설 산한철을 양손에 움켜쥐고 내력을 주 입시켰다. 그러자 설산한철에서는 강 한 반타력이 솟아올라 관해영의 양손 을 튕겨내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 들었다. 그는 이빨을 으스러져라 깨 물고 간신히 고통을 삼켰다. 맹환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설산한철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지상 에서 가장 예리하다는 지존비(至尊 匕)를 구해 빛보다 빠르다는 쾌검식 (快劍式) 월성(月星)을 사용하는 것 이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쾌검식 월성은 내가 익히고 있지 만 지존비가 어디에 있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설산한철을 끊기는 불가능하 다는 얘기가 아니오?" 관해영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스 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맹환 의 얼굴에는 봄바람 같은 훈훈한 미 소가 번져 올랐다. "꼬마야, 넌 나를 풀어 주고 싶으 냐?" "훗! 그러고는 싶지만 도리가 없 소." 그러자 맹환이 미친 듯이 낄낄거렸 다. "크크크……, 태어나서 아직까지 동정을 받아 보지 않았던 나 맹환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에게 오늘 치욕 을 당하는군. 크크크……, 세상만사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군. 크크크."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꽤나 비정했던 사람이었던 모양이 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맹환이 웃음 을 뚝 그치며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 리로 토해냈다. "너란 놈은 보면 볼수록 이상한 생 각이 드는구나. 남들은 나를 보면 두 려움에 달아나기가 바쁜데 네놈은 오 히려 나와 노닥거리고 있으니." 관해영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천성 탓이라고 해 둡시다." 맹환이 또다시 가가대소를 터뜨렸 다. "흐하하하, 노부가 이제껏 살아오 면서 가장 통쾌한 소리를 들어 보는 구나, 흐하하하!" "……!" "흐흐……, 자신이 잘났다고 뻐기 는 놈들도 너 같은 어린애처럼 솔직 하지 못하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우습 기 짝이 없는 것이로구나." 어떻게 말한 맹환으로 돌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인들은 내 성격이 괴팍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날 무슨 괴인 취급 을 하고 멀리 했지. 그 소외감 때문 에 나는 점점 짐승처럼 사나워져 갔 다." "……." "그러나 오늘에야 나는 진정 지기 를 만났으니 이제부터 너와 나는 형 제(兄弟)다." 순간, 관해영은 대경실색을 금치 못했다. "나이와 배분이 있는데 어떻게 당 신과 내가 형제가 될 수가 있단 말이 오?" "그까짓 고리타분한 예의 범절은 유생(儒生)들이나 지키는 것이지. 우 리 같은 무림인들에게는 마음만 친구 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따져 보아도……." "시끄럽다. 네가 좋으면 그만이지. 그러니 너는 더 이상 헛소리하지 마 라." 맹환이 버럭 언성을 높이자 관해영 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성질 한번 괴팍하구나.' 맹환이 다시 말했다. "아우! 넌 지금부터 내가 일러 주 는 기호를 잘 외우고 있다가 휘파람 으로 무공구결을 가르쳐 주면 부지런 히 연공(鍊功) 하거라." 그는 곧 자신의 휘파람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관해영은 결코 맹환이 태어날 때부터 흉폭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 었다. "네가 죄인의 몸이라 이곳에 자주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 니 내가 휘파람으로 전해 주는 무공 을 익혔다가 십성(十成)이상의 실력 이 되면 이곳으로 찾아와라. 그 때가 되면 이곳의 그 역이행이라고 하는 놈을 황천길로 보낼 수 있을 것이 다." 관해영이 감사해 마지않았다. "선배님의……." "형이라고 불러!" 맹환이 빽 소리를 질렀다. "……!" 관해영의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그 은은 한 미소는 맹환의 얼굴에도 어리었 다. 두 사람, 그들은 세월을 넘어 형 제의 우의를 맺은 것이었다. 이로써 죽음과 같은 곳에서 운명은 묘하게도 흐르고 있는 것이었으니… …. 맹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서 가 봐라! 역이행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그럼……." 관해영 역시 염려하고 있던 일이라 망설이지 않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밖에는 어느덧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 다. 그 회색빛 어둠 속으로 자신의 이름이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관해영……!" "관해영!"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시관들이 나를 찾는 모양이군. 한 차례 채찍질을 감수해야 되겠는 데? 그렇지만 그것은 나에게 유리한 일. 태극육합일주공을 운용하면 고통 이 강할수록 내공은 빠른 속도로 증 진된다." 슈욱!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 리며 한 명의 인영이 유령처럼 관해 영 앞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는 바로 역이행이었다. 그는 오악삼살을 죽였는지 전신에 서는 비릿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역이행의 목소리가 음산무비하게 흘러나왔다. "넌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 지금은 작업시간인데!"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관해영은 전 신을 흠칫했다. 벌써 등줄기에는 식 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렸 다. "전 단지 조금 전에……." 역이행이 다그쳤다. "거짓말! 저 소리는 너를 찾는 소 리 같은데 아까부터 들리고 있었다." '빈틈없는 놈이군.' 관해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꼈으나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약초를 캐느라 사방을 돌아다녀 이곳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 다." "넌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본 것은 많습니다. 나무도 보고 꽃들도 보고 새들도 봤으니까요." 역이행의 두 눈에 핏빛 살기가 쏟 아져 나왔다. "네놈은 지금 나를 속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면 내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는 영문을 몰라했을 것이다. 헌데 네놈은 엉뚱한 소리를 주절거렸다. 그것은 분명 네가 무엇 인가를 보고 딴청을 부렸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관해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대답을 했 을 뿐입니다." 역이행이 음산한 웃음을 띠며 한 발 다가섰다. "흐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곳에 왔 다는 자체만으로도 네놈은 죽어야 한 다." 그가 천천히 관해영 앞으로 다가왔 다. 관해영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 섰다. 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5 장 (휘파람으로 전하는 무공 1) 휘파람으로 전하는 무공(武功) 역이행의 우수가 새빨갛게 달아올 랐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있다." 관해영을 발견한 감시관들이 우르 르 몰려들었다. 역이행의 얼굴이 당혹함으로 물들 었다. 그는 급히 쳐들어 올렸던 우수 를 내렸다. 감시관들 중에서 제일 앞 에서 달려오고 있던 일귀가 역이행을 보자 얼굴 가득 의혹을 드러내며 깊 숙이 허리를 숙였다. "역주님이 어떻게 이곳에……?" 역이행이 뒷짐을 쥐고 헛기침을 터 뜨렸다. "음! 잠깐 산책을 나왔다. 헌데 웬 일들이냐?" 그는 시치미를 떼고 일귀를 향해 물었다. 그의 이 같은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관해영이 아니고서는 그 의 행동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관해영은 내심 쓴웃음이 터져나왔 으나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일귀가 관해영을 가리키며 공손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 놈이 작업장을 멋대로 빠져나 와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규정을 어겼으면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 끌고 가라." 일귀가 허리를 깊숙이 숙인 다음 관해영을 잡아끌고 내려갔다. 역이행의 얼굴에 섬뜩한 살광이 뿜 어져 나왔다. '놈은 분명히 나의 정체를 알고 있 다. 절대로 살려 둘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오악삼살 중 한 명을 놓쳤 으니 놈들은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 분명하다. 그 안에 나는 겁천혈괴군 에게서 모용벽경의 소재를 알아낸 후 이곳을 떠나야 한다.' 관해영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석옥의 문을 밀고 들어왔다. 장일비가 벌떡 일어나 관해영의 몸 을 부축했다. "괜찮겠나?" 관해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속 삭였다.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 장일비가 혀를 찼다. "쯧쯧, 그 혈기는 염라대왕도 혀를 내두를 것일세." 그는 관해영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혔다. 사도흑란이 다가왔다. "해영!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지? 반항도 적당히 해야지 그러다가는 맞 아 죽겠다." "걱정하지 마, 맞아죽을 신세는 아 니니까." 관해영은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뒤적여 땅바닥에 쏟아 놓 았다. 그것은 바로 약초들이었다. 관해영 은 약초들을 모아 곧 돌로 빻기 시작 했다. 흑란이 의혹을 띠며 물었다 "뭐하는 거지?" "가서 물이나 떠와, 호광노인의 병 을 치료할 약을 만드는 중이니까!" 흑란이 감탄한 얼굴로 입을 벌렸 다. "와! 너는 못하는 일이 없구나. 의 술까지 안단 말이야?" "……!" 관해영은 찧은 약초를 얼버무려 가 지고 곧 호광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상세를 살피다가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건……?' 호광노인의 가슴에는 손바닥 자국 이 시커멓게 찍혀 있었다. '단순한 신경쇠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것은 지독한 독장 (毒 )이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죽었 어야 했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근근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관해영이 의혹 어린 얼굴로 호광노 인을 살피다가 그의 주머니에서 말라 비틀어진 풀뿌리를 꺼내 얼른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에 은은한 회 심의 미소가 번져 올랐다. '이제 보니 호광노인은 만년삼왕 (萬年蔘王)을 복용하고 있었군. 그래 서 이 지독한 살수에도 목숨을 부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삼왕의 약효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근본 적인 치료가 되지 않아 이젠 생명의 불이 꺼져 가고 있다.' 관해영은 심각한 안색으로 호광노 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태상철권의 뒤에 기록되어 있는 요상법을 좀 더 연구해 치료를 하는 수밖에 없다.' 무심코 호광노인의 가슴을 바라보 던 두진성이 나직한 경악성을 흘려냈 다. "홍살폐혈수(紅煞閉血手)!" 그의 안색이 하얗게 굳어 들었다. 관해영이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두진성은 홍살폐혈수의 장본인을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렇다고 물어 볼 수도 없고…….' 이때 벌써 두진성의 안색은 서서히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관해영에게 물었다.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완쾌가 되겠나?" 관해영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가슴에다 약초를 붙였으 니 내일 아침이면 어느 정도 경과를 알겠죠." 목소리는 비록 일체의 감정이 깃들 여 있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잔뜩 서 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두진성이 어색한 얼굴로 자신의 자 리로 돌아가 잠을 청하자 관해영 역 시 곤한 듯 몸을 누이며 두 눈을 감 았다. 그러자 오늘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다. 등세욱이 낭초민을 시켜 겁천혈괴 군을 암습했다는 것과 이시재의 마천 루라는 마절궁이 무너지며 사대벌왕 이 탄생했다는 것 등……. '등세욱, 그가 알고자 하는 한 사 람! 그는 누구란 말인가?' 관해영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슬 며시 사도흑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영!" "……." "자는 거야?" "……." 사도흑란이 다가와 관해영을 흔들 었다. 관해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가는 참새처럼 조잘거리 는 말에 골치가 아파 온다. 아예 잠 을 청하는 편이 훨씬 낫겠지.' 사도흑란은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녀도 한동안 관해영의 잠자는 모 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관해 영의 팔을 베고 누웠다. 관해영은 결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도흑란이 자신의 품으 로 여러 번 기어 들어와 잠을 자는 것을 묵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 다. '이 여인……, 정(情)이라고는 모르 고 자라난 잡초(雜草)와 같이 살아왔 어. 그 잃어버린 정을 지금 나한테서 느끼려고 하고 있어.' 쇠창살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사도흑란은 잠이 들었는지 숨을 고 르게 내쉬고 있었고, 한 손은 관해영 의 가슴을 헤치고 들어와 있었다. 그녀의 화사한 얼굴에는 때묻지 않 은 미소가 피어날 듯 말 듯 어려 있 었다. 관해영은 슬며시 두 눈을 떴다. '달빛이 흘러 들어오는 것으로 보 아 자시가 가까워 왔군. 두진성과 동 현곡이 일어날 때가 되었을 텐데?'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 둠이 흔들리며 두진성과 동현곡이 일 어나 비밀통로를 열고 석옥을 빠져나 갔다. 관해영이 막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삐이익! 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5 장 (휘파람으로 전하는 무공 2)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관해영의 얼굴에 회색이 만면했다. '벌써 시작인가?'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맹환이 일러주는 대로 휘파람을 해석하기 시 작했다. '쾌검식 월성! 제 일 번, 쾌는 정 (靜)에서 나오나 검과 내가 일치해야 한다.' 한편, 비밀통로를 빠져나오던 두진 성의 얼굴에는 극도의 경악이 일고 있었다. "누군지 굉장한 공력이다. 휘파람 이 흐트러지지 않고 이곳까지 오다 니!" "누구일까? 이 정도의 공력을 지닌 사람은 강호오패밖에 없는데?" "사부님!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가 볼까요?" 두진성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 다 고개를 흔들었다. "이 휘파람은 무슨 신호인 것 같 다. 우린 남의 일에 신경쓸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슈우욱―. 두진성이 신형을 날리자 동현곡은 약간 아쉬운 얼굴로 곧 신형을 날려 두진성을 따랐다. '쾌검식 월성! 천하에서 과연 이것 보다 더 빠른 검초가 있을까? 어떻 게 보면 이것은 두진성이라는 사람의 교탈십팔도결이라는 것과 비슷한 양 상을 띠고 있는 것 같으니……. 노형 님께 기회 있을 때 한 번 물어 봐야 되겠군.' 끼이익! 그런데, 관해영이 비밀통로를 빠져 나간 직후, 석옥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흑의복면인 한 사람이 들어서 는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번뜩이는 눈 동자, 그것은 기름이 발라진 유리알 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복면인은 재빠른 시선으로 죄수들 을 바라보다 전신을 흠칫 떨었다. 석벽! 완전히 닫혀지지 않은 비밀통로의 문이 비죽 열려 있었던 것이다. 스으―. 복면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비 밀통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관해 영이 쾌검식의 기본동작을 익히고 비 밀통로 안으로 막 발을 놓을 때였다. 파츠츠츠―. 가공할 검망이 통로 안에서부터 폭 사되어 나오며 가슴을 무자비하게 쑤 시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헉!" 관해영이 다급한 헛바람을 들이키 며 섬극탄월비를 시전해 옆으로 탄환 처럼 미끄러졌다. 파화아아! 순간 관해영의 어깨에서 피가 솟아 오르고 허공을 스치는 검날이 괴상한 파공음을 토해냈다. "엇!" 동굴 안에서 나직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찰나지간, 한 명의 복면인이 동굴 안에서 가공할 속도로 튀어나왔 다. 번쩍! 달빛에 새파랗게 번뜩이는 검날이 수십 겹으로 허공을 에워싸며 관해영 의 전신을 짓쳐 들었다. 관해영의 얼굴이 흑빛으로 굳어 들 었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 관해영의 우 수가 벼락불같이 검영 사이를 누비며 복면인의 목 밑 인후혈을 찔러 갔다. 그것은 어떻게나 빠른지 검영(劍 影)이 몸에 닿기도 전에 벌써 복면 인의 목 밑에 이르러 있었다. "헉!" 복면인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빙글 신형을 돌려 지면에 내려섰다. 그의 전신은 엄청난 경악으로 물결처럼 떨 리고 있었다. 복면인의 눈빛은 좀 전 의 일초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보였다. 관해영은 차디차게 웃고 있었다. '쾌검식 월성과 교탈십팔도결을 응 용하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비명횡사 할 뻔했군. 그러나 놈이 또다시 덤벼 든다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 복면인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 나 왔다. "네, 네놈이 극상승의 무공을 익 혔을 줄이야!" 관해영이 뚫어질 듯이 그를 쏘아보 았다. "역이행! 내 입을 막으러 올 줄 알 았다." "후훗……, 역시 내 정체를 알고 있었군!" "물론, 그래서 대비책을 강구해 놓 았다." 역이행의 두 눈에 의혹이 스쳤다. "대비책?" "동현곡에게 내 몸에 이상이 생기 면 내가 준 서찰을 읽어 보라고 했 다. 그 서찰에는 너의 정체가 적혀 있다." "흐흐……, 네놈이 그 정도로 영리 하다고는 볼 수 없다."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너는 이 곳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아야 할 것이다. 비밀통로를 보았으 면 알겠지만 조금 있으면 그 비밀통 로의 임자들이 이곳에 나타날 것이 다." "그래서?" "넌 나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머지 두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죄수들이 달려나올 테고 나중에는 감시관들까 지. 네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 다." 역이행의 눈빛이 미미하게 떨렸다. "네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만 말 해라." "타협!" 관해영이 짤막한 목소리를 토해낸 다음 역이행을 바라보았다. '놈이 내 말을 믿지 않고 살수 를 펼친다면…….' 관해영은 은근히 입술이 타들어 갔 다. 역이행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조건이 무엇이냐?" 관해영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 렸다. "난 우연히 너의 정체를 알아내게 되었지만 그걸 폭로한다면 나에게 득 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내가 입을 안 여는 대신 넌 역주 의 신분으로 날 편안히 지내도록 해 주는 것이다." 역이행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직 강호물정을 모르는 죄수라 생각되는 것이 단순하군. 일단 내가 불리하니 승낙을 한 다음 계속 기회 를 엿보자.' 역이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대신 네가 써 놓았다는 서 찰을 내게 건네주어야 한다."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다만 두진성이 그 서찰을 읽었는지 안 읽 었는지는 나로서도 장담할 수는 없 다." 관해영이 이렇게 말한 것은 역이행 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 서였다. 역이행이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천상 이 놈을 죽일 때는 두진성도 함께 죽여야 되겠군.' "좋다, 너의 제의를 승낙하겠다. 그 러나 만약 내 정체가 폭로되었을 때 에는 너 하나쯤은 언제든지 쉽게 죽 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으스스한 목소리를 토해낸 역이행 은 곧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 졌다. 바로 그때였다. 분지 저쪽에서 두 개의 인영이 빗 살 같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관해영의 안색이 당혹으로 물들었 다. '두진성이 오는군.' 그는 곧 열려진 문을 원상태로 해 놓고 비밀통로를 따라 석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사도흑란의 옆에 누 워서 숨을 가다듬을 때였다. 두진성과 동현곡이 들어오면서 번 뜩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드는 것이었 다. 관해영이 슬그머니 두 눈을 떴다. '역이행이 분명 두진성을 노릴 것 이다. 그렇게 되면 분명 역이행은 두 진성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그의 손 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관해영은 지금 차도살인지계(借刀 殺人之計)를 모색하고 있었다. 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6 장 (검은 금맥, 흑전상련 1) 검은 금맥(金脈), 흑전상련(黑錢商聯) 1. 휘파람 무공전수가 계속되는 어느 날 밤. 관해영은 두진성 사제가 일어 나는 인기척을 느끼며 한 가지 결심 을 굳혔다. '며칠 동안 따라가 보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필히 따라가 보아야 되겠 군.' 그는 두 사람이 비밀 통로로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위이이이잉―. 밤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깊은 계 곡. 야수의 울부짖음이 긴 꼬리를 물 고 이어지고 희뿌연 편월(片月)이 음 산한 그림자를 만들어 어둠은 한층 귀기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계곡 한편에는 절벽 하나가 우뚝 솟아 있 었고 그 아래에는 두 사람이 마주보 고 서 있었다. 바로 두진성과 동현곡 이었다. 두진성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 나왔다. "현곡! 너는 그 동안 나의 무공을 거의 습득했다. 나 역시 건청이십팔 절(乾淸二十八節)을 모두 연성했기에 곧 이곳을 떠날 것이다." 동현곡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제자, 사부님의 완공을 축하드리 옵니다." "음! 그 동안 너도 수고가 많았다. 내 오늘 너에게 건청이십팔절의 구결 을 전수해 주겠다. 이곳에서 익힐 시 간적 여유는 없지만 이곳을 떠나서라 도 항시 수련에 증진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잘 듣고 한 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거라." 두진성은 주위에 사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한자 한자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자 숲 속에 숨어 있던 관해영 은 두진성이 전해 주는 구결을 힘들 이지 않고 외울 수가 있었다. 두진성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 왔다. "건이십팔절은 천하오대절공 중의 하나로 등세욱의 천마제왕기(天魔帝 王氣)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 다. 혈사무를 없애고 난 후에 등세욱 과 자웅을 겨루어 볼 것이다." "하지만 등세욱은 천하 제일로 꼽 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너는 이 사부가 등세욱보다 못하다는 말이냐?" 두진성의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에 등현곡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제, 제자는 절대 그런 뜻이 아니 었습니다." 두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남자놈이 그토록 쩔쩔 매다니! 장부라면 아니, 특히 칼을 쥐고 살아가는 무인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기개가 있어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 동안 대리석을 나 르며 전경건무심법(戰經建武心法)을 운용하여 얼마나 내공이 늘었는지 보 고 싶다." "알겠습니다." 동현곡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절벽 앞에 서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쿠우우우―! 순간,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담청 색 서기가 일어 오르는 것이 아닌 가? 그것은 곧 그의 전신을 가리고 눈부신 광망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이 온통 푸른 서광에 흽싸이 고, 슈우우우―! 가공할 회오리가 사나운 폭풍우처 럼 일고 있었다. 두진성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내공을 운용하여 칠금장법(七衾掌 法)을 펼쳐 보아라." 스파아앗! 동현곡의 신형이 지면을 차고 허공 으로 솟아올랐다. 까마득히 솟아올랐 다고 생각되는 그 짧은 순간, 핑그르르르! 그의 신형이 돌연 여덟 번을 회전 하며 쌍수(雙手)를 벼락같이 내뻗었 다. 고오오오! 동현곡의 몸을 감싸고 있던 청색서 기 속에서 가공할 청광이 눈부신 속 도로 절벽을 향해 뻗어 나갔다. 쾅! 쾅!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연속적으로 울리고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 랐다. 동현곡이 지면에 내려섰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땀방 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헌데, 절벽 한가운데는 여덟 개의 쌍수가 반자 깊이로 뚜렷이 찍혀 있 는 것이 아닌가? 칠금장법! 고금 백대절학 중의 서열 삼십이 위의 절기, 장법으로는 서열 2위에 올라 있는 가공할 기예였다. 두진성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이젠 이갑자의 내공을 지녔구나. 강호에 나가도 너를 이길 자는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숲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관해 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다. '동현곡의 무공이 벌써 강호에서 손꼽을 정도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 체 난 어느 정도란 말인가?'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 두진성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젠 시간이 되었으니 내려가 보자." 두 사람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 라졌다. 관해영은 석벽에 새겨진 손 바닥 자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일견 해도 대단한 장법 같다. 익혀 두어야겠다.' 관해영은 손바닥 자국의 배열을 보 며 칠금장법의 오의를 터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관해영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공력은 어느 정도일까?" 슈욱―! 그의 몸이 홀연 허공으로 치솟았 다. 이어서 그는 방금 터득한 칠금장 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비상하는 용 처럼 허공을 난무하던 그의 몸이 떨 어져 내렸을 때 석벽에는 또 다른 손 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내 공력이 동현곡보다는 높군." 관해영이 새긴 손바닥이 동현곡의 것보다 이촌 가량은 깊었다. 그의 입 가에 한 줄기 만족의 미소가 번져 올 랐다. 어둠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6 장 (검은 금맥, 흑전상련 2) 2. 석옥(石屋). 모두가 채석장으로 끌려 나가고 텅 빈 곳에 관해영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이행이 모든 감시관 들에게 관해영의 행동을 저지하지 말 라는 특별명령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호광노인의 전신에다가 침을 꽂고 명문혈에다 진기를 주입시 키고 있었다. "으음……!" 순간, 고슴도치처럼 뻣뻣이 있던 호광노인이 나직한 신음성을 터뜨리 며 두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한 차 례 둘러보다 관해영을 발견하고는 상 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자넨 누군가?" 관해영의 얼굴에 한 줄기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는 호광노인의 두 눈에서 전에 없던 맑은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노인과 같은 석옥의 죄수이니 마 음을 편안히 가지시고 말을 하지 마 십시오. 엉킨 피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았습니다." 호광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난 이미 내장이 썩어 살아날 가망이 없네. 이 만큼 정신이라도 차리게 해준 자네의 의술이 신기할 뿐이네." 관해영은 묵묵히 노인의 얼굴을 바 라보았다. 그는 이미 노인의 내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호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말 한 마디 못하고 죽나 싶었 는데 결코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는 군." "누가 노인에게 이런 독수를 사용 했습니까?" 관해영은 진작부터 묻고 싶은 말이 었으나 이제서야 질문을 던진 것이 다. 호광의 두 눈에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용만후! 그…금수만도 못한 놈, 내 가 친형제간 보다도 더 정을 주었건 만!" 그는 치가 떨리는지 전신을 부들부 들 떨었다. 관해영은 호광이 무엇 때문에 이토 록 살기를 띠는지 몰라 다시 물었다. "용만후가 누구입니까?" 호광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그 놈은 사대벌왕 중 동목벌왕인 복마성주다. 위선의 탈을 쓴 악마 같 은 놈이지." "그가 무엇 때문에 노인을 이 지경 으로 만들었습니까?" 호광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생각하면 참으로 가기 막힌 일이지. 어느 날 용만후와 술을 마시게 되었네. 그러다 만취되어 정 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난 대륙 금사(大陸金社)의 총관직을 맡고 있 던 당혁비(唐赫飛)의 집에 와 있었 네." 대륙금사. 이는 바로 천하상권을 움켜쥐고 있 는 호광이 거느린 단체였다. "헌데, 주위를 둘러보니 당혁비의 일가족이 모두 죽어 있고 내 손에는 피묻은 검이 쥐어져 있는 게 아닌 가? 그 순간 관원들이 들이닥쳐 꼼 짝없이 누명을 쓴 것이네." "그럼 소송도 걸어 보지 않고 이곳 으로 유배되어 왔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기가 막힌 일이지. 난 너 무도 다급히 용만후에게 내가 무죄임 을 증명해 달라고 했는데 그 놈이 글 쎄 내가 살인을 하는 광경을 보았다 고 관원들에게 말하지 않겠나? 그는 평소에 내가 당혁비의 아내와 간통하 여 당혁비가 그걸 눈치채자 항시 그 를 죽일 마음이 있었다는 거짓말과 함께……." "……!" "더군다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혁 비의 아내도 용만후의 말이 사실이라 고 증명해 나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네. 그제서야 나는 용만후의 음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네. 용만후와 당혁비의 아내가 간통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으 니까." "인면수심(人面獸心)한 놈이군요." "그렇네 용만후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뇌옥으로까지 찾아와 홍 살폐혈수를 시전한 것이네. 천하에 죽일 놈!" 호광이 이빨을 갈았다. 관해영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용만후는 홍살폐혈수를 너무 믿었 군. 그처럼 용의주도한 놈이면 호노 인의 생사를 분명 확인했을 텐데 어 째서 귀사역으로만 보내고 안심했을 까?' 그는 내심의 의혹을 억누르며 호광 에게 물었다. "용만후는 사대벌왕의 복마성주인 데 자신의 신분도 고려하지 않고 그 런 일을 저질렀다면 보다 큰 이유가 있을 텐데요." "내 황금에 탐이 나서지. 노부의 대륙금사는 천하상권의 삼분의 이를 쥐고 있다. 그 놈은 욕심이 많은 놈 이기에 복마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막 대한 금맥이 필요할 테니까." 관해영의 얼굴에 잔잔한 경악이 일 었다. "그가 천하패권을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호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사대벌왕은 암중 으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상황이라면 자금이 필요할 테고 결국 승부는 자금이 많은 자가 승리 할 테지." 이렇게 말한 그는 관해영의 치렁한 흑발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자넨 언제 이곳을 떠날 텐가?" 이 느닷없는 질문에 관해영은 아연 한 얼굴이었다. "무, 무슨 말씀입니까?" 가 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6 장 (검은 금맥, 흑전상련 2-1) 그는 호광의 말뜻을 못 알아듣겠다 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호광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 이 아니었다. "자네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 는 몰라도 자네가 날 치료할 정도라 면 필시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을 걸세. 홍살폐혈수를 해혈할 수 있는 자는 당금에서는 몇 명 되지 않네." "……!" "그 정도의 무공을 지니고 있다면 이곳을 떠나기는 식은 죽 먹기가 아 닌가?" 관해영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 다. '상인의 눈이란 의외로 날카롭군.' 호광의 눈빛은 어떤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대답해 주게." 관해영은 구태여 호광을 속이고 싶 지는 않았다.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떠날 것 같습니다." 호광의 창백한 안색에 핏기가 돌았 다. "자네 혹시 비수를 가지고 있지 않 나?" "있긴 있습니다만 무엇 때문에 ……?" "곧 알게 될 것일세. 잠시만 빌려 주게." 관해영이 품속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를 건네주자 호광은 자신의 팔뚝을 쭉 그어 내렸다. "노인!" 관해영이 깜짝 놀라 제지하려 했으 나 호광의 행동은 놀랍도록 민첩했 다. 이어서 그는 찢어진 살가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황금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왼 팔에서도 나무 열쇠를 꺼내는 것이었 다. 관해영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 다. 노인은 두 개의 열쇠를 관해영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받게." 관해영이 머뭇거리자 호광은 두 개 의 열쇠를 관해영의 손에 쥐여 주기 까지 했다. "황금열쇠는 흑전상련(黑錢商聯)의 대태상을 나타내는 신물이네. 흑전상 련은 대륙의 숨은 금맥으로 대륙금사 에 버금가는 금력을 지니고 있네." 흑전상련과 대륙금사. 이 두 개의 세력은 천하상권을 지 배하는 양대산맥이었다. "내가 흑전상련에 가입한 것은 오 래 되지만 그들은 나의 신분이 대륙 금사의 주인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 네. 사실 흑전상련과 대륙금사는 같 은 상인이라도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으니까. 그래서 그 동안 나도 신분 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게 나에게는 복이 되었네." "……." "용마후도 나의 모든 것을 알았지 만 대태상의 신분도 모르고 있었으니 까. 그리고 흑전상련을 이용하면 자 네의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일세.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 대신 용만후를 죽여 달라는 것이네." 관해영에게는 엄청난 복연인 셈이 나 왠지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복수를 부탁하면 들어 줄 수가 있 지만 남이 쌓아 올린 지위를 어떻게 가로챌 수가 있겠습니까?" 호광노인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 다. "제발 사양하지 말게. 내가 그것을 가지고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관해영이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 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호광 은 승낙한 것으로 알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나무열쇠는 우리 가문 대 대로 내려오는 보화창고를 여는 열쇠 라네. 그 황금옥창에는 무엇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그곳의 기 보들을 끄집어 내어 쓰게." 관해영은 호광이 가문을 들고 나오 자 급히 말문을 열었다. "혈육이 있다면 제가 이 나무열쇠 를 혈육에게 전해 주겠습니다." "대를 이을 아들이 내게 없기에 내 가 이 나무열쇠를 자네에게 주는 것 이네. 즉 이 열쇠는 지참금이네." "……!" 관해영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호광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스쳤다 "내게 딸이 하나 있네. 그 애는 무 공에 미쳐 청성파(靑城派)에 들어갔 기에 집안의 일을 잘 몰라 용만후도 살수를 쓰지 않았을 걸세. 그 아이를 만나거든 평생을 책임져 주게." "그, 그건……." 관해영이 황급히 거절하려 하자 호 광노인이 얼른 그의 말을 막고 나섰 다. "내가 걱정되는 것은 그 아이밖에 없네. 자네는 냉정하고 비정해 보이 나 그것은 후천적인 것이고, 본 성품 은 중후하고 광명정대하다고 보네." "전 태어날 때부터 냉정하고 비정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건 틀린 말이네. 내 비록 용만 후를 잘못 보기는 했으나 수많은 사 람들을 접해 보아 알고 있네. 더군다 나 인간의 성품은 가장 급박한 상황 에 처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죽음보다 더한 이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한 가지 사실을 보아도 자네 의 성품을 알고 있네. 그러니 죽어 가는 늙은이의 마음이나 편안하게 해 주게." 관해영은 호광의 인간적인 호소에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 키고 앉아 있자 호광은 마치 큰 짐을 벗은 사람의 신색이었다. "자네의 승낙을 얻었다고 생각되 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호광은 관해영이 딴소리하지 못하 게 못을 박아 두었다. 관해영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군. 말할 틈도 주지 않다니.'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천하의 상 권을 움직이던 호광과 얘기를 나눈다 면 백이면 백 모두 질 것이다. 그만큼 호광의 수완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대륙금사의 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 이다. 관해영은 내심 한 가지 의혹이 구 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런데 청성파라면 태허철권의 원 주인의 문파가 아닌가?' 그렇다. 태허철권은 청성파의 무공을 바탕 으로 창조한 것이었다. '마침 잘 됐군. 언젠가 청성파를 한 번 찾아가 보려 했는데 그때 태허 철권과 나무열쇠를 전해주면 되겠 군.' 그때였다. 문 밖에서 감시관이 소리쳤다. "관해영! 역주님께서 부르신다." 관해영의 얼굴이 의혹이 스쳤다. '역이행이 무슨 일로 나를 .' 한 줄기 불안이 관해영의 가슴을 스쳤다. 어둠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7 장 (벽력마도 1) 벽력마도(霹靂魔刀) 대낮에도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 는 송림지대. 구름이라도 짙게 깔리는 날에는 안 개가 자욱이 깔리고 귀신 울음소리 같은 귀곡성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런 이유로 지옥귀사역의 인물들 마저도 이곳에 오기를 꺼려 하고 있 었다. 관해영이 송림 사이로 들어섰 을 때였다. 그곳에는 천만 뜻밖에도 두진성이 관해영을 기다리고 있는 것 이 아닌가? "무슨 일이기에 역주가 너와 나를 동시에 불렀느냐?" '역이행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 관해영은 시침을 뚝 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나도 불 려 가는 몸인데." 슈욱! 순간, 한 명의 인영이 두 사람 앞 에 떨어져 내렸다. 역이행이었다. 관해영이 싸늘한 눈길로 역이행을 쏘아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찰 때문이오?" 역이행의 얼굴에 음산한 살기가 번 져 올랐다. "흐흐……, 그렇다면 내가 왜 너희 두 사람을 동시에 불렀겠느냐?" 관해영이 흠칫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헌데 왜 갑자 기 마음이 변한 것일까? 어떤 변화 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역이행이 한 발짝 다가섰다. "그 동안 보고 들었던 것을 모두 잊어라. 염라대왕이 물어 보면 나중 에 내가 거짓말을 못할 테니까!" 두진성이 영문을 몰라 관해영을 바 라보며 물었다. "관해영! 역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슈아아앙! 바로 그 순간, 역이행이 어느새 검 을 뽑아 들고 관해영을 벼락같이 쏘 아져 들었다. 그 검세가 어떻게나 빠 른지 희뿌연 검광이 벌써 목전에 이 르러 있었다. 관해영은 벌써 예측하 고 있었기에 두진성의 뒤로 재빨리 숨으며 소리쳤다. "역주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 빨 리 달아나시오." 그는 두진성이 절대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한 것이었다. 두진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 시 물었다. "역주가 왜 우리를 죽이려 한단 말 이냐?" 역이행은 자신의 검초를 관해영이 힘 하나 안 들이고 피해 버리자 노화 가 치밀어 올랐다. "너도 죽어라!" 그는 뻗어낸 검초를 그대로 두진성 을 향해 밀어냈다. 쏴아아아―! 싸늘한 검광이 바람 소리를 일으키 며 노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두진성이 눈썹 하나 깜박거리지 않 은 채 들고 있던 정으로 역이행의 검 을 막아냈다. 탕! 순간, 역이행의 검이 반토막으로 부러지며 허공 높이 핑그르르 솟아올 랐다. 역이행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 러들었다. "무, 무공을 알고 있다니!" 두진성의 안색이 침울하게 굳어 들 었다. "본의 아니게 무공을 보인 셈이 되 었군. 그러나 상관없다. 어차피 떠나 려고 마음먹은 이상 며칠 빨리 떠난 다고 계획에 차질이 오는 것은 아니 니까." 역이행의 전신에 가공할 살기가 뿜 어져 나왔다. 그것은 그가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죽엇!" 역이행이 폭갈을 터뜨리며 부러진 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왔다. 쐐애애애액! 사방이 온통 무수한 검영으로 가득 차며 두진성의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 져 내렸다. 그러나 그 바늘 끝 같은 틈도 없는 검세 속에서도 유유히 신 형을 움직이며 역이행의 검을 피해내 는 것이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토록 극독한 살초를 펼치는 것이냐?" "이유는 내 검을 부러뜨린 탓이 다." 역이행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죽기살기로 공격해 들어왔다. 그 러나 그는 결코 두진성의 상대는 되 지 못했다. 두진성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뜨리 지 않은 채 역이행의 검초를 모조리 피해내고 있었다. 역이행의 얼굴이 엄청난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살려 두지 않겠다." 파아아아―! 돌연 그의 몸에서 쇠털처럼 가느다 란 암기가 비오듯 쏟아져 나오기 시 작했다. 두진성의 입에서 나직한 경 악성이 터져나왔다. "사망밀밀호(死亡密密毫)!" 사망밀밀호! 천하이십대 암기 중의 하나로써 시 전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암기술이었 다. 그러나 일단 쏘아내기만 하면 빗 발치는 듯한 암기를 피할 자는 없었 다. 특히나 사망밀밀호가 무서운 것 은 극독이 묵혀 있어 해독약이 없다 는 것이었다. 콰아아아! 두진성의 몸에서 엄청난 반탄지기 가 피어올랐다. 파아앙! 순간, 수십 개의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음향이 일며 사망밀밀호가 두진 성의 반탄지기를 뚫지 못하고 모조리 퉁겨 나가는 것이었다. "앗!" 역이행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 사망밀밀호에 고슴도치 가 되어 버렸다. "끄아아악!"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비명을 터 뜨리며 역이행의 신형이 지면을 나뒹 굴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 중에서 나직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기회탄강(以氣回彈 )! 강호오패 의 일인인 창궁우사(蒼穹羽士) 목초 관(木草官)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목소리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순 가량의 노인이 두진성 앞에 나 타났다. 각진 턱에 사자 수염을 기르 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위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군다나 등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새겨진 긴 장도를 메고 있어 마치 백 만대군을 호령하는 장수의 기재마저 풍기고 있었다. 창궁우사 목초관이라면 바로 강호 오패의 일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두 진성이 바로 창궁우사 목초관이었단 말인가? 목초관은 노인을 보자 상당히 놀라 는 표정이었다. "벽력마도(霹靂魔刀) 낭초민(浪超 民)……, 그대가 어떻게?" 낭초민이라 불린 노인이 의미심장 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오랜만이오, 근 이십 년만에 뵙는 것 같구료." "그런 셈이군, 마절궁에서 보고 처음이니까 ." "당시 강호오패가 등궁주님을 찾아 궁에 침입했을 때 난 당신에게 당한 일초의 패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 소." 벽력마도 낭초민! 그럼 그는 등세욱의 수하인 사대신 장 중의 한 명이란 말인가? 목초관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번 져 올랐다. "사대신장은 등세욱이 인정하는 심 복들이나 강호오패와 견주기에는 차 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 지." "지금도 차이가 있다고 믿으시오?" "낭초민! 그대가 이 오지에 온 것 을 나와 무공을 겨루기 위해서 온 것 은 아니겠지?" "물론이오. 난 단지 지옥귀사역이 인간들이 갈 곳이 못된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왔을 뿐이오." 목초관이 고소를 지었다. "후후, 그게 아니겠지. 남들은 몰라 도 난 사대벌왕이 생겨 선행을 할 때 의심을 품었다. 역이행은 너의 수하 이겠지. 너에 의해 죽은 걸로 되어 있는 놈이 너의 수족이 되어 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낭초민의 두 눈에 사기가 번들거렸 다. "목초관! 쓸데 없는 것을 많이 알 면 신상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 겠지." "웃기는군. 그 따위 말로 나를 협 박하려 하다니! 내가 궁금한 것은 이 황폐한 곳에 네가 무엇 때문에 역이 행을 잠입시켰나 하는 것이다." 그는 계곡 쪽을 한 차례 바라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역이행은 항시 저곳을 들락거렸 지. 저곳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게 아 닐까? 네놈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고……." 낭초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들 었다. "어차피 그냥 보낼 수는 없겠군." 두 사람의 사이에는 죽음보다 더한 긴장이 흘렀다. 으로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7 장 (벽력마도 2) 목초관의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 던 관해영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 다. '낭초민은 아마 겁천혈괴군을 데리 러 이곳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 때문 에 역이행은 우릴 죽이려고 했다. 빨 리 동굴로 가서 노형님에게 이 사실 을 알려야겠다.' 그는 신형을 도리려다 문득 떠오르 는 것이 있어 한쪽에 자빠져 있는 역 이행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설련한철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없 다. 낭초민이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어 재 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기며 계곡 쪽 으로 상승의 신법을 전개했다. 순간 엄청난 힘이 그의 몸을 허공 높이 퉁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앗! 이것은 강기!' 그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뒤쪽 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목초관과 낭초민이 한데 어 울려 치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강기는 그들이 서로 부딪칠 때마다 밀려나오는 것이었다. 관해영은 그야말로 등줄기에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과연 천하오패의 이름은 명불허전 이군.' 그는 더욱 빨리 신법을 전개해 계 곡을 쏘아 올라갔다. 겁천혈괴군 맹환은 관해영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자 얼굴 가득 의혹을 띠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이렇게 달려오 게?" 관해영이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 다. "벽력마도 낭초민이 왔습니다." "참다못해 날 직접 신문할 셈인 가?" "그게 아니라 노형님을 다른 곳으 로 옮길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맹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도 이제는 안전하지 못한 모 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 "낭초민이 이리로 오고 있느냐?" "지금 창궁우사와 싸우고 있어 시 간이 조금 지체될 것 같습니다." "뭐야! 목초관이 이곳에……?" 그는 목초관이 이곳에서 무공을 연 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 주었다. 맹환이 혀를 찼다. "쯧쯧……, 그 놈의 말코 도사. 늙 어 망령이 든 모양이군. 헌데 혈사무 란 놈들이 그렇게 강한가? 그 놈이 스스로 파계를 하고 이런 곳에서 무 공을 익혀야 하다니!" 관해영은 도사라는 말에 의혹을 금 치 못했다. "창궁우사는 원래 도인이었습니 까?" "그는 원래 전진(全眞)의 제자였다. 그러나 젊은 날 한 여인을 사랑하여 사문에서 파문을 당했지만 그래도 끝 내 도인임을 주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스스로 환속까지 하다니. 혈사무와 어떤 원한을 가진 것일까……?" "……!" "넌 그 동안 내가 전해준 무공을 얼마나 익혔느냐?" "팔성 정도는 될 것입니다." "어, 얼마?" 맹환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 떠졌다. 관해영은 자신의 자질이 부 족하여 맹환이 어처구니없는가 하고 내심 한탄을 금치 못했다. "겨우 팔성 정도밖에는……." "파, 팔성을!" 맹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 굴로 관해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이 놈! 근골이 뛰어나다고는 느꼈 지만……, 천하의 기재다. 흐흐, 맹환은 그야말 로 불황을 낚은 셈이군.' 허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 히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너에게 조화삼라혈 공을 전수해 주겠다." "……!" "내가 옆에서 지도를 해주지 않아 도 완벽하게 익힐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나는 자질이 부족해서 ……." 맹환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자질이 부족하면 더욱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자 어서 등을 돌려라." 관해영은 씁쓸한 얼굴로 등을 돌렸 다. 순간 자신의 명문혈(命門穴)을 토해 뜨거운 진기가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노형님! 이, 이건 안 됩니다." 그는 맹환이 자신에게 진기를 주입 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무림인으로서는 목숨을 버리 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맹환이 다급히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였다가는 만 사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러니 어서 심법을 운용해 진기를 융합시켜라. 어서!" 맹환의 득달같은 외침에 관해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심법을 운용해 진기를 융화시켰다. 맹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눈을 감고 내가 전해 주는 조화삼 라혈공의 구결을 귀담아 들어라." 관해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맹환의 구결을 단 한자도 빠짐없이 외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맹환의 구결이 끝난 것과 동시 노도처럼 밀려 들어오던 내공이 뚝 그쳤다. 관해영은 빙글 돌아서 맹 환을 바라보았다. 맹환은 매우 피곤 한 듯 축 쳐져 있었다. 그는 이 순간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장차 나를 구하러 오려면 등세욱 과 격돌해야 할 것이다. 나를 대신하 여 등세욱을 꺾어 내가 못다한 한을 풀어 주기 바란다." "노형님!" 관해영은 맹환의 희생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맹환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목숨을 유 지할 최소한 진기는 남겨 두었으니 까. 나야 어차피 꼼짝할 수 없는 놈. 내공 따위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느 냐?" "……!" "그리고 훗일 개봉부로 가서 도예 촌(陶藝村)을 찾아라. 그곳에는 저들 이 나에게 알아내려는 모용벽경이란 여인이 있다. 그녀는 나를 만날 당시 정체불명의 괴인들에게 쫓기고 있었 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놈들은 아무래도 마절궁의 수하들 같구나." "……!" "난 모용벽경을 평소에 알고 있어 그녀를 급히 도예촌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추적자들을 따돌렸다. 그때 그녀는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했고 난 볼일이 있기에 보름 후에 도예촌 을 찾는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낭초민에게 암습을 당해 아직까지 가 보지를 못하고 있다." 관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용벽경이란 여인의 신분은 무엇 입니까?" "모용벽경은 무림 제일의 현자로 알려진 모용청운(募容靑雲)의 손녀 다. 모용청운은 정사(正邪)를 떠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 나도 강호오패에 끼여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모용벽경도 그 때 알았지." "대체 그녀가 할 말이란 무엇이었 을까요?" "글쎄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다 만 굉장히 중요한 말을 자신의 조부 에게 전해 달라는 것밖에는……." "그 중대한 말 때문에 추적을 받았 던 것이 아닐까요?" 맹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다만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모용청운과 등 세욱은 극히 친밀한 사이인데 어째서 마절궁이 모용벽경을 추적했느냐 하 는 점이다." "……!" "당시 모용벽경은 임신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궁금 하군. 그녀는 자신을 구해줘서 날 대 부(代父)로 삼겠다고까지 했는데……, 이 놈의 팔자는 어떻게 된 것인지 대 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관해영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무리 괴팍한 성격이라도 정에 대한 그리움은 남들 못지 않구나!' 이때 맹환이 잔뜩 아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녀에게서 낳은 애가 딸이었으 면 좋겠는데……." "어째서요?" 맹환이 관해영을 바라보며 심술맞 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널 사위로 맞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 "……!" 관해영은 맹환이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가 마음 가득 차 올랐다. 맹환이 걱정스러운 듯이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어서 가 보아라. 낭초민이 오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까." 관해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어렸다.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라. 헤어지 면 반드시 만날 날이 있으니까." "그럼!" 관해영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곧 동굴을 빠져나왔다. 헌데 관해영이 동굴 입구를 막 빠 져나오려 했을 때였다. "넌 결코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 다."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울리며 한사람이 동굴 앞에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굳어 들 었다. '낭초민!' 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8 장 (탈출(脫出) 1) 1. 검을 뽑아든 채 동굴 앞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은 벽력마도 낭초민이었다. 그 는 철판이라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형 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관해영을 쏘아보 았다. "넌 맹환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느냐?" 관해영은 낭패감을 느꼈다. 이건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목초관이 어떻게 된 것일까? 설마 낭 초민에게 당한 것은 아닐 테고…….' 하지만 목전의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반대였다. 만약 목초관이 낭초민을 이겼 다면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목초 관이어야만 한다. "당신이 목초관을 죽였소?" 낭초민이 관해영의 질문에 가소롭다 는 듯이 비릿한 조소를 떠올렸다. "흐흐흐, 그는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쯤 염라전에 들어가 자신이 몇 명이나 죽 였는지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관해영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목초관이 낭초민의 손 에 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신도 그렇게 될 것이오." 관해영은 그의 자부심이 역겨워 한마 디 쏘아붙였다. "흐흐흐……, 천하에서 나를 그렇게 만들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스윽! 낭초민이 관해영에게로 다가왔다. 순 간적으로 관해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 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관해영은 낭초민 의 눈에서 짙은 살기를 느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낭초민의 검이 더없이 빠르게 관해영의 목을 노려 왔다. 살인할 때는 말없이……. 그건 낭초민이 지금까지 무수한 싸움 을 치르면서 터득한 하나의 원칙이었다. 무는 개는 짓지 않는다고, 말이 많을수 록 집중이 안 되고, 집중이 안 될수록 상대에게 달아날 틈을 많이 주기 때문 이다. 관해영은 태허철권에 기재된 미리환 영보를 펼쳐 낭초민의 일초를 피했다. 낭초민의 의도를 눈치챘기에 망정이 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낭초민의 검은 정확히 관해영의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낭초민은 관해영이 자신의 일초를 피 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급작스런 공격도 공격이지만 그가 자신의 일초를 피하리라곤 예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금 무림에서 그 누 가 자신의 일초를 이토록 가볍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어떤 식으로 공격한다는 것을 가 르쳐 줘도 말이다. "내가 널 잘못 본 것 같군……." 그는 자신의 일초가 빗나가자 더욱 살심이 치솟았다. 자신의 일에 방해되는 자가 무공이 높다면 앞으로 후환 덩어 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 차례 검을 떨치자 낭초민의 검 끝 에서 세 줄기 한망(寒芒)이 떨쳐지며 예 리한 검기가 관해영을 향해 덮쳐 들었 다. 아까는 낭초민이 관해영을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지 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관해영은 도 저히 낭초민의 공격을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쓰으으으―. 사나운 검풍이 은빛 물결로 다가들었 다. 사방 일 장 범위를 물샐 틈 없이 차 단한 사나운 검초였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관해영은 검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 다가 벼락같이 몸을 바닥으로 굴렀다. 창피하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 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낭초민의 검세가 아무리 사납고 퇴로 를 막고 있다지만 바닥까지는 검기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관해영은 튕기듯 일어나 미리환영보를 펼치며 낭초민의 검세에서 멀찌감치 벗어났다. 하지만 그건 관해영의 오판이었다. 낭초민의 검은 마치 눈이라도 달려 있는 듯이 어느덧 관해영을 바짝 달라 붙어 있었고, 목줄기를 향해 여전히 뻗 어오고 있었다. 위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관해영의 안색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는 급히 미리환영보보다 한 단계 높은 탄월비(彈月飛)라는 신법을 펼쳐 멀찌감치 신형을 날렸다. 순간, 관해영은 가슴이 불에 덴 듯이 화끈거림을 느꼈다. 신형을 바로 하며 자신의 가슴을 보 니 새빨간 피가 푹죽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가슴은 물고기 아가미처럼 떡 벌어져 있었다. 탄월비가 아무리 절세의 신법이라도 한 수 위의 낭초민의 검을 완벽하게 벗 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피하기만 해서는 도저히 낭초민의 막 강한 도법을 이겨낼 수가 없다. 공격이 최상의 수비다.' 생각은 오래 하되, 결심은 빨리 해야 하며, 행동은 더욱 민첩해야 하는 것이 무림인들의 철칙이다. 관해영은 재빨리 주변의 나뭇가지 하 나를 꺾어 들었다. 그런 관해영의 행동에 낭초민이 어이 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흐흐! 정신이 없는 놈이군. 자신보다 강한 자는 보도를 들고 있는데 나뭇가 지로 상대하겠다니……." 그의 비웃음을 듣는 둥 마는 둥 관해 영은 나뭇가지로 낭초민을 겨누며 담담 히 입을 열였다. "승패란 결과를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다." "너무도 놀라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 군." 낭초민이 기가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무림인이 상대를 앞에 두고 눈을 뗀 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는 것 과 마찬가지인 법. 관해영은 이 조그만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찻!" 관해영이 뱀이 개구리를 덮치듯 낭초 민을 향해 몸을 날리며 나뭇가지를 휘 둘렀다. 비록 나뭇가지지만 사나운 예기 가 쏟아져 나오며 낭초민의 전신을 휩 쓸어 갔다. 절쾌(絶快)! 그것은 육안으로서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극쾌의 빠름이었다. 관해영은 목초관에게서 훔쳐 배운 교탈십팔도결 을 펼친 것이다. 아직 내력이 정순하지 못해 그렇지 이 교탈십팔도결의 일식은 정말 위맹하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비웃음을 담고 있던 낭초민의 얼굴에 경악이 일렁거렸다. 상대는 비록 나뭇가 지로 공격하고 있지만 자신의 호신강기 가 지금의 일식을 튕겨낸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형을 재빨리 뒤로 빼는 한편 장도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수 십 줄기의 도세가 천지사방으로 뻗어나 가며 관해영의 쾌검을 모두 튕겨 버렸 다. 관해영은 그의 귀신 같은 검초에 눈 앞이 어지러운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 섰다. 낭초민이 더 공격할 생각을 않고 의혹의 표정으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전설의 검문인 대주검천(大柱劍天)의 교탈십팔도결을 익히다니……." 관해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펼쳐낸 것 이 교탈십팔도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무공의 이름이 나 외우고 있을 만큼 한가한 게 아니었 다. 생과 사! 그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또 다시 검초를 시전하며 낭초민을 항해 짓쳐 들었다. "쾌검 월성(月星) !" 츠츠츠! 대기를 양단할 것 같은 검광이 낭초 민의 가슴팍을 노리고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지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검초 월성. 그것은 관해영 자신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낭초민의 무공 수위는 관해영 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한차례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슬쩍 옆으로 미끄러지 면서 공격권을 벗어나고 말았다. "월성! 맹환의 무공도 전수 받았 군……." "월락만천하(日落滿天下)!" 관해영이 싸늘히 소리치며 다시 낭초 민을 짓쳐들었다. 고오오오오! 갈짓자를 그리며 뻗어나가는 일락만 천하의 검초는 사방을 검기로 덮고 무 수한 검영이 폭사되어 상대로 하여금 어느 게 실초인지 분간을 못하게 만들 었다. 하지만, 낭초민은 일락만 천하의 검법 을 알고 있는 듯 초식이 완벽히 펼쳐지 기도 전에 먼저 피할 방향에 가 있는 것이었다. "청성파의 비전 검술까지도 익히고 있 다니……. 기이한 놈이군." 관해영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틀렸어! 상대가 되지 않아.'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절기를 동원 했지만 그는 낭초민의 옷자락 하나 건 들지를 못한 것이다. 이건 그와 낭초민 의 실력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여 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낭초민이 짐짓 감탄스런 표정을 지었 다. "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지금 너의 실력이라면 능히 절정 고수의 소리를 들을 만하지만, 아직 본좌를 상대하기에 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낭초민이 어찌 알겠는가? 관해영이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년설련즙의 약효나 맹환의 공력이 본신지기와 융합되지 않 았다는 것을……. "……." 관해영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묵묵 히 쏘아볼 뿐이었다. 이제 그가 공격을 하면 그걸로 자신의 목숨은 끝장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매섭게 관해영을 쏘아보던 낭초민의 입에서 폭갈을 터져나왔다. "십방마폭도(十方魔暴刀)!" 순간, 눈부시도록 찬란한 도기가 폭발 하듯이 관해영을 향해 밀려나갔다. 관해영은 피할 엄두를 못 내고 힘껏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피할 길은 없는 것이다. 아까 같은 요행은 두 번 다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타타타탕―. 철판을 때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 리는 가운데 관해영의 나뭇가지가 일곱 조각으로 끊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관해영의 몸에는 한 자씩의 도흔이 시뻘건 피를 뿌리며 그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비겁하지만 난 아직 죽어서는 안 될 몸이다.' 위기를 절감한 관해영은 이를 악물었 다. 그는 남은 한토막의 나뭇가지를 낭초 민에게 던졌다. 내력이 실린 나뭇가지는 암기 구실을 하기에 충분했다. 혼신의 힘이 실린 나뭇가지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낭초민도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도를 쳐들어 나뭇가지를 쳐냈다. 그 짧은 순간이 관해영에겐 구원의 빛이었다. 파앗! 관해영이 지면을 차고 쏜살같이 산 밑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은 마치 바람이 대나무 사 이를 스쳐 가는 것과 같이 유연하기 이 를 데 없었다. "섬극탄월비! 놈이 저것까지 익히다 니……. 그러나, 결코 내 손아귀를 벗어 날 수는 없다." 낭초민은 도를 천천히 들어 올려 멀 어져 가는 관해영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이 가볍게 떨리는 것 같더니 도는 시윗줄을 떠난 화살처 럼 곧바로 관해영의 등짝을 노리고 날 아가는 것이었다. "격공어도술(隔空御刀術)을 할 수 있 는 자는 천하에 단 한 사람! 등세욱밖에 없다." 죽을 힘을 다해 쏘아 가던 관해영은 등뒤에서 다가오는 섬뜩한 살기를 느끼 고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관해영이 미처 고개도 돌리기 전에 보도는 관해영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으아아아악!" 관해영이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단 말마를 터뜨리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 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낭초민 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감돌았다. "난 결코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다. 내가 노린 이상 결코 살아날 자는 없 다." 패앵! 관해영의 가슴을 관통한 보도는 다시 낭초민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진기로 검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는 이 수법 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 자부대로 당금 천하에서 그와 적수 가 될 자는 등세욱밖에 없는지도 모른 다. 그는 관해영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볼 생각도 않고 동굴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심감 때문일 것이다. "나머지 삼대벌왕이 오기 전에 맹환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자." 잠시 후, 그는 맹환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동굴 입구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리고 한차례 몸을 흔드는가 싶더니 그 의 신형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계곡의 어귀에 두 명의 인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목초관과 동현곡이었다. 그런 데 목초관은 배가 갈라져 있고 내장이 흘러내리고 있는 끔찍한 몰골이 아닌 가? 그런 몸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도 신기했지만 더욱 기이한 점은 목초 관이 조금도 괴로워하는 표정이 아니라 는 것이다. 문득, 동현곡이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사부님! 어찌하여 밀환쌍기공(密幻雙 奇功)을 이용하여 죽은 척을 했습니까?" 밀환쌍기공! 전진의 비술로써 상대의 눈을 속이는 기공이다. 목초관은 밀환쌍기를 이용하 여 낭초민의 도법에 일부러 맞은 것처 럼 꾸몄던 것이다. 목초관이 다시 진기를 운용하자 창자 가 다시 들어가고 찢어진 뱃자국이 다 시 원상태로 아물었다. 비술이라기 보다는 사술에 가까운 무 공이었다. 목초관이 침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끝까지 겨루었다면 누가 이겼을지 장 담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낭초민에게 한 가지 의혹을 느꼈기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 "의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동현곡은 스승이 속임수를 썼다는 것 이 매우 치욕스런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무림인이라면 설령 죽을지 언정 정정당당히 대결하는 것이라고 믿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초관은 심통 사나운 아이처럼 시무 룩해 있는 동현곡을 굳이 나무라고 싶 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그를 보면서 오히려 자신의 눈 이 틀림없다고 흐뭇해 하고 있었던 것 이다. 호승지기가 없는 인간은 결코 대 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낭초민의 무공은 예전과 비교도 안 되게 강해졌는데 그의 무공 중 일부가 혈사무주의 무공과 비슷한 점을 발견했 기 때문이다." 동현곡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래서 속임수를 썼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그래야지만 낭초민의 경각심 을 흐트러 놓을 수 있고 그를 추적하여 혈사무주의 행방을 알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동현곡은 스승이 무엇 때문에 속임수를 썼는가 이해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사부님께서 이곳에 온 것도 혈 사무를 쳐부수기 위해 무공을 연성하기 위한 것, 내가 제자된 입장에서 사부님 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 망정 감 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니…….' 그는 죄스러운 얼굴로 목초관에게 용 서를 빌었다. "사부님! 제자 소견이 좁아 사부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 죄스러운 마 음뿐입니다." 목초관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 다. "현곡아! 내 어찌 너의 뜨거운 가슴을 나무랄 수가 있겠느냐? 세상에는 겉으 로는 의협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으나 너처럼 그렇게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승님의 너그러운 마음에 제자 고개 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헛헛……. 자,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나 자." 순간, 동현곡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다. "지금 지옥귀사역을 떠나자는 말씀입 니까?" "왜? 당장 떠나지 못할 이유라도 있 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현곡은 왠지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석옥 쪽을 바라보았다. '흑란! 너를 데리고 가고 싶었는 데……. 그러나 조금만 참아라. 내 반드 시 너를 구출하러 올 테니까.' 목초관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듯 입가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흑란을 염려해서 그러느냐?" 동현곡이 고개를 떨구며 나직이 대꾸 했다. 본심을 들킨 게 창피했기 때문이 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렇게도 그 아이를 잊지 못하겠느 냐?" "예! 제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은 바닷 물이 다 말라 버려도 변하지 않을 것입 니다." 목초관은 제자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 다. 제자의 애타는 마음을 위로해 주고 도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이다. "네가 그 아이에게 향하는 마음을 말 리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아이 를 생각하지 마라. 어서 가자." 동현곡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는 목 초관의 뒤를 따르며 무거운 신색이었다. 사부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으나 차 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으음……." 어디선가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신 음소리가 들려왔다. 동현곡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한쪽 숲 속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죄수들이 올라오지 못하는 곳인데……. 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자신도 모 르게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얼마쯤 숲 속을 헤치며 나가던 그는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 았다. 쓰러져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관 해영이었으며, 그는 가슴에서 시뻘건 선 혈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그는 다급한 음성으로 목초관을 불렀 다. "무슨 일이냐?" 앞서 가던 목초관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부른 동현곡의 모습을 볼 수 없자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여깁니다." 동현곡이 숲에서 손을 흔들자 그제서 야 그를 발견한 목초관이 급히 달려왔 다. "여기 관해영이 쓰러져 있습니다." "관해영이……?" 목초관은 쓰러져 있는 관해영의 상처 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낭초민의 격공어도술에 당했군!" "살아날 가망은 없습니까?" 목초관이 관해영의 맥을 짚어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낭초민의 격공어도술에 당 하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 즉사를 면치 못하는데, 이 아이는 아직도 맥이 뛰고 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로 다" "살아 있다면 사부님께서 손을 써 주 십시오." 동현곡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목초관 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살리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너는 이 아이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 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것이냐?" "그,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살리고 싶습니다." 동현곡이 우물쭈물거리자 목초관은 얼굴 가득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현곡은 이 아이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군. 녀석! 흑란을 그렇게도 사랑하면 서도 연적이다시피한 이 아이를 살리려 하다니…….' 그는 짐짓 안색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나에게는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한 뿌리가 있는데 공력 중진을 위해서 원 래 너에게 복용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어떠냐? 천년하수오 한 뿌리면 이 아이 의 상세는 단 한 시진만에 치유될 수가 있을 것이다. 반면에 네가 복용하면 너 는 가히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수 있는 공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순간, 동현곡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스쳤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공력이 강해지기 를 원한다. 5년 공력이 증진한다는 대환 단 한 알 때문에 숱한 혈겁이 일어나는 무림인데, 지금은 일갑자 이상의 공력이 는다는 천년하수오인 것이다. 동현곡이 갈등을 안한다면 그가 이상 한 것이다. 목초관은 지금 동현곡의 심 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대답을 재 촉 않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일순, 동현곡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빠르게 말했다. 마치 느리게 말하다간 중간에서 번복할까 두렵다는 듯이……. "관해영에게 먹이십시오. 공력이야 제 가 노력을 하면 천년하수오의 효과만큼 은 늘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목초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다시 한 번 생각되는 것이지만 내가 제자 하나만은 잘 둔 것 같군…….' 그는 곧 품속에서 천년하수오를 꺼내 관해영에게 복용시켰다. 그리고는 관해영의 명문혈에다 진기 를 주입시켰다. "잠시 후면 자연적으로 깨어날 것이 다. 자 이제 우리는 떠나자." 목초관이 일어서며 갈 길을 재촉하자 그동안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던 동현곡은 서찰을 접어 관해영의 품속에 다 찔러 넣었다. 힐끗 관해영을 바라보는 동현곡의 얼 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목초관을 따 라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놀랍게도 관해영의 상세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 했다. 낭초민이 이 모습을 봤으면 아마 도 까무러치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천년하수오가 천고에 드문 영약이라도 이렇게 빨리 아물기는 힘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관해영이 평소에 부지 런히 연마한 태극육합일주공의 효능과 겁천혈괴군의 진원내기가 심맥을 보호 한 덕이었다. "끄응!" 관해영이 나직한 신음을 터뜨리며 정 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그는 도깨비에게 홀린 듯한 기분으로 자신의 앞가슴을 내려다보았 다. '이상한 일이군. 나는 분명 낭초민의 도에 가슴이 관통당한 채 떨어졌는데 상처 하나 없다니……, 응?' 그는 품속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 는 것을 알고 급히 손을 넣어 서찰을 꺼내 들었다. 관해영! 나는 스승과 함께 떠난다. 훗일 반드 시 만 나는 날이 있을 것이니 그때 우 리는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보도록 하자. 그러나 미리 밝혀 두지만 내가 흑란을 사랑하는 마음과 너에게 한 판 승부를 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 아 두어라. 동현곡. 관해영은 그제서야 자신이 왜 살아났 는지 알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동현곡이 나를 구해 주었군. 그에게 한 가지 빚을 진 셈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갚아야 하겠지?' 관해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석옥 을 향해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났으니 나도 떠나야 할 때 가 되었군. 참 노형은 어찌 되었을까?'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부리나케 동굴로 신형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동굴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관해영은 직감적으로 낭 초민이 데리고 갔다는 걸 느꼈다. '노형님! 살아만 계십시오. 제가 반드 시 구해 드리겠습니다.' 관해영은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건 낭초민에 대한 복 수를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8 장 (탈출(脫出) 2) 2. 관해영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낮보다는 밤이 탈출하기가 휠 씬 수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윽고 쇠창살 사이로 달빛이 흘러들 었다. 관해영은 감았던 눈을 뜨며 흑란 의 어깨를 조용히 흔들었다. 흑란이 눈을 비비며 졸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할 얘기가 있는 거야?" 관해영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오늘 밤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흑란이 의외라는 듯이 두 눈을 상큼 치떴다. "자신 있는 거야? 두진성과 동현곡이 탈출했다고 경비가 더욱 삼엄할 텐 데……."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관해영 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결코 자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 아." 그는 곧 장일비와 호광에게로 기어갔 다. 장일비와 호광 역시 오늘 따라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불현듯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시시 상체를 일으켰다. "웬일인가?" 장일비가 물었다. "가겠습니다." 관해영의 짤막한 말에 장일비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네." 그들도 오늘 같은 날을 손꼽아 기다 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관해영은 자 신들의 염원을 한 몸에 짊어진 입장이 아닌가? 호광이 매우 아쉬운 듯이 관해영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잘 가게, 부디 밖에 나가거든 자네가 가지고 있는 힘을 마음껏 발휘하기 바 라네." "고맙습니다, 어른." 관해영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떠나는 자나 남아 있는 자나 이별의 아픔은 똑같은 비중으로 저마다의 가슴 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호광이 세상을 많이 산 탓인 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말문을 열 었다. "어서 가게. 이별이란 기약 없는 만남 을 위해 있는 것……, 헤어지면 언젠가 는 만날 날이 있겠지." "그럼!" 관해영이 막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해영! 나 좀 보게나." 언제 깨어났는지 공손중명이 창노한 목소리로 관해영을 불렀다. 평소에 그답 지 않게 힘이 실린 음성이었다. 관해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공손중 명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자신을 불러 세운 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그 를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었다. 그래서 관해영은 그가 예전에 고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미천한 자하곤 어울리기 싫어하는 걸로 짐작했 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불만을 갖지 도 않았다. 그를 도와준 건 불쌍해서일 뿐 어떤 대가를 바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가 놀랍게도 잠도 자지 않고 자신 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공손중명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고맙게 생각 하고 있네." "그건 젊은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손중명은 관해영의 겸허한 말에 깊 이 고개를 끄덕였다. "겸양은 흐뭇한 미덕일세. 내 어찌 죽 을 때까지 자네를 잊을 수 있겠냐만 떠 난다 하니 염치없게도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네. 들어 줄 수 있겠는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겠습니다." 관해영의 호쾌한 대답에 공손중명의 두 눈에는 뿌연 물기가 어렸다. "고마우이, 항주 진회하(秦淮河)에는 내 딸이 있네. 그 아이는 나에 대한 구 명운동을 펴다가 자금이 딸려 스스로 기녀(妓女)로 팔려 갔네." "……!" "그 아이에게 난 잘 있다고 전해주고 복수 따위는 버리라고 일러주게. 딸 아 이의 능력으로는 되지도 않지만 그 아 이까지 죽을 염려가 있네. 단지 자식을 낳아 우리 가문의 대를 잇 게 하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고……." 공손중명은 말끝을 흐리고 소매로 눈 물을 훔쳤다. 한자 네치의 좁은 창문으로 흘러드는 달빛은 두 사람 사이에서 고운 명주실 처럼 부서져 내리다가 공손중명의 얼굴 에서는 백파(白波)로 사라진다. 한 달만에 몰라보게 수척해진 공손중 명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이랑처럼 패여 있고, 깊은 주름살마다에는 진한 슬픔이 양금처럼 묻어 있었다. 관해영은 공손중명의 말 속에 깊은 의혹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노인도 어떤 음모에 희 생당했단 말인가?' 공손중명의 우울한 목소리가 다시 흘 러나왔다. "그 아이를 만나거든 가문의 일 따위 는 잊어버리고 평범한 남자를 만나 행 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관해영이 힘차게 약속을 하자 공손중 명은 안심이 되는지 입가로 한 줄기 미 소가 번졌다. "어서 가 보게!" 공손중명이 손짓을 하자 관해영은 힐 끗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일별을 주었 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들에게 관해영은 이제 희망이었다. 어쩌면 떠나는 관해영보다 자신들이 더 초조한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관해영이 자신들의 염원을 지고 나가기 때문이다. 관해영은 흑란을 데리고 목초관과 동 현곡이 만들어 놓은 비밀통로를 빠져나 갔다. 석옥 밖으로 나오자 오늘 따라 달 빛은 유난히 밝았다. 흑란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 다. "치! 무슨 달빛이 이리도 밝을까?" 관해영이 그녀의 불평에 피식 헛웃음 을 흘렸다. "하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혜택 을 주지. 단지 사람들이 하늘이 주는 혜 택을 선택하지 못하고 불평을 터뜨릴 따름이야." "그렇게 어려운 말도 있냐?" "생각해 봐, 자유의 몸이 되어서 이 달빛을 본다면 달빛이 얼마나 곱겠어?" 그 말에 흑란이 다시 한 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자 유의 몸이 되어 저 달빛을 보고 싶어." 그녀의 중얼거림은 어쩌면 기원인지 도 모른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의 심사가 편안할 리는 없는 것이다. "시간 없다. 흑란! 어서 길을 안내해." "알았어, 나만 따라와." 흑란이 쪼르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 했다. 이곳은 선착장의 정반대에 위치한 벌판이었다. 벌판은 온통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고, 사방 오백여 리 에 달해 있는 광활한 늪지대가 달빛 아 래 온통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벌판을 바라보는 관해영의 얼굴은 굳 어 있었다. '한없이 넓군. 날아서는 도저히 갈 수 가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헤엄을 쳐서 가자면 늪속에 있는 수많은 독충들의 밥이 될 것은 뻔한 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곳을 빠져나 갈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초조감으 로 관해영의 이마에 땀이 배어나기 시 작했다. '배를 빼앗아 타고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거의 오백여 리에 걸친 이 방대한 늪지대 위에는 적어도 수많은 감시선들이 있을 것이다. 만약 불화살이라도 쏘아 서로 신호를 한다면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흑란이 관해영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 다. "지옥귀사역을 감싸고 있는 늪지대를 통과하면 끝없는 사막이 나타나고 사막 을 지나면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지 대가 나타나. 사막지대까지는 가 보았지 만 밀림지대까지 가보지 못했어." 순간, 관해영의 얼굴에 회색이 만면했 다. "넌 어떻게 이 늪지대를 통과했지?" "달 없는 밤을 이용하여 늪을 헤엄쳐 가는 거야." "늪에 흡혈거머리나 식인어 등 수많은 독충들이 있다고 하던데, 넌 어떻게 그 것을 피해 사막까지 갈 수가 있었지?" 흑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 져 올랐다. "나에게는 독물들이 꼼짝 못하는 한 가지 물건이 있어." 이렇게 말한 그녀는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보였다. 그것은 둥근 모양의 옥패(玉牌)였는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칠색서기 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앞면에는 군림(君臨)이란 글자 가 양각되어 있었다. 관해영은 옥패를 바라보며 보통 귀한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흐흐……!" 흑란이 괴상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 했다. 관해영은 의혹 어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흠칫했다. 흑란은 더없이 처연한 얼굴로 옥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아 있었으며 두 눈에는 뿌연 액 체가 고여 있었다. 관해영은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상심에 젖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옥패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거 어디서 났는지 알아?" "……!" "이건 원래 어머니가 지니고 있었던 것인데 내가 집에서 도망칠 때 훔쳐 가 지고 나온 것이야. 어머니는 이것을 아 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 했는데, 난 아 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 흑란이 관해영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나 되게 우습지? 그렇지만 이걸 볼 때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 걸 어떻게 해." "그렇게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왜 집 을 뛰쳐 나왔지?" 그러자 흑란이 잘근 입술을 무는 것 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 병들어 누워 있었고 상노칠은 너무 일 을 시키잖아." "상노칠이 누군데?" "상노칠은 우리 모녀가 의탁하고 있는 곳의 주인으로 예전에 어떤 사람이 그 집에 어머니를 맡겼어. 헌데, 곧 돌아오 기로 한 사람이 십 년이 넘도록 돌아오 지를 않자 어머니는 병들어 누우신 거 야. 그러자 상노칠은 밥값을 해야 한다 고 나에게 일을 시킨 거지." "그럼 너의 부친은?" "어머니에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해. 그 저 대단한 분이래. 내가 다 크면 알려주 겠다나." "헌데 집을 나와 뭘했기에 이곳까지 잡혀 왔냐?" "흐흐! 안 해본 것이 없지……" 흑란이 예의 그 괴상한 웃음을 터뜨 렸다. 어찌 보면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하 고, 한편으로는 가슴 깊이 올라오는 슬 픔을 억지로 막는 것 같기도 했다. "세상 아는 척하지 말고 어서 얘기나 해."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니야. 왜 성질 은 내고 그래……." 흑란이 입술을 삐죽거리다 토라진 목 소리로 말했다. "소매치기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뭐 닥치는 대로 한 거야. 그러다가 우평이 라고 하는 무창 암흑가의 소두목에게 잡혀 그 놈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헌 데, 그 놈이 자꾸 내 몸을 어떻게 해 보 려고 하잖아. 참다 참다 어느 날 우평을 비롯한 소두목들이 술을 마실 때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 버렸지, 뭐……." "……!" 관해영은 입이 떡 벌어졌다. 흑란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몸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험하게 세 상을 굴러먹은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잘 타더라. 모두 죽었지 뭐. 제깟 놈 들이 용빼는 재주 없는 이상 그곳에서 빠져나올 턱이 없지. 헌데,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나를 이곳으로 보내잖아. 그래 서 할 수 없이 이곳에 처박혀 있는 거 지……." 관해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릴 때부터 어두운 곳만 알았군. 그 래도 아직 이 정도의 심성이 남아 있으 니 내가 잘 인도하면 좋은 여인이 될 것이다.' 흑란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무엇 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문을 열었 다. "난 그때 하도 힘이 들어 창기가 될 생각도 했었어.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해 서 억지로 참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잘 한 것 같아." "……!" "만약 창기가 되었다면 너도 못 만났 을 거고 또 널 좋아할 수도 없었을 테 니까 말이야." 관해영은 흑란의 당돌한 말에 등줄기 에 식은땀이 맺혔다. '자신의 감정을 너무 솔직하게 털어놓 으니 은근히 겁이 나는데…….' 그는 흑란과의 분명한 선이 있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선을 그을 마땅한 것이 없 었다. '그래 동현곡이라면 너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이다.' 관해영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녀의 마 음을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흑란! 넌 현곡을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보니 그는 널 좋아하고 또 그는 보기 드문 미남인데……." 흑란이 두 눈을 흘겼다. "넌 자신의 마누라가 다른 사람을 좋 아하면 좋겠니? 다신 그런 말을 꺼내지 마." "뭐?" 관해영은 멍해지고 말았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것이다. 흑란이 대담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남녀의 정까지도 멋대로 생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흑란은 아예 쐐기를 박 아 버렸다. "나에게는 오직 너밖에 없어." 관해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작 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안 되겠어, 이곳을 벗어나면 흑란과 헤어져야겠다.' 흑란이 옥패를 두 쪽으로 쪼개어 그 중 군(君)자가 쓰여 있는 쪽을 관해영에 게 건네주었다. "가지고 있어. 늪을 지날 때 필요하니 까?" 관해영이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 다. "이 귀한 것을 자르다니. 더군다나 이 것은 네가 어머니의 영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데." 흑란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스쳤 다. "그래도 가지고 있어. 내 정표라고 생각하고……." 관해영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 들었다. "정표란 함부로 주는 게 아니야. 서로 의 감정을 확인하고 주는 게 정상이지." 흑란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가지고 있으라면 가지고 있어. 그리 고 난 이미 확인했어. 난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쓰지 않아." 관해영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고 옥패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받으면 무형의 속박인데…….'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도저히 흑란에게 옥패를 되돌려 줄 수 있는 구실을 찾지 못했고 설령 구실을 찾았다고 한들 그녀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불빛들이 두 사람이 서 있는 곳 으로 비춰졌다. "누구냐?" "사자바위 뒤에 있는 놈은 냉큼 앞으 로 나서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감시선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선두에 선 감시원들이 횃불을 일제히 두 사람 쪽을 향해 겨누었다. "들켰어, 어떡하지……." 그녀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보고 관해영이 소리쳤다. "내 허리를 꽉 잡아. 그리고 나를 놓 쳐서는 안돼." 흑란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상황이 급박한지라 관해영의 허리를 죽어라고 끌어안았다. 순간, 관해영이 늪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의 신형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 과 같이 빨랐고, 늪을 평지 달리듯 하고 있었다. 감시선의 인물들은 벌써 까마득히 사 라지고 있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쌔애애애액! 관해영은 질풍처럼 쏘아 나가고 있었 다. 그것은 바로 섬극탄월비였다. '난 이곳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런 수법으로 지옥귀사역으로 들어 온 것을 알고 있다. 동현곡 일행 역시 이런 방법으로 지옥귀사역을 빠져나갔을 것 이다. 만약 진기가 딸려 중도에서 빠져 버린다면 그때는 꼼짝 없이 개죽음이 다.' 관해영은 빛살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앞은 달빛에 반사되는 끝없는 늪지대 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들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것도 없 다.' 슈우우우! 그의 신형은 갈수록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관해영의 허리를 죽어라고 끌어 안고 있던 흑란은 이 사실에 경악을 금 치 못하고 있었다. "해영! 너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관해영이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 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한 가지 알려주지. 현곡도 이런 재주를 가지고 있어. 어쩌면 그는 나보 다 더 빨리 달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 그가 널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은 거짓 말이 아니었어. 그리고 겁쟁이도 아니었 고……." 흑란이 화들짝 놀라며 관해영을 쳐다 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물론! 내가 무엇 때문에 너에게 거짓 말을 하겠어……." 흑란은 잠시 생각하다 살래살래 고개 를 저었다. "그래도 몰랐던 게 다행인 것 같애. 그렇지 않았으면 너를 따라가 허공을 나는 짜릿함을 느껴 보지 못했을 테니 까?" 관해영은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고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 을 할 수 있는 여자는 천하에 흑란밖에 없을 거다. '대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그 대로 말로 뱉아 버리니 당해낼 재주가 없어.' 여명(黎明)! 동녘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 다. 관해영은 그 시간 밀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섬극탄월비! 실로 그 빠름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곳만 벗어나면 되는 것인가?' 흑란은 뒤를 돌아보며 감탄을 터뜨렸 다. "와아! 빠르다. 난 사흘 밤낮을 걷다 가 탈진해서 쓰러진 곳을 순식간에 지 나왔어." 관해영은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그녀 를 데리고 밀림 안으로 들어섰다. 밀림 안은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아 축축한 습기와 회색빛 어둠이 짙게 깔 려 있었다. 더군다나 넝쿨들이 길을 막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관해영은 생각 같아서는 섬극탄월비 를 펼쳐 밀림을 뚫고 나가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 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츠츠츠! 독충들의 괴상한 울부짖음이 연속적 으로 울리고 맹금의 표효 소리가 밀림 안을 진동했다. 관해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식경 쯤 앞으로 나아가자 제법 널찍한 공지 하나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 관해영은 피곤한 듯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나무등걸이에 등을 기대었 다. 흑란은 기운이 팔팔한지 도시 피곤한 얼굴이 아니었다. "배고프지? 잠깐만 기다려 먹을 것을 찾아볼게." 관해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는 놀란 사슴처럼 밀림 안으로 들어갔다. '성질 한번 급하군!' 관해영이 고소를 지으며 지그시 두 눈을 내리 감았다. 순간, "아악!" 흑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울 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응?" 관해영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밀림 안 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여러 마리의 원숭이들이 흑란을 둘러 싸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보통 원숭이들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원숭이들은 성질이 난폭하 기로 이름이 나 있는 사염성원(獅髥猩 猿)들이었다. 사염성원들은 이 낯선 침입자를 결코 관대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카아아아!" 성난 울부짖음을 토해낸 원숭이들이 흑란을 향해 긴 손톱을 무자비하게 휘 둘렀다. 흑란이 사색이 된 얼굴로 원숭이들의 손길을 피해 냈다. 찌익! 하지만 그녀의 옷이 원숭이들의 긴 손톱에 긁히며 찢어지고 백옥 같은 살 결에 긴 혈흔이 생기고 말았다. '저놈들은 흑란을 보자 적인 줄 알고 죽이려 하는군…….'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구 하려고 앞으로 걸어갔을 때 원숭이 한 마리가 또다시 흑란을 공격했다. 흑란은 급히 몸을 굽혀 피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품속에 들어 있던 옥패가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헌데, 사염성원들은 옥패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서광이 신기한 듯이 바 라보다가 느닷없이 옥패를 먼저 차지하 기 위해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그 중 덩치가 유난히 큰 성원 한 마 리가 옥패를 줍자마자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관해영이 신법을 펼쳐 성원의 앞을 막아서자 성원은 자신의 옥패를 빼앗는 것인 줄 알고 한 손을 마구 휘두르며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가볍게 피해 내며 가볍게 우수를 들어 원숭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꽥!" 원숭이가 비명을 지르며 꼿꼿이 뒤로 넘어졌다. 즉사한 것이다. 관해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옥패를 주 워 흑란에게 다가갔다. "아아악!" 순간, 흑란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힘없이 땅에 쓰러져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몸 위에는 수많은 독충 들이 붙어 있었다. 독충들은 옥패 때문에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흑란의 몸에서 옥패가 빠져나가자 일제히 달려들었던 것이다. 흑란의 전신은 무서운 속도로 부어 오르기 시작했다. 관해영이 황급히 흑란을 들어 올리자 독충들이 기겁을 하고 그녀의 몸에서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그건 관해영의 몸 속에 있는 남은 옥패의 향기 때문이 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흑란의 얼 굴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지독한 독충들이군…….' 관해영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조 그마한 동굴을 발견하고 신형을 날렸다.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 겠다.' 거리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9 장 (男性 惡主義 1) 남성렴악주의(男性 惡主義) 1. 관해영의 얼굴은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최대한 독을 빨아내야만 내공으 로 나머지 독을 밀어낼 수 있는데…….' 그러나 여인의 청백지신에 입을 댄다 는 것은 실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망설일 수도 없었다. 이제, 흑란의 몸은 붓다 못해 시퍼렇게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 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살려 놓고 보자.' 그는 흑란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 나 가기 시작했다. 성격이 워낙 활달한 흑 란의 옷은 간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벼운 경장 차림의 겉옷을 벗겨 내자 순식간에 백옥 같은 살결이 거침없이 나타나며 겨우 치부만 가린 헝겊조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허나, 이미 독충에게 물린 자리는 퉁 퉁 부어 오르고 있었고 시커멓게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독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빨리 치 료해야 되겠군.' 관해 영은 성급한 마음으로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는 헝겊을 풀어냈다. 수밀도 같은 두 개의 육봉이 관해영 의 눈을 어지럽혔다. 관해영은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 음쳐 올랐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마지막 은밀한 곳의 헝겊조각을 벗겨 내릴 때 관해영의 손은 매우 떨리고 있 었고, 이마에는 한 줄기 식은땀까지 흘 러내리고 있었다. '휴! 여자의 옷을 벗기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일 줄이야.' 그는 흑란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막상 여인의 나신을 대하자 입으 로 독을 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지, 흑란도 깨어나서 내 얘 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있겠지.' 그가 두 눈을 질끔 감고 흑란의 몸에 입술을 갖다 댈 때였다. "이 놈!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그러 는 것이냐?"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호통과 함께 싸늘한 경풍이 명문혈을 향해 노도처럼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대경실색하여 급히 몸을 날 렸다. 그리고는 급히 동굴 입구로 시선 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노파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눈길로 관해영을 쏘아보 고 있었다. 파뿌리처럼 새하얗게 센 머 리카락과는 달리 노파의 주름살은 별로 많지가 않았다. 관해영은 노파가 젊었을 때 상당한 미인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의 암습에 노호 가 끓어올라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했소?" 노파가 버럭 노성을 터뜨렸다. "이놈! 이 여인에게 무슨 짓을 했느 냐?" 관해영은 그제서야 노파가 자신을 오 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수그러진 얼굴 로 말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전 상처를 치료하 고 있었던 중이었습니다." "듣기 싫다. 넌 분명 흑심을 품고 이 아이를 정신을 잃게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닙니다, 상처를 잘 살펴보십 시오. 독충에게 물려서 이렇게 된 것입 니다." "그렇다면 넌 독충을 부리는 재주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관해영은 노파의 억지에 어이가 없기 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도무지 남 의 말을 들어줄 기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노파였던 것이다. "꼭 본 것처럼 말씀하지 마시오." "안 봐도 훤하다. 남자란 족속들은 겉 이 번지르르 해도 속은 음험하기 그지 없으니까." 관해영의 눈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과거에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군. 아 무리 그렇더라도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 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몰아세운다는 것 은 정신 이상자가 아닌 다음에…….' 노파가 고함을 질렀다. "이놈! 어서 저 아이에게 옷을 입히고 썩 꺼져라." 관해영은 그만 울지도 웃지도 못할 입장이 되어 버렸다. "지금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죽습니 다." "흥!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 상처를 핑계 대어 꼭 음욕을 풀어야 되 겠다는 말이냐?" 관해영은 울컥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자꾸 음욕이니 흑심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시오. 완치를 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노파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방귀를 불 어냈다. "누굴 바보로 아느냐? 그 방법이 아 니라도 치료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 나는 물러날 테니 당신이 치료 를 해보시오." "이제야 속이 좀 찔리는 모양이군. 어 서 사라지거라." 관해영은 생각 같아서는 노파와 일전 을 치르고 싶었으나 굳이 흑란을 치료 하겠다니 군말 없이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파가 예사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노파는 흑란 앞으로 다가가며 불쌍한 듯이 혀를 찼다. "쯧쯧! 오늘도 사내 놈에 의해 불행해 지는 애 하나가 생길 뻔했군." 노파는 곧 품속에서 하나의 주먹만한 피독주를 꺼내 흑란의 입에 물리고 손 바닥으로 전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파의 장심에는 푸른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그것은 상처에 닿자마 자 독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이 아 닌가? 이러한 치료법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설 사 무공을 아는 상승경지의 의원이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노파의 공력은 이미 삼화취정의 경지 에 이르러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19 장 (男性 惡主義 2) 2.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노파는 급히 피독주를 거두어들 이고 한 발짝 물러섰다. "우웁!" 흑란이 울컥 한 사발이나 되는 시커 먼 피를 쏟아내며 눈을 떴다. 흑란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죠?" "난 구벽선 후 봉약매라고 한다." 노파가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는 얼 굴 가득 득의가 넘치고 있었다. 이로 보 아 노파의 명성은 무림에서 상당한 위 치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림이란 곳을 전혀 모르는 흑란으로선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단지 그녀가 궁금한 것은 관해영이 보 이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흑란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제 옆에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어디 갔죠?" "그 음흉한 놈은 내가 쫓아 버렸다." 흑란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음흉하다면……?" "상처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너에게 나 쁜 짓을 하려고 했다." 봉약매는 관해영이 입으로 치료하던 광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순간, 흑란이 못마땅한 얼굴로 뾰족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할머니도 주책이야! 그냥 놔 둘 것이 지 왜 말렸어요?" "뭐?" 봉약매는 그야말로 난데없이 몽둥이 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흑란이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쳤군. 해영을 나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절대적 인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내심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봉약매가 한껏 부드러운 목소 리를 토해냈다. "너는 그 놈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그래요!" 그녀가 뾰족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봉 약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장 훈계를 시작했다. "널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눈을 감아 주니까. 그리고 상대와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는 행동을 은근히 바라 게 된다. 그렇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남자에게 있어 여인이란 미각을 자극하 는 음식과 같아 싫증이 나면 두 번 다 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흑란이 툭 쏘아붙였다. "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고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란 똑같이 늑대일 뿐이다. 나 역시 배신을 당했으니까!" 흑란이 듣다못해 발끈 성질을 부렸다. "당신과 내가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세 요." 봉약매는 그녀의 태도에도 아랑곳하 지 않고 계속해서 타이르듯 나직한 목 소리로 말했다. "넌 아직 철이 없어서 이해를 하지 못 하고 있구나.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의 말 은 모두 진리이니 믿는 것이 좋을 것이 다." "……?" "나의 많은 제자들도 처음에는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나의 철저 한 교육과 직접 간접으로 남자들의 행 실을 경험함으로써 지금은 남자라면 치 를 떨게 되었다." 봉약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중 흑 란과 같은 상황에서 끌려간 여인도 많 다는 것이 아닌가? 흑란이 냉랭히 쏘아붙였다. "남들이 모두 당신의 생각에 동조한다 해도 난 틀려요. 난 내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에요." "너는 남자에 대한 신뢰가 너무 깊어 개조하기가 조금 어렵겠다. 그렇지만 그 런 성격일수록 한 번 돌아서면 남보다 더 철저해지지." "더 이상 당신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요. 해영은 어디 갔죠?" "내가 위협을 주었으니 멀리 달아났겠 지. 남자는 의외로 강자에게는 약하니 까." 그때였다. "전 여기 있습니다." 담담한 한 마디 음성과 함께 관해영 이 다시 동굴 입구로 모습을 나타냈다. "해영!" 흑란이 반가움을 금치 못하고 관해영 에게 달려갔다. 순간, 봉약매가 흑란의 앞을 가로막으 며 관해영을 향해 살기를 뿌렸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아직까지 떠나지 않았다니!" 관해영은 봉약매가 자신을 향해 적의 를 나타내는 것보다 흑란이 무사한 것 에 감사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는 급히 봉약매에게 인사를 했다. "흑란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젠 흑란과 같이 떠나겠습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봉약매가 싸늘히 코웃음을 쳤다. "비켜요." 흑란이 봉약매를 밀어젖히며 관해영 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봉약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넌 갈 수가 없다. 나를 따라가야 한 다." "내가 왜 당신을 따라가야 한단 말이 에요?" "너에게 남자란 얼마나 추악한 동물인 지 알려줄 의무가 나에게 있기 때문이 다." "비켜요. 내가 왜 당신 같은 정신병자 의 말을 듣는단 말이에요?" 흑란이 봉약매를 피해 관해영에게 다 가가려 할 때였다. 팟! 순간적으로 봉약매의 탄지가 번쩍이 더니 흑란이 힘없이 그 자리에 스르르 쓰러져 버렸다. 봉약매는 흑란이 쓰러지는 모습에 놀 라서 바라보는 관해영을 향해 번개처럼 죽오장을 휘두르며 덮쳐 갔다. "스스로 가지 않겠다면 내가 가게 해 주겠다." 위이이잉! 죽오장이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 은 강기를 휘몰고 관해영의 전신을 덮 쳐 왔다. 스치기만 해도 봉약매의 말대로 영원 히 딴 세상으로 가게 될 판국이었다. 관해영은 봉양매의 손속에 흠칫 놀랐 지만 곧 신형을 뒤집어 공세를 피하면 서 소리쳤다. "전 어른과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흑 란을 구해준 공도 있고 하니 저희들이 그냥 떠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봉약매의 얼 굴은 더욱 사나워졌다. 다투고 싶지 않 다니? 이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 닌가? "고양이가 생선을 달라는 격이군." 봉약매는 더욱 더 위맹한 기세로 죽 오장을 휘둘렀다. 사정없는 공격에 관해영은 이리저리 피하다 끝내는 그도 화가 치밀고 말았 다. "자꾸 핍박을 하면 저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참지 못하면 어쩌겠다는 거냐?" 봉약매는 관해영이 의외로 자신을 공 격을 요리조리 피하자 그 급한 성격에 몸이 달 지경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파르스름한 광채가 번득이며 잡고 있는 죽오장이 우웅하는 떨리는 음향을 토해 냈다. 이때, 쓰러져 있는 흑란은 봉약매가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혈도 가 제압당했지만 그렇다고 오공의 감각 마저 마비된 건 아니었다. "해영! 노파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 어 다시는 우리 같은 피해자가 없게 만 들어!" 봉약매가 코웃음 쳤다. "재주가 있으면 마음껏 펼쳐 보아라." 고오오오오오! 죽오장이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관해영의 전신을 노리고 무수한 변화를 그려내며 압박해 들어갔다. 관해영은 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칠금제일장(七禽第一掌), 악작혈명(鵲 血鳴)!" 츠츠츠츠―. 순간, 관해영의 장심으로부터 강맹하 기 이를 데 없는 장력이 노도처럼 밀려 나갔다. "앗!" 봉약매가 경악성을 터뜨리며 재빨리 신형을 뒤로 빼 가까스로 장력의 범위 를 벗어난 다음 말했다. "넌 창궁우사 목초관의 제자냐?" 관해영은 봉약매가 어떻게 목초관을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났으나 내색치 않았다. "그를 알고 있지만 제자는 아니오." 관해영은 악작혈명이 무위로 돌아가 자 다시 쌍수를 휘둘러 봉약매를 공격 해 들었다. 쏴아아아아! 요란한 바람소리가 동굴 가득 울려 퍼지면서 난데없이 수백 송이의 매화가 춤을 추듯이 떨어져 내리며 봉약매의 전신을 덮치는 것이었다. 봉약매가 재차 경악성을 터뜨렸다. "무형상인의 매형오장(梅形五掌)! 무 형상인에겐 제자가 없다고 알았는 데……?" 관해영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안목이 예리하군. 태허철권을 쓴 무 형상인도 알고 있다니.' "겁천마지( 天魔指)!" 슈슈슈슈! 열 줄기 지풍이 봉약매를 향해 섬전 처럼 쏘아져 나갔다. 봉약매는 죽오장을 휘둘러 막으며 아 연해진 얼굴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이젠 맹노괴의 무공까지! 내력이 복 잡한 놈이군!" 관해영의 폭풍 같은 공격을 봉약매도 감히 얕잡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봉약매가 관해영의 공 세에 밀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 는 관해영의 예상 밖의 높은 무공수위 에 잠시 혼란해졌을 뿐이다. 봉약매는 관해영이 펼쳐내는 공격 범 위 안에서 교묘히 공격을 피해내고 있 었다. 문득, 관해영이 손을 멈추고 정중히 말했다. "이제 그만 우리를 보내 주는 것이 어 떻소?" "알량한 몇 푼의 재간을 믿고 너무 설 치지 마라. 맹환이나 목초관이 직접 와 도 나에게는 어림없다." 이렇게 소리친 봉약매는 공력을 배로 증진시켜 죽오장을 휘둘렀다. 위이이잉! 우선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다. 관해영은 갑자기 봉약매의 공력이 배 가 되자 감히 맞서지 못하고 주춤거리 며 물러섰다. '이 노파의 정체가 뭐길래 이토록 강 할까? 목초관이나 맹형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 순간, 봉약매가 갑자기 신형을 날 리며 관해영의 머리 위로 치솟아 올랐 다. 그러자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경풍 이 휘몰아치며 강맹한 살기가 빗발치듯 뿌려지기 시작했다. '으윽!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 다.' 관해영이 창백한 얼굴로 봉약매의 공 격을 피하려 했으나 어느새 허리쪽에 강한 일격을 얻어맞고 지면을 나뒹굴었 다. "오늘은 이쯤 할 테니 어서 물러가라. 난 살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자꾸 비위를 거스르면 참지 못하는 성미다." 봉약매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 소리를 토해내고 흑란을 옆구리에 끼었 다. "놔요! 난 해영과 같이 있어야 한단 말이에요." 흑란이 발버둥쳤지만 그것은 소용없 는 일이었다. "지금은 서운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나를 데려가면 언젠가는 당신을 그냥 두지 않겠어요." 흑란이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공 갈협박으로 위협을 주었으나 봉약매는 고소를 지을 뿐이었다. "모두들 그런 말을 했지만 지금은 나 를 친부모처럼 따르고 있다. 난 너처럼 독기가 강한 여인을 좋아한다. 아직 수 제자가 없었는데 너를 나의 수제자로 삼아야 되겠다." 봉약매가 동굴 밖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놔! 이 할망구야. 난 해영과 같이 있 어야 한다구!" 흑란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관해영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 나 전신의 뼈마디가 부서져 내리는 고 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허리가 부서진 것 같군!'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봉약매가 사라 진 곳을 바라보았다. "이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 겠군! 흑란을 제자로 삼는다고 했으니 신상에는 이상이 없을 테고, 이렇게 되 면 흑란과 자연스럽게 헤어진 셈인데 조금은 씁쓸하군." 관해영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파는 분명 강호상의 유명한 여인일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 흑란을 쉽게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밖은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쏘이고 있 었다. 관해영은 주위를 둘러보며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이젠 어디를 간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갈 곳 이라고는 없었다. 갑자기 가슴속으로 짙은 적막함이 찾 아 들었다. '강호는 넓고 고수는 바닷가의 모래알 처럼 많다. 난 두 번씩이나 남들과 겨루 어 보았지만 두 번 모두 패했다.' 그렇다. 맹환과 목초관의 무공을 익힌 관해영은 나름대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 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낭초민과 봉약매와 싸워본 결 과는 어떠한가? 그는 제대로 손 하번 쓰지 못하고 패하지 않았던가? '사운악의 사부는 천하의 고수이니 난 아직 그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 디든 가서 무공을 증진시켜야만 한다.' '장일비의 말대로 지금까지 익힌 무공 을 종합하여 내 나름대로의 무공을 창 조해 보아야겠다. 강산이 변하는 동안 반드시 이 일을 끝 내고 말겠다.' 관해영! 그는 자신이 싸운 상대들이 모두 천 하 제이인자라는 사실은 모르고 자신의 패배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0 장 (대연신공, 스스로 창안하다 1) 1.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이 년이라는 시 간이 흘렀다. 이곳은 유오이족의 활동무대인 융고 파(隆古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벌판 의 밀림지대가 짙푸른 색깔로 달빛 아 래 빛나고 있었다. 밀림 안에는 폐허가 된 사찰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만 큼 잡목이 우겨져 있고 넝쿨들이 거미 줄처럼 쳐져 있어 여간해서는 발견해 낼 수 없는 곳이었다. 돌연, "우우우!" 엄청난 장소성이 터져나오며 서찰 안 에서 가공할 회오리가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우르르르릉! 콰콰콰쾅!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 엄청난 뇌성이 일어나는가 하면 뽀얀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대체 이 폐허가 된 사찰 안에는 무엇 이 있단 말인가? 사찰 안.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 한 명 의 인영이 태산인 양 우뚝 서 있었다. 청년(靑年). 기다란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고 전신에서는 지극히 차가운 냉기가 뿜어 져 나오고 있었다. 흑발 사이로 번뜩이고 있는 두 눈동 자는 더 할 수 없이 냉혹한 광망을 뿜 어내고 있었다. 청년은 바로 관해영이었다. 그는 지난 이 년 동안을 혼자 있음으 로 더욱 더 냉막해진 것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은 자연이고 무학은 흐르는 물과 같아 자연과 내가 일치가 된다면 그보다 더 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년 동안 관해영은 자나깨나 무공 연마에 모든 것을 쏟았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자연의 힘과 자 신의 무공을 합일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이 년간 그동안 배운 무공을 배 합시켜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으며, 지금 은 새로 창안한 무공을 자연과 조화시 키고 있다.' '이름하여 대연신공(大然神功). 인간이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무리지만 난 대연신공이 극성에 이를 때까지 한시라도 쉬지 않을 것이다. 지 금은 비록 일성밖에 터득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십성을 완벽하게 터득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의 회오리가 대연신공 의 일성의 위력이란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극성을 익혔을 때의 위력은 어떻단 말인가? 태산이라도 뽑고 사해라도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과연 인간의 능력 으로 그런 무공을 익힐 수 있는지 의심 스러울 뿐이다. 관해영은 천천히 죽검을 들어 올렸다. 쿠우우! 엄청난 강기가 그의 죽검에서 용솟음 치듯이 꿈틀거렸다. "대연일검 칠금교탈!" 순간, 번쩍! 눈부시도록 찬란한 검광이 허공 가득 피어오르며 노도처럼 밀림을 향해 쏘아 져 나갔다. 푸스스―.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수천 조각으로 갈라지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고목이 서 있던 자리에는 갈 라진 나무토막들이 커다란 산 하나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실로 가공하기 이를 데 없는 검법이 었다. 그것은 바로 칠금장법과 교탈십팔 도결을 합친 극강의 검법이었던 것이다. "대연이검 천홍월성!" 그것은 바로 천홍혈마강과 쾌검 월성 을 합쳐서 만든 제 이초식이었다. "대연오검!" 스파아앗! 눈부시도록 빠른 한 줄기 빛이 달빛 을 가르고 사라졌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천홍혈마강과 지 상에서 제일 빠른 쾌검 월성을 배합한 극쾌식이었던 것이다. 관해영은 순간적으로 삼초를 전개했 다. 찰나, 고오오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강기가 천지사방으로 밀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번쩍! 검풍이 태풍처럼 일어나고 검광은 수 천대의 화살이 허공을 날 듯이 밀림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파츠츠츠츠―. 밀림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뽑혀 허공으 로 날아오르는가 하면 번뜩이는 검광에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나갔다. 그야말로 방원 십여 장에 달하는 밀 림은 눈 깜박할 사이에 폐허가 되어 버 린 것이다. '대연오검이 완성되었다.' 관해영! 그는 자연과 자신을 불과 이 년 만에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킨 것이었다.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관해영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 있 다가 별안간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혜군앙모(慧君仰慕)라고 짓 자! 내가 혜군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난 관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듯이 대연 오검의 위력을 막을 것은 거의 없을 것 이다.' 혜군앙모! 이로써 대연오검의 마지막 초식 이름 이 탄생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사랑이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담은 극강의 검식이 완성된 것이다. 관해영은 한동안 목상처럼 우뚝 서 있었다. 지난 이 년의 고초가 주마등처 럼 스쳐 갔기 때문이다. 한순간 관해영의 검미가 꿈틀 치솟았 다. '누군가 오고 있다. 발소리가 지극히 가벼운 걸로 보아 내가 고수가 분명하 다. 헌데 지난 이 년 동안 이곳에 사람 의 인적이라고는 없었는데…….' 그는 얼굴 가득 의혹을 띠며 발소리 가 들려오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슈우욱! 그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빛을 갈랐다. 손속?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0 장 (대연신공, 스스로 창안하다 2) 2. 달빛이 명주실처럼 쏟아져 내리는 밀 림 안. 세 사람이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 다. 모두가 사십대 중년인들로서 하나같 이 눈빛들이 날카롭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어깨에 큰 푸대 하나 를 메고 있었는데, 그 푸대 안에는 무언 가 살아 있는 생물이 들어 있는 것인지 가끔씩 꿈틀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세 명의 중년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추혼조(追魂組)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앉아서 기다리자." 그들은 제각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 았다. 그 중 푸대를 짊어진 중년인은 신 경질적으로 푸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중얼거렸다. "제길 누구는 삭신이 쑤시도록 고생하 고 누구는 앉아서 재미나 보니……." 그러자 염소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두 눈에 살기를 뿜어냈다. "맹천! 한 번 더 그 따위 소리를 했다 가는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 이다." 맹천이라 불린 중년인이 찔끔해서 떠 듬거렸다. "알았어! 나도 모르게 그만……." 분위기가 사뭇 험악하게 변하자 장내 는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문득 코에 커다란 사마귀가 난 중년인이 염소수염 을 기른 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 문을 열었다. "그냥 기다리기에는 심심한데……, 어 떤가?" 이어 그는 음탕한 눈길로 푸대를 바 라보았다. 염소수염을 기른 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괜한 생각 마라. 문주가 아는 날이면 당장 황천길이다." "흐흐! 천 리 밖의 문주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우리만 입다물면……." 맹천이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야. 어차피 환희독왕(歡喜 毒王) 같은 색마에게 바쳐질 예물이니 우리가 중간에서 실례를 한다 해도 상 관이 없을 것이네." 염소수염을 기른 자가 무엇인가를 곰 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두 눈에 욕정을 담았다. "그럼 추혼조가 오기 전에 빨리 해치 우자." 맹천이 잽싸게 푸대를 풀기 시작했다. 푸대가 풀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 아 름답기 짝이 없는 십칠팔 세 정도의 여 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커다란 두 눈에 콧날이 유난히 오똑한 모습은 이국적인 용모였다. 그녀는 팔다리를 결박당한 채로 푸대 에서 나오자마자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 다. 발버둥을 치는 데에 따라 그의 미끈 하고 흰 팔다리가 이리저리 엎치락뒤치 락하며 사내들의 눈을 자극했다. 여인을 바라보는 맹천의 두 눈이 이 글이글 타올랐다. 여인은 짧은 가죽 치마를 입고 있었 기 때문에 요동을 치면 칠수록 더욱 더 사내들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풍만한 대 퇴부와 늘씬한 종아리를 드러내게 되었 다. 맹천이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가까이 다가갔다. "흐흐……, 이런 보물을 환회독왕 따 위에게 고스란히 바칠 수는 없지." 여인은 겁먹은 얼굴로 더욱 더 사지 를 버둥거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흐흐……, 너무 두려워 마라. 방사의 즐거움을 미리 알고 환희독왕에게 가는 게 너에게도 유리할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난 유 오이족장의 딸이란 말이에요." "유오이족 따위는 우리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맹천은 여인을 덮치며 허벅지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악!" 여인의 입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져나 왔다. 딱! 그 순간이었다. 하나의 발이 맹천의 턱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으악!" 맹천이 비명을 지르며 일 장이나 허 공으로 붕 떠올라 지면으로 나가 떨어 졌다. 그런 맹천은 사지를 쭉 뻗은 채 움직 일 줄을 몰랐다. 단 한 번의 발길질로 절명하고 만 것이다. 여인의 옆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은 바 로 관해영이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급변했다. '옆에 나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관해영은 그들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여인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여인이 빠르게 관해영의 뒤로 숨으며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두 사람의 놀란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나, 두 사람은 보통이 아닌 듯 평정 을 회복하고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 소리를 토해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 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기껏해야 여인을 겁탈하려는 잡배놈 들이겠지." "네놈은 사대벌왕 중의 현정금문도 들 어보지 못했느냐?" 염소수염을 기른 자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눈길로 사마귀 중년인을 바라 보았다. "원개방! 우리의 신분을 절대 비밀로 지켜야 함을 모르느냐?" 원개방이 안색을 흑빛으로 굳힌 채 급히 입을 다물었다.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대벌왕은 확실히 좋은 놈들이 아니 군. 이렇듯 여인이나 납치하다니…….' 관해영은 이미 지옥귀사역에서 사대 벌왕이 강호에 알려진 것처럼 정의의 수호신이 아니란 걸 겪었던 몸이다. 그 런데 오늘 보니 무림인이 가장 수치로 여기는 여인 납치까지 자행하고 있지 않은가? 관해영은 사대벌왕에 대해 마음속 깊 숙이 분노가 치밀었다. "죽여라!" 두 명의 중년이 관해영을 향해 비호 처럼 달려들었다. 쐐애액!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도광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관해영의 허리 를 휘감아 왔다. 관해영의 입가에 냉소가 번져 올랐다. 순간 그의 죽검이 한 차례 긴 호선을 그렸다. 파아아아! 극패의 검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중년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으아아악!" "크악!" 두 명의 중년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 르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미, 믿을 수가 없다. 나 음양모극(陰 陽矛戟)을 비롯한 삼 인을 일초에 없애 다니. 등세욱의 화신이라도 된다는 말인 가?" 쿠― 웅―. 두 명의 중년인은 자신들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더 니 이내 썩은 고목처럼 지면을 나뒹굴 었다. 음양모극 담걸. 과거 삼상일대를 주름잡던 일대마두 였다.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세 살 먹 은 아이까지도 가차없이 죽이던 흉악한 인물. 그러나 무림 경험이 없는 관해영은 담걸이라는 인물을 알 수가 없었다. 그 는 그를 삼류 고수쯤으로 생각했다. 그가 담걸이 무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알았다면 자신의 무공에 도리어 놀랐을 것이다. 단숨에 세 사람을 관해영은 여인에게 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그동안 관해영의 행동에 넋을 잃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보자 고개를 숙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요, 전 타미라고 해요." '타미?' 관해영은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하 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다 이들에게 잡혀 왔소?" 그러자 타미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 었다. "잘 모르겠어요. 전 분명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푸대 안이었어 요." 관해영은 세 사람의 말을 떠올려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환희독왕에게 잘 보이려고 여염집 여 인까지 납치한 것으로 보아 분명 현정 금문주가 환희독왕에게 무슨 일인가를 부탁하려 한 것임이 틀림없다.' 관해영은 밀림을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누군가가 또 오고 있다. 아까 이놈들 이 말한 추혼조인 모양이다.' 관해영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세 사람의 시신을 밀림 속에다 감추는 한 편 타미를 데리고 밀림 안으로 숨었다. 바로 그 직후, 다섯 명의 인물들이 반 대편 밀림에서 걸어나오며 주변을 돌아 보았다. 그들 역시 중년인들로서 안색이 음침 할 뿐더러 눈매가 날카롭기 이를 데 없 었다. 그들 역시 하나의 포대를 메고 있었 다. 그들은 나무 아래에 주저앉으며 약 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혈랑조는 우리보다 늦는군. 유오이족 의 족장 딸을 데리고 오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래도 그들은 환희독왕 이 그녀를 찍었으니 우리보다는 쉬울 거야. 금련부인 갈색나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내를 구해 오라니……. 우리가 제년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 가?"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중원에서 데 리고 온 열 명의 미녀와 즐기고도 유오 이족의 맏딸을 원하는 환희독왕이나 스 무 명의 미소년을 반송장으로 만들고도 미소년을 찾는 금란부인이나 둘 다 색 골이기는 마찬가지지만 둘을 비교하자 면 금련부인이 더 지독한 것 같아." "하여간 사독채의 그들 부부는 천생 연분인 것만은 사실이야." "그런데 난 우리 문주가 어째서 그들 에게 쩔쩔매는지를 모르겠어." "그거야 사독채의 독술이 천하 제일이 기 때문이지. 그들이 우리를 돕는다면 우리 현정금문은 다른 벌왕들과의 싸움 에서 엄청나게 앞설 수 있기 때문이야. 더군다나 그들 부부에게 다른 벌왕들도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비위를 거슬리면 다른쪽과 손을 잡을 걸세. 그 때문에 문주는 싫은 일도 억지로 하 고 있는 것일세." "신기한 것은 말이야. 그처럼 변덕이 심한 부부들이 아직까지 문주와 유대를 맺고 있다는 거야." "다 이유가 있지. 금란부인은 지금 사 운악 공자에게 흠뻑 빠져 있다네. 그녀 는 사공자와 맺어지고 싶어 환희독왕에 게 우리 문주만 상대하라고 충동질을 하고 있다네." "사공자가 그런 음부(淫婦)를 상대하 려 할까?" "물론 상대할 리가 없지. 그래서 문주 는 사공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할 때마 다 지금 본문을 떠나서 일 년 후에나 돌아온다고 둘러대고 있어. 일 년 안에 는 본문이 필요로 하는 독술을 모두 이 용할 수 있을 테니까!" 다섯 사람이 제각기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관해영의 얼굴에 경악이 스 쳐 지나갔다. '사운악이 현정금문의 인물이었단 말 인가?' 그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운악! 그로서는 단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 는 이름이 아닌가? 그런데 사운악은 등세욱의 고명제자 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현정금문과 연관 이 있을 수 있는가? 관해영은 이 예기치 않은 의혹에 잠 시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추측을 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속시원히 해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 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결심만 했을 뿐이 다, 사독채하고 사운악이 연관이 있다면 절대 그냥 둬선 안 된다는……. '그렇다면 사독채를 그냥 놔둘 수는 없겠군! 사운악에게 득이 돌아가는 것은 모조리 짓밟아 버리겠다.' 이때 다섯 사람이 다시 이야기를 나 누기 시작했다. "헌데 우리가 납치해 온 저 놈은 금련 부인의 눈에 들지 모르겠군! 너무 계집 애처럼 챙겨 먹어서……." "나도 그 점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나 이가 어리기에 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음부들이란 원래 동정을 좋아하니까." "그나저나 혈랑조가 너무 늦는 것 같은데……?" "그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관해영이 그들 앞에 나타나 며 얼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다섯 명의 인물이 지면을 차고 벌 떡 일어서며 관해영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관해영은 대답 대신 한 발 앞으로 다 가갔다. "너희들도 앞으로 그들과 계속 같이 있을 것이다." "혈랑조는 어떻게 되었느냐?" "내가 모두 없애 버렸다. 앞으로 현정 금문도의 인물들은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친 놈! 결코 살려둘 수 없다!" 스스스―. 다섯 명의 인물들이 관해영을 에워싸 기 시작했다. "네놈이 우리들의 얘기를 모두 들은 이상 영원히 입을 봉해야 할 것이다." 쓰르르르릉! 다섯 명의 인물들이 제각기 검을 뽑 아 들고 관해영을 향해 탄환처럼 쏘아 져 들어왔다. 파츠츠츠츠츠! 쐐애애애애액! 사나운 검풍이 천라지망을 구축하고 관해영의 전신을 뒤덮었다. 순간, 관해영의 죽검이 바늘 끝 같은 검망을 헤치며 한 줄기 광채를 쏘아냈 다. 번쩍! 대연일검 중 칠금교탈이 드디어 가공 할 검망을 발출시킨 것이었다. "끄아아악!" "크윽!" 다섯 명의 인물들이 가슴으로 시뻘건 피를 뿌리며 모조리 지면을 나뒹굴었다. 실로 가공한 검초였다. 관해영은 다섯을 눈 깜빡할 사이에 해치우고 포대를 열었다. 열 여섯 살 가량 된 소년이 사지가 결박당한 채 묶여 있었다. 관해영은 소 년의 결박을 풀어주다 멈칫 놀랐다. 소년의 얼굴. 여인보다 화사하고 준미하기 이를 데 없으며 핏빛도 선연한 붉은 입술은 상 대의 혼이라도 흔들어 놓을 것같이 매 혹적이었다. '정말 보기 드문 미소년이군!' 순간 미소년이 낭패한 얼굴로 관해영 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바보 같은 자! 어째서 나를 구하는 거야?" "……?" 관해영은 그야말로 멍한 얼굴이 되었 다. 뜻밖에도 미소년은 정신을 잃고 있 었던 게 아니었다. 立─?.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1 장 (포달랍궁의 옥녀 1) 1. 관해영은 여인의 뾰족한 목소리에 씁 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보니 남장 여인이었군!' 여인이 손목에 남아 있던 밧줄을 신 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에이! 멍청한 방해꾼 때문에 그동안 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잖아?" 관해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멋대로 세상을 살아온 아가씨로군!' 그는 여인을 향해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라 온 환경이 다르듯이 성격 또한 천차만별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성격이라고 한 마디씩 한다면 결국 그는 세상의 모 든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하다가 세상 을 마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여인들이란 자기 중심적이어 서 자신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타미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지 어이없 는 얼굴로 툭 쏘아붙이는 것이었다. "이봐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신 을 구해준 은인에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모르면 잠자코 있어. 난 일부러 납치 를 당했단 말이야!" "그 속사정을 이 분이 어떻게 알겠 어? 의협심을 발휘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타미가 기를 쓰고 관해영을 변호하자 여인은 그제서야 이상한 눈길로 두 사 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었다. "꽤나 위하는군. 보아하니 너도 방금 구출을 받은 것 같은데……."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하는 데는 한 가 지 이유가 있었다. 타미가 입고 있는 옷은 이곳 여인들 이 잠자리에 들 때만 입고 있는 옷이기 때문이었다. 타미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그녀는 옆 눈길로 관해영을 슬쩍 훔 쳐보았다. '좀 냉막해 보이는 분이지만 멋있는 분이야. 내 평생 소원이 이런 분을 만 나는 것이었는데…….' 이때, 남장여인이 관해영을 향해 뾰족 한 목소리로 따졌다. "당신! 내일을 망쳐 놓았으니 어떻게 보상하겠어요?" "보상이라니……?" "남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응당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너무도 당당하게 나오자 관해 영은 아예 기가 질려 버렸다. 관해영은 아직까지 이런 여인을 상대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타미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저 여우같은 계집애가 무슨 꿍꿍이속 이 있는 것이 분명해.' 여자는 눈치로 먹고 산다. 타미는 남 장여인의 억지가 뭔가 목적을 담고 있 다는 걸 느꼈다.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나는 게 상책이 다.' 그녀는 마치 징그러운 뱀을 보았다는 얼굴로 관해영을 불렀다. "공자님! 그냥 가요. 이런 뻔뻔스런 여인과 상대하다 보면 몸만 피곤할 뿐 이에요." 관해영이 의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디를 가자는 말이오?"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을 해야지 않겠 어요? 저희 부족으로 같이 가요." 타미가 답답하다는 듯이 슬쩍 여인을 바라보고는 관해영의 손을 끌었다. 그녀 는 여기서 우물거리다 관해영과 헤어지 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순간, 남장여인이 두 사람의 앞을 막 아섰다. "갈 수 없어. 날 도와 한 가지 일을 끝내야 한다." '계집애! 그럴 줄 알았다니까!' 타미는 자신의 불안이 맞아떨어지자 얼굴에 주름살을 만들었다. "네까짓 게 뭔데 가지 말라고 하는 것 이야?" 여인의 안색 역시 싸늘하게 굳어 있 었다. "건방지게 누구 앞에서 우기는 것이 냐?" 타미가 날씬한 허리에 두 손을 올려 놓으면서 위엄을 부렸다. "난 유오이족의 족장 딸이다. 이 정도 면 너의 의견 따위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겠지." 그녀는 약간 자랑스러운 얼굴로 관해 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과시라는 것을 관해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남장여인이 냉랭히 코방귀를 뀌었다. "유오이족장이 뭐 대단하다고 큰소리 냐? 난 포달랍궁(布達拉宮)의 금동옥녀 (金童玉女) 중 옥녀(玉女)다." 타미가 전신을 흠칫 떨었다. '정말로 천향옥녀(天香玉女) 아몽사 란 말인가?' 기실 타미가 놀라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포달랍궁의 금동옥녀는 당금의 달라 이라마가 출가를 하기 전에 낳은 아들 딸로 따지고 보면 일국의 왕자나 공주 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타미가 놀란 데는 또 다른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오이족이 포달랍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아몽사는 자신들의 공주인 것이 다. 아몽사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번져 올랐다. "내 신분을 알고 나니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는군? 너만 어서 부족으로 돌 아가거라." 그녀가 대번에 말투를 바꾸어 명령을 하자 자존심 많은 타미가 발끈 성질을 터뜨렸다. "아무리 옥녀라도 나에게 명령할 권리 는 없어!" 그러나 아몽사는 전혀 화를 내지 않 았다. 그녀는 마치 너그러운 상관처럼 미소를 지으며 제법 위엄을 부렸다. "이 사람이 옆에 있으니 체면을 세우 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더 이상 말 을 듣지 않으면 유오이족장을 궁으로 불러 들여 벌을 주겠다." "……!" 타미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분 한 듯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버님만 아니라면 얼굴을 할퀴어 줄 텐데…….' 그녀는 내심 분한 마음에 고개를 떨 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순간, "갑시다." 관해영이 타미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몽사의 거만함에 크게 비위가 상했던 것이다. 아몽사가 팔을 벌려 막았다. "어딜 가는 거야?" 관해영의 두 눈에서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한광이 쏟아져 나왔다. "나에게까지 명령을 할 생각이라면 너 의 엉덩이에서 피가 나도록 때려 줄 테 다." 아몽사의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볼기를 때리건 입을 맞추건 그건 당 신의 생각이야.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은 내 일을 도와야 한다구." "난 너를 도울 마음이 없다." 관해영이 냉막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타미를 끌고 달빛 속으로 걸어갔다. 아몽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독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멈춰! 내 말을 거역하면 포달랍궁의 전 고수들을 풀어 널 가만히 놔두지 않 을 것이다." 그녀의 공갈 협박에 관해영은 쓴웃음 을 지었다. "그럼, 그때 또 만나기로 하자." 아몽사는 자신의 협박이 먹혀들어 가 지 않자 두 눈에 살기를 뿌렸다. "날 화나게 하고 무사할 줄 알았느 냐?" 순간, 슈욱! 그녀의 신형이 비호처럼 관해영을 덮 치며 견정혈(肩井穴)을 찍어오는 것이었 다. 관해영이 냉소해 마지않았다. "그 따위 실력으로 버릇없이 굴다 니……." 그가 슬쩍 신형을 비틀어 아몽사의 손길을 피해냈을 때였다. 쫘아아아! 아몽사의 손이 무궁한 변화를 일으키 며 노도와 같은 장력을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리 는 한편 그녀의 장력을 맞받아 쳤다. 펑!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아몽사의 신형 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날아갔 다. 헌데, 그녀의 신형이 팽이처럼 허공에 서 몸을 틀며 각 타봉훼라는 수법으로 두 다리를 맹렬히 휘둘러 오는 것이었 다. 그 기세가 얼마나 드센지 광풍이 휘 몰아쳐 오는 것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다. '무공이 없는 줄 알고 일성(一成) 공 력으로 맞받아 쳤건만 오히려 기습을 해 오다니!' 그는 아몽사의 공격에 눈썹 하나 까 딱하지 않고 발이 얼굴에 닿기가 무섭 게 그녀의 발을 움켜쥐고 숲 속으로 던 져 버렸다. "앗!" 아몽사는 기겁해서 피하려 했으나 그 녀의 신형은 이미 밀림 안 어딘가에 처 박혀 있었다. 타미가 가슴 졸이며 지켜 보고 있다가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찌 푸렸다. "공자님은 너무 마음이 좋은 것 같아 요." "그게 무슨 소리요?" 관해영이 영문을 몰라하자 타미는 대 답하지 않은 채 홱 신형을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이왕 손을 썼으면 단단히 혼을 내 줄 일이지 겨우 집어 던지기만 하다니!' 순간, 타미의 안색이 일그러들었다. '저 계집애가…….' 아몽사가 밀림을 가르며 뛰어오고 있 었다. 타미는 못 본 체하고 관해영을 향 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어서 가요." 그녀가 주춤거리는 관해영을 끌고 걸 음을 옮길 때였다. "같이 가요!" 아몽사가 헐떡거리며 다가왔다.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본인에게 미련이 남아 있소?" 아몽사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매혹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에요, 조금 전의 무례는 제가 사 과할게요." "……?" 관해영은 그녀의 사근사근한 말에 어 리둥절해졌다. '대체 이 여인이 무엇 때문에 태도를 바꾸었을까?' 이때, 아몽사는 자기 나름대로 한 가 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무공은 달라이라마보다 더 강한 것 같다. 반드시 이 사람을 데리고 사독채로 가야 한다. 이 사람 정도라면 능히 내 일을 완수시켜 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꾸 몄다. "저도 유오이족의 부락으로 가고 싶 어졌어요." 원래 그녀의 목소리는 비단폭이 찢어 지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이때는 마치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아 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관해영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 았소?" "급한 것은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한가한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타미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 여우 같은 계집이 무슨 꿍꿍이속 이지? 아무리 나와 같은 여인이라도 변 덕이 죽끓듯 하는구나.' 관해영은 은근히 불안함을 느꼈다. '일이 우습게 되었군. 난 타미와도 헤 어질 생각이었는데 아몽사가 쫓아오면 꼼짝없이 타미를 따라가야 하잖아?' 관해영은 체념한 얼굴로 아몽사를 향 해 물었다. "소저는 일부러 잡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뭐요?" 순간, 아몽사의 얼굴에 우울한 그림자 가 스쳐 지나갔다. "제 동생인 금동(金童)이 갑자기 실종 되었어요. 근자에 많은 미소년들이 실종 되었기에 금동도 누군가에 납치 당한 것이 아닌가 싶어 남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들 이 날 미소년으로 알고 납치를 하더군 요." 타미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사독채가 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포 달랍궁의 금동을 납치하다니……." 그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같은 민족 으로서의 감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관 해영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현정금문도의 무리들이 금련부인의 호감을 사려고 미소년을 납치했으나 그 들은 포달랍궁의 금동이 누구였는지 몰 랐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현정금문이 바로 사대벌왕 중의 하나 라고는 하지만 포달랍궁과 전면적으로 붙는다면 양쪽 다 그 피해가 엄청날 것 이다. 관해영이 다시 물었다. "소저는 사독채에 잠입하여 금동을 구 출하려 하였소?" "그래요." 그녀의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 에 관해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저는 사독채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군. 금동도 당신과 맞먹는 무공을 지니 고 있을 텐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 사독채가 얼마나 용담호혈(龍潭虎 穴)인지 알 만하지 않소?" 그러나, 아몽사의 얼굴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내 힘으로 구하지 못하면 마지막에 신분을 밝히면 되죠. 신분을 알면 나와 금동을 놓아 줄 거예요." 관해영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철없는 아가씨군! 그들은 포달랍궁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살인멸구를 시 킬 것이다.' 아몽사가 밝은 얼굴로 관해영을 바라 보았다. "처음에는 약간 걱정이 되었는데 지금 은 걱정이 없어요. 당신과 함께 가면 충 분히 금동을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관해영은 아몽사가 자신을 걸고 넘어 지자 심히 난처한 얼굴이되었다. '타미와 헤어진 후 빨리 중원으로 돌 아가려고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면 ……. 아무튼 여길 빠져나가야 되겠다.' 관해영은 일부러 냉담한 표정을 지었 다. "난 당신을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없 는데?" "반드시 돕게 할 방법이 있어요." 아몽사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반드시 돕게 할 방법! 과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立─?.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1 장 (포달랍궁의 옥녀 2) 2. 야월적적한 하늘에 은하수가 유난스 레 반짝거린다. 그 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져 있는 평원, 그곳에 서는 하늘의 그 어떤 별빛보다도 더 큰 불빛을 수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바로 유오이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었다. 그 중 유난히 커보이는 천막 안. 유오이족장이 관해영에게 감사의 말 을 올리고 있었다. "딸 아이를 구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관해영은 담담한 얼굴로 유오이족장 을 바라보았다. 오순 가량의 얼굴에 두 눈이 부리부 리하고 우뚝한 콧날 아래 제왕의 수염 을 기르고 있는 모습은 실로 출중하기 이를 데 없는 신태였다. 바로 이 노인, 유오이족의 족장으로서 이름은 타륵(打勒)이었다. 타륵은 그제서야 아몽사를 바라보며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옥녀(玉女)께서 이토록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어 영광입니다." "……." 아몽사는 타륵의 말에 고개조차 까딱 하지 않고 아주 거만한 모습으로 타륵 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타륵은 전혀 불쾌한 빛을 드 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 해 있었다. "오늘 십 년 이래 처음으로 귀빈들이 오셨으니 성대한 연회를 개최할까 하오. 두 분께서는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 그는 밖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 를 토해냈다. "용사백화제(勇士百花祭)를 준비하라 고 일러라." "와아아아!" "유오이족 만세!" 밤하늘을 뒤흔드는 엄청난 함성이 일 었다. 타륵은 유오이족의 수많은 인파들의 함성을 받으며 나무로 만든 백팔 개의 계단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양 옆으로는 거대한 곰을 가둔 우리 들이 늘어서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시킨 밧줄이 있는가 하면 쇠로 된 가마솥에는 횃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타륵이 백팔 개의 계단 을 올라 좌중을 돌아보며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행사를 시작하라." "와아아아!" 군중들의 엄청난 함성이 다시 밤하늘 을 뒤흔들었다. 타륵은 이어 관해영과 아몽사를 바라 보며 정중히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몽사가 먼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타륵이 착석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그윽한 눈길로 관중들을 바라보는 것이 었다. 관해영이 바로 자신의 옆에 앉아 있 는 타미에게 물었다. "대체 용사백화제란 것이 무엇이오?" 타미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용사백화제는 본 부족의 가장 큰 행 사로써 아납진(阿拉眞) 신이 점지한 용 사를 뽑는 행사예요." '용사를?' 관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용사백화제의 제일관문에 도 전하겠소." 계단 아래 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타 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십대의 젊은이로서 거인과 같은 얼 굴에 탄탄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관 중들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아가달(阿家達) 정도라면 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이지. 그는 말 한 필을 거뜬히 들어 올리는 장사인데……." 타륵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순간, 아가달이 신형을 날려 두 개의 나무 사이에 연결된 밧줄 위에 올라섰 다. 그러자 때맞추어 한 명의 인영이 횃 불이 타오르고 있는 가마솥을 아가달에 게 던지는 것이었다. 아가달이 가마솥을 받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밧줄을 타기 시작했다. 출렁―. 밧줄이 아가달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 게 흔들렸다. 아가달의 신형이 넘어질 듯이 비틀거 렸다. 그러나 그는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밧줄의 중간까지는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으나 심하게 요동치는 밧줄 때문에 기어코 지면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 히 아가달은 가마솥을 끝까지 들고 있 어 화상은 입지 않았다. "아가달은 실격이다." 관중 속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곰 같은 장한이 가 마솥을 들고 밧줄 위로 펄쩍 뛰어 올랐 다. 순간, 그는 밧줄 위로 나는 듯이 달려 가는 것이었다. 출렁― 출렁―. 밧줄이 심하게 출렁거리면서 장한의 몸을 옆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한은 워낙 빨리 달리고 있 어서 그는 건너편까지 무사히 다다를 수가 있었다. 관중 속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마장태(馬長太)! 호랑이를 맨손 으로 때려잡았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넌 내 사위로 점찍었다." 마장태는 가마솥을 내려놓으면서 관 중들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어 답했다. 관해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생긴 것하고는 영 딴판이군!' 마장태는 다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 싸이게 되었다. 그는 네 필의 말에 사지 가 묶여 있는 상태였다. 또한 마상에는 각각 한 사람씩 타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긴 채찍 하나가 들려 있었다. 관중들을 숨을 죽이고 마장태를 바라 보았다. 쫘악! 마상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같 은 순간에 긴 채찍을 휘둘렀다. 와두두두두―. 말들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네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나가 는지라 마장태의 사지는 팽팽하게 사방 으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말들은 마장태가 당기는 엄청난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앞발을 길게 들어 올리고 긴 울음을 터 뜨렸다. 마장태의 전신이 땀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시퍼런 힘줄이 지렁이처 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이빨을 악물고 사지를 최대한 움츠리고 있었다. 이히히히힝! 푸르르륵!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안간힘 을 썼다. 그럴수록 마장태의 얼굴은 엄 청난 고통으로 일그러드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장태의 사지가 서서히 펴지 기 시작했다. 순간, "으아아악!" 마장태의 입에서 엄청난 비명성이 터 져나왔다. 와두두두―. 말들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마장태의 사지가 찢겨져 나가기 바로 직전, 탁! 탁! 옆에서 칼을 들고 있던 자들이 황급 히 밧줄을 잘라 버렸다. 지면에서 떨어진 마장태는 기절해 있 었다. 그러자 관중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어렸다. 관해영은 난해한 얼굴이 었다. '무림의 고수들도 어려운 관문을 범인 의 몸으로 통과하려 들다니……. 그야말 로 민첩성과 타고난 신력 없이는 통과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렵겠군!' 이때 아몽사가 상냥하게 물어 왔다. "자지 않을 건가요?" 관해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사실 그는 용사백화제라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타륵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고자 해서 나왔을 뿐이었다 . 더군다나 용사백화제란 무공을 가지 고 있지 않은 사람은 흥미가 있을지 몰 라도 무공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입 장에서 본다면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이 었다. 관해영은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슬쩍 타륵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타륵의 얼굴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 었다. 관해영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자 차마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 때문에 베풀어진 연회인데 어떻 게 빠져나갈 수가 있겠소?" 아몽사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참석했으면 됐지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의무는 없잖아요? 별로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타미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눈길 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가려거든 당신 혼자 가세요. 상관도 없는 남을 끌어들이려고 하지 말고 ……." 아몽사는 그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관해영이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지루하게 구경하 느니 저랑 같이 산책이나 하지 그래 요?" 아몽사가 거듭 자리를 뜰 것을 권하 자 관해영으로서도 마음이 흔들리기 시 작했다. "산책이라, 사실 조금 따분하기는 한 데……." 순간, 타미가 초조한 눈길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관해영이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몽사의 얼굴에는 득의의 미소가 번져 오르고 있었다. '호호! 남자란 어쩔 수 없구나. 나 같 은 미인의 유혹에는 솔깃하지 않을 수 가 없지.' 그녀가 이렇듯 자기 도취에 빠져 있 을 때였다. 망설이던 관해영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 쉬시오. 난 남아 있어야 되겠소. 그게 예의니까." 아몽사의 얼굴에 어려 있던 회심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차디차게 굳어 들었다. 반면 타미의 얼굴은 보름달 같은 환한 미소가 번져 오르고 있었다. 이렇듯 두 여인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지만 관해영은 맹물같은 얼굴로 장 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몽사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바보 같은 자식! 타미가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다고 이토록 감싸고 돌지? 내가 타미보다 휠씬 매력적인 것 같은 데…….' 타미 역시 내심 코방귀를 뀌고 있었 다. '흥! 네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소용 이 없다. 이 분이 나에게 관심을 더 가 지고 있는 이상 넌 나보다는 별 볼일 없는 여인일 뿐이다.' 아몽사가 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드럽 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당신이 남아 있겠다면 나도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결코 자신이 먼저 자리를 떠 타미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녀의 일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내가 자리를 비웠다가 만일 두 사람이 눈이라도 맞는 날에 는…….' 타미의 얼굴이 샐쭉 토라졌다. '형편없는 변덕쟁이 같으니라고! 이랬 다 저랬다 하기는…… 아몽사가 옆에 없어야 일이 수월해지는데…….' 타미! 그녀는 그녀대로 분명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徨萬돛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2 장 (염기제령무 1) 염기제령무(艶氣制靈舞) 1. 이관까지 통과한 유오이족의 용사들 은 몇 명 되기는 했으나 삼관에서 곰과 싸워 이긴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렇게 되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 던 유오이족들은 탄식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올해도 용사는 탄생하지 않을 모양이 군!" "유오이족에는 이렇게도 사람이 없는 것일까?" 그 목소리는 타륵의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타륵의 얼굴은 침중하게 굳어 들었다. '또다시 십 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 가? 내 나이 벌써 오십 줄인데…….' 타륵의 가슴에는 한 줄기 초조한 불 안이 싹터 올랐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아들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사가 탄생하는 것이며, 그 용사 는 타미와 결혼을 하여 자신의 대를 이 을 것이다. 타륵은 무거운 마음으로 중인들을 향 해 소리쳤다. "더 이상의 출전자가 없다면 용사백 화제를 끝내겠다." "……!" 유오이족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이 순간 하나의 기적을 바라 고 있었다. 절대 신인 아납진이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힘을 주어 세 개의 관문을 통과 시키는……. 그리하여 삼십 년 전 지금의 족장이 탄생할 때처럼 뜨거운 감격을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는 여전히 조용할 뿐이었 다. "이것으로 용사백화제를 끝내겠……." 순간, "아직 한 사람이 있어요." 타미의 목소리가 긴박하게 흘러나왔 다. 유오이족의 모든 시선이 타미에게 향 했다. 타미가 발딱 일어나며 관해영을 가리켰다. "관공자가 한 번 도전해 보시겠대요." "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타미의 돌연한 행동에 관해영은 당혹 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타미가 관해영의 손을 끌었다. "어서 나가 보세요. 그리고 우리 부족 사람들에게 천하가 얼마나 넓은지 보여 주세요." 관해영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난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무공을 배 운 것이 아니오." 순간 중인들 속에서 일제히 야유가 터져나왔다. "이제 보니 괜히 소족장 앞에서 거짓 말을 했군. 용기조차 없으면서……." "형편없는 졸장부야." "저런 약골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관해영은 매우 불쾌한 얼굴로 타미를 쏘아보았다. "어째서 나를 곤란하게 하는 거요?" "미안해요. 남들 앞에서 공자님을 자 랑하고 싶어서……." 타미가 정말 하지 못할 일을 한 것처 럼 백배사죄를 하자 관해영으로서도 더 이상 힐책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중인들의 야유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강한 성격의 그로서 는 참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관해영이 광장으로 내려가자 타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야유꾼들에게 후에 필히 큼지막한 보 상을 해야겠군.' 야유꾼에게 보상을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은 타미의 계산된 각본이란 말인 가? 타미가 관해영의 뒤를 따라 가며 귓 속말로 속삭였다. "공자님! 조금 있다가 부족 여인들이 축하의 꽃을 던질 때 잘 보았다가 제가 던진 꽃을 집어 주세요." '꽃을 집으라고? 요구하는 게 많기도 하군.' 관해영은 타미의 뚱딴지 같은 부탁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와…… 아!" "용사가 탄생했다." 유오이족은 관해영의 신기에 열광하 고 있었다. 곰은 관해영의 주먹 한 방에 즉사해 버렸다. "와…… 와!"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 속에 주위 엔 온통 꽃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 은 주위에 몰려 있던 유오이족의 여인 들이 관해영을 향해 꽃을 던졌기 때문 이다. 이때 아몽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 금증을 나타냈다. "꽃을 던지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타륵이 웃으며 대꾸했다. "용사가 꽃을 집어 들면 그 꽃을 던진 여인을 자신의 여인으로 삼을 수가 있 소이다. 대개 관례상 용사는 족장의 딸 과 맺어지지만 공평을 기하기 위해 모 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오." 아몽사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 다. '아뿔사! 저 앙큼한 계집이 그런 꿍꿍 이속을 가지고 있었군.' 그녀는 조금 전에 타미가 자신의 꽃 을 집어 달라고 관해영에게 한 말이 똑 똑히 떠올랐다. 이 순간 관해영은 타미가 던진 꽃이 흰 모란임을 확인했다. 그가 모란을 막 집어 들려 할 때, 팍! 한 줄기 지풍이 모란을 산산조각으로 흐트러 놓았다. 관해영이 놀라 시선을 돌려 보니 아 몽사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타미를 쏘 아보고 있었다. 타미도 분을 참지 못해 전신을 부르 르 떨었다. "아몽사! 무슨 짓이에요?" "이 분이 용사가 되는 것은 무효다." "어째서?" "이 분은 무림인이다. 무림인에게 이 따위 관문은 장난보다 못한 것이다. 내 공을 사용했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밖 에 없다." "무림인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몽사의 눈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난 상관 있어. 넌 이 분을 잡으려고 별짓을 다하는군." "남이야 뭘 하든 당신이 참견할 필요 는 없잖아요." "남의 일이 아니야. 넌 좋아하는 사람 을 남이 채가도록 그냥 놔두는 바보를 본 적이 있느냐?" "그, 그럼……?" 타미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아몽사가 다짐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점찍은 이상 넌 포기해야 되지 않을까?" "당신이 아납진 신이라도 난 포기할 수가 없어요." "뭐야?" 두 여인의 눈에 불똥이 튀어올랐다. 관해영은 두 여인의 싸움에 영문을 몰라 아몽사에게 물었다. "대체 왜들 이러는 거요?" 아몽사가 여지껏 들은 말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관해영은 노한 눈길로 타미를 쏘아보 고는 유오이족을 향해 소리쳤다. "이번 관문 돌파는 무효임을 알립니 다." 관해영은 이렇게 외치고 인파들을 헤 치며 걸어나가자 유오이족들이 술렁이 기 시작했다. "흑!" 타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녀는 관해영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 주는 데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을 느꼈던 것이다. 반면 관해영의 뒤를 쫄랑거리며 따라 가는 아몽사의 얼굴에는 득의의 희색이 만면해 있었다. '호호! 표시는 하지 않고 있지만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녀는 하늘을 날을 듯한 기분에 도 취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눈에 가시 같은 타미의 코가 납작하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바로 그때였다. 타륵을 위시한 유오이족의 부족장들 이 관해영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아닌 가? 그들의 얼굴은 엄숙하고 비장하기 이 를 데 없었다. 만약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면 바로 이런 표정이리라. 관해영이 흠칫했다. '왜들 이런 표정으로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관해영은 내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들 이러는 것이오?" 타륵이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한 번 결정난 일은 절대 번복되지 않 는 것이 본 족의 율법이오. 당신이 방금 의 일을 무효로 만들려면 본족을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소. 아니면 당신이 죽 든가." 그의 음성은 무겁고도 진중했다. 관해영은 거대한 벽에 부딪친 느낌이 었다.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었군! 내가 죽 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죽 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 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것이었다. 방법이라면 오지 타미와 결혼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관해영은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는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 중원으 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다. 순간, 아몽사가 관해영 앞으로 나오며 크게 꾸짖었다. "무슨 짓들이에요? 포달랍궁의 이름 으로 명령하니 어서들 물러나요!" 그녀는 여기서 자신이 완강하게 나가 지 않으면 이상하게 돌아갈 것 같아 서 릿발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타륵의 얼굴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율법에 위배되는 일은 죽을지언정 그 냥 놔두지는 않습니다. 그건 달라이라마 도 인정하는 일이오." 그것은 포달랍궁이 지배하는 그 어떤 부족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아몽사 역시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 다. 그녀는 내심 움찔했으나 곧 짜증 섞 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타륵의 목소리가 완강하게 흘러나왔 다. "꽃을 집어 한 여인을 선택해야 하오. 용사의 피를 얻은 자식을 우리는 반드 시 얻어야 하오." 관해영의 얼굴이 얼음장같이 굳어 들 었다. "내가 끝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면……."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살기가 묻어 있었다. 타륵의 안색이 일그러들었다. 그는 무엇인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 는 듯 두 눈을 조용히 감고 있다가 이 윽고 눈을 떴을 때에는 그의 두 눈은 깊이 가라앉은 호수와도 같았다. "본족이 모두 덤빈다 해도 공자를 이 길 수는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우리가 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셈이오." 돌연 그는 품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십여 명의 부족장들 역시 비 수를 뽑아 드는 것이었다. 타륵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흘러나왔 다. "자결을 하여 율법을 지키겠소." 타륵을 위시한 부족장들이 일제히 비 수를 자신들의 목에 갖다대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 따 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굳은 결의 가 가득했다. 관해영의 안색이 돌변했다. '난감하군! 유오이족은 직선적이어서 가식이 없다고 했는데…….' 그는 타륵의 얼굴에서 죽음의 그림자 를 느끼고 어떻게 할 바를 결정짓지 못 했다. 아몽사는 아몽사대로 어찌할 바를 몰 라 전전긍긍했다. 그녀는 자신이 찍어 놓은 남편(?)이 졸지에 결혼을 하게 될 것 같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런 망발이 어디 있단 말이야? 너희 모두가 다 죽어도 이 분 공자님께 서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타륵은 그녀의 말에 눈도 깜빡하지 않고 관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히 결정하시오." "……!" 관해영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 렸다. 그는 슬쩍 타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타미는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관해영 을 바라보며 애원으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관해영이 처연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타미! 꽃을 가져 오시오." 타미의 전신이 비맞은 참새처럼 바르 르 떨었다. 이어 그녀는 나는 듯이 달려와 한 송 이 모란을 내미는 것이었다. 관해영은 꽃을 받아 쥐었다. 순간 긴장하고 있던 유오이족들이 하 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토해냈다. "와아아……, 타미는 아랍진신의 피를 이어 받은 대용사를 잉태할 것이다." "이제 유오이족에게는 대대로 용사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타륵을 비롯한 십여 명의 장로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고맙소, 유오이족을 구해 주어서 ……." 그들은 관해영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몽사의 안색만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무식한 놈들! 내 이 따위 미신들 을 반드시 없애고 말겠다. 관공자를 반 드시 사독채로 데려가야 하는데……. 일 이 어긋나기 시작하니…….' 그녀는 잡아 죽일 듯한 눈길로 타미 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에 질투의 불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타미가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관해 영의 품에 안겨져 있었던 것이다. 시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2 장 (염기제령무 2) 2. 밤이 깊어가고 천막 안에서 흘러나오 는 불빛들이 별밭처럼 주변을 수놓은 가운데. 타미의 천막 안. 짐승 가죽으로 만든 침상이 자리해 있고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이 질서정연 하게 놓여 있었다. 침상에 관해영이 걸터앉아 있고, 타미 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타미는 너무 행복해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구름 처럼 번져 있었다. "……!" 관해영의 내심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사람 하나 잘못 구해 주었다가 뜻하지 않게 결혼까지 하게 되다니!' 관해영이 대답이 없자 타미가 얼굴을 들어 관해영의 굳어진 얼굴을 바라보았 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요?" "……!" 관해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를 바 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지금 그의 심정으로는 아무런 말도 하 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타미가 잘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 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생긋 웃어 보였 다. "제가 춤을 출 테니 그걸 보시면서 화 를 푸세요." 관해영이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타미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백옥 같은 두 손이 나비를 부르듯이 슬쩍 허공을 휘젓고 살짝 발을 들어 올 릴 때마다 그녀의 가죽치마 아래로 통 통하고 건강미 넘치는 그녀의 뽀얀 허 벅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결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그녀의 춤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문득 의혹이 떠올랐 다. '이상하군! 저건 중원의 춤과 흡사한 데…….'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돌연 타미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나는 타미의 나체. 그것은 실로 숨이 막히는 아름다 움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피 부가 어찌 그리도 건강하고 탄력 있는 것인지. 보는 이가 사내가 아닌 같은 여자라 도 숨이 막히고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 름다운 것이었다. "타미!" 관해영이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순간, '우욱!' 그는 돌연 가슴이 빠개질 듯한 고통 을 느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어 그의 가슴속에는 거대한 불덩이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뿐 아니라 신체 일부분이 급속도 로 팽창되어 왔다. '이, 이것은 섭혼미염무(攝魂美艶舞) 다.' 관해영은 황급히 진기를 끌어올려 끓 어오르는 욕정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진 기를 끌어올리자 욕정은 걷잡을 수 없 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만!" 관해영이 이빨을 악물며 소리쳤다. 타미가 화들짝 놀라면서 뛰어왔다. "왜 그러세요?" 그녀는 관해영이 괴로워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관해영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 춤을 어디서 배웠지?" 타미가 잠시 망설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귀중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겐 세상 어떤 일보다 관해영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본족에서 어떤 여인을 구해준 적이 있어요. 그 여인이 저에게 가르쳐 준 거예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을 때 이 춤을 추면 반드시 그 남자를 사로잡 을 수 있다면서……." 관해영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 왔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타미가 춤을 추었는 데도 관해영이 주체를 하지 못 할 정도라면 만약 무공을 익힌 여인이 이 춤을 춘다면……. 관해영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 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이 춤만 가르쳐 주었느 냐?" 타미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한 가지 더 가르쳐 주었는 데, 그건……." 그녀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 굴을 사르르 붉히는 것이었다. "말하기가 어려운 모양이구나."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조금 있으 면 알게 될 거예요." "조금 있으면 알게 돼?" 관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지?" 순간, "난 여기 있다."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와 함 께 한 명의 중년여인이 천막 안으로 성 큼 들어섰다. 아름다운 얼굴이나 감정이 전혀 나타 나지 않아 차갑게 보였으며 전신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타미의 얼굴에 당혹함이 어렸다. "냉고(冷姑)! 어찌된 일이에요? 두 달 후에나 돌아오신다더니 벌써……." 냉고가 음상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 리로 말했다. "널 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일찍 왔 다." "중원으로 데려간다니, 그게 무슨 말 이에요?" "내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너 에게 섭혼술(攝魂術)을 가르쳐 어디론가 데려가기 위해서다." 관해영은 냉고의 핏기 없는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대로 목적이 있어 타미에게 접근 한 것이었군!' 타미가 겁먹은 얼굴로 관해영의 옆으 로 바싹 다가섰다. "싫어요, 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 요." 냉고의 얼굴에는 음침하기 이를 데 없는 미소가 번져 올랐다. "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려거든 냉고나 가세요. 당신은 내 게 있어 부모나 스승도 아니잖아요." "시간을 끌어 봐야 너만 피곤할 뿐이 다." 냉고의 두 눈에 바늘끝 같은 광망이 쏘아져 나왔다. 타미가 놀라 물러섰다. "냉고, 무서워요!" 그러나 냉고의 손은 어느새 타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잡아끌었다. "얌전히 따라가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팍! 순간적으로 관해영의 손이 비수처럼 냉고의 손목을 후려쳐 갔다. "웃!" 냉고가 나직한 신음성을 터뜨리며 타 미의 손목을 놓고 황급히 물러섰다. 관해영이 냉랭히 소리쳤다.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오." 냉고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죽으려고 환장을 한 놈이군!" 쐐액! 그녀가 번개같이 우수를 뒤집으며 관 해영의 가슴을 후려쳐 왔다. 노도와 같은 장력이 그녀의 손끝에서 부터 회오리처럼 일어나며 밀려들었다. 관해영 역시 일장을 후려쳐 냉고의 장력을 맞받아 쳤다. 펑! 하는 굉음이 이는 가운데 관해영 이 상체를 크게 휘청이면서 뒤로 한 걸 음 물러섰다. 냉고 역시 뒤로 반 걸음이나 물러서 며 경악 어린 시선으로 관해영을 바라 보았다. "이제 보니 제법 재간이 있는 놈이었 군!" 싸늘한 냉소를 터뜨린 후 그녀는 재 차 신형을 날리며 관해영을 덮쳐 왔다. 슈욱! 그녀의 장심에서 붉은 기운이 뻗어나 와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이면서 관해영 의 백팔혈도를 노리고 시시각각 좁혀 들었다. 마치 거미줄 같은 장영은 바늘 틈조 차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관해영을 빽 빽이 둘러싸는 것이었다. 슈욱! 순간, 관해영의 죽검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붉은 안개 속에 가려 있 는 냉고의 인후혈을 향해 섬전처럼 뻗 어나갔다. 대연일검의 절도식이 펼쳐진 것이다. 시뻘건 홍영 사이로 눈부신 검광이 피어올랐다고 느끼는 순간 냉고의 입에 서 짤막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앗!" 이어 홍영이 일시에 거두어지는 것 같더니 다시 부챗살 모양으로 쫘악 퍼 지며 관해영의 가슴을 쳐 오는 것이었 다. "엇!" 관해영이 황망한 음성을 터뜨리며 재 빨리 홍광을 피해냈다. 어느새 관해영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공이 이토록 강하다니!'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의 무공에 확신 을 가지고 있다가 수세에 몰리자 크게 실망했다. 냉고가 우수를 거두어들이면서 탄복 해 마지않았다. "대단하다. 나와 더불어 십 초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강호오패와 사대 벌왕 외에 또 있었다니……!" 돌연 냉고의 얼굴에 음란한 기운이 어렸다. 그녀는 관해영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 고 있다가 자신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관해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그는 냉고가 무엇을 하기 위해 옷을 벗는지를 알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파츠츠―. 그는 대연오검 중 일초를 펼치며 냉 고를 향해 덮쳐 들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광망이 섬전 같 은 속도로 사방을 차단하고 있었으나 냉고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은빛 햇살을 가르고 나 르는 한 마리 잠자리처럼 검광 속을 누 비며 태연한 신색으로 옷을 벗어나가고 있었다. 파팟! 섬뜩한 소리가 울리며 검 끝이 그녀 의 신형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냉고가 걸치고 있던 마지막 옷이었다. 졸지에 힘 안 들이고 옷을 벗은 냉고 의 전신에선 폭발적인 교태가 발산되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어깨의 호선을 타고 내리 는 풍만한 두 개의 육봉, 그리고 쥐면 꺾어질 듯이 가는 세류요를 타고 흐르 다 보면 급격히 확산된 둔부가 관능적 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관해영은 눈앞이 현란해 오자 검초를 흩트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냉고의 환혼무가 더 욱 더 요염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욱!' 관해영이 죽검을 떨어뜨리며 비틀거 렸다. '도저히 내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다. 어째서 타미나 냉고의 섭혼무에는 맥을 못 추는 것일까?' 그것은 관해영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희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3 장 (죽음 앞에서 얻은 기연 1) 죽음 앞에서 얻은 기연(奇緣) 1. 섭혼술(攝魂術)! 그것은 아무리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라도 시간이 오래 경과하면 인간의 내 재된 욕망에 의해 걸려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해영처럼 여인에 대해 담백하고 정 력이 강한 사람이 금방 본능을 느낀다 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 다. 관해영이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으려 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슈욱! 냉고가 돌연 지풍(指風)을 날려 관해 영의 혈도를 짚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비틀거리면서 침상 위로 넘 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고 냉고는 교 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의아한 얼굴이구나. 어째서 자신의 의지가 통하지 않는지." "……!" 관해영이 멀뚱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냉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옷을 입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창안한 염기제령무(艶氣制靈舞) 는 내공과 관계없이 여인이 지니는 본 연의 기를 발출하여 상대를 유혹한다." "……!" "동물의 암내처럼 여인의 음기가 상대 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 건반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 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관해영이 힘겹게 물었다. "결국 염기제령무를 이길 수 있는 방 법이 없다는 말이냐?" 옷을 다 입고 난 냉고가 지그시 입술 을 깨물었다. "염기제령무는 오직 한 사람을 유혹하 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그 사람을 제압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 사 람마저 빠져든다면 염기제령무를 이겨 낼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해영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럼 그 사람이 누구냐?" 순간, 냉고의 안색이 일그러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한순간에 수많 은 희로애락이 스치고 있었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젖어 있던 냉고 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등세욱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이 있느냐?" 관해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또 등세욱인가?' 관해영의 가슴속에는 거대한 반발이 일었다. "난 내가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그가 막아낼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냉고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호호! 자부심이 대단한 놈이군. 그렇 지만 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 재다. 그는 인간이되 신에 가까운 인물 이다." 냉고가 이렇듯이 등세욱을 높이 평가 하자 관해영은 묘한 열등감에 사로잡혔 다. 사운악의 사부이기에 꺾고 싶은 마음 이 간절하나 한편, 생각하면 자신을 이 긴 자들이 항시 등세욱에게는 자신을 양보하기에 마치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냉고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흘러나왔 다. "예전엔 등세욱도 염기제령무에 당한 적이 있었다. 약 이십 년 전의 일인데 그때는 염기제령무의 순수한 위력보다 그가 상대 여인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 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지금은 그때보다 무공이 더 강해졌을 테고 또 한번 당했기에 분명 대비책을 강구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염기제령무도 그때보다 열 배는 더 위 력적이지만, 다시금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번에도 타미의 얼 굴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녀는 슬쩍 타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가에 엷은 웃음을 떠올렸다. 그 웃음 은 마치 등세욱을 꺾을 수 있다는 자신 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해영은 그녀의 말에 한 가지 사실 을 느끼고 얼굴에 분노를 띠었다. "넌 타미의 얼굴이 등세욱이 좋아했다 는 여인과 닮았기에 그녀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구나?" 냉고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녀석! 눈치 한 번 빠르구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곳에서 썩고 있었겠느냐?" "넌 타미를 데리고 가도 등세욱을 이 길 수 없을 것이다." 관해영이 이렇게 소리치자 냉고의 눈 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넌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냐?"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한평생 잊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남자는 자신의 곁 을 떠나간 여자를 오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넌 어째서 그 여인이 등세욱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하느냐?" "너의 말 속에서 느꼈을 뿐이다." 냉고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 져 올랐다. 그녀는 관해영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타미를 데리고 갈 것이다." 관해영이 물었다. "넌 그와 무슨 원한이 있느냐?" 냉고가 싸늘히 코웃음쳤다. "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구 나." "인간은 때때로 쓸데 없는 호기심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냉고가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관해영 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죽을 놈 소원 하나 못들어 줄 만 큼 야박하지는 않다." "……!" "그와 나는 원한이 없다. 그러나 태상 이 등세욱의 죽음을 원하기에 여러 가 지로 그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할 뿐이 다." "태상…….?" "본 통천계(通天界)의 주인이시다. 더 이상은 나도 말할 수가 없다." 냉고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떠올랐 다. '통천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냉고가 얼굴 가득 음침한 살기를 띠며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냉고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 작했다. 관해영이 체념한 얼굴로 두 눈 을 질끈 감았다. 순간, 타미가 벌떡 일어서며 냉고의 앞을 막아섰다. "이 분을 죽여서는 안 돼요." "비켜라." "안 돼요, 절대 비켜드릴 수 없어요. 이 분을 죽이려면 먼저 저부터 죽여 주 세요." 타미가 이렇게 완강하게 나오자 냉고 의 차가운 얼굴에 가벼운 동요가 일어 났다. "넌 이놈을 사랑하느냐?" 타미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래요, 타미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 낀 분이에요." 냉고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랑이란 헌신적이고 상대를 위해서 는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지……." 관해영이 이때 눈을 떠 냉고의 얼굴 에 번져 있는 쓸쓸함을 보고 내심 측은 한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악한 여인도 사랑의 감정을 알고 있단 말인가? 말투를 들으면 저 여인도 사랑의 포로가 되어 시련을 겪 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냉고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한 번의 정분쯤은 허락하마. 그것마 저 거절한다면 앞으로 나의 일에 순순 히 협조하지 않을 테니까." 타미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끝내 이 분을 죽이려면 전 자결하여 당신의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하겠어 요." 순간, 냉고의 얼굴에 얼음장 같은 살 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더할 수 없이 냉혹한 눈길로 타미를 바라보며 한자 한자 힘주어 말 했다. "너에게 이 자만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의 부친을 비롯하여 유오이족의 모든 인원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내가 독한 여인이라는 것을 너는 누구 보다도 잘 알 것이다." 타미가 관해영의 가슴으로 쓰러지며 오열을 터뜨렸다. "흑흑! 난 어떻게 해야 하죠?" 관해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타미! 당신을 결코 원망하지 않을 테 니 냉고를 따라 가라. 날 염려할 필요는 없다." "절 용서하세요. 당신도 중요하지만 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원 치 않아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타미가 몸을 일으키며 관해영을 내려 다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지만 추억을 간 직하고 싶어요." 관해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타미! 안 돼. 이별을 위해서 추억을 만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허나, 타미는 벌써 춤을 추고 있었다. 원래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으므로 관해영의 가슴은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으으……." 관해영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타미의 나혼무는 점점 짙어 지고 있었다. "타미! 더 이상 추지 마라." 관해영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이 숨을 헐떡거렸다. 한켠에 물러선 냉고는 냉혹한 시선으 로 관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으로 나갈 것 같 지가 않았다. 관해영의 두 눈에 핏발이 일었다. 타미는 그 핏발이 무엇을 뜻하고 있 는지 알고라도 있는 것처럼 춤을 추며 관해영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길이 서서히 관해영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었다. 그리고 관해영의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을 때 그녀의 입술은 관해 영의 입술을 덮어 누르며 이렇게 말하 는 것이었다. "당신의 핏줄을 잉태하여 반드시 복수 를 하겠어요." 駭?.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3 장 (죽음 앞에서 얻은 기연 2) 2. 타미가 흠뻑 젖은 모습으로 몸을 일 으키자 냉고가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타미! 이젠 나가 있어라." 타미가 석연한 눈길로 관해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말없이 신형을 돌려 밖 으로 걸어 나갔다. 관해영은 질근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관해영이 참담한 심정에 처해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모기 소리만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타인이 절대 들을 수 없는 전음이었다. "이봐요. 당신은 혈도가 제압당해 진 기를 끌어 모을 수가 없죠?" 관해영의 두 귀가 번쩍 뜨였다. '이 목소리는 아몽사다.' 그는 가슴속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느꼈다. 그것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 만 관해영의 가슴은 그것으로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몽사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제가 한 가지 구결을 알려 드릴 테니 그대로 따라 하세요. 살아날 확률은 얼 마 안 되지만 당신의 자질에 따라 죽지 않을 수도 있어요." "……?" "이것은 대승구식강법(大乘龜息剛法) 이란 것으로 본 궁의 비전절기예요." 대승구식강법! 스스로 인체의 모든 활동을 중지시켜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심공. 그렇게 되면 외부에 아무리 강한 충 격이 와도 몸이 가루가 되지 않는 한 살아날 수 있는 확률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변황 제일의 기공으로 그 모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 다. 특히나 상대의 눈을 속여 목숨을 보 존하는 외에도 내공증진이나 무혈지체 (無穴之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 에도 도달할 수 있는 지고무상한 심공 이었던 것이다. 관해영이 아몽사의 구결을 삼분의 이 쯤 들었을 때였다. 파악! 냉고의 붉게 변한 우수가 관해영의 심장을 때렸다. "으악!" 관해영의 신형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 랐다 침상 위로 떨어졌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냉고의 입술꼬리에 잔인한 미소가 꿈 틀거렸다. "홍옥수는 쇠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 다." 이어 그녀는 신형을 돌리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대벌왕과 혈사무의 움직임이 긴박 해졌다. 그들의 목표도 등세욱! 놈들이 먼저 선수치기 전에 본 계가 먼저 등세 욱을 없애야 한다. 타미의 섭혼술이 아 직 미흡하지만 더 지체할 수가 없다. 목 적지까지 가면서 완성시켜야 되겠다." 스슥! 그녀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유령처 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순간, 천막을 들치고 아몽사가 들어서 며 급히 관해영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관해영의 상체를 살피다가 돌연 얼굴 가득 극도 의 놀람을 띠었다. "맥, 맥이 뛰고 있다니! 기적과 같이 한 가닥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살아 있 을 줄은 몰랐다." 관해영! 그의 신체는 보통 사람들보다 는 휠씬 강한 편이었다. 지옥귀사역의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 과 대승구식강법에 의해 심장이 쇠처럼 단단해졌기에 홍옥수를 견디어 낸 것이 다. 아몽사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 "내상을 치료하기도 만만치가 않지만 일단 살았으니 마음이 가볍군!" 그녀는 관해영을 들쳐업고 천막 밖으 로 나가다가 싸늘한 눈길로 침상을 돌 아보았다. 관해영과 타미가 정사를 나누었던 바 로 자리. 그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 몽사의 두 눈에서는 시퍼런 질투의 불 꽃이 피어올랐다. "계집애, 나중에 딴소리만 해봐라. 이 빨을 모조리 뽑아버릴 테다. 죽은 목숨 을 살렸으니 이 사람은 이젠 내 꺼란 말이야." 휘익! 그녀의 신형이 별빛을 가르고 평원 저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泳汰?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4 장 (괴이한 치료 1) 괴이(怪異)한 치료 1. 상고객잔(上古客棧). 유오이족의 마을을 지나 차미성하(車 美星河)의 후미진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이 객점은 그 규모가 제법 커 보이기까 지 했으며 운치 또한 중원과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기화이초가 만개해 있는 후원 어느 객실을 아몽사가 초조한 신색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침상 위에 죽은 듯이 누 워 있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불안한 음 색으로 중얼거렸다. "왜 아직 안 오는 거지? 설마 그곳에 없지는 않을 테지……." 휘이이익! 순간, 일진광풍이 휘몰아치며 두 사람 이 유령처럼 방 안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 사람은 냉막한 인상의 중년무사였 고 또 한 사람은 다 떨어진 옷에 봉두 난발의 늙은 거지였다. 두 사람은 지극히 냉랭한 시선으로 아몽사를 쏘아보며 으스스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무엇이 필요한 것이냐?" 이렇게 말한 두 사람은 침상 위에 누 워 있는 관해영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몽사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금선혈유(金扇血儒) 당문령(唐文令) 어른과 삼절개옹(三絶 翁) 낙추성(駱秋 星) 어른을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가워 요." 무림이괴(武林二怪)!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와 있단 말인 가? 고금(古今)을 통틀어 가장 기괴한 성 격을 가지고 있는 이들 두 사람. 정(正)도 아니고 사(邪)도 아닌, 그러 면서도 마(魔)도 아닌 이들은 풍진이사 (風塵異士)처럼 천하방방곡곡을 누비며 그 어떠한 상대든 내키는대로 격파해 버리는 초절정의 고수들이다. 아직까지 이들의 오초(五招)를 받아낸 사람은 전무했다. 그러면서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 이들은 그야말로 무림사 이래 가장 기 이한 인물들이었다. 아몽사의 목소리는 일국의 공주답지 않게 지극히 공손했다. 그것은 마치 은방울이 연속적으로 울 리는 것 같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 우 상쾌한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이는 것 같더니 이내 냉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당모(唐某)는 원래 허례를 싫어하 오. 소저가 우리를 부른 것은 필요한 것 이 있기 때문이지 결코 우리 같은 늙은 이를 보려고 한 것은 아닐 테니 어서 용건부터 말하시오." 아몽사 역시 얼굴에 드리워진 웃음을 일시에 거두어 들였다. "좋아요. 나도 당신들과 필요 없는 말 을 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은 마 음은 없어요." 이때, 당모라고 말한 사내가 아몽사의 말을 제지하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소저는 우리의 규칙을 알고 있으리라 고 믿소." 아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오목불(烏木佛)은 여기 에 있어요." 그녀는 곧 품속을 뒤져 하나의 불상 을 내밀었는데, 그것은 조각칼을 처음 잡아본 사람이 나무를 아무렇게나 빚어 놓은 것처럼 볼품이 없는 것이었다. 헌데, 오목불상은 받아든 사람의 눈빛 은 더할 나위없이 반짝거렸다. 그들은 마치 진귀한 보물이라도 받아 든 사람처럼 얼굴 가득 기쁨의 빛을 띠 며 득의의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호호! 마지막 오목불이군!"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많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아몽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오목불을 받았으니 이제 제 부탁을 들어줄 차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두 사람이 퍼득 정신을 차리고 아몽 사를 노려보았다. "흐흐! 물론이다. 우리의 규칙은 오목 불을 건네주는 사람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준다. 그러나 너는 마지막 오목불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 말을 한 사람은 늙은 거지였는데, 그 의 얼굴에는 지극히 음상한 기운이 어 려 있었다. 순간, 아몽사의 얼굴이 침울하게 일그 러들었다. 그것은 마치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 람의 표정 같은 것이었으며 부모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은 어린아이의 얼굴 같 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잘근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 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모든 약속을 이행하면 포달 랍궁으로 쳐들어갈 생각인가요?" 두 사람의 전신에 짙은 살기가 번져 올랐다. 삼절개옹 낙추성의 두 눈에 으 스스한 한광(寒光)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이다. 그 놈의 사승(思承) 때문 에 이십 년간을 이 썩어빠진 서장(西藏) 에서 보냈는데 우리가 참으란 말이 냐?" 금선헐유 당문령 역시 금방이라도 폭 발할 것 같은 노기를 띠었다. "포달랍궁의 땡중들에게 우리가 당한 수모를 몇십 배로 돌려주어도 속이 차 지 않을 것이다." 아몽사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가볍 게 떨었고 안색이 더 할 수 없이 창백 하게 변했다. "이십 년 전 이들은 지존비(至尊匕)라 는 한 자루 보검을 찾기 위해 이곳 서 장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서장의 모든 문파들을 박살내며 지존비의 행방을 추궁했다. 워낙 인명살 상도 많았고, 또 피해도 심해 보다못한 전대의 달라이 라마이신 사승라마께서 이들과 한 가지 내기를 하였는데 그것 은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의 말을 들 어 주기로 한 것이었다." "내기를 한 것은 사승라마께서도 무 공으로 이들을 꺾을 자신이 없기 때문 이었다. 약간의 편법과 속임수를 써서 두 사람을 굴복시킨 사승라마는 열 개 의 오목불을 가장 선량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에게 말하기를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에게 한 가지씩의 일을 해 주라고 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을 영원히 악행을 하지 못하게 막아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이들이 자유의 몸이 되면 서장 에서 이들을 막을 자는 없다. 예전보다 무공이 더욱 고강해진 이들은 포달랍궁 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결국 난 포달랍궁의 죄인이 되는 것이고 ……." 아몽사의 얼굴에는 짙은 갈등이 어렸 다. 물론 지금과 같은 일을 생각 안해 본 것은 아니지만 막상 이들의 흉폭한 시 선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녀는 암울한 시선으로 관해영을 바 라보았다. '그렇다고 이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얼굴은 순간 많은 변화를 일 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은근한 마력으로써 젊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주며 때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 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같은 일을 주름살이 많이 있 는 사람들이 당했다면 그들은 절대 망 설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며 목숨이란 단 한번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문령은 풀무늬가 이는 듯한 변화가 심한 아몽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 았다. "후회한다면 얼마든지 물릴 수도 있 다. 우리는 절대 강요하는 사람들이 아 니니까." 순간, 아몽사가 고개를 발딱 치켜들고 오만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난 태어나서 이제까지 후회라고는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니 어서 저 사람이나 치료해 주세요." 그녀가 침상에 누워 있는 관해영을 가리키자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오목불을 받았으니 살려 놔야지." "젊음이란 때로는 인간을 불투명한 안 개 속으로 몰아넣는 법이거든." 당문령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낙추 성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나쁘다는 것인가?" 당문령이 고개를 저었다.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았네. 단지, 똑 같은 경로를 거친 늙은사람들을 당혹하 게 만드는 불투명한 것이라는 것을 말 하고 싶었을 뿐이네." 낙추성이 투덜거렸다. "젠장! 이십 년 동안 이 냄새나는 서 장에 처박혀 있었더니 사람 하나 병신 만들어 놓았군." 당문령의 눈썹이 곤두섰다. "노괴! 말 조심해. 그렇지 않았다가는 골통을 부셔 버릴 테니까." 낙추성이 성큼 걸음을 멈추고 당문령 을 쏘아보았다. "흐흐흐! 죽음이란 겨울 하늘처럼 멀 리 보이는 것이나 어둠 속에서 보면 바 로 코앞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까?" "뭐야?" "왜 떫은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게?" 당문령의 얼굴에 핏빛 살기가 작살처 럼 쏟아져 나왔다. "포달랍궁의 원한은 둘째 치더라도 내 오늘 너를 염라대왕과 대면식을 시켜 주마." 낙추성이 가소롭다는 듯이 비릿한 조 소를 흘렸다. "개 같은 주둥이에는 몽둥이가 약이 다." 번쩍! 돌연, 승무 빛 어둠이 깔려 있는 방안 에 연속적으로 화사한 빛무리가 번져 올랐다. 당문령이 일수(一手)를 전개한 것이 다. 슈욱! 허공을 가득 메운 수영(手影)은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낙추성의 목을 움 켜잡아 갔다. 그같은 모습은 마치 닭모가지를 비트 는 것과 같이 보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 금 소름끼치는 전율을 일으키게 했다. 낙추성이 냉소를 터뜨렸다. "응조탈혼(鷹爪奪魂)은 세 살 먹은 어 린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손장난에 불 과한 것이지." 그가 슬쩍 몸을 비틀어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허공을 가득 매운 수영이 일시에 벽을 향해 밀려나갔다. 순간, 당문령은 급히 수영을 거두어들 이는 한편 개금오탈각(開金五脫脚)으로 낙추성의 전신을 번개처럼 후려치는 것 이었다. 그것은 번쩍 하는 사이 무려 다섯 번 이나 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낙추성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이, 이놈이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씻지 않은 발로 어른 면상을 걷어차려 하다니. 고목산엽(古木散葉)!" 그의 신형이 홀연 허공으로 뛰어 오 르며 수십 개의 환영으로 갈라지며 당 문령을 덮쳐 내려왔다. "흥! 고목산엽엔 금강풍뢰(金剛風雷) 가 약이다. 금강풍뢰(金剛風雷)!" 당문령의 허공을 차고 올라 몸을 팽 이처럼 휘돌자 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회오리가 일어나 수십 개의 환영을 모 조리 날려 버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무수 한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위에는 모기 소리만한 잡음 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손과 발을 휘두르는 바람소리 또한 일어나지 않았 다. 그런데도 아몽사는 연신 뒤로 휘청거 리고 있었다. 한순간, 그녀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저, 저…….' 사방 벽에는 수많은 손자국과 발자국 들이 뚜렷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찍혀 가 고 있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무학들이었다. 아몽사는 수많은 라마들의 무공을 보 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들과 비 교해서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깨 달을 수 있었다. 문득, 아몽사는 염려의 눈빛으로 관해 영을 바라보았다. 관해영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차디차 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아몽사의 얼굴에 당혹함이 어렸다. 그 녀는 급히 무림이괴를 향해 더할 수 없 이 큰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봐요! 당신들은 싸우다가 저 사람 을 죽일 건가요?" 순간, 무림이괴가 지면에 내려서며 관 해영 쪽을 바라보다 안색을 일그러뜨렸 다. 그들로서도 관해영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끝장을 보지 낳고 손을 멈 춘다는 것이 그들로서는 영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당문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낙추성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들었 다. "할 수 없지. 우리들의 승부는 다음으 로 미루고 우선 저 놈을 살려 놓고 봐 야지." 당문령이 활짝 웃었다. "좋다, 그럼 우리 화해하자." 쫙! 쫙! 순간, 두 사람이 서로의 뺨을 호되게 후려갈기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들의 얼굴은 어느새 퉁퉁 부 어 있었고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 명하게 찍혀 있었다. 헌데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 라보며 헤벌쭉 웃는 것이었다. 아몽사는 기가 막힌 얼굴로 두 사람 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때, 관해영의 상체를 살피던 당문령 이 이를 갈았다. "표화선양 냉하문! 그 여우 같은 년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낙추성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그년의 홍옥수에 심장을 다쳤으 니……, 제길 어렵게 됐어." 두 사람의 안색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그들은 힐끗 아몽사를 바라보며 침음 성을 토해냈다. "맥(脈)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지 만 살려내기가 쉽지 않겠는 걸……." 아몽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쉬운 일이라면 내가 왜 당신들한테 부탁을 하겠어요?" 그녀의 얼음장 같은 말에 낙추성이 괴이하게 웃었다. "흐흐흐! 걱정 마라. 오목불을 돌려주 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이어, 그들은 방 한쪽에 자리해 있는 탁자를 부수어 각각 하나씩의 몽둥이를 손에 드는 것이 아닌가? 아몽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당신들 지금 뭣하는 거예요." "흐흐흐! 보고만 있어라." 낙추성이 관해영 곁으로 다가가더니 느닷없이 몽둥이로 관해영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퍽! 빠악! 두 사람이 관해영을 개패듯이 후려패 자 아몽사의 안색이 흑빛으로 굳어 들 었다. "무슨 짓들이에요!" 그녀가 소리치며 두 사람을 막으려 할 때였다. 낙추성이 몽둥이를 높이 쳐들고 홱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비켜서지 않으면 내려친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 고 있었다. 아몽사가 핼쑥하게 굳어진 얼굴로 주 춤 물러섰다. "대체……." "보고만 있어. 살리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거니까." 낙추성이 돌아서며 또 다시 무자비하 게 몽둥이를 내려쳤다. 당문령이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소 리쳤다. "이괴! 몸 보신한다고 돼먹지 못한 것 들만 주워 먹더니 그 힘은 어디에 두었 으냐? 더 힘껏 내려치란 말이다." 낙추성이 벌컥 노갈을 터뜨렸다. "내 이마에 흐르는 비지땀이 보이지 않느냐?" "그게 땀방울이냐? 개기름이 번들거 리는 것이지!" "조금만 있어! 땀이 개기름을 뚫고 폭 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테니까." "이런 제길! 그러다가는 내가 탈진해 서 죽겠다." 아닌게 아니라 당문령의 얼굴에는 비 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으며 들소처럼 거친 숨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혼신의 힘 을 쏟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순간, 당문령이 몽둥이를 우뚝 멈추며 반색을 했다. "멈춰! 이놈 얼굴에 회색이 돈다." 낙추성이 몽둥이를 집어던지며 소리 쳤다. "그렇다면 무얼 꾸물거려! 어서 벽에 다 세워." 당문령이 관해영을 껴안다시피 해서 팔을 붙들어 벽에다가 기대어 놓았다. 그런 관해영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불 그스름한 혈색이 감돌고 있었다. 낙추성이 품속에서 주먹만한 쇠구슬 을 꺼내들었다. "꼭 붙들고 있어. 놓치는 날에는 만사 도로아미타불이다." 당문령이 심각한 얼굴로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설령, 네놈 철환(鐵 丸)에 맞아죽는다 해도 놓치지 않을 테 니까." "그럼 간다. 제 일구 탄환태(彈還太) 단전(丹田)!" 낙추성이 소리치며 쇠구슬을 집어던 졌다. 쐐애액애액! 쇠구슬이 엄청난 속도로 관해영의 단 전을 가격하고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우왁!" 순간, 관해영의 입에서 피화살을 뿜으 며 허공으로 벌떡 튕겨오르는 것이 아 닌가? "으악!" 당문령이 기겁을 하고 관해영의 전신 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혼신의 힘을 다 해 잡았다. 낙추성이 튕겨나오는 탄환을 잡아 다 시 쏘아내며 소리쳤다. "놓치는 날에는 너와 난 끝이다. 제 이구 실밀타천(實密打天) 관천혈(關天 穴)!" 슈아아아앙! 피앙! 철환이 다시 관해영의 가슴을 때리고 튕겨나갔다. 그러자 관해영의 신형이 앞으로 퉁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당문령은 관해영의 신형이 위로 튀어 오르는 것으로 알고 어깨를 누르고 있 다가 관해영의 이마에 면상을 들이 받 히자 그의 코에서는 뚝이 터진 강물처 럼 뜨거운 선혈이 쏟아져 내렸다. 그의 노화가 삼천 장까지 뻗쳐 올랐 다. "으으……, 노괴야! 남한테 맞아 피를 흘리긴 처음이다. 잘 던져! 철환에 이마 가 터져 죽을 놈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땀을 흘려 보 기는 처음이다." 낙추성의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고 있었다. 아몽사는 이 진풍경에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바로 관해영의 식어가는 피를 뜨겁게 해주는 것이며 상처난 그의 심 장을 순식간에 회복시켜 놓은 격신 생혼타법(隔身生魂打法)임을……. 더군다나 이것은 내공이 삼갑자가 넘 어야만 시전할 수 있는 극상승의 요상 법인 것이다. 문득, 당문령이 소리쳤다. "이, 이놈의 맥박이 정상적으로 뛰고 있다." 낙추성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럼 어서 양쪽 완맥을 움켜잡고 내 력을 불어넣어 굳어져 있던 피를 원활 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사람이 동시에 관해영을 자리에 앉히고 완맥을 잡은 손에 진기를 주입 시켰다. 관해영의 안색이 서서히 평정을 되찾 고 있었다. 반면 두 사람의 신색은 더없이 붉게 달아올랐다. 헌데, 성질이 괴팍하기로 소문난 두 사람. 그들은 관해영의 몸에 서로 진기 를 불어넣다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이 아닌가? 당문령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자식! 은근히 자신의 내력을 과시 하고 있군!' 자신이 불어넣은 내력이 낙추성의 내 력에 밀리는 것을 느낀 것이다. 대뜸 당문령이 자신의 공력을 높였다. 낙추성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내가 너 따위 놈에게 질 것 같으냐? 그동안 꼴도 보기 싫은 네놈과 같이 지 낸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낙추성도 지지 않고 내력을 높였다. 름이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4 장 (괴이한 치료 2) 2. 관해영의 몸을 놓고 서로 내공싸움을 하자 그의 몸은 터질 듯이 부풀었고, 몸 의 반쪽은 동태처럼 얼어붙고 다른 쪽 은 불 속에 뛰어든 것처럼 땀을 뻘뻘 흘렸다. 관해영의 몸에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 는 것은 당문령의 진기는 음한공(陰寒 功)이고 낙추성의 진기는 열강공(熱 功) 이었기 때문이다. 갈수록 두 사람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공력은 이미 십성에 이르러 있었다. '오냐! 네놈이 끝내 물러서지 않는다 면 폐인이 되더라도 날 원망하지 마라.' 이제 두 사람은 이성을 잃어 가고 있 었다.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상대 를 제압하겠다는 일념뿐. 관해영이 자신들의 내력을 이기지 못 하고 전신이 파열되어 죽는 것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한쪽의 아몽사는 어딘지 분위기가 이 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치료를 하는 것으로만 알고 별 의심을 않고 있었다. 한 순간, 무림이괴의 공력이 극성에 이르렀다. 관해영의 몸 속에서 팽팽히 대치하던 두 줄기 성질이 다른 기류가 극성에 이 르자 강한 반발력이 생겨 양쪽으로 튕 겨져 버렸다. 그 결과 자제력을 잃은 두 기류는 관 해영의 임독(任督) 양맥으로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엄청난 내력을 견디지 못하고 혈맥이 터져 죽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것이다. 펄쩍! 관해영의 몸이 허공으로 삼 장이나 치솟았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나가떨어 지더니 몇 번을 꿈틀거리다 잠잠해졌다. "이, 이런……." "바보 같은 놈! 사람의 몸을 놓고 내 공싸움을 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놀란 두 사람이 그제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급히 관해영에게로 달려 갔다. "빌어먹을! 죽은 게 아닐까?"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되면 오목불 을 돌려 줘야 하는데." 모든 것을 눈치챈 아몽사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졌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만약 이 사 람이 죽는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 "그것 참!" 두 사람이 안절부절못할 때, "으음……." 한 소리 신음과 함께 관해영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일단은 관해영이 살아났으니 무림이 괴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기이한 일이군. 백이면 백, 죽었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의아한 것은 일어난 관해영도 마찬가 지였다. 자신이 살아난 사실도 그렇지만 전신 이 날아갈 듯 가뿐하지 않은가? 진기를 유통시켜 보니 알 수 없는 기 운이 사지백해를 힘차게 돌며 전신 마 디마디에 용솟음치는 힘을 불어넣고 있 었다. '치료를 받을 때 무슨 기연을 만난 모 양이군.' 관해영은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무림이괴의 내공 겨룸으로 그들의 진 기가 관해영의 몸을 돌고 돌다 최후에 막혀 있는 임독양맥(任督兩脈)을 뚫어 버렸음을. 즉, 무림인들이 꿈에도 소원하는 생사 현관(生死玄關)이 타동되어 버린 것이 다. 결국 관해영은 엉뚱한 기연을 얻은 셈인데……. "관공자!" 관해영이 살아난 것을 보자 아몽사가 남들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험! 험!" 관해영이 어색한 기침을 터뜨리며 아 몽사를 슬쩍 밀어냈다. "그대가 날 구해 주었소?" 아몽사가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모두 말해 주었다. 다 듣고 난 관해영의 안색이 약간 굳 어졌다. '아몽사에게 큰 빚을 진 셈이 되었 군!' 벌써부터 이번 일을 미끼로 달려들 아몽사를 생각하자 앞이 깜깜했다. 그렇 지만 장부로서 은혜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아몽사! 소저의 걱정은 저들이 포달 랍궁으로 가는 거란 말이죠?" "그래요. 저들은 무공도 높고 원한도 깊으니 포달랍궁은 쑥밭이 될 거예요." "걱정 마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어, 어떻게요?" 관해영이 무림이괴의 앞으로 갔다. "두 분 이 나를 구해 주었으나 계약에 의한 것이니 예의를 차리지는 않겠소." 당문령이 냉랭히 말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오목불을 받았으니 치료를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리 울고불고 매달렸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이는 조금의 은혜도 원한도 없는 상태이기에 난 한 가지 내기를 하 려 하오." 낙추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기라고? 이젠 내기란 소리만 들어 도 신물이 넘어온다." "두렵소?" 순간, "아하하하!" "카카카!" 무림이괴가 엄청난 앙천괴소를 터뜨 렸다. "건방진 놈이군. 감히 우리 앞에서 두 렵다는 말을 하다니!" "감출 필요는 없소. 원래 허장성세가 강한 사람은 속으로 겁이 많은 법이니 까." 관해영의 격발에 두 사람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소로운 놈! 뭐든지 내기를 해 봐 라.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말리 라!" 관해영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어 렸다. '격장지계가 통했군.' "나의 내기는 어렵소. 내가 당신들과 싸워 백초를 넘긴다면 당신들은 앞으로 절대 포달랍궁을 가지 않는 것이오." "따로 따로냐? 아니면 우리 두 사람 모두냐?" "따로 따로 하면 당신들이 손해가 아 니오? 백초의 제한이 있으니 두 분 모 두 상대하겠소." 당문령의 눈에서 스산한 살기가 스쳤 다. "정신이 나간 놈이군. 너를 상대하는 데는 나 혼자서도 이십 초면 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몽사가 재빨리 당문령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무림이괴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니 허언을 하지 않겠죠?" 그녀는 아무래도 관해영이 허언을 하 는 것 같아 국면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 끌어 가려는 속셈이었다. 헌데 화를 내는 것은 도리어 관해영 이었다. "누굴 비겁한 놈으로 만들려는 거요? 두 사람 모두 덤비시오." "크크! 좋다. 그토록 빨리 죽고 싶다 면 소원을 들어 주마." 낙추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낙노괴! 체면이 있지 어떻게 둘이서 이따위 애송이와 싸운단 말이냐?"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왜 못 들어 주겠는 가? 어서 나서게." 낙추성은 당문령보다 조금 지혜가 있 기에 관해영의 장담에 의심이 든 것이 다. '요놈이 이토록 장담을 하는 것을 보 면 일신에 제법 재간이 있는 모양이다. 괜히 사서 망신을 당할 필요는 없다.' 일순간, 낙추성의 신형이 관해영을 향 하여 폭사되며 무수한 장영을 쏟아냈다. 펑! 관해영이 지체없이 장력을 내뻗었다. '이, 이럴 수가…….' 낙추성과 당문령의 얼굴에 경악이 스 쳤다. 왜냐하면 관해영과 낙추성의 장력이 부딪치자 낙추성이 반걸음을 밀렸기 때 문이다. '이제 보니 만만히 볼 놈이 아니군.' 관해영이 두 사람을 향해 의연히 소 리쳤다. "괜히 고집 부리다 망신당하지 말고 어서 전력을 펼치시오. 일초가 지났소." 무림이괴가 서로 눈짓을 주고 받더니 관해영의 양 옆을 공격했다. 파파파파! 세 사람의 신형이 허공에 얽히어 미 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팔초!" 낭랑한 관해영의 음성이 터질 때마다 무림이괴는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관해영의 무공이 그들의 예상을 넘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제 이십초!"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윽!" 나직한 비명이 울리며 세 사람이 지 면으로 내려섰다. 비틀―. 순간적으로 관해영의 신형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관공자님!" 아몽사가 기겁을 하며 그를 급히 부 축했다. "괜찮소, 잠시 기혈이 뒤틀린 것뿐이 니." 이때, 무림이괴는 멍한 얼굴로 관해영 만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도 늙었군. 새파란 후배에게 우 리 두 사람이 덤벼 이십 초가 되도록 제압을 못하다니……. 이 소문이 강호 에 퍼지면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낭패와 치욕! 무림이괴의 심정은 착잡할 뿐이었다. "약속대로 이십 초를 버텼으니 포달랍 궁에 대한 원한은 잊으시오." "좋다. 우린 다른 것은 몰라도 신의는 철저하니까." 파스스―. 당문령이 오목불을 재로 만들며 낙추 성을 돌아보았다. "낙노괴, 가자!" 낙추성이 관해영에게 싸늘한 눈길을 한 번 던지고는 신형을 날렸다. "청산이 변하지 않는 한 또 만날 날이 있겠지. 그렇지만 다음에 는 절대 너를 그냥 두지 않겠다. 우린 패배를 안고는 못 사는 성미니까." 두 사람이 사라지자 관해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림엔 과연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 군. 만약 백초까지 갔다면 어떻게 되었 을지 나도 알 수가 없다.' "관공자님! 고마워요." "아니오, 빚을 갚는 것뿐이니 마음쓰 지 마시오." "그럼, 금동을 구하는 일은 도와주지 않을 건가요?" 관해영은 그녀의 말에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할 수 없군. 그녀는 포달랍궁을 포기 하면서까지 나를 도와 주었는데 나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지 않은가?' 관해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금동을 찾으러." 아몽사가 뛸 듯이 기뻐했다. "가요, 사독채로……!" 한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5 장 (희남궁의 울고 싶은 희극 1) 희남궁의 울고 싶은 희극 1. 마영산(魔影山)! 수목이 울창하고 각종 독충(毒蟲)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 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 다. 그 깊은 산중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앉아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남자는 치렁한 흑발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 용모를 알아볼 길이 없으나 여 인은 영활한가 하면 지혜로운 두 눈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운 미모였다. 바로 관해영과 아몽사였다. 휘영청 떠오른 만월(滿月)이 나무 그 림자 사이로 흘러들고 밤의 전주곡처럼 들려오는 이름모를 풀벌레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그윽한 밤이었다. 아몽사는 관해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 댄 채 행복한 꿈에 젖어 있었다. 문득, 관해영이 아몽사를 향해 심각한 안색으로 물었다. "어떻게 침투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아몽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 무슨 남자가 이토록 목석일까? 호젓하게 둘이 앉아 있을 시간이 얼마 나 된다고 껴안아 줄 생각도 안 하는 거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바로 하며 관해영을 쏘아보았다. "사독채의 주위에는 온갖 독(毒)이 있 어 그냥 들어갈 수는 없어요." "그냥 들어갈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내가 물어 본단 말이오." 아몽사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얘기를 하고 있잖아 요."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높아 주위에 잠을 자고 있던 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관해영은 심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무슨 여자가 이토록 신경질을 잘 부 린단 말인가? 이번 일이 끝나면 일단 도망을 쳐서 마음을 가다듬어야지. 그렇 지 않았다가는 이 여자의 손에 꽉 잡혀 서 오금을 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이렇듯 도망갈 궁리에 몰두해 있을 때였다. 아몽사가 조금은 미안했던지 사근사 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납 치당해 오는 자들과 바꿔치기를 하는 거예요. 모르긴 해도 그들 외엔 납치조 가 몇 명 더 있을 거예요." "그 후엔……?" "각자 요령껏 금동의 거처를 알아내어 연락을 취하는 거예요. 연락 방법은 제 가 알려 드리겠어요. 그리고 한 가지 당 부하겠는데, 아무리 금동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다지만 금련부인의 요구에 응하면 안 돼요." 관해영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당신이나 조심하시오. 환희독왕은 둘 도 없는 색마(色魔)라니까." 아몽사는 관해영이 자신을 걱정해 주 자 매우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당신, 그래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죠?"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해 보고 싶어하 는 여인과는 달리 관해영은 그녀의 질 문이 매우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었다. '틈만 생기면 물고 늘어지는군! 혹시 거머리띠가 아닐까?' 이때, 아몽사가 황급히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저길 봐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희끗희끗 인영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갑시다." 관해영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사독채로 오르는 길을 따라 이인 일 조로 보이는 네 명의 인물들이 하나씩 의 포대를 짊어지고 재빠른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그들은 무공이 매우 높은 듯 지면에 서 한 치 가량이나 떠 있었으며, 그 모 습은 마치 안개가 바람을 따라 이동하 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숲속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관해 영이 아몽사에게 속삭였다. "내가 저들을 따돌릴 테니 당신은 포 대 속의 인물들을 될 수록 멀리 보내시 오." "알았어요." 아몽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관해영이 신형을 날려 네 사람 앞을 막 아섰다. 푸드드득―. 그가 신형을 날리자 그의 주위에 있 던 나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흔들거렸다. 이것은 관해영이 자신의 경공술이 형 편없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 주기 위 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무공이 상대보다 높았다 가는 네 명의 인물들은 자신을 따라오 기는커녕 사독채에게 구원을 요청할 우 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의 신 형이 일시에 멈추어졌다. 그들은 음침하게 가라앉은 회색빛 눈 동자를 굴리며 관해영을 쏘아보았다. "야밤에 길을 막는 것을 보니 결코 좋 은 뜻을 가지고 온 놈이 아니로구나." 관해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대왕의 사자(使者)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확실히 네 놈들은 오래 살지 못할 놈들이다." 그러자 네 명의 인물들은 서로의 얼 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것은 좀 전에 보았던 관해영의 경 공술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뱀이 쥐를 노려보는 듯한 눈 빛으로 관해영을 쏘아보며 음산한 목소 리를 흘렸다. "죽지 못해 환장한 놈이로군." "현정금문도의 애새끼들은 입이 거칠 구나." 순간, 네 명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 원래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얼굴인지라 지금은 아예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송장이 썩어 들어가 고 있는 듯한 얼굴이어서 보는 사람으 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육순 가량의 음산하게 생겨먹은 노인 이 앞으로 나섰다. "넌 누구기에 우리들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 관해영이 더할 수 없이 싸늘한 목소 리로 말했다. "난 전문적으로 현정금문도의 인물들 이 납치하는 미동미녀(美童美女)를 구 해 주는 사람이니 자연히 너희들의 정체를 알고 있지 않 겠느냐?" 노인의 두 눈에 핏빛 살기가 어렸다. "죽여서 놈의 입을 봉해라." 슈슈슈슈! 순간, 네 명의 인물들이 돌연 검을 뽑 아 들고 관해영을 항해 덮쳐 들었다. 싸늘한 검풍이 여인의 통곡소리처럼 울리고 번뜩이는 검광이 달빛 아래 푸 른 빛깔로 번져 올랐다. 관해영이 일부러 당혹함을 드러내며 가까스로 검을 피해냄과 동시에 검을 뽑아든 채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죽어!" 노인이 소리치며 일도양단(一刀兩斷) 의 기세로 검을 내리쳐 왔다. "으악!" 관해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났다. 순간, 그의 검이 묘하게도 노인의 가 슴을 깊숙이 쑤시는 것이었다. "이, 이 놈이……?" 노인은 입으로 선혈을 흘리며 비틀거 렸다. 그런 그의 얼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저, 저 놈은 고…… 고……." 노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썩은 고목처럼 지면을 나뒹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의 신색이 더할 수 없 이 싸늘하게 굳어 들었다. 그들은 관해영이 실력으로 노인을 죽 였다고는 믿지 않았다.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주마." 번쩍! 파츠츠츠―. 세 자루의 검날이 눈부신 속도로 관 해영의 치명 요혈을 노리고 날아 들었 다. 관해영이 감히 맞설 수 없다는 듯이 신형을 빼며 숲 속으로 줄행랑을 놓았 다. "쫓아라!"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세 명의 인물이 신형을 번뜩이며 관 해영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해영의 경공술이 형편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관 해영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 명이 사라진 직후, 스슥! 달빛을 밟으며 아몽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재빨리 포대를 푼 다음 소동 (少童)과 소녀(少女)를 껴안고 숲 속으 로 몸을 날렸다. 휘이익! 순간, 관해영이 포대 옆으로 신속히 떨어져 내리며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 다. "아몽사! 어떻게 된 것이오?" 그러자 포대 속에서 아몽사가 급히 말했다. "빨리 숨기나 해요." "알았소." 관해영은 안도의 숨을 쉬며 포대 속 으로 숨어들었다. 그로부터 일다경이 지난 후에야 세 명의 인물들이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다람쥐 같은 놈! 잡힐 듯 잡힐 듯 하 면서도 귀신같이 달아나다니……." "경공술은 형편없으면서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것이 귀신 뺨치는 놈이야." "햐여튼 빨리 가세. 이러다가는 시간 이 늦었다고 사독채가 지랄발광을 할 테니." 세 사람이 포대를 짊어지고 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노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맹노인 시체는 어떻게 하지?" "숲 속에다가 감춰. 사독채 놈들한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우리의 체면만 깎일 테니……." "그럼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하는 걸 세!" 포대를 짊어지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노인의 시체를 들어 숲이 우거 진 곳에 은밀히 묻어 놓았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 이었다. "시체 썩은 냄새에 사독채 놈들이 발 견해 내지 않을까?" "웃기는 소리 마라? 내일 아침이면 독충들에게 먹혀 뼈만 앙상할 거니 두 고 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독채를 오르기 시작했다. 건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5 장 (희남궁의 울고 싶은 희극 2) 2. 산의 한가운데 우뚝 치솟아 오른 수 십 채의 고루거각(高樓巨閣)들, 마치 하 나의 성을 방불케 할 만큼 웅대한 규모 였다. 세 사람이 지극히 호화로운 고루거각 앞으로 다가갈 때였다. "누구냐?" 우거진 숲 속에서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천천히 신형을 돌려 숲 속 을 바라볼 때였다. "그대로 서 있어! 손가락 하나라도 까 닥했다가는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너무 그렇게 윽박지르지 마라. 우리 는 현정금문도의 채화조(採花組)다." "증패를 보여라!" 포대를 짊어지지 않은 자가 품에서 사각영패를 꺼내 들었다. 숲 속에서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하군. 해독약을 받아라." 쐐애애애! 숲 속에서 푸른빛 도는 세 알의 환약 이 동시에 쏟아져 왔다. 세 사람이 낚아 채듯 해독약을 받아쥐고 입 속으로 털 어넣었다. 그러자 파리하던 그들의 안색이 일시 에 은은한 홍조가 어리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싸늘한 눈길로 숲 속을 바 라보고는 이내 발길을 돌려 거각을 향 해 다가갔다. 순간, 그들 앞에 두 개의 푯말이 나타 났다. 환락궁(歡樂宮)! 희남궁(戱男宮)! 환락궁은 분명 앞에 보이는 고루거각 을 가리키고 있었고, 희남궁은 그 옆에 우뚝 솟아 있는 전각을 가리키고 있었 다.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인계하고 숙소에서 만나세." 세 사람이 뿔뿔이 흩어졌다. 관해영을 들쳐업은 장한은 희남궁을 향해 다가갔다. 희남궁 앞에는 거의 전라의 여인들이 창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으며 장한 을 보자 대뜸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멈춰라! 더 이상 다가왔다가는 목에 바람구멍을 내줄 테다." 장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망할년들! 생각 같아서는 사지를 찢 어 죽이고 싶다만은…….' 그러나 장한은 내심과는 달리 더할 수 없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화조의 한 사람으로서 미소년을 잡 아왔습니다." "내려놓고 가라." 장한은 말없이 포대를 놓고 왔던 길 로 되돌아갔다. 여인들이 포대를 향해 다가오며 조잘 거렸다. "음남(淫男)이 될 놈 하나가 또 왔군. 제발 미끈한 사내가 왔으면 좋겠는데! 모두 비린내나는 아이들뿐이니……." "헌헌장부(軒軒丈夫)라면 우리까지 오 겠어. 난 어린 미소년이라도 자주 안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요즘은 다 죽어가 는 애들만 우리에게 오니 어디 데리고 놀맛이 나야지." "그건 희남궁(戱男宮)에 외부인들이 많이 와서 그래. 예전에는 부인 혼자였 기에 싫증이 나면 우리가 데리고 놀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렇잖아." 저마다 불평을 털어놓던 여인들 중 한 여인이 포대를 들쳐업고 안으로 들 어갔다. '이것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관해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포대를 뚫 어 주위를 살폈다. 호화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대전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겨우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은 여인만 있는 곳이군! 이거 혹 시 여우 소굴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바로 그때였다. 커다란 대전 앞에 선 여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교님! 현정금도문에서 잡아온 사 내입니다." 삐이이익! 육중하기 이를 데 없는 대전의 문이 열리며 중년 여인이 걸어나왔다. 여인의 몸은 마치 커다란 통나무를 연상케 할 만큼 뚱뚱했다. "놓고 가거라." 중년부인의 목소리는 망치로 징을 두 드리듯 고막을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여인이 포대를 놓고 사라지자 중년여 인이 곧 포대를 풀어 관해영의 머리카 락을 잡아끌고 일으켜 세웠다. 관해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디지?" 순간, 여인의 곰 같은 발이 관해영의 복부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욱!" 관해영이 죽는 소리를 지르며 배를 움켜쥐고 지면을 나뒹굴었다. 그러자 여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 다. "말해 두지만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묻 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라." 관해영은 당장에 여인을 때려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아몽사의 입장을 생각해 꾹 눌러 참았다. 관해영이 엉금엉금 기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척했다. 중년여인이 벽 한쪽에 불쑥 튀어나온 손잡이를 비틀었다. 그그그긍! 돌연, 한쪽 벽이 쫘악 갈라지며 고통 스런 비명이 흘러나왔다. "아아악!" "크으으……!" 관해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다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 넓은 대전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사지 가 결박당한 채 혹독한 형벌을 받고 있 었다. 시뻘건 인두로 전신을 지지거나 가시 달린 채찍으로 마구 사내들을 내리치는 여인들. 마치 지옥의 나찰과도 같은 모습이었 다. 중년여인이 다시 기관장치를 누른 다 음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듣지 않거나 도망칠 궁리를 하 면 너도 저 꼴이 된다." 관해영의 가슴 속에서 한 줄기 살기 가 치솟았다. '금동만 찾으면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 어야겠군.' "따라 오너라." 중년여인이 관해영을 데리고 어디론 가 가기 시작했다. 붉은 수정등이 걸려 있는 어느 대전. 비대한 체구의 여인들이 두 줄로 늘 어서 있었다. 여인들의 맨 앞에는 하나 의 태사의가 놓여 있고 지금 그 위엔 이십대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앉아 있었 다. 그리고 여인들의 앞에는 십여 명의 미소년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때, 중년여인이 관해영을 데리고 와 태사의의 여인들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 였다. "수좌님! 이번에 잡아온 자입니다." 태사의의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 였다. "대열 속에 넣어라." 관해영이 대열 속으로 들어가자 태사 의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난 너희들을 희남궁의 음남으로 교 육시킬 나찰교두(羅刹敎頭) 감옥산(甘玉 珊)이다. 너희들은 나와 여기 있는 이십 여 명이 여교두(女敎頭)들의 말에 철저 히 복종을 해야 한다." "……!" "……!" 소년들은 모두 한 차례 혼이 났는지 긴장된 표정으로 감옥산의 말에 잔뜩 귀를 기울였다. 감옥산이 대열 속으로 들어오며 소년 들을 훑어보았다. 문득,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한 소년 에게 물었다. "넌 희남궁의 음남이 된 게 영광이라 고 생각되느냐?" 창백한 안색의 미소년이 고개를 흔들 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감옥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삼여교(三女敎)!" 그녀의 바늘 같은 목소리에 한 여인 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하명하십시오." "이 놈에게 희남궁의 음남이 된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가르쳐 주어라." "알겠습니다." 삼여교는 대답과 동시에 다짜고짜 소 년을 후려패기 시작했다. "으악!" 샌님 같은 소년은 여인의 매를 견디 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터뜨 렸다. 소년이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다. "영광입니다, 지상 최대의 영광입니 다." 삼여교가 그제서야 손을 멈추고 물러 섰다. 감옥산의 발길이 이번에는 관해영의 앞에서 멈추었다. "넌 이곳 희남궁이 천하의 어떤 곳보 다 남자들에겐 천국이라고 생각되지 않 느냐?" 관해영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희들의 착각일 뿐이고 희남 궁이란 돼지보다 못한 여인들이 모인 가장 더러운 곳이다." 순간적으로 감옥산의 얼굴이 독오른 암코양이보다 더 앙칼지게 변했다. "일여교!" 맨 앞에 있던 여인이 재빨리 달려왔 다. "교육시켜라!" 감옥산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여교는 관해영을 번쩍 치켜들었다. 휘익! 그녀는 사정없이 관해영을 벽으로 집 어던졌다. 퍽! 관해영의 몸이 벽에 부딪쳐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욱하는 바람에 고생하게 생겼군.' 일여교는 무자비하게 관해영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아프지는 않지만 자존심을 참기가 힘들군.' 관해영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연 신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아이구!" "아직도 희남궁이 돼지우리라 생각되 느냐?" 관해영이 냉큼 큰소리로 외쳤다. "아니다. 무조건 너희들의 주장이 최 고다." 감옥산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어렸 다. "사내란 꼭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 니까!" 관해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일여교 의 주먹이 느닷없이 그의 얼굴을 강타 했다. 퍼퍽! "실컷 때리고 한 대 더 때리는 거냐?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또 한 가지 잘못을 했기 때문이 다. 이곳에선 사내들은 무조건 존대를 해야 한다. 잘못을 알았으면 시정을 해 봐라." '으이그! 여러 가지로 내 속을 뒤집어 놓는군.' 하지만 지금은 관해영이 참아야 할 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위대한 여교 나으리 들!" "좋아! 대열로 들어가라." 관해영은 분통을 참으며 다시 대열로 돌아왔다. 감옥산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밖에 있었던 사 내들의 습관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이제 부터 모두 옷을 벗어라!" 감옥산의 명에 관해영은 기겁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무슨 망발이냐? 명색이 칠척 대장부가 여인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 다니!' 감옥산의 싸늘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 졌다. "여교들! 동작이 느린 놈들은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마라!" 여교들이 몰려왔다. "동작 봐라!" "손이 보인다.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 군." 퍽! 퍽! 여교들의 손과 발이 무차별 소년들에 게 향했다. 소년들은 여교들의 손길 발길을 피하 며 부산히 옷을 벗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한다. 이것까지 참을 수는 없는데…….' 관해영이 이런저런 궁리를 할 때였다. "넌 꼭 말썽이군. 남들은 모두 벗었는 데 넌 뭐하는 거야?" 여교의 화난 목소리와 함께 솥뚜껑 같은 손이 관해영의 머리를 거세게 후 려쳤다. '이런, 부모님도 머리엔 손을 대지 않는데…….' 관해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자 기를 후려친 여교에게 주먹을 내질러 버렸다. "아야!" 여교가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이 자식! 반항하는 거냐?" 뜻밖의 상황에 여교들이 놀라며 관해 영을 빙 둘러쌌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는 천상 손을 쓸 수밖에 없겠군!' "단단히 혼을 내서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라." 여교들이 일제히 관해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야말로 임자 만난 줄 알아 라." 관해영의 신형이 번뜩였다. 쫘자작! 경쾌한 음향과 함께 여교들의 뺨이 일제히 퉁퉁 부어 올랐다. 관해영의 손에 따귀를 맞은 것이다. 한쪽에서 보고 있던 감옥산의 안색이 홱 변했다. "이제 보니 무림고수였군." 슥! 관해영의 신형이 감옥산 앞에 바짝 다가왔다. "감옥산! 금련부인의 처소는 어디냐?" '난 이 자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 이 럴 때는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다.' 감옥산이 관해영의 눈치를 보다 한쪽 으로 신형을 날렸다. "어딜……!" 피핑! 한 줄기 지풍이 감옥산의 마혈을 짚 어 버렸다. "말해라, 분골착맥이나 철파동쇄 같은 고통을 겪지 않으려." "으으!" 감옥산은 관해영의 위협보다는 야수 보다 더 차가운 눈길이 두려웠다. 그 냉 막하고 예리한 눈초리는 한 번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금련부인의 거처는……." 감옥산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줄줄 금련부인의 거처를 알려 주었다. 이때, 잠시 넋이 빠져 있던 여교들이 사방으 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해영은 구태여 그녀들을 잡을 생각 을 하지 않았다. '금련부인만 잡아 금동의 행방을 알아 내면 된다.' 금련부인의 거처를 알아낸 이상 여교 들보다 먼저 금련부인을 만날 것이다. 휘익! 그의 신형이 비조처럼 한쪽으로 사라 졌다. 살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6 장 (발각된 정체 1) 발각된 정체 1. 지극히 호화로운 내실(內室). 이남일녀(二男一女)가 다탁을 마주한 채 심각한 안색으로 마 주앉아 있었다. 여인은 삼십이 갓 넘어 보이 는 미부였는데 일신에는 새빨 간 홍의(紅衣)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은 도발적이리만치 요염 한 그녀의 얼굴과 강렬한 조화 를 이루어 색정적인 마력(魔 力)을 풍기고 있었다. 두 명의 중년인! 둘은 지극히 대조적인 얼굴 이었다. 여인의 옆에 바싹 붙어 앉다 시피한 사내는 음탕한 얼굴에 개기름이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왕방울같이 툭 튀어나온 두 눈 에는 불꽃 같은 탐욕이 이글거 리고 있었다. 반면, 마주앉은 사내는 보기 드물게 수려한 용모였다. 다만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 라가 있어 옥(玉)에 티 같았다. 문득 준수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인의 아미가 상큼 치켜졌다.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냉랭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문주(劉門主)! 무엇 때문 에 우리를 불렀소?" 유문주! 그렇다. 준수해 보이는 중년 인은 바로 사대벌왕의 현정금 문도의 문주 금도무적(金刀無敵) 유수극(劉秀極)이었다. 유수극이 내심 욕설을 퍼부 었다. '앙큼한 계집! 그걸 네가 지 금 몰라 묻고 있단 말이냐?' 그러나, 그는 일파의 지존답 게 얼굴에는 단 한올의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강직한 얼굴에 한껏 위엄을 띠고 여인을 향해 지극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부인은 언제쯤이나 제령마 고(制靈魔蠱)와 초력독인(超力 毒人)의 연독법(鍊毒法)을 알려 주겠소?" 여인은 갑자기 은방울 같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유문주는 너무 성 격이 급하시군요. 겨우 몇 명의 미동미녀(美童美 女)를 바쳤다고 우리가 당신 에게 절대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순간, 유수극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동안 납치한 미동미녀만 해도 백여 명이 웃돌 텐데, 그 래도 모자란다고? 너희들 때문 에 본좌는 수하들 보기가 낯 뜨거울 지경이란 말이다.' 유수극은 내심 치밀어 오르 는 살기에 눈자위가 붉게 물들 었다. 그러나, 그는 이빨을 지그시 깨물었다. '무림패업을 이루는 날, 내 친히 너희들의 사지를 찢어 죽 이리라!' 이때, 여인이 싸늘한 냉소를 터뜨렸다. "흥! 유문주는 자꾸 우리에 게 요구할 생각을 말고 자신이 해야 될 일부터 염두에 두시 오." 그녀의 얼굴에는 매우 못마 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 나 있었고 두 눈은 어떤 열망 에 차 있었다. 그것은 열 여덟 살 소녀가 눈앞에 백마의 기사를 그려보 는 듯한 눈빛이었으며 벌거벗 은 사내의 몸뚱이를 본 색녀 (色女)의 눈빛 같은 것이기도 했다. 유수극은 얼굴에 의혹을 띠 었다. "아직까진 본좌가 부인에게 섭섭히 해드린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여인은 두 눈을 하얗게 흘겼 다. "기억이 안 나면 제가 가르 쳐 드리죠. 난 아직 사운악 공 자를 만나보지 못했어요." 유수극의 얼굴에 언뜻 경련 이 일었다. '미, 미친 년! 자신의 부군 앞에서 어떻게 사운악이 마음 에 있다고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환희독 왕도 금련부인에게 잡혀 숨도 못 쉬고 있으니, 아무리 그 렇더라도…….' 일남일녀(一男一女)! 이들은 바로 사독채의 주인 인 환희독왕과 금련부인이었 다. '적당히 넘어가려 했었는데, 끈질기군! 하도 약은 계집이라 바늘끝만한 틈도 안 주니…….' 유수극은 심각한 얼굴로 무 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별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자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운악은 아직 연공(鍊功)이 끝나지 않아 당분간은 만나기 어려운 것뿐이지. 내가 부인과 의 대면을 일부러 방해하는 것 은 아니오." 금련부인이 냉랭한 시선으로 유수극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유수극의 얼굴에서 방금 한 말의 진의를 알아내려 고 했으나 이미 냉정을 회복하 고 극패지도의 위엄을 뿜어내 는 유수극의 얼굴에서는 일말 의 감정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럴 것이 유수극은 이미 사 대벌왕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 의 감정도 다스릴 줄 아는 무 인이었기 때문이다. 금련부인은 할 수 없이 싸늘 한 눈빛을 거두었다. "그 속사정이야 내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요즘 북수벌왕 인 의성보에서 자꾸 사람들이 찾아오니 그들이나 한 번 만나 볼까 해요. 벽력마도 낭초민에 게는 아들이 있다고 하던 데……."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슬 쩍 유수극의 표정을 훔쳐보았 다. 유수극의 얼굴에 당혹한 기 색이 어렸다. '은근한 협박이군! 천상 운 악을 이용해 미남계(美男計)를 써야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지는 노릇이었다. 사대벌왕의 한 지존으로서 오랑캐에게 비위를 맞추어 준 다는 것도 노화가 끓어올라 미 칠 지경이지만 자신이 하지 못 한 일을 다른 사람이 한다는 것 또한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자리를 차고 일어나고 싶지만 그랬다가 는 나머지 삼대벌왕 놈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 것은 뻔한 노 릇…….' 유수극은 쓰디쓴 웃음을 지 었다. "빠른 시일 안으로 운악을 오게 하겠소. 대신 다른 벌왕 들과의 접촉은 하지 마시오." 그제서야 금련부인이 얼굴에 웃음을 담았다. "유문주가 성의만 보인다면, 우리야 사대벌왕의 누구와 손 을 잡아도 마찬가지니 이왕이 면 사공자가 있는 현정금문도 가 조금 낫지 않겠어요." 순간, 환희독왕이 왕방울만 한 두 눈을 뒤룩 굴렸다. "문주! 이번에는 중원에서 돌아올 때 공손옥경이라는 여 인을 데리고 오시오. 진회하 (秦淮河) 제일의 기녀(妓女)라 는 그녀의 미색은 내 일찍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꼭 한 번 보고 싶소이다." 유수극의 탁자 밑에 있던 손 에 시퍼런 힘줄이 꿈틀거렸다. '빌어먹을! 이 놈은 한 술 더 뜨는군!' 그는 불빛 아래 번뜩이는 환 희독왕의 개기름이 좌르르 흐 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손가락으로 그의 두 눈을 후벼 파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참자! 제령마고와 초력도인 이 있으면 무림제패는 시간 문 제이다. 눈독을 들이고 있는 다른 벌왕들에게 뺏길 수는 없 다.' 제령마고와 초력도인! 과연 그것은 어떠한 힘을 가 지고 있길래 유수극이 이토록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금련부인이 더할 수 없이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난 흑도의 여문주들을 대 상으로 장락연을 베풀어야 하 니 이만……." 그러자, 환희독왕 역시 비대 한 몸을 일으키며 음침한 미소 를 흘렸다. "흐흐! 이번에 잡아온 여인 중에 기가 막힌 미녀가 있어 나도 그녀와 어울려야 하니 가 봐야겠소." "……!" 금련부인이 두 눈에 야릇한 광채를 뿌릴 때였다. 푸드득―. 백설같이 흰 비둘기 한 마리 가 창문 안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환희독왕이 우수를 가 볍게 휘저었다. 슈욱! 그의 소매 속에서 한 줄기 흡인력이 전서구를 가랑잎처럼 빨아들였다. 그는 재빨리 비둘기 다리에 묶여 있는 서찰을 펼쳐 들었 다. <금련부인에게. 본채에서 이백여 리 떨어진 곳에서 현정금 문도인의 인물 들에게 납치되었다 달아난 남 녀를 사로잡았습니다. 본 채 의 마지막 경계망에 걸린 것입 니다. 그들을 조사해 본 결과 한 여인이 그들을 구했고, 그 녀는 본채에 잠 입했다고 합니 다. 그 여인의 인상착의는 다 음과 같습니다---- ― 中略 ― 그녀를 잡아 잠입목적을 알 아내기 바랍니 다.> 환희독왕의 두 눈에 새파란 녹광(綠光)이 벼락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는 힐끗 창문 저쪽에 삐죽 이 솟아오른 자신의 침소를 바 라보며 음산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이 인상착의 대로 라면 지 금 어울리는 그녀가 아닌가? 앙큼하기 짝이 없는 계집 같으 니라고……." 환희독왕이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그러자 옆에서 전서를 보고 있던 금련부인이 바늘끝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어서 가서 그녀를 잡아요." 환희독왕이 막 신형을 날리 려다가 금련부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 가 어려 있었다. "일단 즐기고 나서 잡아도 늦지 않을 것이오." 순간, 금련부인의 눈꼬리가 솟아올랐다. "우리를 죽이러 왔는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재미를 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그녀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환희독왕이 찍소리도 하지 못 하고 내실을 빠져나가며 투덜 거렸다. '젠장! 전서구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6 장 (발각된 정체 2) 발각된 정체 2. 진사주렴이 늘어져 있는 침실. 족히 열 명이 누워 구를 수 있는 커다란 침실 위에 환희독 왕이 비스듬히 누워 눈을 뒤룩 거리고 있었다. '젠장! 음식과 여인은 보는 즉시 해치워야 하는데…….' 그는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 을 다셨다. 바로 그때 밖에서부터 영롱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왕님! 그녀를 목욕시켜서 데려왔습니다." 환희독왕이 새끼 손가락으로 돼지코를 후벼파며 말했다. "들여 보내!" 사르륵! 방 한 쪽의 휘장이 바람에 흐늘거리듯 젖혀지며 한 명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 왔다. 그녀는 바로 아몽사였던 것 이다. 환희독왕의 두 눈에 번쩍하 고 광채가 흘렀다. "어서 이리로…… 다가 오너 라." 아몽사가 두려운 얼굴로 주 춤거리며 다가갔다. 그러자 환희독왕이 눈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다리를 주물러라." 아몽사의 두 눈에 지혜로움 이 스쳤다. '기회를 보아 혈도를 제압하 고 금동의 거처를 물어야겠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곧 환희독왕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환희독왕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졌다. "어, 시원하구나. 조금만 더 위……." 그는 연신 입으로 아몽사에 게 주문을 하고 있었으나 기실 그의 두 눈은 아몽사의 앞가슴 에 가 있었다. 상체를 숙이면서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드러나는 우윳빛 육봉이 환희독왕의 눈을 어지 럽혔다. "흐흐! 그것 참 탐스럽게 생 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같이 중얼거리고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아몽사는 그의 말뜻 을 모르고 언제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고 바짝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순간, 환희독왕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아몽사의 손을 움켜 쥐었다. 아몽사는 내심 기겁을 할 듯 이 놀라며 손을 빼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그의 느린 손을 결코 뿌리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전신이 뻣뻣이 굳 어지며 사지백해에 충만해 있 던 힘이 둑을 터뜨린 봇물과도 같이 일시에 밖으로 빠져나가 는 것이었다. "왜, 왜 이렇게…….?" 아몽사가 놀란 얼굴로 떠듬 거렸다. 환희독왕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꿈틀거렸다. "너는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잠입했느냐?" 아몽사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눈치 챘구나! 그렇다면 관 공자는 어떻게 됐을까?' 그녀는 눈 앞이 캄캄해 왔으 나 잡아떼는 데까지는 시침을 떼기로 작정을 하고 오히려 환 희독왕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소녀는……?" 그때였다. "요 앙큼한 계집애 같으니라 고!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오 리발을 내미는 것이냐?"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 리가 울리며 진사주렴을 들추 고 금련부인이 들어섰다. 아몽사는 자신의 정체가 어 떻게 탄로났는지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입을 꾹 다물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금련부인이 굴곡이 섬연한 몸매를 흔들며 깔깔거 렸다. "호호!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구나. 나는 여자의 입을 열 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어." 그녀는 묘한 눈길로 환희독 왕을 바라보았다. "옷을 벗겨요." 환희독왕은 마치 그녀의 말 을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잽싸 게 아몽사를 침상으로 끌어올 리는 한편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찌이익! 아몽사의 어깨가 순식간에 드러나자 금련부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열락을 맛보고 싶어하니 뜨 겁게 다루어요." 환희독왕의 두 눈에 핏발이 일었다. "흐흐! 당신이 그런 말을 안 해도 나는 이 여인을 뜨겁게 달구어 놓을 것이오." 그는 아몽사의 앞가슴 옷을 잡아채며 힘껏 찢어내렸다. 그러자 수밀도 육봉이 불빛 아래 현란하게 나타났다. "악!" 아몽사가 기절할 듯이 놀라 며 남은 한손으로 황급히 앞가 슴을 가렸다. "크흐흐! 한 손으로 얼마나 가리나 보자." 그는 곧 아몽사의 치마에 손 을 대며 힘을 주었다. 찌지직! 그녀의 몸이 막 벗겨져 나가 려는 찰나, 아몽사가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둬요, 말을 할 테니 ……." 금련부인이 소리쳤다. "떨어져요." 그러자 환희독왕이 거친 숨 을 쉭쉭 몰아쉬며 잔뜩 못마땅 한 얼굴로 금련부인을 쏘아보 았다. 금련부인은 그의 표정 따위 는 아예 무시하는 얼굴로 아몽 사를 의미심장한 얼굴로 쏘아 보았다. "아직 순진하군. 이 즐거운 일을 마다하다 니……. 너는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잠입했느냐?" 앞에 한 말은 지극히 부드러 웠으나 뒤에 흘러나오는 말은 문틈으로 흘러드는 겨울바람처 럼 쌀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마디만을 하는 데, 두 가 지 음색을 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보호색을 띠는 도마뱀 처럼 언제 어느 때 변할지 모 른다는 것이었다. 아몽사는 잘근 입술을 깨물 었다. "난 금동을 찾으러 왔어요." 금련부인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넌 금동과 무슨 연관이 있 느냐?" "난 옥녀 아몽사다." 순간, 두 사람의 안색이 일 시에 변했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의 얼굴 에는 각기 다른 표정들이 나타 났다. 금련부인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랬었군! 넌 이곳에 혼자 들어왔느냐?" 아몽사가 서슴없이 대답했 다. "언제나 나는 혼자 행동한 다." "거짓말 마라! 너 혼자라면 납치되어 오던 남녀 중 여인만 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남 녀 모두 보냈으니 분명 남자도 잠입했을 것이다." 아몽사의 얼굴이 당혹하게 일그러들었다. '이 여인의 심기가 이토록 깊을 줄이야…….' 그러나, 아몽사는 딱 잡아떼 었다. "난 모른다. 그들이 불쌍해서 보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상 조금도 굽힘 없는 태도로 밀고 나갔다. 그러자 금련부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혼이 덜 났군! 말을 하지 않으면 짓밟으세요." "흐흐! 그렇게 나오기를 얼 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오." 환희독왕은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아예 아몽사를 침상에다 눕히고 부 리나케 치마를 걷어 올렸다. 불빛 아래 대리석으로 다듬 어 놓은 것 같은 다리가 백옥 처럼 빛났다. 아몽사가 혼절할 듯 놀라 소 리쳤다. "하, 한 사람이 같이 왔어 요." 그러자 환희독왕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사람 피말리는구나." 그는 침상 옆으로 벌렁 드러 누워 멧돼지 같은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아몽사가 급히 몸을 일으키 며 치마를 내렸다. 금련부인이 사월에 핀 장미 꽃보다 더 붉은 입술을 나풀거 렸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당신이 금련부인인가요?" "그렇다." 아몽사가 잘근 입술을 깨물 고 곰곰이 생각하다 결심이 선 듯 말을 꺼냈다. "그 분은 당신이 있는 곳으 로 갔어요." 금련부인이 냉랭히 코방귀를 뀌었다. "흥!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 들었군." 아몽사가 급히 물었다. "금동은 지금 어디에 있죠?" "정체를 알고 난 후 돌려 보 내면 포달랍궁과의 마찰이 생 길 것 같아 죽이려고 했으나 현정금문도의 문주가 자신에게 인계를 해 달라고 해서 지금 유수극에게 잡혀 있다." 아몽사는 현정금문도나 문주 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왠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금 동을……?" 금련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마라." 순간, 환희독왕이 상체를 벌 떡 일으키며 금련 부인을 바라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아냈으니 어떻게 할 참이요?" "그저 눈만 떴다 하면 그 짓 만 생각하고 있으니……." 금련부인의 싸늘한 핀잔에 환희독왕이 얼굴이 일그러졌 다. '그러는 네년은 나보다 더하 면 더했지 덜하지 는 않을 색녀면서…….' 금련부인은 아몽사를 자신의 뒤로 돌아서게 했다. "당분간은 건들지 마세요." "무엇 때문이오?" "난 아직 이 녀와 비견될 만 한 멋들어진 남자를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만 이런 미인과 재미를 본다는 것은 불 공평해요." 환희독왕은 그녀의 억지에 내심 혀를 찼다. '별 엉뚱한 불공평도 다 있 군! 그저 남 잘 되는 일은 배 가 아파서…….' 그러나, 내심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 다. "당신의 말을 내가 어찌 거 역하겠소. 단지 이녀는 이곳에 놔두시오." 금련부인이 냉소해 마지않았 다. "흥!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 기는 꼴이지. 내가 남자를 구 할 때까지 희남궁에 두겠어요." 환희독왕은 그야말로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흐이그! 이래서 데릴사위 노릇은 하는 게 아니었는 데……. 더군다나 내 독술이 아직까지 금련보다는 아래이니 고분고분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였다. "부인! 큰일났습니다." 한 명의 중년인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금련부인이 눈살을 찌푸렸 다. "웬 호들갑이냐?" 순간, 환희독왕이 다짜고짜 그의 뺨을 후려쳤다. 금련부인에게 받은 수모를 수하에게 풀려고 하는 것이었 다. "이놈아! 내 거실에 들어 올 때는 먼저 통보를 하라고 하지 않았으냐?" "…….!" 졸지에 뺨을 두 대씩이나 얻 어맞은 사내는 멍청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환희독왕이 부하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 문이다. 금련부인이 발칵 성질을 부 렸다. "이놈! 큰일이면 어서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사내는 그때서야 그녀를 향 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지금 희남궁에 음남으로 잡 혀 왔던 자가 희남궁을 쑥밭으 로 만들고 있습니다." 금련부인의 붓으로 그린 듯 한 눈썹이 치켜 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수궁십 마녀(守宮十魔女) 는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그 자가 너무도 강해 대적 할 자가 없습니다. 수궁십마녀뿐만 아니라 팔대 독관(八大毒關)도 깨졌습니다." 순간, 금련부인의 얼굴이 순 식간에 달라졌다. "그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 냐?" 이때, 아몽사는 깊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관공자임에 틀림없는데 어 째서 그런 소란을 부렸을까? 금련부인을 잡기 전까지는 참 았어야 했는데…….' 그녀가 암담함을 느끼고 있 을 때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는 부인의 거처에 들 어갔다가 부인이 없자 희남궁 을 쑥밭으로 만들고 이리로 오 고 있습니다. 부인과 독왕을 만나려는 것 같습니다." 금련부인이 대뜸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오독대진(五毒大陣)을 펼치 게 해라. 아무리 초극고수라도 오독대진을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곧 아몽사를 바라보 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베어물 었다. "만약 오독대진까지 뚫린다면 그를 사로잡을 방법이 있지." "……." 버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7 장 (오독대진 1 ) 제 27 장 오독대진(五毒大陣) 와! 와아! 하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 "크악!" "끄아아아악!" 목청이 찢어지는 듯한 단말마가 이 어졌다. 관해영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 독채의 인물들에게 가공할 살초를 뿌 려내고 있었다. 사독채의 인물들은 일찍이 당해 보 지 않은 일에 아연 경악했으며 관해 영의 절학(絶學)에 몸서리를 치고 있 었다. 관해영은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사독채의 인물들을 베어넘기며 재빨 리 염두를 굴렸다. '금련부인이 처소에 있었으면 일은 쉬웠을 것이다. 없는 바람에 내 정체 가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죽검(竹劍)이 허공에서 주춤 거리는 틈을 탄 사독채의 인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죽어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이때 관해영은 전면에 지극히 호화 로운 한 채의 전각을 발견하고 훌쩍 허공으로 신형을 날리며 죽검을 뿌리 치듯이 휘둘렀다. 순간, 번쩌억! 먹장구름을 헤치고 한 줄기 벼락불 이 내려치듯 무수한 검망이 천지사방 으로 뻗어나가며 사독채의 인물들을 휩쓸었다. "끄으……." 검광의 회오리가 자욱히 이는 속에 사독채의 인물들은 휩쓸리는 가랑잎 처럼 검은 죽음 속으로 영혼을 던지 고 있었다. '이곳이 환희독왕이 있는 곳이니 금련부인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관해영은 이렇게 생각하고 화려한 전각의 높은 담장을 훌쩍 뛰어 넘었 다. 이때였다. "멈춰라!" 싸늘한 호통이 이는 가운데 한 줄 기 막강한 잠력(潛力)이 가슴을 후려 쳤다. '이 비릿한 냄새는 독장(毒掌)…….' 관해영은 급히 숨을 죽이는 한편 다시 허공으로 한 자나 훌쩍 뛰어올 라 독장을 피해내고는 지면에 내려섰 다. 그는 어떠한 공격에도 즉각 대처하 기 위해 양손에 진력을 끌어올리고 전면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바로 앞에 시뻘건 홍의(紅衣)를 걸 친 다섯 명의 괴인들이 일렬로 쭉 늘 어서 있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희다못해 푸르스름한 기 운을 띠고 있는 안색들. 그것은 정원 가득 탐스럽게 피어 있는 작약 꽃송이와 어울려 귀기(鬼 氣)롭게 보였다. 그들의 가슴에는 각기 오, 주(蛛), 막( ), 사(蛇), 갈(蝎) 자가 황금수실 로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관해영이 내심 부르짖었다. '독인(毒人)들이다.' 그가 이렇게 단정한 것은 다섯 사 람 옆에 꽂혀 있는 깃대에 삼각건이 바람에 펄럭이며 오독무적(五毒無敵) 이란 글씨를 바람에 나부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스―. 오인이 미끄러지듯이 다가오며 관 해영을 둘러싸는 동시에 일제히 소리 쳤다. "오독만천지(五毒滿天地)!" 그리고는 일제히 품속에서 무엇인 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한 번 물리기만 하면 즉사 를 면치 못하는 독충들이었다. 독오! 날개가 달린 붉은 지네. 이것은 가슴에 오 자가 수놓아진 독인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빠져나 오려고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 고, 족집게 같은 이빨을 벌려 칙칙거 리고 있었다. 독주(毒蛛)! 시커먼 털이 전신을 뒤덮고 있는 주먹만한 거미. 원래 이것은 주(蛛)자가 쓰여져 있 는 사람의 품에서 나왔는데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는 전신의 털을 모조리 곤두세우고 있어 흉측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독막(毒 )! 전신이 새파란 두꺼비. 독금사(毒金蛇)! 찬란한 황금빛을 뿌리고 있는 이 뱀은 놀랍게도 몸통이 실처럼 가늘었 다. 독갈(毒蝎)! 눈처럼 색깔을 띠고 있는 전갈인데 갈(蝎)자가 새겨진 독인의 손에서 꼼 짝도 안 하고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 었다. 관해영의 안색이 굳어 들었다. '저 다섯 가지 독물은 특수한 환경 에서 키워지고 훈련받은 것이 분명하 다.' 바로 이때 오인이 손에 들고 있던 독물(毒物)들을 관해영을 향해 일제 히 던졌다. 치치치―. 꾸르르륵―. 독물들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입 을 벌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독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황 급히 되돌아갔다. 찌익! 오인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독물들 을 움켜쥐고 냉혹한 시선으로 관해영 을 노려보다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몸에 피독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관해영은 영문을 몰라 하고 있다가 그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입가에 회 심의 미소를 지었다. '흑란에게서 받은 반쪽짜리 옥패가 있는 줄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 그렇다면 독물들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군!' 오 인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 놈들은 보통 독물들과 틀리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 독 성(毒性)은 웬만한 독물보다 십 배는 강하고 성질 또한 난폭하기 그지없 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주 자가 새겨 진 독인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손바 닥 위에 있는 거미를 사랑스러운 듯 이 쓰다듬고 있었다. 이어 그는 뒤를 향해 소리쳤다. "인혈(人血)을 먹여라." 순간, 정원을 둘러싸고 있던 사독 채의 인물들이 제일 앞에 선 두 명을 앞으로 떠밀어 버리는 것이었다. "억!" 두 장한이 비명을 지르며 오 인 앞 으로 나뒹굴었다. 그들의 얼굴은 완전히 흑빛이었다. 주 자가 새겨진 독인이 지독히도 음산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훈련을 받은 독물들은 인혈을 마 시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피독물의 향기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가 슬쩍 손에 들고 있는 거미를 두 장한에게 집어던지자 나머지 네 명도 일제히 독물들을 풀어놓았다. 순간, 독물들은 두 장한에게 달라 붙어 피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두 명의 장한이 비명을 지르며 독 물들을 떨쳐 내려고 두 손을 허우적 거리다가 전신이 흑빛으로 물들어 사 지를 축 늘어뜨렸다. 두 장한의 시체는 점점 쭈글쭈글해 지며 종내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 다. 그때서야 독물들이 후르륵 날아 자 신들의 주인에게로 날아가는 것이었 다. 관해영은 이 처참한 광경에 이를 갈았다. '지독한 놈들! 생명을 저토록 경시 하다니…….' 오 인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차갑 게 굳어들었다. 그리고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텅 빈 것 같은 두 눈에서 더할 수 없이 가공할 살광이 뿜어져 나왔다. 막( )자가 쓰여져 있는 독인이 면 도날 같은 새파란 입을 벌리며 시리 도록 차가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흐흐! 맛있게 먹었느냐? 이제부터 더 맛있는 피를 맛보거라." 그는 자신의 두꺼비를 쓰다듬다 돌 연 관해영을 향해 홱 집어던졌다. 그러자 나머지 독인들도 저마다 자 신들의 독물들을 집어 던지는 것이었 다. 쓰으으―. 독물들은 더할 수 없이 빠른 기세 로 관해영을 향해 덤벼들었다. "감히 미물들로 사람을 해치려 하 다니……." 관해영이 소리치며 죽검을 휘둘러 독물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탕! 탕! 탕! 탕! 탕! 다섯 번의 둔탁한 음향이 연속적으 로 울리는 가운데 독물들이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도 독물들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더욱 맹렬한 기세로 덮쳐들기 시작했다. 관해영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신 형을 날려 피했다. '삼성 공력이 깃들여 있는 검에도 상처 하나 입지 않다니…….' 휘이이―. 독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이때, 다섯 줄기의 막강한 잠력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관해영의 전신을 덮치는 것이었다. 콰아아아아! 오 인이 신형을 날리며 장력을 발 출한 것이다. 이것은 독물들 사이로 교묘하게 쏘 아져 오고 있었으며, 또한 배합이 극 히 절묘해 관해영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관해영의 얼굴이 일그러들었다. '이 놈들은 필시 수십 년간 함께 고락 을 같이한 놈들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 토록 절묘한 공격을 해올 수는 없을 것 이다.' 관해영은 생각하는 한편 신형을 뽑아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순간, 퍼엉! 관해영이 마지막 한 줄기 장력을 가슴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삼장이 나 날아 작약이 피어 있는 정원으로 내 려섰다. 그러나 관해영의 얼굴은 지극히 냉정 해 도저히 장력을 정통으로 맞은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藍�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7 장 (오독대진 2 ) '조금도 방심해서는 안 되겠군! 독물 도 독물이지만 이들 오인의 무공도 범 상한 것이 아니다. 만약 장력을 맞는 순 간 반탄진기를 이용해 장력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오 인은 잠시 멍청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관해영이 지면에 내려서자마 자 비틀거리다가 고꾸러질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관해영을 덮쳐 왔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지풍(指風)이 빛살처럼 날 아들고 독물들이 더욱 맹렬한 기세로 덮쳐 들었다. 지네의 입에서는 하얀 독무(毒霧)가 뿜어져 나오는가 하면 거미는 거미줄 로, 두꺼비는 파리를 잡듯 긴 혀를 날름 거리며 관해영의 전신을 핥아 오고 있 었다. 더군다나 실처럼 가느다란 뱀은 관해 영의 검풍 사이를 뚫고 목을 휘감아 오 는 것이었다. '위험하다!' 관해영이 직감적으로 느끼면서 또다 시 신형을 벼락같이 뽑아 올렸다. 슈육! 그의 신형이 지풍과 독물들 사이를 완전히 빠져나갔을 때였다. 오 인이 마치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 다는 듯이 저마다 긴 죽통을 겨누고 기 관장치를 힘껏 눌렀다. 펑! 요란한 폭음과 함께 쇠털처럼 가는 암기가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갔다. 그냥 있다가는 고슴도치 신세를 면하 기 어려울 판국이었다. '지독한 놈들…….' 관해영은 다시 천근추 신법으로 지면 으로 바윗돌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 암기들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관해영은 등줄기에 식은 땀이 솟았다. 그가 지면에 발을 디딜 때였다. 웅크린 금사가 섬전처럼 달려들며 관해영의 발목을 물었다. 관해영이 냉소를 터뜨렸다. "미물 따위가 감히……." 그는 발로 금사의 머리통을 걷어차 멀리 날려 버렸다. 다음 순간 그는 신형을 날려 지면을 떼굴떼굴 굴렀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시퍼렇 게 번뜩이는 다섯 개의 낫이 얼음빛깔 로 번쩍 하고 스치는 것이었다. 파파파팟! 오 인이 어느 틈에 쇠사슬에 연결된 낫을 휘둘러 온 것이다. 새빨간 작약의 꽃잎들이 허공으로 휘말려 올라갔다. 그 꽃비 속으로 오 인의 쇠사슬 낫이 맹렬한 기세로 쏘아져 들었다. 관해영은 죽검으로 다섯 개의 낫을 모조리 튕겨내며 염두를 굴렸다. '큰일이다. 호흡은 점점 막혀 오고 단 숨에 이들을 처치할 방도는 없으니 …….' 그는 다섯 마리의 독물들이 뿜어내는 독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호흡을 폐 쇄시킨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숨은 목구멍까지 차올랐 으며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사물을 구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때, 요란한 굉음과 함께 작약 속에 서 뿌연 독연(毒煙)이 피어올라 정원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렸다. 펑! 펑! 관해영의 안색이 크게 변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독연이 눈으로 들어가는 날에는 눈 을 실명하고 만다. 청각을 최대한 사용 하는 수밖에 없다!' 이이이잉―. 츠츠츠―. 독물들이 날아다니는 소리와 낫이 허공을 스치는 소리가 관해영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 왔다. 관해영은 전신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낫을 교묘히 피해내며 독극물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머리다!' 관해영이 벼락같이 죽검을 머리 위로 맹렬히 휘둘렀다. 과연 탕하는 소리가 울리며 시뻘건 지네가 삼 장(三 丈)이나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무엇인가 얼굴을 핥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두꺼비다!' 관해영이 대경실색하며 급히 일장(一 丈)이나 물러섰다. 순간, 독겸(毒鎌) 한 자루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파아악! 검붉은 선혈이 튀어 올랐다. 관해영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조화삼라혈공(造 化森羅血功)을 펼쳐 독물들을 태워 버리 고 그 순간 대연오검(大然五劍)으로 독 인들과 승부를 결정짓자!' "……." '그렇게 되면 천상 독기를 들어 마셔 야 되지만 독에 안 당하려고 발버둥쳐 봐야 도리어 시간만 끌게 되어 내 스스 로가 쓰러지게 된다. 독을 한군데로 몰 아넣고 세 시진은 버틸 수 있다. 그 안에 해독약을 얻어야 한다.' 관해영은 전신 공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일갈노호 가 천둥처럼 터져나왔다. "조화삼라혈공 제 육단 열천(熱天) 파황(破荒)!" 순간, 그의 전신에서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기류가 천지사방으로 퍼져나가 며 주위에 있는 것을 모조리 태워 버 리는 것이었다. 화아아악! 더불어 그의 신형은 이미 오 인을 향해 빛살처럼 쏘아가고 있었다. "앗!" "저, 저 놈이……?" 오 인이 대경실색하며 독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러나 관해영의 검은 벌써 대기를 쪼개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막강 한 검풍으로 그들의 몸을 허공으로 띄 워 올리고 있었으며 수만 가닥으로 그 들의 전신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피! 그리고 우박처럼 후두둑거리며 쏟아 져 내리는 인육의 눈보라! 관해영이 손끝에 와 닿은 감촉을 느끼며 내심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순간 발 아래로 바늘에 찔린 듯한 뜨끔한 통증이 전해 오는 것이었다. '이, 이런…… 이건 전갈이다.' 과연 그의 발을 문 것은 전갈이었다. 이놈은 습성이 먹이를 찾으러 다닐 때는 가재처럼 발발거리고 돌아다니나 일단 위험한 적이라고 느꼈을 때는 죽 은 듯이 있다가 느닷없이 상대를 물어 버리는 것이다. 관해영이 한쪽 발로 전갈을 짓뭉게 버리고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의 독기까지 막아낼 내공이 내 게는 없다.' 관해영은 서서히 의식이 몽롱해 가는 것을 느끼며 지면으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그토록 짙은 독무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 홀연 짤랑한 방울소리가 울려왔다. "호호호! 정말 대단한 자였다. 결국 당했지만 오독대진을 파괴하다니……." 작약꽃밭 사이로 금련부인을 필두로 환희독왕, 아몽사, 그리고 여러 명의 인 물들이 다가왔다. 아몽사가 안타깝게 소리쳤다. "관공자!" 그녀는 금련부인에게 맥문이 잡혀 있는 상태라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애타 게 관해영만 부르는 것이었다. 금련부인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목대진의 독물들은 해독약이 없다. 이 자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아몽사의 얼굴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웅지도 한 번 펴보지 못 하고 죽어야 하다니……. 이 죄를 어떻 게 보상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죄책감 때문에 당장이라도 목숨을 끊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았 다. 금련부인이 고소를 머금었다. "눈치를 보니 꽤나 좋아했는가 보군!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천향옥녀의 사랑 을 받을 수 있었나 볼까?" 그녀는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관해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때 관해영은 얼굴을 지면을 대고 기절해 있었다. 그녀의 눈치를 안 중년인 한 명이 달려와 관해영을 발로 툭 건드려 돌려 놓았다. 그는 혹시 자신의 손에 독이 묻을까 봐 발로 관해영을 찬 것이었다. 순간, 관해영의 얼굴을 본 금련부인 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반짝거렸다. '이, 이런 기남(奇男)이 있었다니…….' 그녀는 넋이 빠진 듯 관해영의 얼굴 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운악보다 사나이다운 멋이 있는 것 같군! 상상 속에 그리던 이상형의 남자와 거 의 흡사하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아깝다. 진작 알았으면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 건데…….'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 시신을 치울까요?" 금련부인이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놔둬라." 그녀는 관해영의 빼어난 얼굴을 새삼 스레 바라보았다. '이런 자는 내 평생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내게 준 기회를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눈앞의 관해영이 살아나서 자신을 힘차게 껴안아 주는 광경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음심이 동해 견딜 수가 없었 다. '많은 노고가 따르지만 그 방법을 써 서 살려 놓아야겠다.' 그녀는 급히 중년인에게 소리쳤다. "이 자를 만독실(萬毒室)로 옮겨라." 순간 환희독왕이 의혹 어린 얼굴로 물었다. "뭘 하려는 거요?" 금련부인이 냉랭히 쏘아붙였다. "당신이 참견할 필요는 없어요." 환희독왕이 찍소리를 하지 못하자 그 의 눈치를 살피던 수하들이 조심스럽게 관해영을 들치고 사라졌다. 금련부인이 아몽사의 손을 잡고 그들 을 따르려 할 때였다. 유수극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부인! 부탁이 있소." 그의 침중한 목소리에 금련부인이 의혹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 "내 부탁은 다름이 아니라 아몽사를 나에게 인계하라는 것이오." "그건 안 돼요. 당신이 아몽사에게 무 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니에 요." "하하! 본인은 동자공(童子功)을 익 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소. 그 때문에 난 운악을 양자로 둔 게 아니오." 금련부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 하다 그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이 데리고 있어요. 그렇 지만 금동은 몰라도 옥녀는 얼마 있다 내가 말하면 다시 돌려보내야 해요." "좋소! 그렇게 하겠소." 금련부인은 내심 구슬 같은 의혹을 느꼈다. '도대체 유수극은 금동과 옥녀를 어 디에 이용하려는 것일까? 유수극은 약 은 자니까 절대 쓸데 없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몰래 염탐을 해봐야겠다.' 원래가 심계가 뛰어난 그녀였는지라 유수극의 행동을 대번에 의심한 것이다. 유수극은 두 사람에게 일별을 고하고 아몽사를 끌고 자신의 처소로 사라졌다. 환희독왕은 아쉬운 듯 연신 입맛을 다시며 사라져 가는 아몽사를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금련부인이 놀랍게도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곧 아몽 사를 품을 수 있을 테니……." 환희독왕이 뛸 듯이 기뻐했다. "무슨 소리요. 마음에 드는 자라도 나 타났다는 말이오?" 금련부인이 힐끗 관해영이 사라진 쪽을 가리켰다. "저 사람……." 환희독왕이 펄쩍 뛰었다. "저 놈을 살려낼 생각이란 말이오?" "그래요, 나는 그를 살려 내기로 마 음먹었으니 당신은 간섭하지 말아요." "무공이 너무 강한데 괜히 후환을 만 드는 것이 아니겠소?" 환희독왕의 염려스러운 말에 금련부 인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꼼짝 못하 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 "그래도 살려 놓으면 만독불침(萬毒 不侵)이 되어 그나마 독도 소용이 없을 텐데……." "걱정 말아요. 심고(心蠱)가 있으니 까." 순간, 잔뜩 걱정스러움을 띠고 있던 환희독왕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졌다. 심고! 버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8 장 (색녀와 초독입성 1 ) 제 28 장 색녀(色女)와 초독입성(超毒入聖) 1.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풍겨 나오는 드넓은 대전(大殿). 사방 벽을 빙 둘러가며 선반이 매어 져 있고, 그 선반 위에는 수천 수만에 달하는 약병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 었다. 바로 이곳이 사독채 제일의 금지구역 인 만독실(萬毒室)이었다. 그 중앙에는 커다란 욕탕이 마련되어 있고 푸른 빛 도는 독수(毒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글부글―. 독수는 저절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끓고 있었다. 그때마다 코를 찌를 듯한 비린내가 석실 안을 진동했으며 수증기처럼 피어 오르는 독연(毒煙)이 땅바닥으로 짙게 깔리고 있었다. 욕탕 안에는 관해영이 뻣뻣이 굳어진 채로 둥실 떠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머리에는 수십 개의 금침(金針)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 앞에는 금련부인이 심각한 얼굴로 관해영의 차디찬 얼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독(毒)에 중독되었기에 살려낼 수 있는 방법은 이독제독(以毒制毒)밖에 없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주위에 있는 약병 들을 쓸어 관해영의 입에다가 쏟아 부 었다. 금련부인! 그녀는 관해영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 가? 아니면 살리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다는 것이었 다. 관해영의 머리에 가득 꽂혀 있는 금 침들로 보아 그녀는 분명 관해영에게 몽혼금침대법(蒙魂金針大法)을 시전하 는 것 같았다. 몽혼금침대법! 독이 뇌신경으로 가지 못하게 한 후 차츰 강한 독약을 먹임으로써 급기야는 인간의 신체가 항독체질(抗毒體質)로 변하고 마는 극악한 방법이었다. 금련부인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이는 그녀가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독제독을 사용하면 살려낼 수는 있지만 독인이 되어 지능도 어린 아이 처럼 퇴화하고 심성이 단순해져서 살인 밖에 할 줄 모르는 흉폭성을 띠게 된 다. 그래 가지고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 이 되지 못한다." 사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완전한 인 간 관해영이었던 것이다. "중독에서 벗어나 용모도 변하지 않 고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지각을 지 닐 수 있는 것은 오직 초독입성(超毒入 聖)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관해영을 초독 입성지체(超毒入聖之體)로 만들려고 하 고 있단 말인가? 초독입성! 이것은 그야말로 독인(毒人)들이 꿈 에서도 갈망하는 독의 최고 단계이다. 입선지경(入禪之境)에 달했다는 만독불 침 역시 초독입성의 제 일단계이며 이 것이 극성(極成)에 이르면 어떠한 독도 신체에 이로운 영약(靈藥)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어떤 음식물도 시간, 장소, 상 황에 구애받지 않고 독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설로만 전 해져 내려왔을 뿐 현재까지 그것을 익 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금련부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들 었다. "모두 아홉 단계로 나뉘어져 있는 초 독입성의 과정……, 이제 마지막 단계 인 융독(融毒)만 남았다." 금련부인은 관해영의 몸에 여덟 단계 를 시전하면서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품속에서 날이 새파랗 게 선 비수를 뽑아들더니 추호의 망설 임도 없이 관해영의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관해영의 몸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반면 놀 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스르르―. 욕탕을 가득 메우고 있던 독수가 상 처를 통해 관해영의 몸 안으로 모조리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관해영의 몸은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금련부인이 관해영의 몸을 주의깊게 살피며 말했다. "이 독수는 약독보혈(藥毒寶血)로 만 가지의 독약과 만 가지의 영약이 섞인 것이다. 영약과 독약은 상충하기에 이 사람의 몸에 급작스럽게 들어가 독약을 억제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아무리 독술의 대가라 할지라도 수많 은 독약을 마셨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 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 가지의 영약은 그 즉사를 방지해 주며 서서히 체내의 진기와 융 화를 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 그야말로 강(强)은 유(柔)로 다스리고 불(火)은 물(水)로 다스리는 이치와 같 은 것이다. "독약의 기운이 영약의 약효에 의해 억제를 당하다 조금씩 본신지기와 융합 이 되면 저절로 극상승의 독공을 익히 는 꼴이 된다. 그 후, 홀로 남은 영약들 이 다시 본신지기와 흡수되어 이갑자의 내공이 증진하면 초독입성은 완성되는 것이다." 관해영!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기연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그의 몸은 더할 수 없이 팽팽하 게 부풀어 있었으며 독수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독수의 물이 조금이라도 더 많 았다면 관해영의 몸은 바람의 힘을 견 디지 못한 풍선처럼 뻥 터져 버렸을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욕탕의 독수가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관해영의 몸 속으로 빨려들었다. 순간, 금련부인은 비호처럼 몸을 날 려 관해영의 머리 앞에 내려서며 자신 의 입술로 관해영의 입술을 덮어 눌렀 다. 이때 손가락으로 누르면 뻥 하고 터 져 버릴 것 같은 관해영의 배 안에서는 꾸르륵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그의 전신은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새파란 청광(淸光)을 띠 고 있었다. 금련부인의 얼굴에 언뜻 당혹감이 스 쳤다. '잘못했다가는 만사가 끝장이다.' 그녀는 급히 관해영의 입 안으로 자 신의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신기하 게 멈춰지며 관해영의 몸이 서서히 가 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진기와 관해영의 잠재 되어 있는 내력을 격발시켜 하나로 융 합해 독수의 주요성분만 관해영의 몸 속에 남겨 두려고 하는 것이었다. 츠으으으―. 관해영의 몸에서 뽀얀 수증기가 피어 올랐다.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비오듯 땀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이런 수고까지 한다는 것이 어딘지 미련스러워 보이는 그녀였으나 자신이 좋으면 물불을 가리 지 않는 성격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성격이 한 사내의 끊어진 숨결을 회생시키고 있었다. 셈�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8 장 (색녀와 초독입성 2 ) 2. 지극히 단조로운 밀실(密室). 유수극이 나무의자에 그린 듯이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열 세 살 가량의 미소 동(美小童)이 겁먹은 얼굴로 서 있었다. 소동은 바로 아몽사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금동 아극파(阿極巴)였다. 그리고 아몽사는 유수극 바로 앞에 뻣뻣이 서 있었다. 아극파는 혈도가 짚였는지 손가락 하 나 움직이지 못했다. 문득, 아몽사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 다. "우리에게서 무얼 알아내려는 것이 죠?" 유수극이 더할 수 없이 싸늘한 눈길 로 아몽사를 쏘아보았다. "오 년 전 포달랍궁에는 한 노인이 일주야를 묵고 갔을 것이다. 넌 그때 노인에게서 무엇을 받았느냐?" 순간, 아몽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 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상당한 충격에 핏기가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몽사가 완강히 부인했다. "난 당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유수극의 얼굴이 더할 수 없 이 음침하게 변했다. "시치미 떼지 마라. 너희들의 손에 끼어 있는 지환(指環)이 그와 만났음을 말해 주고 있다." 지환(指環)! 그것은 옥(玉)으로 만들어진 것이었 으며 아몽사와 아극파의 중지에 똑같은 모양으로 끼어 있었는데 용(龍)과 봉황 (鳳凰)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릴 듯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유수극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용봉쌍환(龍鳳雙環)은 그 사람이 평 소에 애지중지하던 것으로 함부로 남에 게 줄 리가 없다. 내 예상에는 그 사람 들이 너희들을 제자로 삼은 것 같은데, 제자로 삼은 이상 분명 무슨 선물을 남 겼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그 분을 알죠?" "그건 말할 수 없다. 어서 뭘 받았는 지 말하거라." 아몽사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어렸 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한 결심이 어린 얼굴로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절대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고 신신당부를 받았기에 말할 수 없어 요." 유수극이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넌 이 아이가 죽는 것을 방관하겠다는 것이냐?" 그는 어느새 한 자루의 비수를 뽑아 아극파의 목에 갖다 대었다. 이것은 유수극으로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는 어린 아이들이 무엇 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어 이 같은 방 법을 택한 것이다. 만약 상대가 무림고수였다면 그는 절 대로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림인은 의리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나 어린 아이들은 자 신의 목숨이 달아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아극파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해쓱하게 굳어지면서 아몽사를 향해 소 리치는 것이었다. "누나! 어서 말해. 이 자는 워낙 잔인 해서 진짜로 나를 죽일 거야." 아몽사가 버럭 노성을 질렀다. "닥쳐! 난 비록 여인이지만 신의가 뭔지는 알아. 맹세를 어떻게 깬다는 말 이냐?" "그, 그럼 날 죽게 내버려 둘 참이 야?" "사내자식이 입이 그렇게 가벼워 어 디에 쓰느냐? 네가 모두 말했기 때문에 이런 곤경을 당하는 것이다." 순간, 아극파가 두 눈을 부릅뜨고 소 리쳤다. "난 겁쟁이는 아니야. 그렇지만 그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난 참다 참다 견딜 수가 없었어. 누나 도 그 고통을 당해 보란 말이야. 그럼 날 욕할 수는 없을 거야." 이렇게 소리치는 아극파는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정말로 두려운 듯 부들 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유수극이 지극히 조용한 시선으로 아 몽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들이란 엄하게 다룬다고 결 코 좋은 결과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때로는 구슬리기도 하고 때로는 위협 을 주기도 하는 것이 아직 채 성숙되지 못한 어린 아이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공포를 준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동생을 나무랄 필요는 없다! 너라도 그 고통을 당했으면 입을 열었을 테니 까 말이다." "……!" "사실 난 너희들에게 관심이 없다. 아극파의 지환을 보고 그 사람과 모종 의 연관이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금련 부인이 일이 귀찮아질까 봐 죽이려는 이 아이를 내가 가로막아 이곳으로 데 리고 와 심문을 했다. 결과 너희가 그 노인을 만났음을 알았다. 자, 그러니 어 서 순순히 털어놓거라. 그러면 너희들 을 집으로 돌려 보내줄 테니……." "……!" "금동은 당시 나이가 어려 노인과 대 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넌 노인과 많은 시간을 같이 있었다고 했다. 금동 의 지환도 노인이 떠나고 난 후 너에게 받았으니 모든 비밀을 너만이 알고 있 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널 찾아 포달랍궁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스스로 걸어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 이 어디 있겠느냐?" 아몽사가 돌연히 소리쳤다. "어떤 수단으로도 내 입을 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요." 유수극이 빙그레 미소를 띠었다. "과연 그럴까?" 순간, 그는 아극파의 손을 탁자 위에 다 올려놓고 비수로 콱 내리찍었다. "아아악!" 아극파가 숨이 넘어갈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나 유수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네가 입을 열 때까지 아극파의 신체 를 하나하나 자르겠다."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의 여유를 두 고 아몽사를 주시했다. 허나, 아몽사는 입을 꾹 다물고 유수 극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유수극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번져 올랐다. "좋다. 정 입을 열지 않겠다면……." 번쩍! 한 줄기 시퍼런 광채가 그림자 없는 빛으로 화해 아극파의 팔을 후려쳤다. "누나!" 아극파가 겁에 질려 빽 소리를 질렀 다. 거의 같은 순간, 아몽사의 입에서도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멈춰요." 순간, 유성처럼 흐르던 광채가 우뚝 멈추어졌다. 팟! 그리고 유수극의 검은 아극파의 팔에 반촌(半寸) 가량이나 상처를 내고 있었 다. 아몽사의 전신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 다. '위협만 주는 과시인 줄 알았는데, 정 말로 팔을 자르려고 했어…….' 그녀는 아무리 자신이 독하게 마음을 먹어도 혈육이 고통받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수극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물결 처럼 번졌다. "진작 이랬으면 서로 피곤하지 않았 을 텐데……." 그가 검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며 아몽사가 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아직 그 분의 성함을 몰라요. 그 때 그 분은 지나가는 과객으로 저희 궁 에서 일주야 동안 숙식을 했어요. 무척 피곤한 표정이었고 항시 무엇인가를 골 똘히 생각하곤 했죠. 난 그분을 처음 대했을 때부터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했어요." 아몽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련한 눈길로 그때 일을 회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흘 러나왔다. "어느 날 그 분이 전설의 어기충소 (御氣沖 )를 펼쳐 어디엔가 갔다 오는 걸 목격했어요. 그 후 전 그 분에게 무 공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어요. 그 분은 빙긋이 웃음만 띨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 "그렇지만 제가 워낙 끈질기게 달라 붙자 나중에 묻더군요. 그토록 무공을 배우고 싶냐고. 그렇다고 하니까 지금은 시간이 없고 후일 자신을 찾아 오라고 하더군요. 자 신은 제자가 있기에 더 이상 제자를 받 을 마음이 없지만 저 같으면 자신의 딸 처럼 생각하고 옆에 둘 수 있다며 ……." 유수극이 묵묵히 듣고 있다 나직한 침음성을 흘렸다. "흠! 그 사람은 무척 냉정한 사람인 데 이째서 너에게 마음이 끌렸는지 모 르겠군." "그 분이 무척 고독해 보여 전 어리 광도 많이 부리고 음식이나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서 보살펴 드렸어요. 비록 짧은 기간이었 지만 우린 친 부녀처럼 가까워질 수 있 었어요." "그도 이젠 늙었난 보군. 정 따위를 느끼다니……." 이렇게 말한 유수극은 무엇인가를 곰 곰이 생각하는 듯 멀건히 허공을 바라 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많은 희비(喜悲) 가 엇갈리고 있었다. "……!" 이윽고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유수극이 냉정한 눈빛으로 아몽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너에게 비급이라도 주었느냐?" 아몽사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비급 따위는 없었어요. 단지 한 장 의 양피지를 줬을 뿐이에요." 순간, 유수극의 두 눈에 더할 수 없 는 광채가 섬전처럼 스쳐 지나갔다. "양피지라고 했느냐?" "그래요, 그것하고 용봉쌍환을 줬을 뿐이에요. 용봉쌍환은 원래 한 쌍이라 떨어질 수 없다고 두 개 모두 준 거 죠." 그녀는 힐끗 아극파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두 개 모두 내가 끼고 있어야 했는 데 아극파 보기가 미안해 하나를 줬다 가 이런 일을 겪게 되었지만……." 유수극이 다그치듯 물었다. "양피지는 어디에 있느냐?" "……!" "왜 대답을 않는 것이냐?" 아몽사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요." 유수극의 눈썹이 꿈틀 솟아올랐다. 그는 곧 비수를 아몽사의 얼굴에 갖 다 대고 그녀의 뺨에다 쓱쓱 문질렀다. "이 고운 얼굴이 보기 흉하게 변해도 좋으냐?" 아몽사는 심신이 떨리고 전신의 맥이 쪽 빠져나갔으나 굽힘이 없었다. "추녀가 될지언정 그 분의 신신당부 를 저버릴 수는 없어요." "네 동생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유수극의 은근한 협박에 아몽사는 어 떻게 해야 될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유수극은 아몽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재차 다그쳤다. "어서 그 양피지를 내놓아라." 아몽사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뺏길 수밖에 없는 상항. 그렇 다면…….' 그녀는 돌연 고개를 발딱 치켜들고 대담하게 유수극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 라보았다. "저도 요구조건이 있어요." 유수극은 그녀의 대담한 말에 어이없 는 얼굴이었다. "요구조건? 지금 너의 처지에 어울린 다고 생각하느냐?" "흥! 내 요구가 이행 안 되면 죽을 작정이에요. 내가 죽으면 당신도 양피 지를 얻을 생각을 말아야 해요." 아몽사가 유수극이 양피지에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역으로 위세 좋게 나간 것이었다. 유수극은 아몽사의 꼬장꼬장한 성격 을 보고 그녀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 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한 것 같군! 이년 의 죽음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는 곧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우선 무엇인지나 들어 보기로 하자." 아몽사가 거침없이 말했다. "관공자를 구해 줘요." 순간, 유수극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다. 그녀의 요구조건이 상상 밖이었던 것 이다. "만독실에 간 그 자를 말하는 것이 냐?" 그는 아몽사의 비통한 목소리로 소리 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 그가 관공자 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아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을 위해 한 가지만 말 하겠어요. 양피지에는 천마별부(天魔別府)란 곳을 들어갈 수 있는 기관조종법이 적혀 있 어요." 그녀는 유수극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 할까 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 같은 말을 한 것이나 그 충격은 실 로 상상 밖으로 거대한 것이었다. 유수극의 전신이 벼락맞은 사람처럼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런 그의 얼굴은 엄청난 희열이 번 지고 있었으며 두 눈은 더할 수 없는 탐욕으로 이글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몽사는 의외로 반응이 크자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분이 자신은 천마별부에 기거하 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없을 수도 있으 니 기관을 열고 들어와 무공을 익히라 고 했어요." 그러나, 그 말은 지금 유수극의 귀에 는 들려오지 않았다. '천마별부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면 등세욱의 모든 절기를 익힐 수 있을 뿐더러 그를 죽이려 할 때 여러 가지로 유리하다. 기관작동을 알아내면 사대벌왕의 암투에서 뿐만 아니라 차후 무림에서도 나를 대적할 자는 없다.' 유수극! 그는 무엇 때문에 등세욱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등세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천마별부는 등세욱을 보호하는 철옹 성(鐵瓮城)이면서 반면 쉽게 다치지는 않지만 한 번 다치면 회생불능의 상태 가 되고 마는 심장과 같은 곳이다. 그 심장을 내 마음대로 요리할 절호의 기 회가 왔다.' "……." '이것은 제령마고나 초력독인의 연독 법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구태여 연공 법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최악의 경 우에는 천마별부를 선택할 것이다.' 천마별부! 그곳은 바로 등세욱의 심장. 그 깊숙한 곳을 노리는 유수극은 분 명 천하의 효웅다웠다. 그는 아몽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 였다. "좋다, 그 청년을 구해 주겠다. 양피 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 머릿속에 있어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유수극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들었다. "양피지를 태워 버렸단 말이냐?" "가지고 있으면 부담이 될 것 같이 외운 후 태워 버렸어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 냐?" "지필묵을 가져와요. 그럼 제가 그리 겠어요." 유수극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제자리 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새 지필묵이 들 려 있었다. 아몽사가 지필묵을 받아 들고 한자 위에다가 도형(圖形)을 그리기 시작했 다. "그리고 마침내 붓을 놓으며 한지를 유수극에게 내밀었다. "천마별부의 기관구조예요." 허나, 그녀는 작동법만은 적지 않았 던 것이다. 유수극은 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며 회 심의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군. 기관의 위치가 꼭 들어맞 는군!' 이때, 아몽사가 다짐을 하듯 말했다. "조종법은 관공자를 구해 온 다음 알 려 드리겠어요." 유수극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밀실을 빠져나갔다. "좋아! 틀림없이 그 놈을 네 앞에 데 려다 놓겠다. 그때, 딴 소리를 했다가는 영원히 태양이 뜨는 것을 보지 못하도 록 해 주마."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 다. "……." 금련부인의 득의에 찬 목소리가 울리 고 있었다. "호호호! 드디어 초독입성이 되었다." 그녀는 만면에 기쁜 빛을 띠고 관해 영을 바라보았다. 관해영! 그의 몸은 지금 서서히 변해 가고 있 었다. 전신이 새카맣던 피부는 서서히 투명 한 빛을 띠며 윤기를 더해 가고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은 서서히 백옥빛을 띠는 것이었다. 문득, 금련부인이 무엇이 생각난 듯 이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잊을 뻔했군. 깨어나기 전에 멍에를 씌워 놓아야지." 멍에!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아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9 장 (사랑은 기 1 ) 제 29 장 사랑은 기(奇) 1. 금련부인은 품속에서 번쩍이는 옥함 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옥합 안에는 두 마리 벌레가 꿈틀거 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길이가 겨우 한 치 정도에 불과했으며 지렁이 같이도 보였으나 몸에는 무수한 털이 나 있었 다. 금련부인이 요사스런 미소를 흘렸다. "호호! 심고의 지배를 받으면 그 어떠 한 자라도 시술자의 명령을 따라야 한 다." 그녀는 곧 한 마리 심고를 입 안으로 꿀꺽 삼키고는 나머지 한 마리를 관해 영의 코 안으로 들이밀며 연신 괴상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꿈틀― 꿈틀―. 심고가 관해영의 입 안으로 들어가고 난 얼마 후, 그는 나직한 신음성을 터뜨 리며 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다 금 련부인을 발견하고는 의혹을 띠었다. "그대는……?" 금련부인이 기쁨을 참지 못한 얼굴로 대답했다. "금련부인!" 비록 짤막하기 이를 데 없는 대답이 었으나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듯한 희 열이 넘치고 있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다. "따지고 보면 당신과 나는 적이나 마 찬가지인데 어떻게 해서 독에 중독되어 있는 나를 구해 주었소?" "호호! 이제 적이 아니지. 나는 너를 필요에 의해서 살려낸 것이니까." 이렇게 말한 금련부인은 이글이글 타 오르는 눈길로 관해영의 목을 끌어안았 다. "무슨 짓이냐?" 관해영이 당혹성을 터뜨리며 금련부 인을 밀어냈다. 쿵! 졸지에 허연 허벅지를 드러내고 바닥 에 나뒹군 금련부인. 그녀는 전혀 노여워하는 기색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오히려 허리를 묘하게 비틀며 다가왔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육체란 후손을 번영시키기 위해 있는 것만은 아니니 까." "요망한 것!" 관해영은 얼굴 가득 노기를 띠고 자 리를 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그는 경악성을 터뜨리며 당 혹함을 금치 못했다. "앗!" 관해영은 그때서야 자신의 몸이 실오 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 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거대한 분노로 화해 두 눈 에 살기를 띠게 했다. "요부! 너 같은 계집은 죽어야 마땅하 다." 관해영이 벼락같이 우수를 뒤집어 금 련부인의 전신을 휩쓸었다. 그러자 강맹한 잠력(潛力)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장강의 물줄기처럼 밀려나 갔다. 그러나, 금련부인은 관해영이 두 눈에 살기를 띨 때부터 잔뜩 경계를 하고 있 었던 터라 힘들이지 않고 피해내며 소 리쳤다. "고집불통! 좋게 데리고 나가려 했더 니 안 되겠군." 이렇게 소리친 그녀가 주문을 외우려 할 때였다. "시끄럽다! 사독채를 아예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관해영이 노갈을 터뜨리며 한 손으로 금련부인의 머리를 쓸어가는 한편, 다른 한 손으로는 완맥을 움켜쥐어 나갔다. 이것은 더할 수 없이 신속하고 교묘 해 금련부인이 재빨리 후퇴했으나 벌써 완맥을 잡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몽사와 금동은 어디에 있느냐?" 관해영의 더할 수 없이 냉막한 목소 리에 금련부인의 안색이 일시에 새파랗 게 굳어 들었다. 그녀는 설마 관해영이 이토록 자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요염한 미소를 흘리며 은방울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너는 아몽사와 나 둘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 관해영은 그녀의 대담한 질문에 일시 에 멍청한 얼굴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몽사는 이제 막 피어 난 꽃송이라면 금련부인은 활짝 핀 장 미가 새벽 이슬에 젖어 있는 듯 지극히 완숙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다. 관해영은 순간적으로 두 여인의 아름 다움을 비교해 보고는 이내 고개를 흔 들었다. "당신은 비록 향기가 짙은 여인이나 그 향기는 사람을 죽이게 하는 독향(毒 香)이고, 아몽사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 을 상쾌하게 하는 생향(生香)이라 할 수 있는데, 어찌 너 같은 요부와 아몽사를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금련부인이 돌연 교소(嬌笑)를 터뜨렸 다. "호호호……!" 관해영은 그녀가 왜 웃는지를 몰라 멍청하게 있다가 의혹스런 얼굴로 물었 다. "왜 웃는 것이냐?" 금련부인은 관해영을 녹일 듯 요염한 웃음을 흘렸다. "호호호! 나를 독향에 비유했는데, 원 래 독을 뿜어내는 꽃이란 다른 꽃들보 다 유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나의 아름다움이 아몽사를 능가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여우 같은 계집!" 관해영은 그녀의 농간에 자신이 농락 당했음을 알고 분기탱천했다. 화가 난 해영이 잡고 있던 그녀의 완 맥에 힘을 가하는 순간, 금련부인은 연 신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때였다. "억!" 관해영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굳어 있었고, 더할 수 없이 의혹스런 얼굴로 금련부 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금련부인의 입이 쉴 새 없이 움 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녀가 일종의 사술을 부린다는 것을 알아차리 고 벼락같이 쌍장을 뻗어냈다. 콰아아아! 내재된 잠력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장 력은 마치 폭풍과 같은 사나운 기세로 뻗어나갔다. 금련부인의 안색이 일시에 휴지조각 처럼 일그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허공으로 석자나 뛰어 오르며 장력을 피해냈다. 퍼엉! 가죽북 터지는 요란한 굉음이 울리고 벽에 부딪친 장력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금련부인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나부꼈 다. 관해영은 슬쩍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금련부인의 희디흰 나삼이 우산처럼 부풀어 있었고 그 사이로 두 다리의 적 빛 살결이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 다. "죽어!" 관해영이 일갈노호를 터뜨리며 금련 부인의 사혈을 노리고 열 줄기 지풍을 튕겨냈다. 그것은 마치 달빛을 가르고 날아가는 화살촉과도 같이 빠르고 정확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금련부인은 번룡오륜(蒜龍五 輪)의 신법으로 신형을 다섯 번이나 회 전해 지풍을 피해냄과 동시에 짜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순간, 관해영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 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자 금련부인이 지면에 내려서며 더할 수 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 다. "귀여운 도련님! 이리로 와요." 그녀의 하얀 손이 바람먹은 갈대처럼 하늘거리며 관해영을 불렀다. 관해영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 이 일시에 사라지며 멍청한 얼굴로 금 련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금련부인을 향해 다가갔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 의지와는 상 관 없이 이 여인의 말이 내 뇌리를 지 배하다니…….' 그러나, 그의 마지막 의식마저도 점차 희미해져 가고 관해영은 자신의 존재조 차 모르는 듯 몽롱한 시선으로 금련부 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금련부인의 두 눈은 짙은 욕정 으로 촛불을 담은 듯 이글거리고 있었 다. "어서 날 안아 봐라. 내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 느냐?" "그래,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여인이요." 관해영은 허수아비가 걸음을 옮겨놓 는 듯 이상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 가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호호호호호……!" 금련부인이 전신을 흔들며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심연(深淵)의 밀전. 굴뚝 안 같은 어둠이 일렁이는 촛불 에 밀려나가고 세 사람의 인영을 희끗 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남일녀! 그들은 다름 아닌 유수극과 아몽사 금동인 아극파였다. 유수극의 목소리가 침통하게 흘러나 왔다.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심고에 중 독되어 있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아몽사가 심각한 얼굴로 조용히 침묵 을 지키고 있다가 적이 불안한 음성으 로 말했다. "심고를 제거할 방법은 없나요?" "심고는 일명 정인고(情人蠱)라고 하 는데 일단 중독이 되면 서로 영적인 교 감을 갖기 때문에 한쪽이 죽으면 같이 죽을 만큼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 평생 동안 금련부인의 노예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심고에 중독된 자가 시술자의 명령을 끝내 버텨 시술자의 몸 속에 있는 심고 를 털어버리면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아직 까지 심고를 이겨낸 자는 없었다." 아몽사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런 건 아름다 운 연인들에게나 이용하게 할 일이지 음부(淫婦) 따위가 시술하게 하다니 …….' 유수극 역시 심정은 말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아몽사의 비밀이 필요하기 때문에 관해영을 구출하려는 마음은 아 몽사 못지 않았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야말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겠 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린 다음 심각한 얼굴로 아몽사를 바라보았다. "나도 할 만큼 했으니 너도 그만 포기 하거라." 아몽사가 서릿발같은 얼굴로 유수극 을 바라보았다. 영리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는 유수 극이 다른 마음을 품고 말머리를 돌린 다고 생각했다. "그를 구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기관조 종법은 잊어버리세요." 아몽사가 단단히 못을 박자 유수극은 쓴 입맛을 다셨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사지를 비틀어 서라도 알아내고 싶다만 지금은 성질이 날카로울 때니 홧김에 자결이라도 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유수극은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지 금은 아몽사를 족치지 않는 것이 좋다 고 생각했다. '사람이란 마음이 편안할 때는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한 법이지만 자포자기 상태에서는 살고픈 욕망이 없게 마련인 것, 시간이 흘러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 앉으면 위협을 줘서 알아내야겠다.' '흐흐! 그 놈을 구출하지 못했다고 포 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다.' 유수극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이 물 결처럼 일렁거렸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도록 귀 기스러운 느낌을 들게 할 정도로 음산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때, 밀실 밖에서 지독히도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유수극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북경(北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북경에서……?" 유수극이 사뭇 의아한 얼굴로 밀실 문을 열고 나가자 눈빛이 날카로운 중 년인 한 명이 무릎을 구부려 한 통의 서찰을 받쳐올렸다. 유수극이 급히 서찰을 펼쳐 읽어 내 려가다가 얼굴을 돌연 일그러뜨리며 중 얼거렸다. "운악이 출관을 했다고? 그리고, 위혜 군과 혼례를 올린다고?" 푸스스―. 유수극의 손에 움켜쥔 서찰이 삼매진 화(三昧眞火)로 한 줌 재가 되어 허공으 로 흩어졌다. "며칠 남지 않았으니 빨리 북경으로 가야 되겠다." 걸음을 옮기던 유수극이 밀실을 바라 보며 두 눈을 음침하게 가라앉혔다. '저들 남매도 데려 가야겠다.' 지극히 호화로운 내실. 문 쪽으로는 휘장이 두텁게 드리워져 있고 비단금침 위에는 일남일녀가 거의 알몸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방 안의 공기 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사람의 몸은 후질근하게 젖어 축 늘어져 있었 다. 금련부인은 지극히 만족스런 얼굴로 반듯이 누워 있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호호! 요즘은 정말 살맛이 난다니까. 그렇지 않아? 귀여운 나의 도련님!" 그녀는 새빨간 입술을 열어 관해영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냈다. 관해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련부인이 하얗게 눈을 흘겼다. "꼼짝을 안 하는 것을 보니 힘들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방법은 많이 있으니 까……." 관해영은 금련부인이 무슨 짓을 하든 멀뚱한 눈길로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아무리 의지를 발휘해도 소용이 없 다. 이대로 벌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 인가?' 정사가 있고 난 후 한 번씩 찾아오는 희미한 정신으로 관해영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아아……." 금련부인의 숨소리가 갑자기 높아졌 다. 바로 그때였다. "부인! 유문주께서 오셨습니다." 지극히 조심스런 목소리가 휘장 밖에 서 흘러나오자 금련부인은 신경질적으 로 고개를 발딱 쳐들고 소리쳤다. "무슨 일이라고 하더냐?" "시비는 감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신색을 보니 매우 중대한 일인 것 같습 니다." "무슨 일일까?" 금련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충 옷을 걸친 다음 내실을 빠져나갔다. 관해영이 겨우 머리만 돌려 휘장 쪽 을 바라보며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다. '유문주라면 사운악의 양부가 아닌가? 그가 무엇 때문에……? 당장에라도 뛰 쳐나가 사운악의 행방을 물어보고 싶은 데, 이 무슨 참담한 신세란 말인가?' 관해영은 쓰디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기도 하지 만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토록 무력해 하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을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29 장 (사랑은 기 2 ) 2.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금련부인이 사납게 휘장을 들치며 냉 랭히 코방귀를 터뜨렸다. "흥! 사운악이 출관했으니 조만간 데 려 오겠다고? 이젠, 사운악 따위는 흥미 없다." 이어 그녀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관해영의 몸 위에 엎어졌다. 관해영의 의사 따위는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는 행동이었다. 사실, 그녀는 관해영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기술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운악! 이젠 소용없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있는데 내가 왜 엉뚱한 곳으로 눈을 돌리겠어?" 그녀는 관해영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 겠다는 듯이 소나기 같은 입맞춤을 퍼 부었다. 그러나 관해영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흐리멍텅한 두 눈은 예전의 면도날 같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무엇인 가에 대한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사운악이 출관했다고? 그는 지금 어 디에 있지?" 순간, 금련부인의 전신이 흠칫했다. "해영도 사운악을 알고 있는 모양이 군. 그와 잘 아는 사이야?" 그녀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짙은 호 기심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관해영을 물 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관해영의 두 눈에 핏빛 살기가 작살 처럼 쏟아져 나왔다. "어서 사운악이 있는 곳이나 말해." 금련부인은 관해영의 더할 수 없이 싸늘한 목소리에 전신을 가볍게 떨었다. "어머! 왜 그렇게 무서운 살기를 뿜 지? 꼭 신들린 사람 같애." 그 소리에 관해영의 눈빛이 사그러들 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군! 그가 있는 곳 을 안다고 해도 달려갈 수 있는 입장도 안 되고…….' 그는 가슴속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 함을 느끼며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 다. '휴! 지난 삼 일 동안 정사를 끝내고 정신이 돌아오는 시간을 이용해 운공을 해 보았지만 내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이때 금련부인이 자세를 이상하게 취 하며 중얼거렸다. "사운악은 지금 북경에 있다. 그는 위 혜군과 약혼을 못해 안달이 나 있다니 기가 막힌 일이지. 들리는 말로는 위혜 군이란 여인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혼사를 질질 끌고 있다니, 세상 일이란 참 요지경 속이야." 관해영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부 르르 진저리를 쳤다. '그녀가 혼인을?' 관해영에게 있어서는 실로 엄청난 충 격이었다. '혜군은 아직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녀에게 실망을 줄 수는 없다.' 관해영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활화산 같은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축 늘 어진 사지에 거대한 용암줄기 같은 엄 청난 힘이 생겨났다. 관해영이 금련부인을 밀치며 벌떡 상 체를 일으켰다. '가야 한다. 혜군을 사운악에게 빼앗 길 수는 없다.' 그가 침상에서 내려서며 옷을 걸치고 내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금련부인이 앞 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는 것이냐?" "비켜라! 난 가야 한다." 관해영이 금련부인을 밀치며 걸음을 떼어 놓았다. 금련부인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가긴 어딜 간다는 것이냐? 넌 항시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관해영은 들은 척도 않고 번 뜩 신형을 날려 휘장을 젖혔다. "……!" 금련부인이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순간, 관해영의 신형이 멈칫하며 제자 리에 우뚝 멈추는 것이었다. 금련부인이 재빨리 소리쳤다. "돌아와!" "……!" 관해영은 멍청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전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는 이미 금련부인이 주문을 외우는 순간부터 자신의 의지를 상실하고 있었 던 것이다. 금련부인은 두 눈을 빛내며 더 할 수 없이 달콤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어서 돌아와!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 이 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 지? 너만 원한다면 송두리째 너에게 줄 수 있단 말이야. 어서 내 몸을 안아. 그 러면 구름을 잡은 느낌이 어떻다는 것 을 알 거야." 관해영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야 해! 혜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 어." 그가 힘겹게 걸음을 떼어놓자 금련부 인의 안색이 새파랗게 굳었다. "돌아와! 돌아오란 말이야." 그러나 관해영은 멈추지 않고 어렵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살기가 어려 있었다. "사운악! 그, 그 놈을 죽여야 하는 데……." 금련부인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토록 강한 반발력 이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관해영의 의지에 놀라움을 금 치 못하는 한편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천하에서 심고를 이겨낼 수 있는 인 물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나풀거리며 주문 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관해영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고 엄청난 고통으로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철썩! 관해영은 어디선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고막을 후벼파는 단말마. 수십 개의 낯익은 얼굴들이 주마등처 럼 스쳐 지나가고 끝내는 하나의 얼굴 이 눈앞으로 거대하게 다가오며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비틀―. 관해영의 신형이 넘어질 듯이 휘청거 리다가 끝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금련부인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솟 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죽음의 그림자가 스쳤 다. 만약 관해영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면 몸 속의 심고 가 터져 모든 신맥을 파열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처참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금련부인의 얼굴이 잿빛을 띠면서 점 차적으로 보기 싫게 일그러들었다. 견딜 수 없었음인가? 금련부인이 바늘 끝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돌아오란 말이야." 파아아앗! 관해영이 신형을 박차고 휘장을 헤치 고 앞으로 나아갔다. "혜군! 내가 간다." "아아아악!" 순간, 금련부인이 참담한 비명을 터뜨 리며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썩은 고목 처럼 쓰러졌다. 관해영이 흠칫하며 뒤를 돌아다보았 다. 그리고 그토록 모호하던 정신이 일순 간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통 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드디어 사술에서 풀려난 것이군!" 검! 지극히 평범한 한 자루의 검. 그러나 그것은 한 사내의 가슴에 더 할 수 없는 공포를 심어 놓고 있었다. 환희독왕은 계집의 몸에서 신형을 일 으키며 소변을 보기 위해 내실을 빠져 나갔다. 순간, 번뜩이는 광채와 더불어 목덜 미에 와 닿은 싸늘한 촉감을 멈추며 흠 칫 전신을 떨었다. 그는 이 촉감이 분 명히 검이란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죽이지 않고 위협만 주는 것일까?' 환희독왕은 내심 의혹을 금치 못했 으나 기름진 얼굴에는 한 줄기 공포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저승사자." 지극히 짤막한 말이었으나 환희독왕 은 자신도 모르게 공포심을 느꼈다. "얼굴을 보게 해 다오." "보면 놀랄 것이다." "이 싸늘한 검의 촉감만큼이나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돌아서!" 환희독왕이 천천히 신형을 돌려 검의 임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환희독왕의 얼굴이 썩은 돼지 간처럼 변하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네, 네놈은? 그럼 금련은 죽었단 말 이냐?" 관해영이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죽을 줄 알았더냐?" "훗훗! 기적이란 것을 믿지 않았으나 네놈을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나는군!" 환희독왕이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떨 구었다. 그것은 바로 관해영의 칼끝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우수가 슬쩍 올려 진 것은 같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관해영 의 검이었다. 푹! 검 끝이 환희독왕의 목을 반이나 꿰 뚫고 들어갔다. "속임수란 하수(下手)에게나 쓰는 것 이다." "끄으……." 환희독왕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 툭 불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상태에서 죽 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검이 한 치라도 더 뻗어 온다면 초인이라도 살아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환희독왕의 공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관해영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아몽사는 어디에 있느냐?" "유…… 유수극이 데리고 갔다." "뭐야?" 관해영의 눈썹이 역팔자로 솟아올랐 다. "그가 무엇 때문에 아몽사를 데리고 갔다는 말이냐?" "그…… 그건 나도 모른다."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든 이유부터 밝히도록 하거라." 관해영의 싸늘한 목소리가 끝남과 동 시에, 번쩍! 백색 검망이 더 할 수 없이 빠른 속 도로 피어올랐다. 툭. 환희독왕의 목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 면서 땅바닥에 툭 떨어지며 피분수를 뿜었다. 관해영이 지체없이 신형을 날리며 소 리쳤다. "사운악! 기다려라." 법은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0 장 (만상천사 1 ) 제 30 장 만상천사(萬象天邪) 1. 북경의 장군부(將軍府)! 느릅나무가 빽빽이 우거져 있는 이 육중하리만큼 거대한 장원은 가을로 들어서면서부터 단풍이 들기 시작한 울긋불긋한 나무 잎사귀와 어울려 또 다른 멋을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한여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조용함과 엄숙함이었다. 시월(十月) 이십일(二十日). 바로 오늘. 대장군부는 여느 때와는 달리 술렁 이고 있었다. 혼(婚)이라고 쓰여진 수많은 등롱불 이 높은 담장을 따라 매달려 있었고, 지체가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속속들 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 수많은 축하객들……. 이들은 바로 천하 방방곡곡에서 내 노라 하는 세도가들이었고 내일 있을 위혜군의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손 에는 저마다 선물 보따리를 들고 있었 다. 햇살이 추녀 끝을 타고 지붕 위로 기어오를 무렵, 눈에 잘 띄지 않는 중 년문사 차림의 한 사내가 대장군부의 대문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대문 옆에 서 있던 비범해 보 이는 대한이 중년문사를 불러 세우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반듯한 탁자를 앞에 놓고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대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지 필묵으로 책자에 서명을 기입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중년문사가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 큼 다가가 붓에 묵을 듬뿍 찍어 일필 휘지로 휘갈겼다. 광풍서생(狂風書生) 도영린(陶英鱗)! 이 희안한 변호 앞에 방명록을 관장 하는 사내는 그만 멍청한 눈길로 중년 문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년문사는 도도하리만큼 고 고한 자세로 여덟팔자 걸음을 휘저으 며 여봐란 듯이 목을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그의 이 같은 모습에서는 사대부집 의 자식으로 남을 얕잡아 보는 오만함 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얼마 동안 걸음을 옮기던 중년문사 는 커다란 느릅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 추며 대장군부의 육중한 건물을 바라 보며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운악! 나 관해영이 네놈의 목을 가지러 왔다.' 관해영! 운명이 그를 해적으로 만들었고, 시 대가 그로 하여금 복수의 검을 들게 한 풍운아(風雲兒)! 그는 증오와 미움으로 대장군에 발 을 들여놓은 것이다. '혜군! 당신을 결코 사운악에게 시집 보내지는 않을 것이오.' 벌써 위혜군에 대한 사랑이 가슴 밑 바닥을 잔잔히 적시는 관해영이었다. 두 자루의 보검이 걸려 있는 지극히 호화로운 내실. 한 사내가 뒷짐을 지고 가을바람에 휩쓸리는 느릅나무 잎사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쩍한 큰 키에 빛나는 흑의(黑衣), 그리고 준미하리만큼 단아한 얼굴은 빈틈이라고는 바늘 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극패지도의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하에서 이런 인물은 단 한 사람, 바로 사운악이었다. 예전보다 더 숙성해 보이는 그의 얼 굴에는 만감이 엇갈리고 있었다. '후후……, 드디어 천마제왕기(天魔 帝王氣)까지 전수받았다. 비록 시일이 짧아 육성(六成)밖에 익히지 못했으나 그것만으로도 등세욱을 빼고 당금에서 나의 적수는 없을 것이다.' 사운악! 그는 광오해진 것인가, 아니면 정확 히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자신의 평가가 정확하다면 그 는 명실공이 천하 제이인자인 것이다. 사운악의 얼굴에는 한껏 오만함이 어렸다. '십성(十成) 이상만 터득한다면 등세 욱과도 겨루어 볼 만하다.' 이 무슨 소린가? 제자된 입장으로 사부의 이름을 함 부로 부르다니? 팔랑―. 나뭇잎 하나가 나선을 그리면서 떨 어져 내렸다.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 사운악의 눈 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리고는 빙글 문 쪽을 바라보며 돌 아섰다. 거의 같은 순간, 스윽―. 지극히 청수해 보이는 초로에 접어 든 노인 한 명이 흡사 유령처럼 내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불그레한 홍안(紅顔), 허연 백발과 제왕의 수염……. 마치 신선을 방불케 하는 용모였으 나 착 가라앉은 것이 어딘지 모르게 음산해 보였다. 문득, 사운악의 얼굴에 반가움이 일 었다. "할아버님!" 노인은 만면에 자애스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 못 본 사이에 더욱 강해진 것 같구나. 그래 이번 연공에서 등세욱이 마지막 절기들을 모두 가르쳐 주었더냐?" "그렇습니다." "천마제왕기도 전수받았느냐?" "여기 그 구결을 적어 놓았습니다." 순간, 노인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 (神光)이 번뜩거렸다. 그는 급히 족자 를 펼쳐 읽어 본 다음 품속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지극히도 사악 한 미소가 물결처럼 번지고 있었다. "흐흐흐……, 드디어 백년지한(百年 之恨)이 풀릴 날도 떨지 않았다." 백년지한! 그리고 천마제황기! 과연 그것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노인은 금방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 다. 한 줄기 고뇌가 깊은 이랑처럼 패여 진 주름살 속에서 스며나오고 끝내는 천천히 퍼지면서 불꽃 같은 야망을 뿜 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었다. 하지만 등세 욱을 꺾고 무림패권(武林覇權)을 쥔다 면 그대의 인고의 세월은 아무것도 아 니다." 독백 같은 노인의 목소리였으나 사 운악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할아버님! 이제 남은 일은 위혜군과 혼인하여 황궁밀반(皇 宮密班)만 조정할 수 있게 된다면 통 천계(通天界) 쯤 아무것도 아닙니다." 통천계! 냉고가 언젠가 말했던 단체가 아닌 가? 노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통천계와 격돌해 야 되지만 그들 보다 무서운 것은 등 세욱 그 자를 없애지 않고 천하를 패 권한다 해도 그것은 빈껍데기에 불과 할 뿐이다." "등세욱을 없앨 시기가 언제쯤입니 까?" "그건…… 내가 천마제왕기를 십성 까지 익힐 때까지다. 거기에다가 내가 지닌 만사일월수라공(萬邪日月修羅功) 이 가세된다면 등세욱도 나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문득 사운악의 얼굴에 한 줄기 염려 스러움이 스쳤다. "하온데 등세욱이 우리의 정체를 눈치채지 않았을까요?" 순간, 노인이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 다. "등세욱!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너를 유수극의 양자로 보내 놈 의 제자가 되게 한 것과 현정금도문과 의성보가 본 혈사무(血死霧)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사대벌왕 중의 나머지 이대세력인 파사철부와 복마성 이 통천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 도……." "……!" "그가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사대 벌왕주들이 자신에게 비수를 들이대고 있고, 자신을 참회하게 하여 은거를 하 게 한 것이 통천계의 거대한 음모임을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영원 히……." 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몸부림. 이는 천하 제일인 등세욱을 파멸의 구렁텅 이로 몰아넣고, 그리고 가장 믿어 왔던 네 명의 수하와 한 명의 제자에게 목 숨을 저당 잡히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를 배신하는 가장 더러운 배신 이 잉태되고 주인의 등을 찌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장 추잡한 배신을 동 시에 탄생시킨 절대군림자로 향한 길. 사운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 통천계의 정체는 무엇입 니까? 그가 어떤 신분이고 어떤 방법 을 세웠기에 등세욱을 이토록 무력하 게 만들었습니까?" 노인은 심각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천천히 말문 을 열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너 의 급선무는 대명의 재상인 위정국을 이용해 황궁밀반의 수좌가 되는 것이 다. 나에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통천 계도 벌써 황궁으로 손을 뻗치고 있다 고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궁밀반은 황 궁의 저력으로 불릴 만큼 가공할 힘을 지닌 집단, 한치의 착오도 없이 수중에 넣어 지금까지는 팽팽한 통천계와의 관계에서 본 혈사무가 힘의 우위에 서 게 하겠습니다." 노인이 지극히 만족한 웃음을 터뜨 렸다. "하하! 난 널 믿는다. 넌 아직까지 한 번의 실수도 없었을 뿐더러 나의 대를 이을 단 하나의 혈육이 아니냐?" 순간, 사운악은 못마땅한 얼굴로 노 인을 바라보았다. "헌데, 전 언제까지 유사극을 속이고 있어야 합니까?" 노인은 사뭇 여유 있어 보이는 미소 를 지우지 않았다. "그건 유사극을 없앨 때까지다. 유사 극은 너를 이용해 무림패권을 잡으려 고 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뇌영무제 동방백인이 혈사무에 속해 있는 줄 모 르고 있다. 어리석은 놈들이지." "……!" "그 두 놈들은 내가 자신들에게만 도움을 주는 조력자인 줄 알고 야망을 불태우지만……, 후후! 우리가 무림의 패권을 움켜쥐는 날에는 그야말로 쓰레기와 같은 존재 들이지……." 쓰레기와 같은 존재. 결국 이용을 하고는 가차없이 죽이 겠다는 뜻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더 할 수 없는 자신 감으로 가득 찼다. "이제 곧 천하는 나 혈사무주 만상 천사(萬象天邪) 사군휘(謝君輝)의 것이 될 것이다." 만상천사 사군휘! 강호오패의 일 인. 그러나 사군휘는 강호오패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었 다. 그런 만상천사 사군휘가 혈사무주 라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군휘의 노안에 강렬한 투혼이 끓 어올랐다. "천하패권에 앞서 등세욱 너를 꺾고 본인은 고금 제일인이라는 영예를 얻 을 것이다. 우선은 실추된 내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실추된 명예? 그렇다면 그는 언젠가 등세욱에게 패한 경험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사군휘가 더할 수 없이 심각 한 얼굴로 사운악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운악! 등세욱이 기거하는 천마별부 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내어라. 등세 욱은 세곡의 명리에 멀어졌으니 그와 결투를 하려면 내가 천마별부에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겠 다." 사군휘가 신형을 날려 사라지려고 하자 사운악이 급히 방문을 열었다. "할아버님! 오늘은 손자의 결혼식입 니다.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남아 서……." 사군휘의 두 눈에 상대의 심장을 얼 려 버릴 것 같은 한광(寒光)이 폭사되 어 나왔다. "이 놈! 다음 세대에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이 그따위 결혼식이 좋다고 그토 록 신경을 쓴단 말이냐? 이번 일은 너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니, 난 이만 가겠다." 휘익! 사운악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사군휘의 신형은 이미 연기와 같이 사 라지고 없었다. 사운악이 지그시 입술 을 깨물었다. '순결을 잃은 아내……,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린다. 그러나 야망을 위해 서는 감수해야만 한다.' 문득 사운악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 리며 가을 특유의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괜히 불안을 느끼 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부의 마음 같은 드넓은 하늘. 그 짙푸른 하늘 한편에 시리도록 냉막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환상을 느끼는 것이었다. "관해영이란 놈, 반드시 내 손으로 죽였어야 하는 건데……. 지옥사귀 사 이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모르겠군! 헌데 오늘 따라 왜 이토록 불안스러운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 그것은 사운악의 전신을 한 차례 떨리게 하고 있었다. 열어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1 장 (재 회 1 ) 제 31 장 재회(再會) 1. "절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사공자와 꼭 혼인을 하지 않아도 오라버니는 그 와 매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잖아요." "그동안 네가 완강히 거부하고 매제 도 혼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지 금까지 왔지만 이젠 아버님이 더 이상 참지를 못하신다." 여인의 규방. 지극히 호화롭고 잘 정돈된 방 안에 서 남녀의 목소리가 야적(夜寂)을 깨뜨 릴 만큼 드높게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바로 위장천과 위혜군이 었다. 위장천은 타이르는 듯한 부드러운 눈길로 위혜군의 눈물자국이 뚜렷한 얼굴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버님은 연로하시기에 언제 돌아 가실지 모르는 분, 자신이 맡고 있는 황궁별반의 수좌(首座) 자리를 매제에 게 물려주시려 한다. 매제 정도라면 황 궁밀반을 가장 유능하게 통솔할 수 있 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 "명칭건흥군은 내가, 황궁밀반은 매 제가…… 그렇게 하여 대명의 황조가 굳건해 지면 가문의 영예를 천세(千世) 까지 물려주려는 것이 아버님의 욕심 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바람이기도 하다 는 말은 꿀꺽 삼켜 버렸다. 그것은 지금 성질이 날카로워져 있 는 위혜군에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 통을 줄 뿐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같은 핏줄을 타고난 위혜군이 위장천의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 가? 위혜군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 가 휘날렸다. "난 죽으면 죽었지 사공자의 부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하면서도 단호 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장천 역시 이때만큼은 자제력을 잃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천하에서 그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어디에 있다고 그를 멀리 하는 것이 냐?" "남자의 눈에는 남자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나 여자의 눈에는 남자를 식 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요." "그따위 말로 이번 결혼을 회피하려 하지 마라. 천하의 모든 여인이 남자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어째서 불행한 여인들이 지천에 깔려 있느냐? "……!" "넌 지금 사공자의 혼약을 미루어 보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보지 만 이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영! 당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관해영!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이름, 밤마다 베갯머리에 눌물로 피어오르고 꿈으로 한 아름 가슴에 안겨드는 아름 답도록 그리운 사내. 위혜군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아픈 비애를 느겼다. 이때 위장천이 그녀의 신색을 살피 며 눈살을 찌푸렸다. "넌 아직도 관해영이란 놈을 생각하 느냐?" 위혜군이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겠 어요." "네가 그를 생각하는 것이 괴로운 과거 때문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조금 이라도 연모의 정이 있다면 그런 것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다." "전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어요." "네가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나에게 도 생각이 있다." 위장천의 음성이 단호하게 흘러나오 자 위혜군은 의혹스런 눈길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러자 위장천이 낯빛을 엄숙히 고 치는 것이었다. "네가 정녕 그를 잊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지옥귀사역으로 인편을 보 내 관해영을 처형시키고 말겠다." 순간, 위혜군의 안색이 일변했다. "안 돼요,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네가 매제와 결혼하지 않 겠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장천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자 위혜군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해영! 당신은 항상 나를 약하게 만 드는군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운악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요?' 위장천은 수심이 가득한 위혜군을 보자 더 이상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없어 신형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한 마 디를 덧붙였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내일의 일 이나 준비하거라." 위장천이 내실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오라버님!" 위혜군이 다시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느냐?" 위장천이 돌아보니 위혜군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염려스러움을 띠고 있 었다. "주련은 어떻게 할 참이죠?" 순간, 위장천의 안색이 싹 변하고 말 았다. 곡주련! 위혜군의 입에서 무엇 때문 에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일까? "지금 무얼 말하는 것이냐?" 위장천이 급히 얼버무리며 나가려 했으나 위혜군의 단호한 말이 그의 발 걸음을 잡고 말았다. "시치미 떼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그 녀를 좋아하고 있잖아요." 순간, 위장천의 안색이 보기 싫게 일 그러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빨 리 사라지고 그는 애써 침착한 안색으 로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이냐? 다시는 그런 소리 입 밖에 내지 마라."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라버 니가 그녀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난 알고 있어요." 위장천이 벌컥 성질을 터뜨렸다.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그녀는 매제와 깊은 관계가 있는 여인 이고 또 그런 일이 없다 하더라도 나 와는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이다." "오라버니! 사랑의 감정이란 인력으 로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오라버니가 주련이 사공자의 노리개라는 것을 알 면서도 끌리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듯 이 저와 해영의 관계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 주기를 바래요." 위혜군이 결론을 묘한 곳으로 끌고 가자 위장천의 노화는 극에 이르렀다. "더 이상 날 모욕하지 마라. 신화의 가문에서 태어나 또 다른 신화를 세운 나 위장천이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 로 빠지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할 것 같으냐? 다시 한 번 더 그따위 소리를 했다가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 로 알고 남매의 정을 끊어 버리겠다." 위장천이 바람을 몰고 내실을 빠져 나가자 위혜군은 붉은 입술을 잘근 깨 물었다. '사운악! 너는 우리 남매를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이어 그녀는 창 밖에 휘영청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며 한 사나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영! 당신은 지옥귀사역에서 몸 성 히 잘 있는지 모르겠군요.' 그녀의 반짝이는 눈가로 투명한 액 체가 고이기 시작했다. 대장군부의 동쪽.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달빛 아래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 바로 이곳이 객사(客舍)로써 대장군 부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맞이하 여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밤이 깊었음인가? 고고한 태초의 적막 속에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달빛을 타고 흐 른다. 휘익! 순간, 희끗한 검은 인영 하나가 객사 의 지붕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무언 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 이었다. 그는 바로 광풍서생 도영린으로 변 장한 관해영이었다. '혜군을 찾기 위해서는 후원(後園) 쪽을 먼저 수색해 보아야겠다.' 관해영은 곧바로 불빛이 흘러나오는 후원 쪽으로 신형을 날리며 정원 속에 몸을 숨겼다. "흑흑……." 불빛이 흘러나오는 내실에서 여인의 나직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이었다. 관해영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반 짝거렸다. '여인이라……. 혹, 혜군은 아닐까?' 그는 자신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며 지체없이 신 형을 날려 창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실(內室). 침대 위는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며 한 명의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머리를 침대에 묻고 흐느끼 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인의 섬세한 나신은 바람먹은 방풍림 가지처럼 떨리고 있 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의혹이 스쳤다. '뒷모습이 눈에 익은데……?'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흑……, 이렇게 굴욕을 당하면서 도 살아야 한단 말인가?" "……!" 여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에 흘러 내리는 눈물, 그리고 잘근 깨문 입술에 는 죽음보다 더 짙은 비애가 어려 있 었다. 순간, 그 모습을 자세히 보던 관해영 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숨 을 들이켰다. '주…… 주련!' 여인은 곡주련이었다. 관해영은 목구멍을 넘어 흘러나오는 그녀의 이름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 다. 곡주련은 탄식을 터뜨렸다. "관가가! 난 어찌해야 하나요? 이젠 복수의 집념도 나날이 가을 햇빛 아래 퇴색되어 가는 푸른 잎사귀처럼 시들 어만 갑니다. 오직 사운악의 노리개로 전락했을 뿐이니……." 관해영은 당장이라도 창문을 뛰어넘 어 곡주련을 부둥켜안고 싶지만 웬일 인지 몸이 앞서지를 않았다. 그녀는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독백 처럼 중얼거렸다. "사운악! 그는 갈수록 강해지고 나는 갈수록 초라하고 비참해질 뿐이니 어 떻게 해야 그를 이기고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관해영은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사운악! 네놈이……, 네놈이 주련을 저토록 비참하고 어려운 신세로 만들 어 놓다니! 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 는 놈이다.' 관해영은 전신의 기혈이 뒤집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곡주련을 바라 보았다. '주련! 당장이라도 너를 데리고 이곳 을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더욱 비참해질 뿐이다. 사운악을 없앤 후 너를 데리러 오겠 다.' 관해영은 측은한 눈길로 곡주련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실, 곡주련이 지금 심정으로 관해 영을 보았다면 그녀는 수치심을 이기 지 못하고 자결할 것이 십중팔구였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관해영은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주련!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 신경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1 장 (재 회 2 ) 2. 위혜군이 잠자리에 들기 위해 막 촛 불을 끄려고 할 때였다. "불을 끄지 마시오. 어둠보다는 밝음 이 두 사람의 얼굴을 더욱 빛내 줄 테 니까 말이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사운악이 내 실로 들어섰다. 위혜군이 흠칫하며 싸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이토록 야심한 시간 에……." "핫핫……, 내가 오지 못할 데를 온 것은 아니오." 사운악이 능글거리며 위혜군을 슬쩍 끌어안았다. "저리 비켜요." 위혜군이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사운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항상 차갑군. 내일이면 한 이불을 쓰는 부부가 될 터인데 너무 빼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오. 명심하시 오! 이번 혼인은 당신 아버님의 뜻이지 결코 내 자의는 아님을……." "……!" 위혜군의 안색이 여러 번 변했다. 그것은 극심한 모멸감이었다가 끝내 는 상대를 멸시하는 듯한 낯빛이었다. 사운악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 갔다. "자, 이리로 오시오! 당신은 어차피 새장 안에 든 새이기에 날아갈 수가 없소이다." 순간 위혜군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가 휘날렸다. "사운악! 이것만은 알아두어라. 내가 새장 안의 새라도 결코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최악의 경우 죽음마저도 불사 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운악의 얼굴이 냉막하게 일그러들 었다. "나도 너에게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다. 넌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불구의 몸임을 명심해라. 여인으로서 정조를 잃었다는 것, 이것은 네가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 라도 널 여인 중에 가장 추한 존재로 만들뿐이다." 충격 탓인가? 위혜군의 신형이 쓰러질 듯이 비틀 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운악의 입가 에는 조소가 번져 올랐다. "난 너에게 아내로서의 만족감 따위 는 바라지도 않는다. 너 역시 나에게 사랑받을 생각은 마라." 위혜군은 이 뜻밖의 말에 안색이 새 파랗게 굳어 들었다. "그……, 그럼 어째서 나와 애써 혼 인을 바라는 것이냐?" "필요에 의해서다." 사운악이 잘라 말하자 위혜군은 그 만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 위혜군은 가슴속에서 노여움이 끓어 올라 옆에 있는 화병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운악을 맞추지 못 하고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나 버렸다. 사운악은 분분히 흩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 리를 토해냈다. "오늘만큼은 참는다. 하지만 내일부 터는 내 말을 조금이라도 거역한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 "……!" 위혜군은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새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굳어 있었다. 사 운악은 그 모습이 통쾌해 견딜 수 없 다는 듯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넌 이제 나에 의해 울고 웃 는 인형이 되어 갈 것이다." 순간, "사운악! 네놈에게는 그런 기회가 영 원히 없을 것이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창문을 넘어 한 명의 사내가 내실 안으로 유령처럼 들어섰다. 그는 변장을 지우지 않은 관해영이 었다. 사운악은 그의 출현으로 적잖이 놀 라워하는 눈치였다. '주위에 오도록 느끼지를 못하다니! 대체 이 놈은…….' 그는 한순간에 심신을 안정시키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냐?" 그는 중년문사로 변장한 관해영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러면 나를 알아보겠느냐?" 관해영이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 며 역용을 지우자 준수한 얼굴이 나타 났다. 순간 사운악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너……, 넌 관해영!" 위혜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해…… 해영! 당신이 어떻게……." 그녀의 얼굴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 범벅이되어 전혀 다른 여인 같은 모습 이었다. 사운악은 침착을 되찾으며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지옥귀사역을 탈출한 모양이군 ……." 관해영이 으스스한 살음을 토해냈다. "후후……, 너에 대한 복수 때문에 지옥귀사역에 눌러앉아 있을 수가 없 었지." "잘 왔다. 항상 너를 없애고 싶었는 데 위장천 때문에 지옥귀사역에 갈 수 가 없었다. 헌데 제발로 찾아와 주었으 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 냐?" 쩌엉! 관해영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죽을 놈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네놈 이다." "후후! 꼴을 보니 몇 가지 무공을 익 힌 모양인데……, 분수를 모르는구나!" 사운악이 막 손을 쓰려 할 때였다. 위혜군이 관해영의 앞을 막아섰다. "해영! 무모한 짓이에요. 당신은 사 운악의 적수가 될 수 없어요. 어서 달 아나요." 관해영이 안타깝게 발을 구르는 위 혜군을 옆으로 밀어냈다. "혜군, 비키시오! 당신이 걱정할 만 큼 약한 내가 아니오." 그는 위혜군을 안심시킨 다음 사운 악을 향해 미끄러지듯이 다가들었다. "사운악! 네놈을 죽이기 위해 난 내 목숨을 하늘에 걸었다." 지난 세월의 처절함 때문인지 관해 영의 얼굴은 온통 살기 투성이었다. 츄아아악! 관해영의 죽검이 허공을 가르고 더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사운악의 전 신을 베어 갔다. 이것은 쾌(快)를 위주로 한 검법이서 그 빠르기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운악은 부챗살처럼 밀려오는 검광 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이놈이 이 정도의 재간을 익 혔단 말인가?' 그러나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사운악이 아니었다. 그는 눈빛을 차갑게 굳히며 한 손을 기쾌하게 뒤집었다. 쿠아아아! 번갯불 같은 일 장이 관해영의 검광 을 휩쓸어 버렸다. 콰아아아앙! 순간, 천지 진동의 굉음이 일며 사나 운 강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음!" "으윽!" 두 사람이 답답한 신음성을 터뜨리 며 제각기 한 걸음씩 물러섰다. 사운악의 놀람은 극도에 이르렀다. '이……, 이럴 수가! 당금에서 나의 적수는 등세욱과 조부님밖에 없다고 자부했었는데…….' 이때 관해영은 벼락 같은 기세로 사 운악을 덮치고 있었다. "대연삼검! 삼라창궁(森羅蒼穹)!" 번쩍! 츄츄츄츄―. 삼라창궁의 도식이 허공을 자욱히 메우며 사운악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달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천마혈염(天魔血炎)!" 사운악이 일갈노호를 터뜨리며 쌍장 (雙掌)을 벼락같이 밀어냈다. 콰콰콰콰! 시뻘건 핏빛 강기가 백파(白波)로 밀 려오는 검광들을 차단하며 관해영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앗!" 관해영이 경악성을 터뜨리며 신형을 뽑아올려 천마혈염을 피해냄과 동시에 검을 밑으로 향한 채 사운악의 백회혈 (百會穴)을 찔러 갔다.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검기는 만근거석이라도 꿰뚫어 버릴 만큼 무 거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스치기만 해도 즉사를 면 치 못할 판국이었다. 그러나 사운악은 빙판 위를 미끄러 지듯이 이리저리 신형을 움직여 검 끝 을 피해내며 오지(五指)를 연속적으로 튕겨 강맹한 다섯 줄기의 지풍을 쏘아 냈다. 그것은 허공에 뜬 관해영의 모든 퇴 로를 봉쇄하는 동시에 치명적인 사혈 (死穴)을 노리고 있었다. 관해영은 다섯 줄기 지풍을 모조리 검으로 쳐내며 지면에 내려섰다. 그의 얼굴은 온통 식은땀 투성이었다. 이 한 번의 결전으로 그가 얼마나 낭패를 당했는지 역력히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사운악을 제압할 실력이 안 된단 말인가?' 관해영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암담한 심정이었다. 사운악이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흐……, 관해영! 놀랄 만한 발 전이었으나 넌 내가 당금의 제이인자 임을 명심해야 한다." 관해영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난 네놈이 제일인자라도 꺾고 말겠 다.' 관해영이 어금니를 으스러져라 깨물 고 대연삼검을 연달아 펼쳐 내었다. 슈슈슈슈! 츄아아아아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공할 검망이 회오리치는 가운데 사운악의 쌍수가 돌연 열여섯 번이나 뒤집히며 관해영 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윽!" 관해영이 외마디 신음성을 지르며 입으로 피를 뿜으며 휘청거렸다. "해영!" 위혜군이 소리치며 관해영을 부축했 다. 그녀는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는 관 해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 이고 있었다. 사운악이 잔인한 미소를 흘리며 다 가들었다. "옛 연인이 다치니 무척이나 안타까 운 모양이로군……." 그는 아무리 무심하려 해도 위혜군 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관해영을 위하 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 다. "오음뇌인(五陰雷人)!" 사운악이 소리치며 우수를 연속 다 섯 번이나 후려갈기자 다섯 개의 수영 이 차례로 밀려나가며 관해영의 가슴 을 강타했다. "으윽―." 관해영이 피를 뿌리며 무려 열 걸음 이나 물러나면서 간신히 신형을 바로 잡았다. 그러나 사운악의 독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최후의 일격이다. 사망(死亡) 마폭 (魔暴)!" 쿠우우우우―. 엄청난 장력이 태풍처럼 밀려 들어 왔다. 관해영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여, 역부족이다.' 還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2 장 (불광대사 1 ) 제 32 장 불광대사(佛光大師) 1. "크윽!" 사운악의 장력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관해영은 벽에 부딪치며 바닥을 나뒹굴 었다. "으으……!" 관해영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일 어서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용이 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사운악 역시 놀라는 눈치였다. "나의 장력을 연속적으로 세 번을 얻 어맞고도 아직 숨을 쉬고 있다니 대단 한 놈이군." 그는 만에 하나 관해영을 살려 뒀다 가는 훗일 자신을 능가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서자 아예 숨통을 끊어 놓기로 작정을 하고 천천히 다가들었다. 순간, 위혜군이 사운악의 앞을 막아 서며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해영! 어서 달아나요." 관해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벽을 짚고 신형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비켜!" 사운악이 위혜군의 신형을 뿌리치며 마지막 일장을 가하려 할 때였다. "해영, 뭘해! 어서 달아나란 말이야." 위혜군이 사운악의 다리를 붙잡고 악 을 쓰듯 소리치는 것이었다. 사운악의 얼굴에 당혹함이 어렸다. "이…이 년이!" 파악! 사운악의 발이 사정없이 위혜군의 가 슴을 후려 찼다. "헉!" 위혜군은 거대한 쇠망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도 끝내 사운악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혜군!" 관해영의 두 눈에서 시뻘건 살광이 쏟아져 나왔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관해영이 이빨을 갈며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위혜군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 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살아 있어야만 복수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관해영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그래, 일단 피하고 보자. 놈이 나보 다 빨리 죽지 않는 이상 복수는 얼마든 지 할 수 있을 테니…….' 파악! 관해영이 마지막 진기를 쓸어올려 창문으로 신형을 날렸다. "서라!" 사운악이 소리치며 달려 가려 했으나 위혜군이 발을 잡고 있는 바람에 걸음 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손을 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사운악이 극도의 노화를 참지 못해 그녀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러나 맞으면 맞을수록 위혜군의 손 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랑! 그것이 한 여인에게 커다란 힘을 준 것이다. 사운악의 안색이 일그러들었다. "으으……, 이 년이 정신을 잃으면서 까지 손을 놓지 않으니." 그는 다급한 신색으로 밖을 향해 소 리쳤다. "적이다! 후원 쪽을 막아라." 그의 목소리에는 내공에 실려 있어 대장군부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 다. 삐익! 순간, 찢어지는 듯한 호각 소리가 연 속적으로 울리고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헉헉……." 관해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느릅나 무 사이로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고 있 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 가야 한다. 그게 혜군의 희생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는 길이다.' 한 발을 옮길 때마다 기혈이 뒤틀리 고 눈앞이 아찔거렸으나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운악, 그 놈을 죽이지 못하고 이토 록 처참한 몰골로 몸을 피해야 하다 니……!' 바로 이때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지척에 들려왔다. 관해영이 재빨리 숲 속으로 몸을 숨 기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다가와 사방 을 휘둘러보는 것이었다. "멀리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 위를 샅샅이 뒤져라."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부챗살처럼 나가며 숲 속을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의 인물이 관해영 쪽으로 다가오며 창으로 숲을 찌르고 있었다. 관해영의 얼굴이 당혹하게 물들었다. '큰일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곧 발 각되겠는데…….' 그는 마지막 남은 진기를 단전으로 끌어 모았다. 순간, 다가오고 있던 인영이 잔뜩 웅 크리고 있는 관해영을 발견하고는 목청 이 터져라 소리쳤다. "여기다! 끄윽!" 관해영이 지면을 박차고 죽검으로 인 영의 가슴을 베는 한편 신형을 뽑아 올 렸다. 그러나 삼장도 채 날아가기 전에 그 의 신형은 무거운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심한 부상과 탈진으로 인해 더 이상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장이란 말인가?' 그는 암담한 시선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수많은 인물들을 바라보 며 절망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슈우우! 느릅나무 사이에서 한 줄기 회색빛 인영이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쏘아 져 오며 관해영을 안아 들고 지붕을 타 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 난 일이어서 모든 사람들은 쐐액! 하는 바람소리만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개중에는 안력(眼力)이 뛰어 난 사람이 있는 듯 황망히 소리쳤다. "서쪽이다. 그 쪽은 경비가 없는 곳 이니 놓치기 쉽상이다." 슈우우우―. 수십 명의 인물들이 한꺼번에 신형을 날리자 마치 숲 속에 졸고 있던 새떼들 이 후두둑 하고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 들이었다. 관해영을 옆구리에 낀 인물은 삼십여 장이나 떨어진 고각들의 지붕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타넘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신법은 이미 입 선 지경에 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 정도였다. 관해영은 한순간 자신의 몸이 지극히 부드러운 장력에 의해 허공으로 떠오르 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삭풍(朔風)과도 같은 바람소 리가 귓가로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들 으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일까? 천하에 서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있다 니 놀라운 일이군…….' 그러자 일단 사지를 벗어났다는 안도 감에 전신의 맥이 풀리며 차츰 정신을 잃어갔다. 시뻘�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2 장 (불광대사 2 ) 2. 관해영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 러보니 사방 벽은 온통 먼지투성이였 고 주위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한 눈에도 다 쓸어져 가는 관제묘 (關帝廟)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 다. 헌데, 자신의 앞에는 한 명의 노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가? 노승(老僧)! 허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데다 지극히 온화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그 는 자애스런 미소를 지으며 관해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해영이 급히 상체를 일으키며 물 었다. "대사께서 저를 구해 주셨습니까?" 노승이 염주알을 굴리며 나직한 불 호를 외쳤다. "아미타불! 전생(前生)에 연(緣)이 있 었던 모양이네……." "구명지은을 어떻게 갚아야 할 지……." "허허! 구명지은 운운하지 말게. 그 게 다 자네의 복이니까. 내상이 워낙 엄중해 회복하기 어렵다고 보았는데, 자네의 체질이 특이해 벌써 반 이상이 나 회복되었네." "……!" "사운악이 그토록 독랄한 수법을 쓰 는 것을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대단한 원한이 있는 모양이군."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 다. 그는 노승이 사운악과의 결투를 지 켜보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보다 더 높은 무 공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 듯 머리를 스쳤다. "대사께서는 저와 사운악의 결투를 모두 지켜보셨습니까?" "그런 셈이지. 난 한 사람의 종적을 추적하다 장군부까지 들어가게 되었는 데 그만 그의 행적을 놓쳐 버렸네. 그 래서 각 건물을 뒤지다가 자네와 사운 악의 결투를 보게 되었네." "……." "처음에는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고 했으나 사운악과 원한이 있다면 필시 의로운 사람일 것 같아 자비를 베푼 것이네." 관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헌데 대사님의 명호는 어떻게 되는지요." 그러자 노승은 입가에 약간 겸연쩍 은 미소를 흘리는 것이었다. "나는 불교에 귀의했을 때부터 세인 들이 쓰는 이름을 버렸으나 사람들은 나를 불광(佛光)이라 부르더군." 순간, 관해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광대사(佛光大師)! 소림이 삼백 년만에 낳은 절대기재. 그는 모든 일에 관용을 앞세우고 모 든 사람들에게 양보하는 성격의 소유 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 먹은 일은 아직 까지 단 한 번도 양보를 한 적이 없는 기이한 인물이었다. 관해영은 잠시 놀란 마음을 진정시 키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떤 자를 추격하고 계셨습니까?" "으음……." 불광대사는 나직한 침음성을 흘리며 온화한 얼굴을 침중히 가라앉혔다. 관해영은 그의 안색을 보고 문제의 인물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 하고 있었다. 불광대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바로 만상천사 사군휘라고 하 네. 강호오패의 한 사람이지……." "그와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입니 까?" "근래 강호에는 혈사무라는 괴집단 이 나타났는데 이들에 의해 많은 정도 명숙들이 실종되었다네. 조사해 보니 혈사무는 어딘지 모르게 사군휘와 모 종의 관계가 있을 것 같아 그의 뒤를 쫓고 있는 중이네." "허면, 어떤 단서라도 잡았습니까?" 불광대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불행히도 확실한 단서는 얻지 못했네. 다만 사군휘가 무림에 흐 르는 암류의 원흉임은 확실하다는 것 이네." 관해영은 곰곰이 생각하다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사군휘와 사운악은 친족입니까?" 관해영이 이렇게 물어 본 것은 성 (姓)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관해영이 잔뜩 기대에 찬 눈길로 불 광대사를 바라보자 그는 천천히 고개 를 저었다. "성만 같을 뿐이지. 연관이 있다고는 보지 않네. 사운악은 유수극의 양자인 반면 등세욱의 고명제자……, 따지고 보면 등세욱과 사군휘는 서로 원수지 간인데 어떻게 관련이 있을 수 있겠는 가?" "그럼 사군휘가 무엇 때문에 장군부 로 들어 왔을까요?" "그거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네. 빈승은 사군휘가 이곳 북경으로 향 한 것을 알고 혹 사운악의 결혼식에 등세욱이 나타나면 그와 대결을 벌이 기 위해 장군부로 오지 않았나 싶네." "그의 종적을 찾았습니까?" "못 찾았네. 빨리 그를 만나 모든 것 을 확인해야 무림암류를 해결할 방법 을 모색할 수 있는데……." 불광대사는 사뭇 걱정스럽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순간, 관해영이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인지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불광대사가 의혹 어린 얼굴로 물었 다. "어딜 가려는 것인가?" 관해영이 두 눈에 핏빛 살기를 뿌렸 다. "상처를 치료했으니 다시 장군부로 가 보아야지요." 불광대사가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 푸렸다. "사운악에게 다시 도전할 셈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무모한 짓이네. 자네는 아직 내상이 완전히 치료가 되지 않았을 뿐 더러 설령 치료가 완치되었다 할지라 도 사운악의 적수가 되지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고 보니 내가 살아나온 것이 더할 수 없 는 치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놈 과 부딪쳐 내가 죽더라도 팔 두 개 정 도는 없앨 수 있다고 봅니다." 관해영이 두 눈에 지독한 살기를 띠 면서 자신의 뜻을 굽힐 것 같지 않아 보이자 불광대사가 잠시 주저하다 입 을 열었다. "장군부의 아가씨 때문인가?" "……!" "젊은 사람들의 태반이 여인들 때문 에 자신의 인생을 그르치지. 한 순간만 참으면 나중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 르고……." 관해영은 불광대사의 고리타분한 소 리를 더 이상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 다. "절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은혜를 보답하겠습니 다." 관해영이 작별을 알리고 빙글 신형 을 돌렸을 때였다. 불광대사의 신형이 바로 자신 앞에 예의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귀신이 혀를 내밀 정도의 놀라운 신법이었다. "고집이 세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 이 더 많은 법이네. 하니 그 여인을 생 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해 도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게." 그러나 관해영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나는 갈 것입니다. 그러니 막지 마십시오." 관해영이 다시 신형을 날리려 하자 노인이 벌떡 일어서며 앞을 가로막았 다. 관해영의 얼굴에 노기가 끓어올랐다. "왜 이러십니까?" 불광대사가 조용히 합장을 했다. "아미타불……. 나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네만 자네를 막아야 한다는 생 각이 드는군. 인연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인간의 짧은 목숨으로는 실 로 불가사의한 일일 뿐이지." "……!" "그대에게는 광명한 협기(俠氣)가 흐 르고 신룡(神龍)과 같은 재간이 있네. 빈승은 그대에게서 무림의 구성이 될 기운을 느꼈으니 자네의 목숨을 보존 시켜 훗날 무림의 큰 일을 위해 몸을 바치게끔 만들 것이네." 관해영이 냉랭히 대꾸했다. "전 대사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 단한 놈은 못됩니다. 다만 복수를 한다 는 일념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든간에 난 자 네를 데리고 갈 것이네." "용서하십시오. 제가 무례를 범하더 라도……." 관해영이 느닷없이 우수를 세워 불 광대사의 옆을 쳐 나갔다. 이것은 불광대사가 자신을 잡지 못 하게 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이 한수로 인해 불광대사는 적잖은 놀라움을 나타냈다. "자네는 맹환과 어떤 사이인가?" 관해영은 노인의 말에는 전혀 대꾸 도 없이 다시 우수를 번개처럼 휘둘러 따라 오는 불광대사의 가슴을 쓸어 갔 다. 쫘아아아―. 날카로운 수영이 어지럽게 허공을 뒤흔들며 불광대사의 가슴을 정통으로 후려쳤다. 순간, 불광대사의 우수가 기기묘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관해영의 손바닥을 모조리 쳐내는 것이었다. 그 진동으로 관해영이 두 걸음이나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불광대사의 얼굴에는 의혹이 가득했 다. "이번에는 창궁우사의 무학까지 알 고 있다니……. 내력이 참으로 복잡하 군!" "복잡한 것은 하나도 없소이다." 관해영이 소리치며 손으로 대연삼검 을 쳐나가자 천지는 일시에 수영(手影) 이 가득했다. 그러나 회복이 완전히 되지 않은 상 태라 그 위력은 훨씬 떨어져 있었다. 불광대사의 신형은 수많은 수영들 사이를 연기처럼 누비며 나직한 감탄 을 터뜨렸다. "훌륭하네. 자네의 지금 실력으로는 당금의 제 삼인자라고도 할 수 있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자네는 정도의 태양이 되어 등세욱과도 겨루어 볼 만 한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일세." 문득, 노인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 에 관해영은 눈앞으로 수십 개의 수영 이 어른거리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허리쯤에서 미세한 충격을 느끼고 석상처럼 굳어 들었다. 순식간 에 혈도를 짚히고 만 것이다. 불광대사가 얼굴에 쓴웃음을 띠었다. "용서하게. 강제라도 자네를 살려야 겠네. 자넨 성격이 너무 굴강하여 그냥 놔두었다가는 필시 사운악에게 목숨을 잃을 걸세." 이내 불광대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관해영을 끼고 관제묘 밖으로 신 형을 날렸다. 還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3 장 (괴인 봉왕 1 ) 제 33 장 괴인 봉왕(怪人 蜂王) 1. 왕옥산(王屋山)!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 없는 것 처럼 보이나 실상은 노송(老松)이 우거 져 있어 발을 들여놓기 가 무섭게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때는 정오(正午) 무렵. 한 명의 인영이 노송을 헤치며 정상 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왕옥산의 지리에 훤한 듯 망설 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옆 구리에는 축 늘어진 사내의 신형을 끼 고 있었으나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불광대사였다. 이윽고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을 지 나 정상에 도달하자 바람소리만 휑휑 해 사뭇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 져 있어 칼날 같은 바람을 모두 막아 낼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화스럽게 보 였다. 불광대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 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이 근방인 것 같은데……." 바로 이때였다. 웅웅―. 어디선가 벌떼 소리가 고요한 산의 적막을 깨고 시끄럽게 들려왔다. 이것이 만약 벌떼들이 내는 소리라 면 실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벌들이란 꽃을 찾는 곤충들이 라 꽃이 없는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 는 것이다. 왕옥산의 준봉(峻峰)들이 사방으로 이백여 리에 달해 있고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극히 드물었다. 오직 봄철에 송화(松花)가 고작인 이 왕옥산에 벌떼소리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괴이한 기분을 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광대사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번져 오르는 것이었다. "찾기는 제대로 찾았군!" 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재빨 리 신형을 옮겼다.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는 드넓은 분지(盆地). 노란색의 유채꽃이 살랑이는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지금은 가을……, 유채꽃이 피어 있 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일 수 있으 니 그것은 바로 왕옥산의 특이한 기온 때문이었다. 꽃밭 속에는 다 쓰러져 가는 한채의 초옥(草屋)이 자리해 있고 벌떼 소리는 바로 초옥 주변에서 울려나오고 있었 다. 헌데 초옥 주변에 날아다니는 수많 은 벌떼들, 그것은 구름과 같은 형상으 로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다. 불광대사는 유채꽃 속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 서성거리며 곤혹스런 얼굴로 초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모르고 들어갔다가는 쇄천만봉진( 天萬蜂陣)에 걸려 아무리 강한 고수라 도 살아날 수 없다.' 쇄천만봉진! 이것은 바로 벌떼를 이용한 절진으 로써 기진(奇陣)을 설치한 사람이 벌떼 를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절대 파해 되 지 않는 죽음의 절진이었다. 불광대사는 잠시 망설이다 초옥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봉왕(蜂王)! 옛 친구가 찾아왔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드높아 웅 웅거리는 벌떼 소리를 완전히 압도하 고 있었다. 그러자 초옥 안에서 질그릇 깨지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뉘신지 모르나 그냥 돌아가시오. 이 몸은 세월에 묻혀 나를 잊었으니 어찌 친구가 있을 수 있겠소." "헛헛! 빈승의 흉내를 잘도 내는군. 백년금거(百年禁居)를 풀어줄 일 때문 에 찾아왔더니 할 수 없지." 불광대사가 중얼거리며 신형을 돌리 자 초옥 안에서 벼락 같은 노갈이 터 져나왔다. "가만! 백년금거를 푼다고? 거짓말은 아니겠지?" 이 알 수 없는 목소리는 어딘지 모 르게 짙은 격정으로 잔잔히 떨리고 있 었다. 불광대사가 못이기는 척 다시 돌아 서며 혀를 찼다. "쯧쯧……, 자넨 내가 거짓말을 했다 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러 니 어서 벌떼를 물리치게." "땡추! 거짓말을 했다가는 소림사 중 놈들 머리통을 모조리 목탁 대용품으 로 쓸 것이다."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어 삐익! 하고 한 차례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순간 허공을 어지러이 맴돌던 구름 같은 벌떼들이 모조리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불광대사가 걸음을 옮겨 초옥으로 향했다. 초옥 안. 한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는 금빛의 수많은 벌들이 층층 이 달라붙어 있었다. 벌떼 속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번뜩이는 두 눈 때문 이었다. 허나 불광대사는 그의 사나운 눈빛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문을 열었다. "초산(楚山)! 근 삼십 년만에 보는 것 같군." 초산! 바로 봉왕이라는 호(號)를 가지고 있 는 이 신비로운 사람의 이름인 것 같 았다. 초산이 냉랭히 외쳤다. "만난 것은 만난 것으로 끝내고 어 서 백년금거를 푸는 방법이나 말해!" "무뚝뚝하긴 변함없군. 방법은 다름 이 아니라 바로 이 아이에게 역봉밀정 대법(力蜂蜜精大法)을 시전해 주는 것 일세." 순간 초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 다. "자네가 이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아 세 속의 일 들을 몰라서 그렇지만 지금 무림은 난 세(亂世)일세. 자네가 이 아이에게 역 정밀봉대법을 시전하지 않으면 난세는 종국에 가서는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룰 것일세." "난 그런 것 몰라.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이 금봉(金蜂)들 뿐이야." "이보게, 초산. 자네도 무림에 몸담 고 있는 사람, 어찌 무림을 모른다고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고향 떠난 사람이 고향을 그립지 않다고 말을 하 는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누가 천하의 주인이 되든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피를 부르는 법. 악 (惡)이건 정(正)이건 나하고는 상관없 는 일이야." "그럼 자네는 가문의 명예마저 모른 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자 초산은 입을 꼭 다물고 두 눈마저 내리감는 것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의 신형은 잔 잔히 떨리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전신 에 달라붙어 있는 금봉들이 요동을 치 고 있었다. "……!" 이윽고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 이 지났을 때였다. 초산이 두 눈을 슬그머니 뜨며 바닥 에 누워 있는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누군가? 십문령주(十門令 主)의 주인이라도 되는가?" 십문령주! 이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불광대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네.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걸세." 초산이 관해영의 몸을 찬찬히 뜯어 보며 나직한 감탄을 터뜨렸다. "근골은 아주 훌륭하군." "시전하겠나?" "가문의 명예를 찾으려면 금거를 풀 어야 할 테니 시전해야지. 그렇지만 십 문령(十門令)을 보기 전에는 절대 시전 할 수 없네." "아미타불! 부처님의 배려로 또 하나 의 인연이 이루어지니 무림에 낀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태양이 비출지니 ……." 불광대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 들었 다. 그것은 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물의 뼈로 만든 것이었다.하얀 백색 을 띠고 있는 비수에는 여러 개의 서 명이 각인(刻印)되어 있었다. "확실하군. 헌데 어떻게 자네가 십문 령을 지니고 있는가?"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는 의혹이 가 득 차 있었다. 불광대사가 처연한 미소를 흘렸다.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네. 십문령을 만든 정천십종(正天十宗)은 나만 빼고 는 모두 실종되었네." "흐음! 괴이한 일이군. 천하에 내노 라 하는 정천십종이 실종되다니……." "뿐만이 아니네. 십문령주만 맡고 있 던 무상검신(無相劍神) 헌원승송(軒轅 昇松)도 한 가지 의혹을 풀기 위해 관외(關外)로 나갔다가 아직도 돌아오 지 않고 있네." 도 없�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3 장 (괴인 봉왕 2 ) 2. 순간 담담하던 초산도 이때 만큼은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헌원승송이 느꼈던 의혹이란 무엇 인가?" 불광대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자넨 이곳에서 삼십 년을 지내 잘 모르겠지만 이십 년 전 모용청운(慕容 靑雲)이 갑자기 실종된 사건이 벌어졌 네. 그러자 평소 모용청운과 교우가 깊 었던 헌원승송은 그 일에 어떤 음모가 깔려 있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 기에 이르렀네." "……!" "그러다가 얼마 전 그가 나를 찾아 왔는데 관외(關外)로 나가 보아야 된다 면서 나보고 십문령주의 대리 행사를 하라고 하더군……." 초산의 눈빛이 짙은 호기심을 띠었 다. "정도 제일의 기인인 헌원승송이 겁 먹을 정도라면 상대가 어떤 자들인지 궁금하군." "아마도 헌원승송은 모용청운의 실 종에 관해 어느 정도 단서를 잡은 게 분명하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물어 도 끝내 대답을 안하고 관외로 나갔네. 그래서 내가 십문령을 지니게 된 것이 지." 이때 초산이 단호한 음성을 토해냈 다. "그건 자네들의 사정이고 난 어찌 되었건 십문령을 얻었으니 금거가 풀 리게 되었군." 일순 불광대사의 얼굴에 근심이 스 쳐 지나갔다. '삼십 년 전 봉왕 초산은 구파일방 (九派一 )과 시비가 붙어 많은 제자들 을 살해했다. 결국 구파일방의 요청을 받은 우리들은 초산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오래 전부터 친분 관계가 있었던 터라 목숨을 빼앗을 수는 없었 다. 그렇다고 구파일방의 출신인 우리 들로서는 장문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어 양쪽 모두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있는 금거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백 년 동안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여 구파일방과 봉왕의 원 한 관계를 청산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금거가 풀리면 초산이나 구파일방을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군…….' 그는 지극히 염려스러운 눈길로 초 산을 바라보았다. 이때 초산은 신형을 일으켜 선반 위 에 놓아둔 하나의 철궤를 들고 와서 불광대사 앞에 놓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격정으로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 "이 만년금철(萬年金鐵)의 철궤는 오 직 지존비로만 열 수 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뼈로 만든 비수를 열쇠 구멍에다 맞추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비수가 바로 천하의 보 도(寶刀) 지존비(至尊匕)란 말인가? 초산이 지존비를 돌리자 철컥 하는 소리가 울리며 철궤의 뚜껑이 불쑥 열 렸다. 순간, 눈부시도록 찬란한 금광이 침 침한 방 안을 환히 비추는 것이었다. 대체 철궤 안에는 무엇이 들었기에 이토록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일까? 철궤 안. 그곳에는 금으로 세공된 주먹만한 크기의 벌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날 아오를 것같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으핫핫핫!" 초산이 미친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 붙어 있는 금봉들 이 웅웅거리며 방 안을 어지럽게 날아 다니는 것이었다. 불광대사는 급히 외신강기로 몸을 엄밀히 보호하자 금봉들은 벽에 부딪 친 듯 모조리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다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더 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었다. 불광대사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 다. '실로 대단한 곤충들이군. 나의 외 신강기는 웬만한 고수들도 피를 토하 고 쓰러질 정도인데 한낱 곤충 따위가 견디어 낼 수 있다니!' 이때 초산이 광소를 멈추고 금으로 세공된 금봉을 집어들자 방 안을 날아 다니던 금봉들이 다시 초산의 몸에 달 라붙는 것이었다. 초산이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가보인 혈류금봉(血流金蜂)이 나에게 돌아왔으니 금거는 풀린 것이 다." 삼십 년 전, 정천십종은 혈류금봉을 뺏아 철궤에 넣고 철궤를 열어야만 금 거가 풀리는 것으로 약정한 것이었다. 초산이 지금 이렇듯 철궤를 열어 혈 류금봉을 손에 넣었으니 자연 그를 구 속하고 있던 여러 가지 제약들이 일시 에 풀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불광대사가 극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산! 자네는 구파일방에 예전의 원 한을 갚을 셈인가?" 초산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그야 두 말 하면 잔소리지." 순간, 불광대사의 안색이 굳어 들었 다. '길게 보아 이 아이를 강하게 하는 것이 정도를 위해 유익하다고 느껴 금 거를 풀었지만 올바른 판단이라고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가 이렇듯 불안과 염려스러움으로 초조함을 금치 못하자 초산이 빈정거 리듯이 말을 걸어왔다. "땡초! 너무 겁먹지 말게. 구파일방 과의 원한을 더 이상 끌지 않을 방법 이 있으니까." 그 말에 불광대사의 귀가 번쩍 뜨였 다. "그게 무엇인가?" 불광대사가 급히 상체를 앞으로 기 울이자 초산이 관해영을 가리켰다. "저 아이를 내 전인으로 주는 것이 네." "전인이라고?" 불광대사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초산이 더할 수 없이 쓸쓸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사실 이곳에서 삼십 년을 틀어박혀 있다 보니 세상의 명리와 강호의 은원 이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가를 알았다 네. 내 나이도 어언 백 살이 넘고 보니 이젠 손에 피를 묻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네." "……!" "다만 자연을 벗해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도 내 절기들을 후세에 남기고 싶 은 욕망은 버릴 수 없더군! 그렇다고 아무 놈이나 잡아다가 내 절기들을 전 해 줄 수는 없는 일. 이제 이 아이를 보고 나니 보기 드문 기재 같아 전인 으로 삼고자 함이네." 獵� 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3 장 (괴인 봉왕 3 ) 3. 문득 불광대사는 마음이 쓰리듯 아 파 왔다. 한 인간의 청춘을 빼앗았다는 죄책 감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 이다. 그러나 보다 고마운 것은 초산이 삼 십 년 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모든 것에 초연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는 것이다. 급기야 불광대사는 이게 다 부처님 의 자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호 를 외웠다. "아미타불! 자네도 근 백년을 살다 보니 인생의 참뜻을 알았군.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 는가?" 초산이 듣기 싫은 듯 빈정거렸다. "땡초! 부처는 자네나 찾고 어서 이 아이를 전인으로 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게." 순간, 불광대사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었다. "이 아이를 십문령의 전인으로 삼은 것도 이 아이의 뜻과는 상관 없었던 일이네. 그러니 자네도 이 아이를 전인 으로 삼고 싶으면 그렇게 하게. 허나 너무 고집이 세어 움직이게 했다가는 큰 코 다칠 일이니 꼼짝도 못하는 상 태에서 절기들을 전수하게." 초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본인의 허락도 없이 전인으로 삼았 다고? 이제 보니 자네는 땡초보다는 날강도군." 불광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자네도 조금 있으면 알게 될 일이니 어서 역봉밀정대법을 시전해 주게." "여부가 있나." 초산이 관해영의 옆으로 성큼 다가 섰다. 관해영! 그는 초산에 의해 실오라기 하나 걸 치지 않은 알몸으로 바닥에 반듯이 눕 혀져 있었다. 초산은 두 손에 묻어 있는 벌들을 모두 떨쳐내고 난 다음 관해영의 몸에 끈적끈적한 액체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투명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짙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불광대사가 의혹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게 대체 무엇인가?" 초산이 그를 돌아보며 담담한 목소 리로 말했다. "지정석청(地精石淸)이네." 순간, 불광대사의 얼굴에 가벼운 경 악이 일었다. "지……, 지정석청이라고? 그렇다면 죽은 자도 회생시키는 천고에 다시없 는 영약이 아닌가?" "이를 말인가? 이 지정석청을 벌들 이 먹으면 평소보다 천 배의 힘을 얻 게 되지. 그 천 배의 힘은 인간의 하루 에 해당하는 공력이라고 볼 수 있네. 이 벌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인간의 몸에 주입시키는 것을 역봉밀정대법이 라고 하는 것이네. 이제 알겠는가, 땡 추?" 초산이 이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앉 자 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금봉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관해영의 몸을 사정 없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해영의 몸이 순식간에 퉁 퉁 부어오르는 것이었다. 벌들은 관해영을 쏘고 난 다음 날개 를 파닥거리다가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해영의 주위에 는 수많은 벌들의 시체가 깔려 있었다. 헌데 벌들이 떠나가고 난 초산의 몸. 그것은 실로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휘늘어진 백발(白髮) 아래 허연 눈썹 은 두 눈을 덮고 있었으며 우뚝한 콧 날 아래 길게 뻗은 수염은 석자나 되 어 그의 무릎을 덮고 있었다. 더구나 일신에는 희디흰 백의를 걸 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할 정도의 위엄스런 모 습이었다. 벌떼들이 계속적으로 죽어가자 초산 의 눈가에는 아픔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체념한 얼 굴로 중얼거렸다. "놈! 벌써 사갑자의 공력은 얻은 셈 이군. 그 때문에 내 사랑하는 벌들이 저렇듯 죽어가니……." "……!" "그렇다고 내 전인이 될 놈이 너무 약해서는 안 되지." 이때 관해영의 몸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도 세 배 정도는 더 부어 있 었다. 마치 바늘로 푹 찔러 버리면 펑! 하 고 터져 버릴 것 같은 그의 몸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불광대사가 눈썹을 찌푸렸다. "너무 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초산이 벌컥 성질을 터뜨렸다. "땡추야! 이건 부어 오르면 오를수록 좋은 현상이란 말이다." "……?" "그리고 부기가 가라앉고 벌들의 공 력이 본신지기(本身之氣)와 융합이 되 려면 족히 한 달이 걸리지." "흐음! 꽤 오랜 시간이군." "그것도 적게 잡아서야. 난 그때까지 이 놈에게 전해줄 봉종지술(蜂縱之術) 을 정리하고 혈류금봉의 사용법을 완 성해야 되겠네." 초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불광 대사 역시 마주 일어서는 것이었다. 초산이 물었다. "자네도 떠나려는 것인가?" 불광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아이에게 전해줄 정천십종 과 무상검신(無相劍神)의 무학을 이리 로 옮겨 와야 되지 않겠는가?" "그들이 비급이라도 만들어 놓았는 가?" "예전에 정도(正道)가 마절궁에게 꼼 짝을 하지 못하자 우리는 공동전인을 받아들여 등세욱을 꺾기로 하고 움직 이는 비급을 만들어 놓았다네." 초산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 어 왔다. "움직이는 비급……? 그런 것도 있 었나?" "두고 보면 알 것이네." 불광대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두고 바람처럼 방문을 빠져나갔다. 움직이는 비급. 과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4 장 (움직이는 비급 1 ) 제 34 장 움직이는 비급(秘 ) 1. 한 달 후……. 관해영은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누워 있다는 것 을 알았다. 그는 초옥 안을 둘러보며 깊은 의혹 을 느꼈다. '이곳은 어디지? 난 불광대사에게 잡혀온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불광대사 에게 혈도를 짚히는 순간부터는 기억 이 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혜군과 사운악은 결혼을 한 것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관해영은 살 심이 크게 치솟아 자리를 차고 일어섰 다. '찾아가서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 관해영이 급히 옷을 걸치고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초산이 안 으로 성큼 들어섰다. 관해영이 그의 신선 같은 용모를 보 고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적잖은 놀라 움을 나타냈다. "당신은 누구요?" 초산이 어이없는 얼굴로 개탄해 마 지않았다. "허! 이놈 보게. 사부가 될 사람에게 당신이라니……." 그 말에 관해영이 오히려 어리둥절 한 얼굴이었다. '사부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관해영이 낯빛을 굳히며 싸늘한 목 소리를 토해냈다. "불광대사는 지금 어디에 있소? 나 는 그를 만나 따져 보아야겠소." 순간, 방문이 열리며 불광대사가 안 으로 들어왔다. 관해영이 거두절미하고 대뜸 물었다. "저 노인이 나의 사부가 될 사람이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불광대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이네. 그는 자네를 전인으로 받 아들이는 대신 사갑자에 해당하는 공 력을 주었네. 그러니 무림대의를 생각 해서라도 노여움을 가라앉히게."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게 무슨 짓 입니까?" "자넨 빈승을 원망하는가?" "그렇습니다. 전 죽더라도 사운악과 단판을 지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 다." "아미타불! 인생이란 긴 여정과 같은 것이어서 변수가 많은 법이라네. 언젠 가 자네는 사운악을 응징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녀가 있었기에 복수가 시작된 것 입니다. 사운악을 없애는 것은 해왕도 사람들 에게 대한 나의 죄책감 때문이며 그녀 의 사랑을 얻는 것은 나의 전부입니 다." 순간, 묵묵히 듣고 있던 초산이 냉랭 히 쏘아붙였다. "흰소리 그만 해라. 여인이란 원래 강한 자를 좋아하는 법. 네가 강해지면 여인이란 언제든지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늙은 사람이란 인내가 가져 다 주는 단 열매의 맛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 사람이 인내의 열매를 맛보기에는 그 시간은 너무나 지루한 것이다. 관해영이 초산을 힐끗 바라보고는 불광대사에게 물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불광대사가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가 묵묵히 듣고 있던 관해영 이 냉정히 잘라 말했다. "전 두 사람의 전인을 모두 거절하 겠습니다." 순간, 초신은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 럼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냐?" 반면 관해영의 안색은 침착하기 이 를 데 없었다. "전 제 스스로 무학일종(武學一宗)을 이루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와도 사제의 연을 맺고 싶지 않습 니다." 그의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말에 초산은 급기야 눈살을 찌푸렸다. "무척 오만한 아이로군." 그러나 불광대사는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허허허!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가 히 고금 제일존(古今 第一尊)에 오를 만한 기개다." 초산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바라 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넨 뭐가 좋다고 웃는가? 나는 이 놈에게 절학을 전수하지 못해 지금까 지 헛수고를 한 것 같아 화가 나 죽겠 는데." "이 사람! 꼭 사제지간이 되어야지만 절학을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전인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절기를 후세에 남기려는 방편, 어떡하 든지 절학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래 좋 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이 아이에게 자네의 절기를 그냥 전수해 주는 거네." "흥!" 초산이 돌연 냉랭히 코방귀를 뀌었 다. "이봐! 땡초야, 자네는 내가 늙었다 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느닷없는 질문에 수양 깊은 불광 대사도 진의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 이었다. "누가 자네를 젊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맞아! 그런데 이 나이가 되도록 사 부 소리 한 마디 못 듣고 절기를 고스 란히 물려주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 리인가?" 불광대사는 그의 농담 같은 말에 그 만 쓴웃음을 지었다. "그까짓 사부 소리 안 들으면 어떤 가? 자네의 절학을 사용하면 그게 곧 제자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무리 사제지간이 아니지만 절기를 배운 이상 사부처럼 자넬 어려 워하고 존경할 게 아닌가?" 초산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도 그럴 듯하군. 하긴 내 마음에 든 놈이니 이 놈의 의사야 어 찌 되었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지." 이어 그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제법 엄숙한 얼굴을 지었다. "난 네놈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전수해 주겠다. 이건 아무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 그건……." 관해영이 난처한 얼굴로 거절하려 하자 초산이 손을 흔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네놈이 거절한 다 해도 우리가 응하지 않을 테니까." "난 아무의 무공도 배우고 싶은 마 음이……." 관해영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초산이 자신의 무공구결을 읊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강호의 기인(奇人)들은 성질이 괴팍하군. 싫다는 데도 억지로 전수하 니!' "……!" 관해영이 입을 다물고 있자 초산이 힐끗 그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 었다. '놈……! 방금 것은 되는 대로 읊어 본 것이다. 네놈이 귓가로 흘려 버리는 데야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게 무공구 절을 말해.' 이어 그는 진지한 얼굴로 관해영을 자신의 옆에 앉히게 한 다음 말문을 열었다. "난 너에게 벌을 배양하는 방법과 다루는 법, 그리고 벌로 하여금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겠다." 관해영은 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자 초산 은 뚜렷한 목소리로 붕종지술(蜂縱之 術)의 구결들을 읽어 주며 해석하기를 벌은 미약한 미물이지만 집단으로 행 동하기 때문에 어떤 절학보다도 가공 할 위력을 나타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초산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 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관해영에 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무공을 전 수하기 시작했다. "사침비봉공(死針飛蜂功)은 내가 벌 들의 형태를 관찰하여 창안한 무공이 다." 사침비봉공(死針飛蜂功)! 허공을 날며 적을 공격하는 절기로 써 내공이 얕으면 절대 시전할 수 없 는 무공이었다. 이것은 모두 십단(十段)으로 나누어 져 있으며, 매 단마다 쾌(快)와 예(銳) 가 혼합되어 있어 그 위력이란 가히 공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초산은 사침비봉공을 설명한 다음 품속에서 금봉을 꺼내 관해영에게 내 밀었다. "이걸 받아라." 관해영은 금봉의 강렬한 빛 때문에 눈부신 얼굴로 초산을 향해 물었다. "이걸 왜 제게……?" "어른이 주면 우선 받아!" 초산이 빽 소리를 지르자 관해영이 금봉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초산은 관해영의 손에 들려진 금봉 을 몹시 아깝다는 듯 쓴 입맛을 다셨 다. "그걸 잘 간직하거라. 만약 잃어버렸 다가는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그 리고 그 혈류금봉에는 무수한 묘용과 가공할 파괴력이 있다." 혈류금봉(血流金蜂)! 서른다섯 가지의 기관장치가 되어 있어 자유자재로 비행할 수 있으며 몸 에는 백여 가지의 암기를 숨기고 있는 가공할 병기인 것이다. 또한 날개에 베이면 어떠한 철삭(鐵 索)이라도 베어지는 것이었다. 관해영은 혈류금봉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가 막힌 병기로군. 이게 제일 마 음에 드는데…….' 그는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혈류 금봉의 날개를 펴 허공에 날려 보았다. 눈앞�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4 장 (움직이는 비급 2 ) 2. 천 년의 고도(古都) 낙양(洛陽). 정오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 는 거리에 무척이나 특이해 보이는 사 람이 나타났다. 일신에 청남빛 옷을 걸친 이 인물은 치렁치렁한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 었으며 원숭이 한 마리를 데리고 있었 다. 바로 관해영이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 보고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유유히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 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나도록 익힌 음식을 먹 어 보지 못했으니 이거야 어디 사람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선 기름진 음식을 채우고 나서 일을 시작해야 되겠다.' 그는 열래객잔(悅來客棧)이라고 쓰 여진 객점 안으로 쑥 들어서며 빈 탁 자를 발견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 다. 순간, 작달 만한 점원 하나가 구르 다시피 달려와 넙죽 허리를 숙이며 참 새 같은 목소리로 물어 오는 것이었 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관해영은 객점이 처음이라 잠시 곤 혹스러운 얼굴이었다. "흐음!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 으로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점원이 신형을 돌리려 할 때 관해영 이 다시 말했다. "식사는 두 사람 분으로 해오게." 그러자 점원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손님은 양이 무척 크신가 보군요. 우리 집 설근탕(雪根湯)은 아무리 대 식가라도 한 그릇이면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가져오라면 가져오면 되는 것이 다." 관해영의 얼음장 같이 변한 목소리 에 점원이 자라목을 하고 주방 쪽으로 뽀르르 줄달음치며 소리쳤다. "선근탕 둘!" 관해영이 점원의 행동에 고소를 금 치 못하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흑전상련은 이곳 낙양에 근거를 두 고 있다. 단시일 내에 막강한 세력을 만들기 위 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관해영! 그는 흑전상련을 얻으려고 이곳 낙 양으로 온 것인가? '호광노인이 준 황금열쇠가 흑전상 련의 대태상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물 이라 했으니 흑전상련을 이용하는 데 는 큰 지장이 없을 것이다.' 관해영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였다.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소녀가 객점 안으로 뛰어들었다. 열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놀 랍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는 이 여인은 허름한 마의(麻衣)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꽃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지극히 불안한 신색으로 주 위를 둘러보다 관해영의 옆을 스쳐 빈 탁자 밑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손놀림 하나는 귀신이 빰칠 정도로 군!' 손놀림이라니……. 무얼 말하는 것인가? 순간, "저쪽이다." 문 밖에서부터 우렁찬 목소리가 울 리며 두 명이 객점 안으로 뛰어들었 다. 일신에 검은 경장을 하고 있는 그들 은 예리한 눈길로 객점 안을 샅샅이 훑어보다 여인이 숨어 있는 빈 탁자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어 봐야 결코 우리 눈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이 발딱 일어서며 소리 쳤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예요?" "몰라서 묻느냐? 감히 꽃을 파는 척 하며 단추단의 물건을 소매치기하다 니……." 여인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매치기라니! 말조심하세요. 어엿 한 숙녀를 소매치기로 몰아넣다니 ……." 중년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방귀를 뀌었다. "누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아느 냐? 우리 마중이앙(魔中二殃)의 이목 을 속이려 했다면 그건 너의 실수다." 문득, 여인의 안색이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이제 보니 살성을 건드렸군. 헌데 이들이 쩔쩔 매던 그 단주라는 사람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여인은 내심 생각과는 달리 두 눈에 독기를 띠며 대들었다. "전 남의 물건을 슬쩍한 적이 없어 요. 정 못 믿겠다면 조사를 해봐요." "흐흐, 끝까지 오리발이군. 우린 너 의 품속에 단주의 물건이 있음을 추호 도 의심하지 않는다." "흥! 정 못 믿겠다면 확인을 시켜 드리지요." 이렇게 말한 여인은 억울해 죽겠다 는 얼굴로 자신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 는 것이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하얀 살결을 지닌 그녀의 나신이 아낌없이 드러나는 것 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나신(裸身)을 보자 객점 안의 인물들 은 저마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침 을 삼키는 것이었다. 관해영도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토록 대담한 여인이 있었다니? 흑란이나 아몽사도 이렇게 까지는 당 돌하지 못할 것이다.' 여인은 자신의 벗은 옷을 훌훌 털어 버리며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악을 쓰 는 것이었다. "이젠 됐나요. 전 분명 결백하죠?" 그녀는 재빨리 다시 옷을 입었다. 마중이앙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들은 곤혹스런 얼굴로 서로의 얼 굴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 하고 있다가 침음성을 터뜨렸다. "으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늘 이 두 쪽이 나도 분명하다고 했는 데……." 바로 그때였다. "흐흐흐! 솜씨만큼 몸매도 훌륭한 편이군." 지극히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한 명 의 인영이 객점 안으로 들어섰다.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안색. 그 얼굴은 분명 삼십은 안 넘어 보 였으나 늙은 사람처럼 노련함이 어려 있었다. 더구나 옆으로 쭉 찢어진 두 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여우의 교활함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의식적으로 손에 들고 있는 세 개의 철구(鐵球)를 굴리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마중이앙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몹시 두려운 음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단주님, 이 여인이 아닌 모양입니 다." 사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바보 같은 놈들! 그토록 우둔해서 야 장차 무엇에 쓰겠단 말이냐?" 순간, 팟! 사내의 손이 더할 수 없이 빠른 속 도로 관해영의 앞섶을 잡아 나가는 것 이었다. '대단히 빠른 손속이다.' 관해영이 내심 감탄을 터뜨리며 피 하려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단지 놀란 얼굴로 멍청히 앉아 있었 다. 그러자 어느 새 관해영의 품속에서 하나의 목합을 꺼내 든 사내는 질타하 는 눈길로 마중이앙을 바라보았다. 마중이앙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관해영을 가리키며 떠듬거렸 다. "저놈이 소매치기란 말입니까? 놈은 우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은 것 같 은데……." 사내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런 멍청한 것들!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느냐? 이 계집이 훔친 물건을 이 자의 품에 넣은 것이다." 그제서야 마중이앙은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고 여인을 바라보며 두 눈에 살기를 띠었다. "이런 찢어 죽일! 우릴 농락하다 니……." 여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그러들었 다. '달아나는 게 상책이다.' 파앗! 여인이 지면을 차고 창문 쪽으로 신 형을 날렸다. 단주라는 사내의 얼굴에 지독히 음 산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흐흐흐! 나 철환마군(鐵丸魔君) 만 음도(萬陰度) 앞에서 달아나려 하다 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환마군 만음 도는 신형을 날려 여인의 앞을 막아섰 다. 그러자 여인이 들고 있던 꽃바구니 를 만음도를 향해 집어 던졌다. 들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4 장 (움직이는 비급 3 ) 3. 순간, 우우우우욱! 파파팟! 꽃송이가 폭죽처럼 터져 버리며 무 수한 암기들이 만음도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만음도가 냉소를 터뜨렸다. "이 정도는 아이들 장난이다." 그는 말을 하는 한편 우수를 휘저어 암기들을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뜨린 다음 여인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관해영이 아닌 사람들은 만 음도가 어떻게 해서 여인의 완맥을 움 켜잡고 있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핼쑥하게 굳어 들었다. '이 연숙상(燕淑霜)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군. 파사철부의 오대단 주 중 지옥단주(地獄團主)를 건들다 니…….' 지옥단주 철환마군 만음도! 강호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이유 여하를 막 론하고 가장 처참하게 죽인다는 악명 높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도를 수호하는 사대 벌왕 중 파사철부의 오대단주 중 한 사람이었기에 정도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징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터였 다. 그럴수록 만음도의 성격은 더욱 잔 인해지고 있었다. 만음도의 두 눈에 바늘 끝 같은 안 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흐흐! 이 철환마도 만음도의 물건 을 소매치기 한 이상 살아날 생각을 말아라." 여인 연숙상은 도저히 살아날 희망 이 없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만음도가 두 눈에 야릇한 광채를 뿜 어냈다. "그렇지만 아직 살아날 희망은 있 다." 연숙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만음 도를 응시했다. 그러자 만음도는 그녀의 볼록한 앞 가슴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 다. "흐흐! 너의 몸을 보니 죽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날 따라오면 오늘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 연숙상은 만음도가 자신의 몸을 원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두 눈을 내리감았다. 이것은 객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의 상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는 행동 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 을 정도의 여인이라면 만음도의 말에 십분 감사하고 고분고분 따라야 정상 일 것이다. 그런데 얼굴을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것이었으니 주위 사람 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만음도는 크게 자존심이 상해 한 손 으로 그녀의 턱을 받쳐 올리고 싸늘한 조소를 흘렸다. "흥! 제법 고고한 척하는군. 그렇다 면 강제로라도 데려가는 수밖에 없 다." 그가 연숙상을 끌고 객점을 빠져나 가려 할 때였다. "잠깐!" 지극히 냉랭한 목소리에 만음도가 신형을 돌려 객점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지 못 한 듯 두 눈에 곤혹스러움을 담는 것 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환음청술(幻音聽 術)로 나의 귀를 어지럽힌 것일까?' 이때 마중이앙이 두 눈을 희번뜩거 리며 버럭 호통을 터뜨렸다. "어느 놈이 감히 단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이냐?" 순간, 관해영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인을 그냥 두고 가거라." 마중이앙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이거 정신이 돈 놈 아 냐!" 그들은 만음도가 일수를 뻗칠 때 관 해영의 멍청해 있던 얼굴을 떠올리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관해영의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다. "난 두 말하기 싫어하는 성미다." "우리도 두 번씩은 참을 줄 모르는 성미다." 마중이앙이 소리치며 동시에 검을 뽑아 관해영을 쓸어갔다. 쐐애액! 파츠츠츠! 번뜩이는 검광이 일직선으로 관해영 의 인후혈과 가슴을 노리고 뻗어 오자 앞에 있던 흑모가 돌연 두 손을 휘둘 러 두 자루 검을 낚아채는 것이었다. "억!" "이, 이런……." 마중이앙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황 망히 물러서며 떠듬거렸다. 만음도 역시 상당히 놀라워하는 눈 치였다. '원숭이가 절정고수의 금나수법(擒 拿手法)을 사용하다니…….' 이는 마중이앙이 전혀 생각지도 않 은 일이라서 손쉽게 검을 빼앗겼다고 는 하나 무림고수라고 자처하는 그들 에게 있어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 다. "이, 이놈의 원숭이! 머리통을 따 버 리겠다." 마중이앙이 씩씩거리며 양쪽에서 흑 모를 공격해 들어갔다. 주먹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자 사나 운 경풍이 회오리처럼 일어나고 그 여 세에 주위의 탁자가 콩가루처럼 부서 지며 어지러이 휘날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모는 조금도 당황함이 없 이 이리저리 신형을 옮기며 두 사람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마중이앙의 노화는 극에 이르렀다. "죽어라! 이놈의 원숭이." 두 사람이 수비는 무시하고 흑모를 공격해 들어가자 마치 장난이라도 치 고 있는 듯한 흑모가 느닷없이 두 손 을 뻗쳐 두 사람의 앞가슴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윽!" "으악!" 마중이앙이 비명을 지르며 지면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들의 입에서는 시뻘건 선혈 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한 기가 들린 사람처럼 사지를 바르르 떨 다 축 늘어지는 것이었다. 순간, 만음도의 전신이 흠칫 굳어 들었다. '저 원숭이가 방금 펼친 초식은 정 천십종과 헌원승송의 무상삼검 중 십 자역곤건인데…….' 관해영이 어리둥절해 있는 만음도의 안색을 바라보며 내심 웃음을 금치 못 했다. '후후!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흑모는 정천십종과 무상검신의 절기를 익히고 있어 거의 무적고수임을…….'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만음도 는 정확히 흑모의 초식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흑모는 탁자를 훌쩍 뛰어넘어 긴 팔을 휘두르며 만음도를 공격해 들 어갔다. "물러가라." 만음도가 소리치며 우수를 뻗어 흑 모의 장력을 맞받아 쳤다. 그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4 장 (움직이는 비급 4 ) 4. 퍼엉!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흑모의 신형 이 비틀거렸다. 확실히 만음도는 마중이앙보다 무공 이 뛰어난 것은 확실했다. "끽끽―." 흑모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 웃거리다가 빠른 속도로 만음도를 덮 쳐 갔다. 만음도는 방금 일초를 교환한 후 손 목이 시큰거리고 있었던 터라 이번에 는 손에 들고 있던 세 개의 철구를 집 어던졌다. 피이이이이잉! 세 개의 철구가 삼각형 모양으로 흑 모의 전신을 덮어 갔다. "끼익!" 흑모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돌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세 개의 철구 를 맞받아 치려 할 때였다. "흑모! 물러서라. 철구는 장력이 닿 으면 터진다." 관해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흑모가 신형을 뒤집으며 벼락같이 물러서고 그 틈을 타 관해영이 우수를 휘저었 다. 그러자 한 줄기 강력한 흡인력이 세 개의 철구를 모조리 소매 안으로 빨아 들이는 것이었다. 만음도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철구는 조금의 저항을 받아도 터지 는데, 아무 이상이 생기지 않다니……. 도대체 이자의 내공이 어느 정도란 말 인가?' 그는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며 여인 을 한쪽으로 밀쳤다. 여차 하면 달아날 생각이었던 것이 다. 관해영이 그의 속셈을 간파하고 비 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도망가는 것은 막지 않을 테니 어 서 물러가거라." 만음도는 자신의 내심이 들키자 얼 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이대로 물러섰다가는 강호에 드러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 청을 돋우었다. "네놈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피 사철부의 지옥단주다. 설마 파사철부 를 적으로 삼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는 파사철부의 이름으로 관해영에 게 위협을 주려 했던 것이었으나 그것 이 도리어 죽음을 자초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관해영의 두 눈에 핏빛 살기가 어렸 다. "파사철부라? 그렇다면 살려 둘 수 없겠군!" 이어 그는 오른쪽 소매를 휘둘러 세 개의 철구를 쏘아냈다. "원래 주인은 너니 받아 가거라." 쐐애액! 세 개의 철구가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쏘아져 오자 만음도는 도저히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아 신형을 날려 가까스로 세 개의 철구를 피해냈다. 펑! 세 개의 철구가 벽에 부딪치자 요란 한 폭발음이 울리며 벽이 털썩 무너져 내렸다. 순간, 파아아아앗! 관해영이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신 형을 날리며 죽검으로 만음도의 가슴 을 길게 베어 버리는 것이었다. 만음도는 무엇인가 번뜩하는 광채를 보고 난 다음 가슴이 불에 덴 듯 화끈 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새 죽검을 뽑아 들고 자신 앞에 우뚝 서 있는 관해영을 보 고는 신형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찰나, "허억!" 그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며 허리가 양단된 채 지면을 나뒹 구는 것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연숙상은 관 해영의 가공할 무위에 온통 정신을 빼 앗기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관해영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 흑 모의 손을 잡고 객점을 빠져나왔을 때 였다. "자, 잠깐만요." 여인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관해 영을 불러 세웠다. 관해영이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할말이라도 있소?" 그러자 여인이 입가에 매혹적인 웃 음을 띠는 것이었다. "그냥 가면 어떡해요." 관해영은 이 뚱딴지 같은 말에 어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곳에 남아 있으란 말이오?" "사람을 구하려면 끝까지 구해야 하 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요?" "무슨 뜻이오?" "전 파사철부를 대할 능력이 없어 요. 그들이 추격할지도 모르니 안전지 대로 갈 때까지 동행을 해주셔야지 요." 부탁도 아닌 강압적인 말에 관해영 은 내심 한숨을 불어냈다. '이건, 사람을 구해 놓으니 보따리 를 달라는 격이군?' 관해영이 망설이고 있자 연숙상은 그의 팔을 붙들고 끌고 가는 것이 아 닌가? 관해영이 고삐 꿰인 망아지처럼 주 춤거리며 끌려갔다. '이거, 매정하게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어딜 가려는 거요. 난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어 멀리는 갈 수가 없는 몸 이오." 연숙상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 다. "소협의 목적지는 어디죠?" "동금로(東金路)의 만물전당포(萬物 典當鋪)요." 관해영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연숙 상의 두 눈에 더할 수 없는 강렬한 이 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사라지고 연숙 상은 예의 애교 있는 목소리를 토해냈 다. "그곳에는 왜 가는 거죠?" "그건 말할 수 없소이다." "잘 됐군요. 저도 그 근방으로 가야 해요. 소협은 파사철부가 두렵지 않으 세요?" 관해영이 발걸음을 옮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사대벌왕을 모두 없애려고 마음먹은 사람인데 파사철부 따위가 뭐가 두렵겠소. 앞으로 사대벌왕의 사 람이면 그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 이오." 연숙상은 관해영의 두 눈에서 뿜어 지는 섬뜩한 살기를 느끼며 고개를 갸 웃거렸다. '이상한 사람이야. 신비한 힘을 지 니고 있는 것 같애…….' 그녀는 관해영의 옆 모습을 힐끗 바 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볼수록 괜찮은 사람인것 같아. 이 기회에 사랑이나 한 번 해볼까?' 弔� 장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5 장 (흑 철상 연의 음모 1 ) 제 35 장 흑(黑) 철상 연(聯)의 음모(陰謀) 1. 만물전당포가 있는 동금로에 들어서 자 연숙상이 발걸음을 멈추고 관해영 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관해영이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잘 가시오." 연숙상이 저만큼 걸어가다가 돌아서 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또 만날 테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말 아요." 관해영이 그만 얼굴을 찌푸렸다. '또 만난다고? 다신 보고 싶지 않 다.' 여자를 만난다는 것, 관해영에게는 그것처럼 피곤한 것은 없었다. 참새처 럼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목소리에 그는 아예 질려 버렸던 것이다. 만물전당포(萬物典當鋪)! 낙양성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 은 거의 없다. 누구나가 한 번쯤은 드나들었을 법 한 이 건물은 목조로 만든 단층이었으 며 더할 수 없이 낡아 보였다. 관해영이 만물전당포 안으로 들어서 자 주위는 침침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거미줄이 사방에 쳐져 있었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복도를 따라 한 참을 들어서자 쇠창살이 가로막힌 내 실이 나타났다. 관해영이 회색빛 어둠이 자욱한 내 실 안을 살피며 소리쳤다. "안에 누구 없소." 순간, 방 안에 칸막이로 세워진 선 반 사이로 한 명의 노인이 손에 주판 을 들고 걸어나왔다. 작달만한 키에 흐리멍텅한 두눈……. 도대체 무엇 하나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노인은 두 눈을 꿈 벅거리며 쇠창살 가까이로 다가왔다. "무엇을 맡기시려 하오?" 관해영은 대체 이런 곳이 어떻게 천 하상권을 움직이는 곳인가 하고 의혹 을 금치 못했으나 싸늘한 목소리로 대 답했다. "하나의 열쇠요." 노인의 얼굴이 시큰둥하게 변했다. "열쇠라……, 우리는 값어치 없는 것을 받지 않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은 분명 받을 거요. 이곳의 돈 을 전부 계산해도 지불하지 못할 만큼 귀한 것이니까." "흥! 우리는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도 저당 잡을 만한 돈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후후! 난 노인의 말을 믿지 못하겠 소." 이렇게 말한 관해영은 품속에서 황 금 열쇠를 꺼내 쇠창살 안으로 들이밀 었다. 순간, 노인의 신색이 일시에 흑빛으 로 굳어 들었다. "그…… 금황약시!" 노인은 단번에 황금열쇠를 알아보고 는 그 자리에 무릎을 구부리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하는 것이었다. "속하! 대태상을 뵙습니다." 관해영이 위엄을 갖추었다. "날 련주(聯主)에게 안내하게." 노인이 쇠창살을 따며 지극히 공손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따라 오십시오." 관해영이 노인을 따라 들어가자 그 는 칸막이 사이를 지나 막다른 벽 앞 에 서서 무엇인가를 매만지는 것이었 다. 그때였다. 그그긍! 굉음과 함께 벽이 양쪽으로 갈라지 며 지하계단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노인이 익숙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소인의 뒤만 따르십시오. 한 발이 라도 잘못 밟는 날에는 기관이 발동해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까짓 비밀 통로가 무어 대단하다 고…….' 관해영은 내심 기관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성가시게 일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묵묵히 노인의 뒤를 따랐다. 얼마를 가자 점점 더 강렬한 빛이 밀려 들어왔다. '햇빛이다.'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 통로는 끝이 났으며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이는 것이었다. 그의 앞에 거대한 저택의 후원이 나 타났다. '흐음! 지하통로를 연결해 놓았으니 모르는 사람은 여간해서 찾지 못하겠 군…….' 이때, 슈우우욱! 미세한 파공음이 울리며 비단장포를 걸친 중년인 한 명이 두 사람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 신법은 지극히 교묘해서 주위에 수북히 쌓여 있던 낙엽들조차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중년인은 보통 키에 이마에 붉은 사 마귀 하나를 달고 있었는데, 그것이 관해영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니,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를 대하 면 이 붉은 사마귀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중년인이 노인에게 물었다. "누군가?" 노인이 중년인의 귀에 몇 마디 속삭 였다. 그러자 중년인의 안색이 대번에 달 라지며 놀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대태상이라고? 근자에 통 모습을 안 보이다가 어쩐 일로……." 허나, 그는 곧 땅바닥에 무릎을 구 부리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속하! 추사명이 대태상을 뵈옵니 다." 관해영이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 였으나 내심으로는 금황약시에 대해 은근히 감탄하고 있었다. '대태상이란 신분이 상당하구나. 보 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니…….' 강호의 규칙을 잘 모르는 관해영으 로서는 이런 규칙들이 신기한 것이었 다. 추사명이 일어서며 다시 허리를 숙 였다. "제가 연주께 안내를 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노인을 향해 차가운 목소 리를 토해냈다. "자네는 이만 가보게." "알겠습니다." 노인이 다시 비밀 통로로 사라지자 추사명은 관해영을 인도하는 한편 얼 굴 가득 의혹을 띠었다. '신비의 대태상이 이토록 어린 인물 일 줄은 몰랐는데……. 헌데 왜 갑자 기 나타났을까? 우리의 음모를 눈치챈 것이 아닐까?' 우리의 음모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일 열리는 수뇌회의에서 우리 쪽 의 인물을 련주(聯主)로 뽑으려는데 뜻밖의 변수가 나타난 셈이군. 방해가 된다 싶으면 미리 제거하는 수밖에 없 다.' 만물전당포! 추사명이 이 안에서 노리는 것이 무 엇일까? 관해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추사명 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담하게 잘 가꾸어진 누각(樓閣). 추사명은 바로 그 앞에서 걸음을 멈 추었다. "련주이신 연남강 어른은 지금 병환 중이십니다. 이곳에 계시니 들어가 보 십시오." 관해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각 안 으로 들어섰다. 순간, 코를 진동하는 악취가 풍겨 나오며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의혹 어린 시선으로 하나 의 내실을 바라보자 뒤따라 들어오던 추사령이 바로 그 내실을 향해 소리치 는 것이었다. "련주님! 대태상께서 오셨습니다." "대태상이라고……?" 내실 안에서 놀란 여인의 음성이 흘 러나왔다.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련주가 여인이란 말인가?' 이때, 추사명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 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관해영은 추사명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括� 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5 장 (흑 철상 연의 음모 2 ) 2. 황촉불이 일렁이는 내실. 지극히 평범한 가구들이 정돈되어 있고 창이 나 있는 곳에는 침대 하나 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파리하기 이를 데 없는 안색의 노인이 누워 신음성을 토 해내고 있었다. 관해영이 안으로 들어서자 침상 옆 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여인이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다, 당신은……." "여인은 뜻밖에도 연숙상이었던 것 이다. 관해영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대가 어떻게……?" 연숙상이 돌연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해영을 쏘아보았다. "당신이 대태상인가요?" 그런 연숙상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 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관해영이 불쾌한 얼굴로 황금열쉬를 꺼내 보이자 그것을 살펴본 연숙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약시를 보니 확실한데……." 관해영이 불만스럽게 물었다. "내 신분을 의심하시오?" "지금까진 대태상이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지만 대타상은 나이가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헌데 당신 나이 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내가 예전의 대타상이든 아니든 황 금약시가 있으니 대태상의 신분이 인 정되는 것은 사실이 아니오." "그야……." 연숙상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관해영이 의혹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련주와 어떻게 되오?" 관해영이 이렇게 물어 본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대태상의 신 분이란 것을 알았을 때는 하나같이 무 릎을 구부리고 더할 수 없이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데 연숙상은 오히려 고 개를 빳빳이 들고 자신을 의심했기 때 문이었다. 연숙상이 얼굴에 쓸쓸함을 띠며 침 대의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저의 아버님이에요." 관해영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흑전상련주의 딸이 소매치기라 니……, 어찌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 료." "비웃지 말아요. 이곳 생활이 무료 해 가끔 나가요. 그래도 행실이 좋지 않은 자들만 털어요." "그래도 소매치기는 소매치기가 아 니오." "당신 정말……." 연숙상이 두 눈에 독기를 뿜어내자 관해영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옷 벗는 것은 어디에서 배웠소?" 순간, 연숙상이 얼굴을 붉히고 고개 를 푹 떨구는 것이었다. 관해영은 자신이 너무 심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얼른 화제를 바꾸었 다. "당신의 아버님은 무슨 병환에 걸렸 소?" 연숙상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처 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 년 전부터 앓아 오다가 근자에 들어 갑자기 병이 악화되었어요. 유명 한 명의는 다 불러 보았지만 병세나 치료법을 모르겠대요." "내가 한 번 볼 수 있겠소?" "당신이 봐도 알 수 있는 병이 아니 에요." "그래도 혹시 알 수 있소?" "마음대로 하세요." 연숙상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승낙 하자 관해영은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는 이불을 들치다 코를 찌를 듯한 악취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악 취 때문만은 아니었다. 흑전상련주 연남강! 그의 하체는 썩어 문드러져 고름투 성이었다. 관해영은 태허절권의 요상법을 익혔 기에 의술에는 남다른 지식이 있어 연 남강의 맥을 짚고 진맥을 시작했다. 순간, 관해영의 안색이 더할 수 없 이 일그러들었다. '누군가 연남강의 몸에 폐맥부혈수 (閉脈腐血手)를 펼쳐놓았다. 누가 이토 록 잔인한 짓을 했을까?' 폐맥부혈수(閉脈腐血手)! 점혈수법의 일종으로 혈맥을 막아 피를 유통되지 않게 하여 서서히 전신 을 썩게 하는 지독한 수법이었다. 관해영은 불현듯 머리를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흑전상련 안에는 분명 무슨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다.' 병세를 살피고 있던 관해영이 심각 한 안색으로 말했다. "물이나 한 컵 따라 주시오." "그게 병세와 상관 있는 일인가요?" "그렇소." 연숙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찻잔 에다 물을 따랐다. 관해영이 찻잔을 받아든 순간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팟! 찻잔이 벽을 뚫고 들어가자 그 속에 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앗! 관해영이 뒤따라 신형을 날리며 벽 을 향해 장력을 발출시켰다. 펑! 벽이 허물어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허공을 휘날렸다. 그러나 신음소리를 흘린 상대의 종 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이 뚜렷 이 나타나 있었다. 관해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상당히 빠른 놈이군!' 연숙상이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바 라보며 경악해 마지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관해영은 사뭇 심각한 얼굴이었다. "연소저! 누군가 당신의 아버님에게 독수를 펼쳐놓았소. 그리고 방금 이곳 을 엿본 자도 그 일과 연관이 있을 것 이오." "그, 그럴 수가 믿을 수가 없어요. 본 련은 누구와 원한 진 일이 없는 데……." "근자에 흑전상련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소?" "예전과 같을 뿐이에요." "잘 생각해 보시오. 무심히 지나치 는 세세한 일까지……." 관해영의 말에 연숙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힘없이 중얼거렸 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아요. 단지 내일 새로운 련주를 뽑는 것이 근래 없었던 일이라면 일이죠? 그렇지 만 그건 당신도 알고 있는 일이니 변 화에 해당할 리는 없고……." 관해영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 다. "련주를 새로 뽑는다고? 그 이유는 뭐요?" 연숙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은 그 일 때문에 온 게 아닌가 요?" "난 모르는 일이오." "아버님이 병환으로 집무를 못 보니 새로운 련주를 뽑아야죠. 흑전상련의 규칙에 의하면 수뇌들 중 오 인 이상 의 추천을 받으면 후보로 나설 수가 있어요." 관해영은 새로운 사실에서 무엇인가 를 찾으려는 듯 집요하게 물었다. "추천된 자는 모두 몇 명이요?" "두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강동분 타주(江東分舵主)를 맡고 있는 기종해 (奇宗海)라 하고 다른 사람은 바로 저 예요." "누가 뽑힐 것 같소?" "아무래도 기종해가 유리한 것 같아 요." "어째서?" "아무래도 여인이 련주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모두의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종해는 부련주인 포 통천이 적극적으로 밀고 있으니까요." "흐음!" 관해영이 침음성을 터뜨리며 한 가 지 사실을 떠올렸다. '연남강에게 암수를 쓴 자들이 처음 나타난 나의 동정을 살피는 것을 보면 내가 나타남으로써 자신들의 일이 불 리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원인은 무 엇인가?' 括� 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5 장 (흑 철상 연의 음모 3 ) 3. 관해영이 사뭇 의아한 얼굴로 물었 다. "연소저! 대태상은 련주선출에 어떤 권한이 있소?" 연숙상은 관해영이 무엇 때문에 끈 질기게 물어 오는지 몰랐으나 알기 쉽 게 설명해 주었다. "대태상은 수뇌회의에서 선출한 련 주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 요. 대태상이 거부하면 대태상이 승낙 할 때까지 계속 새로 뽑아야 해요." 관해영은 벼락불 같은 영감이 뇌리 를 스치고 지나갔다. '흠! 그 정도의 권한이 있다면 감시 할 만도 하다. 저들의 음모는 볼 것도 없이 련주의 선출과 관련이 있음이 분 명하다.' 관해영은 이렇게 생각하며 연숙상에 게 다짐을 해두었다. "연소저! 당분간 이 일은 아무에게 도 말하지 마세요. 내가 흉수에 관해 서 밝혀 내겠소." 연숙상이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물 었다. "이번 련주 선출 때문이 아니라면 당신은 무슨 일로 이곳에 왔죠?" "연소저! 만약 내가 련주로 나서고 싶다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야 두 말할 것도 없이 련주가 되 는 것이죠. 대태상은 련주보다 우위에 있으니까 요." "난 사실 련주가 되려고 이곳에 왔 소." 연숙상은 관해영이 무엇 때문에 마 음을 돌려 이런 말을 했는지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관해영은 그녀의 신색 따위 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차후 하기로 하고 우선 본인의 숙소부터 정해 주시오." 연숙상이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가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절 따라 오세요." 그녀가 관해영을 인도한 곳은 바로 전각 안에 비어 있는 한 칸의 깨끗한 방이었다. 밤이 깊었음인가? 관해영은 침상 위에 누워 깊은 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촛불이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 스륵―. 미세한 음향과 함께 천장이 둥그런 원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는 사람 하나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나타나며 거미줄처럼 가는 실이 천천 히 내려오는 것이었다. 헌데, 그 가는 명주실을 타고 한 명 의 흑의인이 거미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몸에는 착 달라붙는 흑의경장 차림 에 얼굴엔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손에 는 새파랗게 날이선 비수를 들고 있었 다. 그는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몸을 잔 뜩 웅크리고 두 눈에 면도날 같은 광 망을 뿜어냈다. '흐흐! 몰라야 될 것을 알았기 때문 에 죽어야 한다.' 쐐애애애액! 흑의인이 더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며 비수로 관해영의 심장 을 내리찍었다. 순간, 자는 줄만 알았던 관해영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찔러오는 흑의인 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이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금나수는 흑의인의 완맥을 정확히 낚아채는 한 편 어깨를 비틀어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해 놓았다. 흑의인의 눈빛이 걷잡을 수 없이 흔 들렸다. "으으……, 이토록 무공이 강할 줄 이야." 거의 공포에 가까운 이 중얼거림을 관해영은 희미한 웃음으로 흘려 버렸 다. "어리석은 놈이군. 낮에 당했으면 내가 경계하고 있을 줄 알고 있을 터 인데 대담하게 기습을 하다니……. 대 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기에 배짱이 그토록 좋은지 한 번 볼까?" 관해영이 몸을 비트는 흑의인의 등 줄기를 발바닥으로 사정없이 누른 다 음 복면을 벗기다가 나직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넌 추사명!" 그렇다. 복면인의 얼굴에 있는 붉은 사마귀 는 어떠한 사람이든 그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특이한 것이었다. 추사명이 이빨을 갈았다. "제길 시간에 쫓기다가 어설프게 손 을 썼더니……." 관해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추사명! 누가 시킨 짓이냐?" "흐흐! 내가 말을 할 것 같으냐?" "넌 반드시 입을 열고 말 것이다." 관해영이 추사명의 얼굴을 받쳐 올 렸다. 순간, 추사명을 바라보는 관해영의 두 눈이 강렬한 녹광(錄光)을 띠는 것 이었다. 추사명의 안색이 공포로 일그러들었 다. "으으! 구, 굴혼마안공(屈魂魔眼功) 을 쓰려 하다니……." 그는 안간힘을 쓰며 관해영의 두 눈 을 피하려 했으나 그럴 수록 관해영의 두 눈에 이끌리고 있었다. 관해영의 눈동자가 갈수록 짙은 녹 광을 띠자 추사명의 초점이 서서히 풀 리기 시작했다. "너는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며 왜 흑전상련에 잠입했느냐?" 관해영의 환상 같은 목소리에 추사 명이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난 혈사무의 삼 개 외당(外堂) 중 금마당(金魔堂)의 소속이다." 일순, 관해영의 얼굴에 잔잔한 경악 이 일었다. '혈사무라고?' 刻年�.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6 장 (대태상의 신 1 ) 제 36 장 대태상(大太上)의 신(神) 1. 혈사무! 관해영으로서는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것은 지옥귀사역에서 창궁우사 목초관의 얘기를 들어 알고 있기 때문 이다. 관해영이 다시 물었다. "혈사무에서 무엇 때문에 흑전상련 을 노린단 말이냐?" 추사명이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 다. "그건 나도 확실히 모른다. 다만 무 주(霧主)에게서 흑전상련을 장악하려 는 명령이 떨어진 걸로 알고 있다" 관해영이 모호한 얼굴로 내심 침음 성을 흘렸다. '으음! 혈사무는 무슨 획책을 하고 있는 것일까? 흑전상련을 노리는 걸로 보아 막대한 금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관해영이 더욱 강렬한 녹광을 띠었 다. "이곳에 잠입한 혈사무의 인물들은 모두 몇 명이냐?" "대략 십여 명 정도로 알고 있다." "그 중 책임자는 누구냐?" "기종해다." "포통천도 혈사무의 인물이냐?" "아니다. 다만 기종해가 포섭했을 뿐이다." 관해영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그는 연숙상에게서 포통천이 기종해 를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는 말을 들었 을 때부터 무엇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혈사무주는 누구냐?" "그건 나도 모른다. 무주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혈사무 전체를 통틀어 아 무도 없을 것이다. 극히 소수의 인원을 빼놓고는 무주를 만날 수도 없다." "혈사무의 총단은?" "나 역시 아직 총단을 가 본 적이 없다. 다만 본거지는 개봉의 은원서원 (隱元書院)이다." "그럼, 지금부터 흑전상련 안에 있 는 열 명의 반도들의 이름을 대 보아 라." "그들은 모두 내일 있을 련주의 선 출에 관여 있는 사람들로서 기종해, 포통천……." 묵묵히 듣고 있던 관해영은 추사명 을 죽일 것인가 살려줄 것인가를 망설 이다가 그의 사혈(死穴)을 짚어 버렸 다. 추사명이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를 뿌리고 죽어 자빠지자 관해영은 싸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 배신을 한 사람은 두 번 배 신할 수 있는 것이다.' 드넓은 대전. 긴 탁자를 마주하고 이십여 명의 인 물들이 엄숙한 신색으로 앉아 있었다. 하나 같이 긴장한 눈빛들. 그것은 대전 전체를 팽팽한 긴장감 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허나, 상석(上席)에 앉아 있는 그의 기름진 얼굴은 여타 사람들과는 다르 게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바로 기종해였다. 그는 지극히 음엄한 눈길로 맞은편 상석에 있는 연숙상의 초조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아홉 명씩 양편으로 나누어 착석해 있던 인물들 중 우측에서 노인 한 명이 일어서며 칼칼한 목소리를 토 해냈다. "그럼 진행을 맡고 있는 본인 포통 천이 련주 선출을 진행할까 합니다." 통방울 같은 두 눈과 얄팍한 입술이 불빛 아래 번뜩거렸다. 순간, 연숙상이 급히 말문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아직 한 분이 더 와야 해요." 포통천이 왕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의혹을 띠었다. "누굴 말하는 거요. 올 사람은 다 착석해 있는 것 같은데." "대태상이에요." 연숙상의 조용한 목소리에 좌중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실, 련주의 선출에 대태상이 직접 나선 일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종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흐흐! 그 놈은 영원히 나타나지 않 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여러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관해영이 내 실로 걸어 들어왔다. 순간, 좌중의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 서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속하들이 대태상을 뵙습니다." 그러나 기종해의 안색은 순식간에 썩은 돼지 간처럼 변하는 것이었다. '이런……, 추사명이 실패했단 말인 가? 그래도 추사명은 두려워서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안위를 삼으며 슬쩍 관 해영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직 약관의 청년.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기종해가 생각할 때는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적이 안심이 되는 것이다. "앉읍시다." 관해영이 이렇게 말하며 오랫동안 비워 둔 대태상의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러자 좌중의 인물들이 비로소 자 리에 앉으며 더할 수 없이 긴장한 얼 굴로 침묵을 지켰다. 포통천이 관해영을 향해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이며 좌중을 향해 말문을 열 었다. "대태상께서 련주 선출을 직접 관 여하시니 여러분들은 더욱 심사숙고해 새로운 련주를 뽑을 것이라고 본인 포 통천은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관해영을 의식해서인 지 좀 전보다 많은 예의를 차리고 있 었다. "그럼, 후보자는 일어서 주시기 바 랍니다." 연숙상과 기종해가 일어섰다. 포통천이 다시 말했다. "여러분들은 제가 후보자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이 뽑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 거수(擧手)하시기 바 랍니다. 먼저 연숙상 소저를 지지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거수한 인물들은 착석해 있는 인물 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이 들어보이는 노인들이었다. "다음에는 기종해 타주를 련주로 뽑 고 싶은 사람은 거수해 주십시오." 나머지 사람들이 손을 들어 올리니 그 숫자가 열 명이나 되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일방적인 승리인 것이다. 기종해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 져 올랐다. '흐흐! 이제 흑전상련은 본 혈사무 의 손에 들어왔다.' � 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6 장 (대태상의 신 2 ) 2. 포통천이 좌중을 둘러보다 이윽고 관해영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대태상! 연남강의 다음으로 기종해 가 련주로 뽑혔음을 선포해 주십시 오." 그러자 관해영이 더할 수 없이 싸늘 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본인은 인정할 수 없소." 순간, 좌중의 인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저 놈이 다 된 밥 에 재를 뿌리는군.' 포통천의 신색이 어딘지 모르게 딱 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태상께서는 거부하는 이유가 무 엇이오." 대뜸 말씨부터가 반발적으로 튀어나 오는 포통천이었다. 관해영이 한 마디로 딱 잘랐다. "자질이 없소." 기종해의 전신이 엄청난 모욕감으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포통천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기타주는 만인이 인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그가 능력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능력이 있단 말입 니까?" "바로 나요." 관해영이 자신을 가리키자 포통천은 어이없는 얼굴로 떠듬거렸다. "그,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것이오?" "신분이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어떻 게 밑으로 내려갈 수 있단 말입니까?" "본인이 련주로 나서면 규칙에 어긋 나는 것이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내가 련주가 되겠소. 이 의가 있는 사람은 말하시오." 관해영이 좌중을 둘러보자 누구 하 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관해영 스스로가 대 태상의 신분을 팽개치고 련주가 되겠 다고 한 이상 수하된 입장으로서 반박 하고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기종해는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 었다. '젠장! 어디서 저런 도깨비 같은 놈 이 나타나서…… 빠른 시간 안에 놈을 없애 버리고 련주를 다시 뽑도록 해야 되겠다.' 관해영이 더할 수 없이 엄숙한 얼굴 로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럼 이의가 없다면 지금부터 본인 이 흑전상련을 이끌고 가겠소." "……!" "포 부련주!" "하명하십시오." "련주가 된 본인이 첫 번째 명령을 당신에게 내리겠소." 포통천은 더할 수 없이 긴장한 얼굴 이었다. 그는 관해영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 바 없었으나 싸늘하게 굳어진 그의 얼 굴을 바라볼 때는 한 줄기 불안을 느 꼈다. 이윽고 관해영의 첫 번째 명령이 흘 러나왔다. "포 부련주에게 명하오. 기 분타주 를 죽이시오." "억!" 포통천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 다. 첫 번째 명령! 그것은 바로 동료를 죽이라는 명령 이었으니 그가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좌중의 인물 들 역시 해연한 얼굴로 관해영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관해영의 얼굴은 지극히 담 담할 뿐이었다. 포통천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떠듬거렸다. "어찌 그런 명령을……." 관해영이 냉소를 터뜨렸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이 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료를 죽이라는 것은……." "당신이 싫다면 기 분타주에게 명하 겠소." 관해영이 기종해를 바라보자 기종해 의 안색은 더할 수 없이 창백하게 굳 어 있었다. 관해영이 추호도 망설임 없이 명령 을 내렸다. "기 분타주! 포 부련주를 항명죄로 처치하시오." 기종해가 대답을 못하고 내심 염두 를 굴렸다. '이놈이 뭘 알고 있는 것이 아닐 까?' 연숙상이 심히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저토록 터무니없는 억지를 쓰는 것일까?' 순간, 관해영이 자리를 차고 일어섰 다. "두 사람 다 싫은 모양이군. 그럼 내가 처치해 주지." 기종해가 뒤로 주춤 물러서다 버럭 악을 썼다. "지금 직분을 이용해 아무 죄 없는 우리들을 처치하려는 것을 보니 분명 외부에서 들어온 첩자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당신의 신상을 철저히 조사하 기 전에는 명령을 따를 수가 없소이 다." "그렇소. 대태상은 이 일을 잠시 보 류하시오." 기종해를 지지한 열 명의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가 휘날렸다. "기종해! 넌 혈사무의 금마당에서 어떤 지위에 있느냐?" 일순, 기종해의 안색이 홱 돌변했다. '이, 이놈이 어떻게…… 그럼 추사 명이 모든 것을 실토했단 말인가?' 관해영은 다시 포통천을 향해 얼음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포 부련주! 너는 흑전상련을 배신 하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포통천이 노갈을 터뜨렸다. "무슨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너야말로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첩자임이 분명하다." 자제력을 잃은 그의 목소리에 좌중 의 안색들이 저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일개 부련주의 신분으로 대태상에게 이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관해영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갔다. "어떤 해명을 해도 너희들이 혈사무 에 몸담고 있는 것을 안 이상 결코 살 려 두지 않을 것이다." 기종해의 안색이 음침하게 변했다. "후후! 정체를 알고 있었다니 그럼 죽는 수밖에 없겠군." 파악!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한 줄기 금빛 광채가 관해영의 심장을 향해 빗살처 럼 쏘아져 나갔다. "앗!" "저, 저것!" 좌중의 인물들이 일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기종해의 일초가 너무나 절 묘하고 신속해 관해영이 피할 수 없으 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관해영은 그들의 상상을 완 전히 뒤덮고 맨손으로 금빛 광채를 움 켜쥐는 것이었다. 관해영의 손에 잡힌 것은 명주실보 다 가는 철삭(鐵索)이었다. 기종해의 얼굴이 더할 수 없는 경악 으로 일그러들었다. '믿을 수 없다. 천리금사인(千里金絲 刃)은 너무도 날카로워 절대 맨손으로 잡을 수가 없는데…….' 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6 장 (대태상의 신 3 ) 3. 바로 그때였다. "죽어라!" 포통천이 소리치며 관해영의 등뒤 명문혈을 향해 벼락같이 일검을 치러 오는 것이었다. 쐐애애액! 관해영이 뒤돌아보기도 전에 싸늘한 검풍(劍風)이 벌써 한치 가까이 이르 러 있었다. 위험천만의 순간! 관해영이 손에 쥔 철삭을 기종해를 향해 집어던지며 앞으로 신형을 날렸 다. 철삭은 어김없이 기종해의 가슴을 관통했고, 포통천은 관해영의 뒤를 그 림자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해영이 자신을 속이 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깨닫지 못했 다. 기종해가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이 빨을 갈았다. "혼자 죽을 수는 없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관해영의 가 슴을 향해 철삭을 힘껏 쏘아냈다. 순간, 관해영의 신형이 허공으로 뛰 어오르며 기종해의 키를 타넘고 그의 뒤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끄으으윽!" 뒤따르던 포통천은 기종해의 철삭에 가슴이 꿰뚫린 채 힘없이 지면에 나뒹 굴었다. 그러나 기종해는 내공이 심후한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뿐 숨을 거두지 는 않았다. 관해영이 그의 혈도를 제압하며 싸 늘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기종해! 어서 이 많은 사람들한테 자신의 신분을 솔직히 털어 놓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종해가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었 다. "누구든 내 입을 열 수 있다고는 믿 지 않는다." "그럴까?" "자신 있다면 뭐든지……." 갑자기 기종해의 목소리가 뚝 끊겨 졌다. 그런 그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창 백하게 질려 있는 것이었다. 좌중의 인물들은 기종해가 왜 그런 안색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 어리둥절 해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종해의 얼굴을 볼 수 있었 지만 관해영의 얼굴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관해영의 두 눈은 새파란 녹광 을 띠고 있었다. "기종해!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하 나도 숨기지 말고 말해 보아라." 그러자 기종해가 꿈결처럼 중얼거리 는 것이었다. "난 혈사무의 금마당에서 일급 무사 의 직책을 맡고 있는데 흑전상련을 장 악하기 위해 강동분타주의 신분으로 잠입했소. 연남강에서 독수를 쓴 것은 내가 한 일이오." 좌중의 인물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 고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노갈을 터뜨 렸다. "대태상! 놈을 죽이시오." "흑전상련을 우습게 본 놈은 살려 둘 수 없습니다." 관해영이 바라보니 자리를 차고 일 어난 자들은 하나같이 기종해를 지지 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관해영이 내심 쓴 웃음을 지으며 기 종해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너는 지금부터 혈사무의 인물들과 네가 포섭한 인물들의 명단을 대라." 기종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십 명의 인물들이 사방으로 뛰어 나가 는 것이었다. 순간, 검은 인영 하나가 동서남북에 서 번쩍거렸다. 퍽! "어이쿠!" "으악!" 도망가던 인물들이 하나같이 면상을 움켜쥐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들은 얼굴에 선혈이 낭자한 채 인 사불성이었다. 그때, 사방에서 번쩍이던 인영이 관 해영 옆에 내려 섰는데 바로 흑모였 다. 착석해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은 흑 모의 가공할 무위에 일시에 넋이 빠진 듯 하나같이 멍청한 얼굴들이었다. "연소저! 이들을 가두시오." 관해영이 굴혼마안공을 거두며 이렇 게 소리치자 연숙상이 밖을 향해 소리 쳤다. "밖에 대기하고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와서 반도를 데리고 나가거라." 그러자 대전 안으로 한 무리의 사람 들이 들어서며 기종해를 비롯한 인물 들을 데리고 나갔다. 관해영이 기종해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연숙상에게 물었다. "흑전상련의 세력분포와 활동에 대 해서 말해 보시오." 연숙상이 잠시 생각하다 말문을 열 었다. "흑전상련은 천하에 십여 개의 분타 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각 분타 밑에는 각기 이십 개의 분타가 있으나 따지고 보면 천하에 없는 곳이 없는 셈이에요." "……!" "흑전상련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업을 하기에 대개 고리대금이나 전 당포, 또는 금은 밀매, 노예시장들에 종사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금력은 황제라도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 에요." 금력으로만 따진다면 황제도 부럽지 않다는 광오한 흑전상련. 관해영은 도시 놀라는 기색이 아니 었다. 그는 지극히 무덤덤한 신색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륙금사와 금력을 비교해서는 어 떻소?" 연숙상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관해 영의 얼굴에 깊은 의혹을 느꼈으나 노 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존심 상하는 얘기지만 저희들이 상당한 열세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요." 관해영이 지극히 엄숙한 신색으로 좌중을 돌아보며 단호한 목소리를 토 해냈다. "모두 잘 들으시오. 이제부터 흑전 상련은 지하에서의 암약은 끝내고 정 면으로 실체를 드러내시오. 목표는 대 륙금사의 패망, 빈털터리로 만드는 것이오." "……!" 좌중의 인물들은 모두 일순 경악했 다. '무모하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우 리 흑전상련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연숙상이 여러모로 생각해 보고는 심히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대륙금사와는 나름대로 좋게 지내 왔습니다. 구태여 불안을 야기시킬 필요가 있겠 어요? 잘못 하다가는 천하상권의 질서 가 무너집니다." 관해영이 확신하듯 잘라 말했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시오." "알겠어요." 연숙상은 더 이상 말을 해 보아야 관해영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마음속으로 관해영이 말한 것 들이 아무 탈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흑전상련에 몸 바친 이 다섯 노인들은 대륙금사와 정면으로 부딪친 다는 말에 하나같이 곤혹스러움을 드 러낸 것이다. 그러나 관해영의 머리는 이 순간 재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대륙금사는 복마성을 움직이 고 있다. 대륙금사를 없애는 것은 곧 복마성을 없애는 것이고 복마성을 없애면 사대 벌왕의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사향 냄새가 은은히 풍기는 여인의 내실. 두 사람이 창가에 서서 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연숙상이 걱정스러운 음성으 로 물었다. "아버님의 병환은 언제쯤 회복될 것 같아요?" 연남강의 병세를 치료했던 관해영은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예전의 상태 가 될 것이오." "너무 긴 시간이군요." "그렇지는 않소. 그 동안의 병세를 생각할 때는 한 달이라도 상당히 빠른 시간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럴까요. 전 도무지……." 못 믿겠다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 밀어오른 연숙상이었으나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다. 관해영이 어찌 그녀의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신형을 돌려 조용한 눈길로 연숙상을 바라보 았다. "이제 그만 떠나 보겠소." 연숙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딜 간다는 말이에요?" "해야 할 일이 있소. 내 소식은 틈 이 나는 대로 각 분타에 전하겠소. 없 는 동안에 연소저는 한 가지 일을 해 주셔야겠소." "어떤……?" "한 사람을 지옥에서 구출하는 것이 오. 실패란 있을 수 없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대륙금사의 빈털터리는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 오." 연숙상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 다. "그렇게까지나……." 세상에 과연 그토록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존재한단 말인가? 관해영이 이번에는 약간 염려스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황금 오백 관을 준비할 수 있겠 소?" 연숙상의 얼굴에 가벼운 경악이 일 렁였다. 황금 오백 관! 이것은 그야말로 성 하나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큼의 거금이었던 것이 다. 물론 흑전상련이 그만한 거금을 마 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갖 고 다니기에는 너무 큰 거액이기 때문 이었다. "대체 그 많은 황금을 무엇에 쓰려 고 하는 것이에요?" 관해영은 싱긋 웃음을 지을 뿐이었 다. "곧 알게 될 것이오." 관해영이 이렇게 말하고 내실을 빠 져나오려 하자 연숙상이 급히 막아섰 다.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잠시 술이라도 한 잔 하시고……." 그러나 관해영은 그녀를 피해 내실 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 홀로 남은 연숙상. 그녀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 은 허전함을 느꼈다. '무심한 사람!' 과연, 그녀의 내심은 무엇이란 말인 가. 눈앞�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6 장 (대태상의 신 4 ) 4. 관해영은 흑모의 손을 잡고 관도(官 道)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 다. '복마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양동작 전(兩動作戰)! 대륙금사의 초토화와 함께 무력(武力)의 약화를 병행해야 한다.' 관해영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구파일방을 이용해 단시일 안으로 막강한 조직을 결성해야 한다.' 허나, 관해영의 얼굴은 결코 밝지만 은 않았다. 그것은 바로 구파일방이 자신을 어 떻게 대해 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십문 령(十門令)을 각 문파에 전달해 인재 들을 청성파로 보내라 했으니 나와 비 슷한 시기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십문령을 구파 일방에 전달했다는 뜻이 아닌가? '호광의 딸도 있고 태허설권의 창안 자가 청성파의 출신이니 은혜도 갚을 겸 청성파를 새로 조직하는 세력의 주 춧돌로 삼자. 그렇게 되면 차후 정도 의 선두는 청성파가 될 것이다.' 관해영! 청성산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관해영은 청성산 옥허관(玉虛關) 앞 에 이르러 층층이 올라간 청성파의 고 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도착했는지 모르겠군!' 그는 청성파의 굳게 닫힌 대문을 두 드렸다. 삐걱! 문이 열리며 중년도인 한 명이 나서 며 조용한 눈길로 관해영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도우(道友)는 무슨 일로 본파를 방 문했소?" 관해영이 그를 바라보니 눈빛이 맑 고 얼굴이 정수해 적이 마음이 놓였 다. "장문인을 만날까 하오." 중년도인이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십문령의 소청을 받고 왔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곤란합니다. 본파는 지금 중대한 회의를 열고 있으니 도우(道 友)는 훗일 본파를 찾아오기 바라오." 중년도인이 정중히 거절하자 관해영 은 잠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난 지금 장문인을 만나고 싶소. 전 해 줄 물건이 있소이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물건은 제가 대 신 전해 주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꼭 전해 야 합니다." 관해영이 대문 안으로 성큼 발을 들 여놓자 중년도인이 앞을 막아서며 노 기를 띠었다. "물러서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손 속이 무정하다고 후회할 것이외다." 관해영은 들은 체도 않고 계속 걸음 을 옮겨 놓았다. 순간, 중년도인이 냉랭히 코웃음을 터뜨렸다. "흥! 본파를 너무 우습게 보다가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도인이 어느새 검을 뽑아 들고 관해영의 허리를 베어 나가자 관해영 이 한 자나 훌쩍 뛰어 검을 피해내며 싸늘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의를 표방하는 청성파가 하류 잡 배나 쓰는 암습을 하다니……, 그러고 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가?" 중년도인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 랐다. 사실, 그는 관해영으로 하여금 경각 심을 주기 위해 가벼운 일초를 시전한 것이었으나 관해영이 이렇듯 자신을 핍박하자 그는 살심이 크게 일어났다. "본 청성파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본 도의 규칙을 무시해도 좋다는 규율이 있다." 쐐애애애액! 중년도인이 사납기로 이름난 낙성추 혼(落星追魂)으로 검을 휘둘러 들어오 자 그 기세가 성난 장강의 물줄기와도 같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검 끝이 막 몸에 다다를 때 돌연 두 손을 들어올려 맨손으로 검날 을 움켜 잡았다. "엇!" 중년도인이 기겁을 하며 급히 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검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괴사였다. 맨 손을 검을 잡다니……. 비록 중년도인의 검이 간장이나 막 사 같은 보검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백 번 정련해 만든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 이었다. 그런데 관해영은 그런 검을 나무 막대기 잡듯이 잡아 버리는 게 아닌가? 뚝! 관해영이 공력을 일으켜 검을 끊어 버리자 중년도인이 세 걸음이나 비틀 거리며 물러서서야 가까스로 신형을 바로잡았다. 그런 그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 었으며,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 다. 그 자신도 청성파의 일류급 고수였 는데……, 그는 자신이 관해영의 적수 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것을 알고 있 었는지 주위를 향해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막아라! 침입자다." 관해영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번 져 올랐다. '후후! 꽤나 놀란 모양이군. 적이 침 입하다니, 그건 너무 심했는데…….' 이때, 사방에서 도인들이 우르르 쏟 아져 나오며 관해영을 빙 둘러쌌다. 헌데, 관해영의 앞으로 나서는 것은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가? 이십여 세 가량의 이 여인은 몸매가 풍염하기 이를 데 없었고 두 눈이 유 난히 서글서글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 금 시원한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아름다 운 얼굴은 차디차게 굳어 있었다. "청성파가 만만하게 보였다면 그건 너의 실수다. " 관해영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 녀는 다짜고짜 등뒤의 검을 뽑아 관해 영을 향해 살초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스파아앗! 쾌(快)와 예(銳)가 절묘히 배합된 그 녀의 검세는 마치 수십 줄기의 벼락불 이 치듯 관해영의 전신을 찔러 오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내 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힘이 실려 있지 않아 검세의 육중 함은 느낄 수 없으나 그 빠름과 화려 함만큼은 그야말로 단연 어떠한 검법 보다도 우위에 있다.' 관해영이 피하기만 하자 여인이 검 세를 거두어들이며 소리쳤다. "이 도적아! 왜 공격을 안 하는 것 이냐?" 관해영이 일부러 두 눈을 상큼 치떴 다. "내가 왜 도적이란 말이오?" 여인이 버럭 악을 썼다. "본사를 침입했잖아." "난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왔을 뿐이 오." 여인이 힐끗 중년도인을 바라보자 중년도인이 관해영의 말이 맞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인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 리로 물어 왔다. "그럼 용건이 뭐야?" 관해영은 그녀가 꼬박꼬박 반말을 하자 심히 못마땅했으나 전혀 내색하 지 않았다. "장문인과 한 사람을 만나려 하오." "누군데?" "호산진(胡珊眞)이라는 아가씨요." 순간, 여인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번져 올랐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靡�."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7 장 (단혈맹의 탄생 1 ) 제 37 장 단혈맹(丹血盟)의 탄생(誕生) 1. 여인이 사뭇 이상하다는 눈길로 관 해영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호산진이라면 난데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지?"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망아지 같은 여인이 호산진이라 고? 골치 꽤나 아프게 생겼군!' 그는 호산진의 말투와 행동들이 도 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관해영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여인 이 불룩한 앞가슴을 툭 내밀며 재차 다그치듯 물어 왔다. "당신은 무슨 일로 날 찾는 거야?" 이 도전적인 말에 관해영은 심히 못 마땅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아버님의 부탁을 받았소." 순간, 호산진이 놀람과 기쁨이 뒤엉 킨 얼굴로 황급히 다가들었다. "아버님이? 대체 어디에 계시죠? 건 강은 어때요? 무고하신가요?"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질 문에 관해영은 어느 것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 있다가 조용한 목소 리로 토해냈다. "그건 차차 말하기로 하고 우선 나 를 장문인에게로 안내해 주시오." 호산진이 샐쭉한 얼굴로 홱 몸을 돌 렸다. "따라 와요." 관해영은 그녀의 태도가 순식간에 일변하자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다가 그녀를 따라가며 물었다. "이곳에 모이기로 한 구파일방의 정 예들은 모두 다 모였소?" 호산진이 의혹스런 얼굴로 관해영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건 구파일방의 비밀인데 당신이 어떻게 알죠? 구파일방의 문하도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관해영 의 행색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별 볼일 없다는 듯이 고개 를 홱 돌려 버렸다. 관해영은 내심 울화통이 치밀어 올 랐으나 속 좁은 여인이거니 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 "곧 알게 될 것이니 우선은 묻는 말 에나 대답해 주시오." "흥! 신비한 척하기는……, 그러나 아버님의 소식을 알려주었으니 보답해 주는 의미에서 알려주지요. 그들은 모 두 도착했어요. 지금은 다만 십문령주 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뿐이 에요." "……!"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죠?" "잘 지내고 있소." 관해영이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어서였다. 만약 호광이 지옥귀사역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곧이 곧대 로 말을 했다가는 이 말괄량이 같은 성격의 여인은 단번에 달려갈 듯이 불 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노송이 우거진 오솔길을 걷고 있었는데 앞에는 소담스러워 보 이는 정자(亭子)가 자리해 있었다. 정자 한가운데는 한 명의 늙은 도인 (道人)이 앉아 있었다. 그는 흰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하계한 신선을 방불케 할 만큼 청수한 모습이었다. 바로 이 노인이 청성파의 장문인인 신정도인(神鼎道人)이었다. 호산진이 신정도인 앞에 이르러 깊 숙이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신정도인이 맑은 하늘 위로 흐르는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관해영을 직시했다. "도우는 무슨 일로 본인을 찾아왔 소." 관해영은 그의 탈속한 기품에 내심 감탄하며 품속에서 태허철권을 꺼내 주었다. "이 물건은 돌려줄까 해서입니다." 신정도인이 책을 받아 들고는 전신 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신정도인의 얼굴에는 걷잡을 수 없는 격동이 스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관해영을 향해 꿇어앉는 것이 아닌가? 순간, 관해영이 당혹함을 금치 못했 다. "왜 이러는 것이오." 신정대사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무영대사조의 진전을 이었으니 저 에게는 사숙(師叔)에 해당합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관해영이 심히 난처한 얼굴로 호산 진을 바라보자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황급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 다. 관해영은 내심 혀를 찼다. '쯧쯧! 난 단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물어 보려 한 것뿐인데, 오히려 힐 책하는 뜻으로 받아들이다니…….' 관해영은 일이 어떻게 되었든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난 무영상인의 진전만 이었을 뿐 사제의 예를 올린 것도 아니고 또 청 성파의 문하도 아니니 이런 예우는 곤 란하오." 그러나 신정도인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리 부인하려해도 무림의 관습 상 저의 사숙임은 분명합니다." 관해영은 내심 커다란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 문제는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 주어 마음이 몹시 홀가분하오." "……!" "장문인! 나를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안내하시오." 신정도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왜……?"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순간, 신정도인이 더할 수 없이 놀 란 얼굴로 떠듬거렸다. "그, 그럼……." 관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십문령주요." 거대한 대전. 이백여 명의 청년들이 엄숙한 얼굴 로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생기발랄해 보이는 이들은 두 눈에 신광이 번쩍거리고 있었으며 꽉 다문 한일자의 입술에는 남아의 기 재가 드높아 보였다. 바로 이들이 구파일방의 자랑하는 정예들인 것이다. 관해영이 신정도인의 안내를 받으며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신정도인이 좌중을 향해 우 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모두 예를 올리시오. 이 분이 십문 령주이시오." 순간, 이백여 명의 청년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관해영을 얕 잡아보는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신정도인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뭣들 하는 거요. 어서 예를 올리지 않고……." 그때서야 이백여 명의 청년들이 허 리를 깊숙이 숙이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속하들이 십문령주를 알현합니다." 관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관해영이 모두가 자리에 앉기를 기 다려 조용하나마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게 한 것은 당금무림에 마(魔)가 창궐하고 정(正)이 쇄하기에 정도의 기운을 되 찾고 제마멸사(制魔滅邪)를 이루기 위 해서요." "……!" "본인은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정도 맹을 결성하려 하오." 좌중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 다. 靡�."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7 장 (단혈맹의 탄생 2 ) 2. 이때였다. "잠깐! 이의가 있습니다." 자리를 차고 일어난 청년은 소림사 의 한 승려였다. 그는 관해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며 관해영의 말에 반박을 하고 나섰 다. "당금 사대벌왕에 의해 정도가 부흥 하고 있는데 어째서 마가 창궐한다 하 시는 것입니까?" 목소리는 지극히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데 행동거지는 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해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어차피 이것보다 더 심한 반발 이 나올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터 였다. "그렇지가 않소. 구파일방은 지금 사대벌왕에게 속고 있는 것이오. 사대 벌왕은 등세욱의 수하들이오." 순간,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나 왔다. 장내는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예의 소림승려가 불만스런 음성을 토해냈다. "우리는 믿을 수가 없소이다." "그렇소." "우리가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증거를 제시하시오."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관해영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옆에 서 있는 신정도인은 얼굴 가득 노기를 드러냈다. 아무리 구파일방의 영재들이라고는 하나 십문령주에게 이토록 불손한 행 동을 취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사부 를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 문이었다. 신정도인이 일갈 노호를 터뜨리려 할 때였다. 관해영이 지극히 조용한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당장 제시할 증 거는 없소이다." 소림승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련주의 말을 믿을 수가 있겠소." 관해영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믿으라고 하지는 않겠소. 이건 명 령이오." 순간, 넓은 대전 안이 찬물을 맞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들 역시 관해영에게 불만을 느끼 고 있으나 감히 십문령의 명령을 거역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관해영이 지극히 차가운 얼굴로 좌 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구파일방도 언제까지 사대 벌왕에 의지하겠소? 예전의 힘을 되찾 아 구파일방의 영광을 다시 재현해야 하지 않겠소." "……!" "즉 무림의 정의는 구파일방에 의해 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오." 소림승려가 조심스럽게 관해영의 눈 치를 살폈다. "말뜻은 충분히 알겠지만 그렇게 되 려면 구파일방이 사대벌왕보다 강해져 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무리요." "어째서 무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구파일방 은 지금처럼 사대벌왕의 눈치나 살피 고 있는 것이 아니오." 관해영이 이렇듯 한꺼번에 욕보이자 이백여 명의 안색이 일시에 변하는 것 이었다. 비범해 보이는 청년이 자리를 박차 고 일어서며 버럭 언성을 높였다. "련주는 구파일방을 예전처럼 일으 킬 능력이 있단 말이오." 관해영은 은근히 심사가 뒤틀렸다. '결국 내가 정도맹을 이끌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국한되는군. 쓸데없 는 자존심만 남아 가지고…….' 관해영은 지금이야말로 무언가를 보 일 때라고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 내 능력을 보이면 되 겠소." 그러자 청년이 주위를 돌아보며 의 미심장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각파가 자랑하는 절기들을 격파하 면 진심으로 련주에게 충성을 바치겠 소." 모든 청년들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 았다. 그것은 관해영이 결코 자신들의 우 위에 있다고는 믿지 않은 자만이 만들 어 내는 어이없는 얼굴의 조각들이었 다. 소림의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 그것은 단 한 순간에 무너지고 무당 의 오행검진(五行劍陣)은 관해영의 손 가락 하나에 검을 하늘 높이 날려 버 렸다. 구파일방의 정예들은 그때마다 경악 을 금치 못했다. "……." 관해영은 넋나간 사람처럼 서 있는 구파일방의 정예들을 바라보며 한 줄 기 미소를 베어 물었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소?" 구파일방의 정예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꿀먹은 벙어리들이었다. 그들은 관해영을 더 이상 자신들과 같은 위치의 인물로 보지 않았던 것이 다. 관해영은 이들이 자신에게 완전히 굴복했을 것으로 보고 적이 안심한 얼 굴이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무공을 연성하 시오. 시간은 두 달, 각자가 가진 절기 에 새로운 절학을 습득하면 아마도 지 금보다는 다섯 배는 강해질 것이오." "……!" "당신들에게 절학을 가르칠 사부를 소개하겠소." 관해영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흑모(黑毛)!" 휘익! 그 찰나, 창문을 타넘고 하나의 인 영이 유령처럼 관해영의 옆에 내려섰 다. 흑모였다. 순간, 이백여 명의 인물들이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그럴 것이 하찮은 원숭이를 무공 스 승으로 섬겨야 될 판이니 어찌 그들의 안색이 편안하겠는가? 관해영은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 겠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 며 흑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모는 영리하기 그지없어 여러분 에게 충분히 절학을 가르칠 수가 있소 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흑모는 정 종십종의 전인이요." 그러나 이백여 명의 구겨진 얼굴들 은 펴질 줄 몰랐다. 관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 흑모를 못 믿겠다면 누구든 시 험을 해보아도 무방하오." 그러자 곤륜의 제자가 흑모 옆으로 내려서며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제자가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흑모가 그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성 이 난 얼굴로 길길이 날뛰었다. "흥, 감히 원숭이 주제에……." 청년이 싸늘히 냉소를 흘리며 우수 를 뻗쳐 흑모의 완맥을 잡아나갔다. 그러자 흑모가 재빨리 한 손으로 잡 아오는 손을 쳐나가며 다른 한 손으로 청년의 앞가슴을 쳐나갔다. 그것은 청년으로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초였으며 완전한 허점이기도 했다. "앗!" 청년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황망히 몸을 빼내려 했으 나 벌써 흑모의 우수는 청년의 기해혈 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모는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이 일초는 좌중의 인물들을 경악하 게 했으며 흑모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년은 멍청한 얼굴로 관해영에게 매달려 재롱을 부리고 있는 흑모를 바 라보며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 이었다. '지금까지 약점을 고치려 해도 어디 가 틀린지를 몰랐었는데 단숨에 지적 하다니…….' 이어, 여러 사람들이 흑모와 대결을 벌였으나 하나같이 삼초를 견디지 못 했다. "하하! 어떻소. 흑모는 가히 살아 있 는 구파일방의 비급이오." 靡�."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7 장 (단혈맹의 탄생 3 ) 3. 청성파 장문인의 내실. 관해영과 신정도인이 마주앉은 채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먼저 말 문을 연 것은 관해영이었다. "구파일방의 정예들을 모였으니 이 제부터 그들을 단혈맹(丹血盟)으로 부 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수좌(首座)는 호산진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또한 수 좌는 당분간 본인이 직접 무공을 전수 하겠습니다." 신정도인은 내심 기쁨을 금치 못했 다. '산진이 구파일방의 젊은이들 중에 영수격이 되었으니 장차 구파일방은 본 청성파가 이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구파일방의 하위에 머물러 있던 청성파로서는 엄청난 도약이었 다. 하루아침에 구파일방의 영수격이 되었으니 신정도인의 기쁨은 말해 무 엇하겠는가? '무영대사조님! 감사합니다. 불세출 의 기재를 후인으로 점찍으셔서…….' 생각해 보면 하늘이 도운 일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제는 소림의 장문인에게도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고, 어쩌면 농담도 한 마디쯤 은 던질 수 있다고 신정도인은 생각하 고 있었다. '악착같이 사숙이라고 우겨 본파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자.' 신정도인! 그는 무한한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 이다. 내실…….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불빛이 밝 아 보였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는 데 남자는 관해영이었고 여인은 호산 진이었다. 헌데, 호산진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흘러나오는 목소리조 차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용숙부님이 아버님을……, 그게 정 말인가요?" 관해영이 집요하게 물어 오는 그녀 의 질문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호광노인의 얘기를 사실대로 말해 준 것이다. 호산진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거렸 다. "지금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시나 요." "내가 지옥귀사역을 떠날 때까지는 살아 있었으나 워낙 병세가 깊어 지금 은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소." 관해영의 침중한 목소리에 호산진은 급기야 두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을 흘 리며 흐느끼는 것이었다. "흑흑……, 아버님! 전 그것도 모르 고 그 동안 아버님을 악인이라고 원망 했으니……." "……!" 관해영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될지 몰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었다 순간, 호산진이 두 눈에 살기를 띠 면서 자리를 차고 벌떡 몸을 일으켰 다. "용만후! 이 놈을 당장……." 관해영이 그녀를 막아섰다. "감정으로만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 니요. 내가 복마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손을 써놓고 있으니 호소저는 내 가 가르쳐 준 무공을 부지런히 익혀 용만후에게 직접 복수를 하시오." 호산진이 숨을 씩씩 몰아쉬며 마음 을 진정시켰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 셔서……." 관해영이 적이 안심한 표정으로 품 속에서 나무열쇠를 꺼내 밀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 아버님이 나에 게 준 것인데 난 필요가 없으니 당신 에게 돌려주겠소." 순간, 호산진이 전선을 부르르 떨었 다. "이, 이건……." 관해영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당신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황금옥창의 열쇠라더군!" 관해영이 나무 열쇠를 내밀자 호산 진은 단연 고개를 저었다. "난 받을 수 없어요." "어째서?" "아버님이 이걸 줄 때 분명 날 책임 지라고 했을 거예요." "그, 그게……." "어때요. 내 말이 틀렸나요?" 호산진이 따지듯 덤벼들자 관해영은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호산진이 두 눈을 반짝였다. "어릴 때부터 이 열쇠는 당신의 사 위에게 준다고 아버님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어요."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군!' 관해영은 내심 그녀를 떨쳐 버릴 여 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사실 이 떠올랐다. "호소저! 일이야 어떻게 되었던 당 신은 재앙이 따르는 사람에게 시집 올 생각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오." 그는 호산진이 물어 오면 해와동에 있었던 일들을 대충 얘기해 주고 자신 의 신세를 들려 줄 참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성격이 자유분 방한 호산진이라 할지라도 감히 시집 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허나, 호산진의 대답은 관해영의 상 상을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다. "접근할 명분이 없어서 안달이 날 정도였는데 이젠 조금도 걱정할 필요 가 없어졌어요.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여자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말들을 와르르 쏟아내는 호산진 앞에 서 관해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일은 일생의 중대사이니 천천히 시간을 가지며 해결합시다." 관해영이 슬쩍 발을 빼자 호산진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지옥귀사역에서는 분명 승낙을 했 을 게 아니에요." "그건 그렇소만……." "그럼, 더 이상 긴 말은 필요가 없 어요. 난 아버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 라도 시행하는 효녀이니까요." 관해영은 그야말로 진땀을 흘렸다. '꼼짝달싹 못하게 아예 못을 박는 군!' 관해영은 더 이상 말을 했다가는 꼼 짝 없이 그녀에게 걸려들 것 같아 슬 쩍 말머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구파일방의 정예들은 그동안 얼마나 실력들이 늘었소?" 호산진이 관해영의 내심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일이 천하의 대세에 이 르자 자신의 얘기만 할 수 없어 못마 땅한 얼굴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사이에 몰라보게 강해졌어 요. 구파일방이 생긴 이래 가장 강하 지 않을까 생각돼요." "그대는 어떻다고 보시오?" "대라신공(大羅神功)을 아직 팔성까 지 밖에 익히지 못했어요." 대라신공! 이것은 관해영이 스스로 창안해 그 녀에게 전수해 준 무공이었다. 관해영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을 워낙 좋아해서 그런지 벌써 팔성을 익히다니……. 그 정도면 당금 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그러나 관해영은 겉으로는 추호도 내색하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떠날 참인가요?" "할 일이 많은데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지 않소?" "…….!" 호산진은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젠 저돌적으로 연정(戀情)을 나 누어 보려 했는데…….' 사랑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마 음 졸이며 애태울 때는 자신의 용기 없는 마음이 한스러워 견딜 수가 없으 나 막상 마음을 모질게 먹고 고백이라 도 하려 할 때는 상대는 훌쩍 떠나 버 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호산진의 마음은 갑자기 찬 바람이 몰아치듯 쓸쓸하기만 했다. 관해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참 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靡�."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8 장 (사랑을 넘어선 증오 1 ) 제 38 장 사랑을 넘어선 증오 1. 침실. 여인이라면 한 번만이라도 사내의 품에 안겨 단꿈에 취해 보고 싶은 화 려한 침실이었다. 그러나, 곡주련에게 있어서는 창살 없는 감옥이오, 언젠가는 피보라를 뿌 려야 될 심판의 방인 것이다. 심야(深夜)! 부엉― 부엉―. 초생달 걸린 청청한 소나무에 밤부 엉이가 홀로 앉아 짝 잃은 외로움을 구슬프게 노래하고 있었다. 곡주련은 마치 자신의 가련한 신세 를 대면이라도 하듯 울어대는 밤부엉 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직이 흐느 끼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꿇어앉아 침대에 얼 굴을 묻고 소리 죽여 오열하고 있었 다. "흑흑흑! 관가가, 야속합니다. 제가 비록 더럽게 짓밟힌 몸이라지만……." 폭포수처럼 흐트러진 머릿결이 경련 하는 어깨를 따라 흔들렸다. "삶에 미련이 남아 이제껏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은 아니건만……." 곡주련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의 초생 달을 우러러본다. 초생달에 떠오르는 관해영의 얼굴은 더럽혀진 그녀를 비웃듯 엶은 조소를 띠고 있다. "저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잖아요?" 곡주련의 지금 신세가 적어도 그녀 의 잘못은 아니건만 울고 용서를 빌어 야 함이 여인의 숙명이던가? 양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황촉불 에 반짝 빛났다. "여기까지 오셨으면서도 위혜군만 만나고, 저는 나 몰라라 외면하시다 니……, 야속합니다." 허나, 초생달 속의 관해영은 그저 조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관가가! 언젠가는 절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이해라고? 흐흐……, 역겨워서 더 이상 못 봐주겠군." 나직한 음소와 함께 한 사내가 침상 으로 다가섰다. 사운악은 흉물스런 눈길로 곡주련의 둔부 주위를 훑어보며 빈정거렸다. "곡주련! 청승떨지 마라. 관해영이란 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독한 놈이 야." 곡주련은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말 이 없었다. "……." 사운악은 뭐가 재미있는지 낄낄거리 며 말했다. "너는 내 노리개야! 내 욕정을 받아 내는 요강에 불과해! 그런 너를 관해 영이가 거들떠보기나 할 줄 아느냐?" "……." "천만에 말씀이지. 가래침이나 안 뱉으면 다행일 게야." 곡주련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유치한 자식! 내 소원이 뭔 줄 아 니? 관가가 손에 죽는 거야.' 사운악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옷 을 벗기 시작했다. "조만간 관해영의 시체를 너에게 선 물하지. 그때 시체나마 즐겁게 해주렴. 그럼 네 소원풀이도 될 테고……, 흐 흐! 재미있을 거야." '변태자식!' "그때 나는 옆에서 구경하겠어. 걱 정하지 마라. 시체와의 사랑에 질투할 내가 아니니까!" 사운악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일순, "손대지 마!" 곡주련은 몸을 움츠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라?" 사운악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비틀 었다. 곡주련은 머리채가 통째로 빠져나가 는 듯한 고통에 못 이겨 상체를 일으 켰다. 사운악은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반항할 자존심이 남아 있다 그거냐? 고깃덩어리가 웃기는군." "퉷!" 곡주련은 사운악의 얼굴에 침을 뱉 으며 비웃음을 던졌다. "이까짓 몸뚱아리 마음대로 해! 어 차피 포기한 몸 멋대로 갖고 놀아. 하 지만 이거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둬 라." 사운악은 그녀를 요절내려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참으며 얼굴의 침을 닦 았다. "고분고분한 것보다 반항하는 계집 이 오히려 감칠맛이 나지. 어디 무슨 말인지 지껄여 봐!" 곡주련은 거침없이 말했다. "너는 내 몸을 가졌지만 마음은 빼 앗지 못했어. 하지만……." "그래서?" "관해영은 위혜군의 몸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송두리째 훔 쳐 갔어." "으으!" "여자에 관한 한 사운악, 너는 관해 영에게 명백하게 졌어. 알겠니, 이 패 배자야?" "닥쳐!" 사운악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리지 못 하고 차갑게 소리쳤다. 짝! 짜아악! 사운악은 정신없이 그녀의 뺨을 후 려 갈렸다. 곡주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 올 랐다. 사운악은 그녀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광란에 가까운 폭행……. 이성을 상 실한 사운악의 폭행 앞에 곡주련의 몸 은 고통의 경련을 일으켰다. 퍽! 퍼억! 어느 부위고 가릴 것 없이 소나기처 럼 퍼부어지는 구타. 곡주련은 그러나 한 마디 비명도 토 하지 않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했다.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8 장 (사랑을 넘어선 증오 2 ) 2. "흐흐흐." 사운악은 손을 털며 곡주련을 내려 다보았다. 곡주련의 몸은 아직도 간헐적인 경 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 운악은 불같은 욕정을 느꼈다. 사운악은 그녀를 덥석 안아 침상에 눕히고 거칠게 옷을 찢어 버렸다.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된 곡주련. 사운악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쨌든 몸 하난 좋아. 싫증이 안 난단 말씀이야." 사운악은 혀로 입술을 빨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갔다. 곡주련은 저항하지 않았다 '더러운 놈! 너는 시간(屍姦)하고 있 는 거야. 나는 숨만 쉴 뿐 시체나 다 름없거든.' 허나 사운악의 우악스런 손길에 그 녀의 육체는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 다. '안 돼!' 곡주련이 속으로 안간힘을 쓰며 저 항했지만 그럴수록 몸은 정반대로 사 내를 갈구했다. 더욱이, 사내의 거대한 이물질이 하 체를 유린할 때는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격렬한 쾌감이 온몸을 휘 감았다. 정신마저 몽롱해진다. "……." 마침내 곡주련의 입에서는 들뜬 신 음성이 터져나왔다. 허리를 비틀며 몸으로 울기 시작했 다. 육체와 영혼이 순식간에 분리되는 여자의 속성을 저주하며…… 사운악은 그런 곡주련에게서 변태적인 쾌감을 만끽했다. "흐흐……, 귀여운 계집! 너는 언제 나 처녀로구나." "……." "다른 건 몰라도 엉덩이 하나만큼은 위혜군도 네 발밑일 게야." 사운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갖가 지 해괴한 방법으로 곡주련을 짓밟기 시작했다. 곡주련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운악의 허리 를 끌어안고 발정한 암캐마냥 발광하 던 자신의 모습이 천장에 그려졌다. '나 자신이 저주스럽다.' 사운악은 그녀의 배에서 몸을 일으 키며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배설작업을 하고 나면 기운이 솟 아. 특히 너하고 할 때는 더욱 더 ……." 곡주련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양볼을 타고 눈물만 흘러내렸 다. '이불 밑에 비수를 감춰 놓고 있다. 놈이 나를 유린할 때 쓰기 위해서 ……. 허나 나는 한 번도 비수를 꺼내 지 못했다.' '꺼내기는커녕 비수 따위는 까맣게 잊고 욕정에 몸부림치니, 사운악 말대 로 나는 타고난 화냥년이란 말인가?' 사운악은 갑자기 바보가 된 멍청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멍든 젖무덤을 움 켜쥐었다. "위험한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나도 구하기 힘든 장난감을 망가뜨리 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면서 사운악은 그녀를 돌려 눕 혔다. "개들이 혼례 치르는 거 봤을 테지? 개같이 놀아 보자고!" 다시금 솟구치는 욕정을 풀기 위해 사운악은 그녀의 엉덩이에 붙었다. "지저분한 행동은 그만둬요. 여긴 창녀굴이 아니란 말이에요!"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위혜군이 들 어왔다.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사운악을 밀 어내고 곡주련을 가만히 부둥켜안았 다. "곡언니! 조금만 참아요. 관가가 틀 림없이 곡언니를 구하러 오실 거예 요." 진심 어린 위로였다. 그러나, 곡주련은 불현듯 위혜군에 게서 참을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놔!" 곡주련은 위혜련을 와락 밀쳐내며 소리쳤다. 위혜련은 멍해졌다. "곡언니, 왜……?" 곡주련은 위혜련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내가 왜 네 언니니? 잘난 체 하지 마! 관가가와 맺어졌다고 으시대는 거 야, 뭐야?" "그건 오해……." "듣기 싫어. 너는 나를 비웃고 있어. 사운악의 인형이 된 나를 조롱하며 멸 시하고 있단 말이야." "아니야. 절대로……." 위혜군은 금방이라도 울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운악은 두 소녀의 싸움을 질투와 흥미가 엇갈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 었다. 곡주련은 위혜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해왕도가 공동묘지로 변한 건 모두 네년 때문이야. 뿐만 아니라 넌 내 사 랑마저 도적질해 갔어." "……." "그런 네가 뻔뻔스럽게 누굴 위로하 려 들어." 위혜군은 고개를 떨구었다. 양볼을 타고 수정 같은 눈물이 흘러 내리며 가슴 옷깃을 적셨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위혜군은 목이 매어 더 이상 말을 못했다. 허나, 곡주련의 이성은 마비되어 있 었다. "사운악! 너는 멍청한 놈이야. 결혼 식날 도망간 계집을 그대로 방치해?" 사운악은 어리둥절했다. "그럼 어떡하란 거지?" "나한테 했던 것처럼 해! 강제로 범 하란 말야!" 위혜군은 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곡주련과 사운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운악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 올랐다. "일리가 있군, 그래?" 곡주련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짓밟아 버려. 타락시켜. 나처럼 네 욕정을 받아내는 요강으로 만들란 말 야." "아, 안 돼!" 위혜군은 멈칫멈칫하다가 부리나케 문 밖으로 뛰었다. 허나, "이미 결정 내렸다." 사운악은 가볍게 신형을 날려 위혜 군 앞을 가로막았다. 위혜군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켰다. "설마 나를 범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버님이 아시면……." 사운악이 징그럽게 웃었다. "네 아비도 내 행동을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할 것이다." 사운악은 위혜군을 덥석 안아 들었 다. 그녀는 사력을 다해 반항했다. "놔! 비열한 인간!" 사운악은 침상에 위혜군을 눕힌 후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며 흉물을 떨었 다. "잠시만 참아라. 나중에는 울고 매 달릴 테니까." 위혜군은 발버둥치며 목아프게 외쳤 다. "악마!" 관해영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8 장 (사랑을 넘어선 증오 3 ) 3. 곡주련은 위혜군의 외침에 잠시 정 신을 차렸다. 그녀는 사운악에게 깔려 버둥거리는 위혜군을 보며 불현듯 안 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 저 었다. '내가 왜 막아야 해? 내가 당한 만 큼 저 계집도 당해야 해.' 위혜군은 자신의 몸에 걸쳤던 옷이 하나도 남김없이 떨어져 나가자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저주받을 짐승! 관가가가 너를 죽 일 것이다." 곡주련의 눈동자에 갑자기 핏발이 섰다. "언제부터 관가가야? 나쁜 년!" 곡주련은 위혜군의 입에서 관해영의 이름이 나오자 걷잡을 수 없는 질시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사운악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사운악! 깨끗한 척하는 저 년을 암 캐로 만들어요." 사운악은 곡주련을 돌아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나와 같은 인간이 되어 가는 구나. 오냐, 걱정 마라." 사운악은 말하기가 무섭게 허리를 찍어 눌렀다. 위혜군은 허벅지를 오므리고 필사적 으로 반항했다. 곡주련이 다가서며 느닷없이 허벅지 를 가격했다. 퍽! 위혜군은 갑작스런 통증에 그만 허 벅지를 벌리고 말았다. "이래야만 우리 둘이 공평한 위치가 되는 거야." 그 순간, 사운악의 사내가 위혜군의 비밀지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 "악!" 위혜군은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자 지러지며 전신이 뻣뻣이 굳었다. 사운악은 격렬히 움직이기 시작했 다. 두 사람의 정사를 보고 있던 곡주련 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도 침상에 올라 사운악 에게 달라붙었다. "확인해 줘! 나와 위혜군이 똑같음 을……." 곡주련은 두서없이 뇌까리며 사운악 의 몸에 전신을 비벼 댔다. "흐흐……." 사운악은 곡주련의 행동에 강렬한 욕정을 느끼고 그녀의 몸을 덥석 끌어 안았다. 방 안에선 추악한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운명의 선은 이렇게 어이없이 엇갈 리기 시작했다. 새벽. 아직도 어스름한 땅거미가 깔려 있 는 산길을 누군가 힘없이 오르고 있 었다. 사박 사박―. 다름아닌 위혜군이었다. 갈가리 찢 어져 치부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옷 사이로 드러나는 피부는 온통 멍투성 이었다. 사운악의 변태적인 욕정에 얼마나 시달렸나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 다. 물안개가 깔린 산길을 오르는 위혜 군의 발걸음은 허망하기만 했다. 영혼 을 상실한 목각인형이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정상. 동녘에서 움터 오는 여명의 햇살에 산 밑에 자리잡은 장군부가 떠오르듯 보이고 있었다. 휘이잉! 쌀쌀한 산바람이 위혜군의 찢어진 옷가지를 날려 그녀를 벌거숭이로 만 들었다. 그러나 위혜군은 도무지 감각 이 없었다. "나는 여자의 자격을 상실했어. 오 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몸에 두 사내 가 들어왔어……." 헝클어진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그 녀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허공을 바 라보고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 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건 그 길뿐이야." 위혜군은 죽음을 생각하자 이상한 힘이 솟았다. "가문의 지속적인 권력과 부귀영화 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내에게 딸 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린 아버님. 하지 만,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어요." 위혜군은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아 두려는 듯 얼굴을 덮은 머릿결을 쓸 어 넘겼다. "내가 죽으면 아버님도 슬퍼하실 테니까……." 위혜군은 천천히 벼랑 끝으로 다가 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절벽. 기형적으로 자란 노송 몇 그루만 있을 뿐 칼날 같은 암석들만 보이는 절벽이었다. 위혜군은 지그시 눈을 감 았다. "관가가! 안녕!" 그때였다. "아가씨!" 다급한 외침과 함께 한 중년여인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위혜군은 한쪽 발을 절벽 밑으로 내렸다. '유모! 이 다음에 저승에서 봐요.' 중년여인 유모는 다급히 외쳤다. "아가씨! 소공자님을 생각하셔야 합 니다." 일순,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려던 위 혜군이 멈칫했다. 위혜군은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저 으며 탄식하듯 말했다. "유모! 난 자격이 없어요. 유모가 잘 알아서 하리라 믿어요." 유모는 이십여 장 앞까지 달려오며 헉헉거렸다.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하세요." 위혜군은 돌아서서 물기 어린 음성 으로 뇌까리듯 말했다. "유모가 있으니 걱정 없어요. 다가 오지 말아요." 유모는 멈칫 발걸음을 멈추며 애써 진정시킨 음성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소공자께서 큰일이에요." 유모는 평상시처럼 얘기했다. "글쎄, 소공자께서 설사를 하시는 데……." 일순, 위혜군이 다급하게 물었다. "설사라니? 언제부터 설사를 하는 거예요." "이틀 전부터…… 젖이 맞지 않아 서 탈이 난 모양이에요. 거기다가 열 까지 오르고……." "그걸 지금 얘기하면 어떡해요." 위혜군은 산 아래로 부리나케 뛰어 가기 시작했다. 유모는 점차 멀어져 가는 위혜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탄 식했다. "사는 게 뭔지……." 위혜군의 투신자살을 막은 소공자. 과연 그는 누구인가? 痼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9 장 (홍등일번지 1 ) 제 39 장 홍등일번지(紅燈一番地) 1. 금륭 진회하와 더불어 천하 이대 (二大) 색향(色鄕)으로 명성을 날리 고 있는 절강성(浙江省) 항주. 홍등일번지(紅燈一番地). 떠돌이 보따리 장사치나 날품팔이 들에게 처갓집보다 좋은 곳이다. 엽전 몇 닢에 목구멍 때를 벗길 수 있으며 말만 잘하면 푸짐한 여자의 살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홍등일번 지의 밤이다. 삐쩍 마른 당나귀가 뼈관절을 와작 와작거리며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노 인을 싣고 홍등일번지로 들어섰다. 홍등일번지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 사내 세 명이 문 밖에서 서성거리 고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안에서는 불협화음으로 어우 러지는 헐떡임이 들려오고 있었다. 사내 한 명이 가래침을 콱 뱉으며 투덜거렸다. "염병할! 들어간 지가 세 시간이 넘었는 데도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무 슨 동굴 탐험이 이렇게 길어?" 다른 사내가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잔뜩 화가 난 음성으로 씨부렁거렸 다. "이런 빌어먹을 놈 봤나? 누구 뿌 리 빠지는 걸 보고 싶어 늑장을 부리 나, 원!" 나머지 한 사내는 궁시렁궁시렁 거 리다가 냅다 고함을 쳤다. "여보쇼! 밑천 작작 뽑고 그만 나 오쇼!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 줘야 지, 혼자 전세 냈소?" "지랄 법석들 떨고 있네." 한참 허리 공사를 하던 사내가 못 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사내의 직업은 마부. 온몸의 근육이 울퉁불퉁 움직이며 아래에 깔린 창녀를 아예 요절내고 있었다. 저녁 한끼 값을 투자한 만큼 밑천 을 뽑으려는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입에서는 어리굴젓 냄새가 나는데도 도무지 끝낼 줄 몰랐다. 창녀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새는 천장은 곰팡이로 성한 곳이 없었다. 무표정한 창녀. 그러나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연신 야릇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수컷 찾아 헤매는 발정한 암캐처럼 손님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 방 옆에 붙어 있는 또 다른 방. 삐쩍 마른 당나귀를 타고 온 늙은 이가 나무로 대충 짜 맞춘 침상에 누 워 있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호광이었다. 호광은 예전보다 더욱 깊은 병이 들었는지 얼굴이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 허나, 그의 눈동자는 생기에 넘쳐 있었다. 그것은 옆에서 지켜보는 관해영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관해영은 호광의 앙상한 손목을 잡 고 한참 동안 진맥한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심화와 홍살폐혈수의 독기(毒氣) 가 신경을 마비시키고 뼈를 연약하 게 만들어 신(身)과 기(氣)를 허약하 게 만들었습니다만 아직 뇌까지는 침 투하지 않았으니 회복은 시간 문제입 니다." 호광은 주름진 눈을 깜박거리며 담 담히 말했다. "삶에 그다지 미련은 없네. 살아 생전 바깥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니……." 관해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 다. "용만후, 그 자와 겨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용만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뺏은 다음 절망감 속에서 서서히 죽게 하는 겁니다." 호광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번갯 불 같은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용만후! 그 놈은 무공이라면 몰라 도 다른 면에서는 내 상대가 안 돼. 특히 상전(商戰)에서는 말이야." 관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흑전 상련을 밑천으로 한다면 더욱 그렇습 니다." "흐음!" 호광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생각 에 잠겼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를 지옥귀사역에서 어떻게 꺼내 왔는가?" 관해영은 씽긋 미소지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지 않습니 까? 특히 지옥귀사역 죄수들을 관장 하는 놈들에게는 즉효약 아닙니까?" 호광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가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야 릇한 신음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관해영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여긴 홍등일번지입니다." "그럼 저 소리는……?" "안전과 비밀이 보장되기에는 여기 보다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에…… 이해하십시오." 호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해는 무슨……, 그러고 보 니 저 소리는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을 대변하는 소리였구만!" "어르신네도 이런 곳을 와 보셨습 니까?" "처음 총각 딱지를 뗀 곳이 바로 이런 곳이었지. 그런데……." 호광은 짐짓 눈을 부라렸다. "자넨 장인한테 별 걸 다 물어 보 는군?" "예?"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봐 주겠네. 하지만 다음부터는 장인과 사위간의 예절을 지키게." 관해영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역시 노련한 생각답다. 없는 건수 만들어 호산진과 나와의 관계를 새삼 강조하는군.' 호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 다. "그래 산진이는 만나 보았는가?" "만나는 보았습니다만 대단한 말괄 량이더군요." "그건 내 책임이 아닐세. 자네 하 기에 달려 있는 거야." "저한테 말입니까?" "그렇지." 호광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 다. "자네, 산진이 치마는 벗겨 보았는 가?" 관해영은 호광의 직선적인 물음에 일순간 멍해졌다. "……." 호광은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 다. "당연한 말에 얼굴이 붉어지면 정 직하지 못하다는 증거일세. 남녀 사 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 관해영은 더 이상 말상대를 했다가 는 자기만 손해라는 생각에 입을 다 물었다. 그때였다. 관해영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9 장 (홍등일번지 2 ) 2. "아버님!" 호산진이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초췌하 기 이를 데 없는 호광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호광은 그녀를 향해 힘들게 손을 들었다. "녀석, 잘 있었느냐?" "흑!" 호산진은 울음을 터뜨리며 호광의 품에 뛰어들었다. "아버님! 용서하세요. 전 아버님이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고생하시는 아 버님을 구출할 생각도 않고……." 호광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지 네 잘못은 하나도 없느니라. 오히려 마 음의 상처를 준 이 아비가 미안하구 나." 호산진은 마구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흑흑……." 관해영은 부녀지간의 뜨거운 상봉 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코끝이 찡해졌 다. '내 뿌리는 어디일까?' 혈육의 정을 느껴 보지 못한 관해 영. 그는 날 때부터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라도 부모를 만나 응석을 부려 보 고 싶었다. 그로선 지금 호산진의 신세가 못내 부러울 뿐이었다. 그때, 호광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 이 들려왔다. "그래, 아비가 찍은 사윗감은 마 음에 드느냐?" 호산진이 볼멘 음성으로 투덜거리 듯 말했다. "순전히 얼굴만 반질반질한 색마예 요. 죽자살자 하는 계집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니까요, 글쎄!" "그래?" 호광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문제성이 농후 한 사위를 골랐구만. 하지만 어떡하 냐? 이미 정해 버렸으니 네가 가르 쳐 가며 살아라." 호산진은 심각하게 말했다.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책임 지겠어요. 뭐, 말로 안 되면 패서라고 버릇을 잡아야죠." 관해영은 어이가 없었다. '부녀지간이 한 통속이 되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군. 잘못하다 가는 엄청 시하에서 평생 허리 한 번 못 피고 살겠는데!' 호산진이 관해영에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이봐요?" "……?" "어디 장소가 없어서 아버님을 이 런 지저분한 곳에 모셨어요?" "이유가 있어서……." 관해영이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가 발칵 화를 냈다. "이유는 무슨 얼어죽을 이유예요. 당신은 다 나쁜데 특히 변명하는 버 릇이 더 나빠요.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고생한 줄이나 알아요?" "고생?" "그저 치마만 둘렀다 하면 침이나 질질 흘리는 게 사내란 늑대들이지 만……." 관해영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 다. '오늘 사내 값어치 도매급으로 타 락하는군.' "여자 찾아온 늑대들이 글쎄 나한 테까지 치근덕거리지 뭐예요. 치마 한 번 벗는데 얼마냐 부터 엉덩이 굴 리는 데 얼마……." 호산진은 자신의 말이 약간 지나쳤 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얼버무리며 톡 쏘아붙였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되겠어 요? 알 만한 사람이 일 처리가 이게 뭐예요?" 관해영은 입을 닫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알 만하다고? 무슨 알인지 더럽게 크군.' 호광이 끼여들었다. "산진아! 네가 그만 참아라. 남편 기를 너무 죽이면 출세를 못하는 법 이니라." "하긴 그래요. 저 치가 출세 못하 면 순전히 나만 억울하니까." '아무리 내 딸이지만 치켜 주니까 끝을 모르는구나.' 호광은 내심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해영, 이번에 내 생애에 있어 가 장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네." 관해영은 호광의 음성이 진지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어떤 계획이십니까?" 호광의 눈동자에 신광(神光)이 번 뜩거렸다. "대륙금사를 다시 되찾음은 물론 그 기반을 이용해서 사대벌왕의 세력 붕괴에 힘이 되고 싶네." "그러면 오죽 좋겠습니까?" "내게 어느 정도 자신 있는 계획이 있네." "믿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체력 회 복에 주력할 때입니다." 관해영은 호광의 손을 지그시 움켜 쥐었다. "어르신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곳 홍등일번지는 아시다시피 흑전 상련이 경영하는 곳, 안심하시고 치 료하십시오." "고맙네!"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엔 끈끈한 정 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풍운을 잉태한 악수이기도 했다. "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39 장 (홍등일번지 3 ) 3. 관해영은 호광의 곁에 믿을 만한 인물을 배치해 놓고 길을 나섰다. 호산진은 호광의 옆에 있을 때와는 달리 얌전히 관해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는 시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사기 위 해 굶주린 사내들은 이 골목 저 골목 을 헤매고 있었다. 호산진은 구토할 듯한 표정을 지었 다. "뭐가 좋은 게 있다고 잠들 안 자 고 헤매는지, 쯧쯧! 저것들 어미도 아들 낳았다고 좋아라 미역국 먹었겠 지?" 관해영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 다. '사대벌왕의 뒤에 구린 냄새가 풍 겨! 어쨌거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내 최종 목적은 해왕도 형제들 의 복수와 천하 제일인이라는 등세욱 을 꺾는 데 있다.' 호산진은 관해영이 들으라고 쫑알 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저 늑대들은 정직 한 거야.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잖 아. 거기에 비하면 누구는 뒤로 호박 씨 까는 능구렁이야." 누구? "뒤로는 싫다는 여자도 뒤통수 치 면서 좋다는 여자를 굳이 마다 하는 이유가 뭐야?" 관해영은 고소를 머금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건수 잡히면 곤란하다.' 호산진은 내빼듯 걸어가는 관해영 을 보자 눈꼬리를 치켜 떴다. '목숨보다 귀중한 여자 자존심까지 버리고 구걸하듯 하니까 인간 같지가 않은가?' "야, 날강도야! " 새벽녘에 돌연히 터져나온 여자의 앙칼진 외침. 일순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머니에 먼지밖에 없어 할 일 없 이 서성이던 사내들과 동이 트기 전 에 하나라도 더 잡아 긁어 내야겠다 고 골목길에 서성이던 열린 여자들이 었다. 졸지에 관해영과 호산진은 구경거 리가 되었다. 허나, 호산진은 야릇한 미소를 지 으며 짐짓 성난 음성으로 고함을 질 렀다. "이 벼락맞아 뒈질 놈아! 낯짝만 반반하면 장땡이냐? 얼마나 잘 살려 고 이 불쌍한 년 등쳐먹고 사라지려 는 거야?" 관해영은 일시간 할말을 찾지 못했 다. '왜 이러지, 밤귀신이 씌었나?' 구경꾼들 중에 사내들 모두의 눈알 이 툭 불거져 나왔다. '이, 이런 시궁창에 저런 선녀가 있었다니?' '십 년째 이곳 단골인 내가 한 번 도 보지 못하다니? 아무리 떠돌이 계집들이라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지 만 이건 너무 속상한데?' 호산진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 거렸다. "이놈아! 너도 찢어진 입이 있으니 말은 할 줄 알 게다. 어디 말 좀 해 봐!" "……." "일만 잘 되면 호강시켜 주겠다고 내게서 뜯어 간 돈이 지금까지 얼만 줄이나 아니?" "산진이, 지금 무슨 말을……." "흥! 아직 내 이름은 까먹지 않았 구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 좀 해 봐!" "무슨……." "나한테 등쳐 간 돈이 무슨 돈인 줄 알지? 밤이고 낮이고 사내들 요 강 노릇해서 번 돈이야. 그걸 야금야 금 뜯어 가고 나서 차버리려고 그 래?"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지저분한 제비구만." "제비 측에도 못 끼어. 피 빨아먹 는 거머리지." "거머리보다 흡혈귀지." 특히, 거리의 여자들은 분노를 금 치 못했다. 누구나 한 번씩은 그런 쓰라린 과 거가 있었고 현재도 있기 때문이다. "저런 놈은 사타구니를 못 쓰게 불 을 확 싸질러 버려야 돼." "저 여자만 당한 게 아닐 거야. 얼 마나 많은 여자를 피눈물 흘리게 했 을까?" 여차하면 실력 행사로 나올 판국이 었다. "버릇을 고쳐 줘야 돼!" "계집 엉덩이가 돈 벌어 주는 기계 로 생각하는 저런 놈은 이 자리에서 피곤죽을 만들어야 돼!" "작살냅시다!" 호산진은 한 술 더 떴다.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 곡을 했다. "이놈아! 흑흑! 엉엉! 천벌이 두렵 지도 않니? 떠날 땐 떠나더라도 얘 기나 좀 하자는 데 야멸차게 뿌리치 고 가려 하다니." 마침내 거리의 여자들이 관해영에 게 달라붙었다. "아무리 양심을 전당포에 맡겼기로 서니 잠시 얘기 좀 하자는 데 거절을 해?" "거지 항문에서 콩나물 빼먹을 놈 아! 빨리 결정해. 얘기라도 할 거야, 그냥 갈 거야?" 관해영은 어이도 없고 난감하기도 했다. "얘기하는 것이 뭐 어렵겠소만 ……." 여자들은 우르르 관해영을 끌고 어 느 빈 골방에 처넣었다. 호산진도 함께 밀어 넣어주며 독려 를 했다. "이미 갖다 바친 엽전은 찾을 수 없어. 조금이라도 밑천 뽑으려면 이 곳에 붙여 놓고 부려먹는 길 뿐이 야." "우리 같은 여자들은 애초에 사내 들에게 정을 주면 안 되는 거야. 막 판이라 생각 말고 잘 해봐." "우리는 그저 믿는 건 엉덩이밖에 없어. 알았지?" 호산진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고개 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언니들……." 동변상련, 인생의 밑바닥에서 아무 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자들, 있는 자들에게서는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정(情)이었다. 그녀들은 관해영과 호산진이 들어 있는 골방을 빙 둘러싸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냥 줄행랑을 놓으면 우리 죽고 너 뒈지는 거야." "마음을 돌려요. 우리 같은 여자도 얘기 낳고 살림 잘 할 수 있어요." 관해영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곳을 나가는 건 쉽다. 하지만 그러다가 저 가련한 여인들이 다칠 수도 있고, 도대체 이 불여우가 무슨 속셈으로……?' 관해영은 울컥 치미는 화에 빙글 돌아섰다. "산진! 당신……." 무언가 물어 보려던 관해영의 입이 벌어진 채 굳어 버렸다. 갑자기 바보가 된 듯……. 관해영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0 장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점 1 ) 제 40 장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점 1. 어느새 호산진은 실오라기 하나 걸 치지 않은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옥(玉)으로 깎은 듯한 여체. 거친 행동과 말투에 자칫 여자임을 잊게끔 만드는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 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관해영은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더 듬거렸다. "점잖지 못하오. 소저, 어서 옷을 입으시오." 호산진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살며 시 다가섰다. "뭐라고 욕하시고 비웃으셔도 감수 하겠어요. 제가 색정(色情)을 밝히는 탕녀라서가 아니에요." "……." "무림인이라면 모두 그렇지만 특 히 당신은 항상 사선(死線)을 넘으시 는 분. 사대벌왕을 상대하시는 당신 을 사랑한 게 죄라면 죄……." "소저!" "마음을 주면 이미 한 사내에게 순 결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일. 내일 을 모르는 인간인지라 이 몸에 정표 를 남겨 달라는 간절한 소원일 뿐이 에요." 호산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다소 곳이 절을 올렸다. "지아비를 하늘같이 모시며 칠거지 악을 범하지 않는 정숙한 여인이 될 것이오니 부디 거절치 마시어요." 희미한 등불 아래 자신의 모든 것 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스스로를 바 치겠다는 호산진. 여자의 숙명인 순종의 길을 걷겠다 는 호산진은 관해영 면전에 절을 올 린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관해영은 마주 앉으며 그녀의 어깨 를 감싸 안았다. "어리석구료.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다니……." 호산진은 고개를 들어 그를 우러러 보았다. 눈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에 기쁨이 어렸다. "사랑은 묘한 것, 제 뜻대로 당신 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지요. 당신의 종이 되라는……." "소저!" "흑!" 호산진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관해 영의 품에 안겼다. 관해영과 호산진은 한 몸이 되어 바닥에 뒹굴었다. 달아오른 여체에서 불이 토해지고 사내의 강인한 육체는 정복의 길로 들어섰다. 정복과 복종! 두 남녀는 어느 순간 천지만물의 존재를 망각하고 오로지 육체의 열락 에 함몰되었다.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예의를 지킨 다는 것은 위장에 나쁘다고 음식에 소금 치지 않는 격, 관해영은 체면 몰수하고 마음껏 노를 저었다. 호산진은 거친 파도에 시달리며 살 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어느덧 창 밖이 훤해졌다. 깜박 잠이 들었던 관해영과 호산진 이 눈을 떴다. 호산진은 살며시 옷을 입고 일어났 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보며 머리 를 매만지던 호산진이 돌아서며 느닷 없이 소리쳤다. "뭘 하는 거예요? 어서 일어나서 손발 씻고 마누라 먹여 살릴 궁리를 해야죠. 그렇게 게을러서 이 험한 세 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던 관 해영은 깜짝 놀라며 후닥닥 일어났 다. "지금 내게 한 소리요?" 호산진은 코웃음을 날렸다. "그럼 이 방에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요? 혹시 일도 안 하고 장인 덕 보겠다는 천박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거야 물론 아니지만 당신이 말 하길, 내 종이 되고 싶고 칠거지악이 어쩌고……. 아, 뭐 꼭 그러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호산진은 눈을 흘겼다. "정상에 깃발 꽂게 하려면 무슨 말 을 못할까, 일단 도장 찍었으니까 이 제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못해요." '이거 완전히 거꾸로 된 상황이네.' "우선 줄줄이 달고 다니는 계집들 부터 처리하세요. 맘 약해서 못하면 내가 대신 처분해 주겠어요." 관해영은 속이 쓰렸다. '내가 미쳤지. 계집처럼 분위기에 껌벅 가서…….' 호산진은 질긴 고기를 우물거리고 있는 듯한 관해영을 보다가 갑자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 마 세요. 군것질 정도는 시켜 드릴 테니 까." 관해영은 말이 없었다. '네 마음대로 나를 휘두르지는 못 할 것이다. 흑란, 타미, 아몽사 등도 너 못지 않거든.' 관해영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사이에 홍등일번지는 알게 모르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거리의 여자 천 명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군가의 엄격하고 까다로움 심사 를 거친 후 모종의 교육을 받기 위해 서……. 그러나 홍등일번지를 애용하는 손 님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없어 진 만큼 보충되었고 이불과 여자는 새 것이 좋은 거니까. 두두두두―. 이십여 기의 기마대가 한 대의 마 차를 호위하며 산길을 치달리고 있었 다. 마차는 창문 하나 없고 문 역시 굵 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으며 지붕에는 커다란 사각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 다. 만리표국! 대륙금사 산하의 표국. 막강한 배경과 신속, 그리고 정확 한 책임보장에 기치를 내건 만리표국 은 해마다 엄청난 부(富)를 쌓고 있 었다. 두두두두―. 만리표국의 기마대는 가파른 산길 을 돌아 초원을 향한 내리막길을 달 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려왔 다. 구르르릉! 순간, 앞으로 치달리던 기마대 위 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억!" "바위가 굴러 온다!" 집채만한 바윗덩어리가 무서운 속 도로 굴러오고 있었다. 가파른 비탈길이라 가속도가 붙은 바윗덩어리는 순식간에 기마대 후미 까지 덮쳐 왔다. 만리표국 표사들은 정신없이 채찍 을 휘둘렀다. "이럇!" "아차하면 모두가 황천행이다!" 짐승인 말도 위기를 느꼈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치달렸다. 내리막 길을 내려 막 초원으로 들 어서려 할 때였다. 탁! 탁! 갑자기 말들이 고꾸라지며 쓰러졌 다. 누군가가 쳐놓은 밧줄에 다리가 걸 린 것이었다. 꽈르르릉! 그와 동시에 집채만한 바위가 말과 무사들을 깔아뭉개며 지나갔다. "크아악" "킥!" 피떡이 따로 없었다. 찰나 지간에 일어난 참변이었다. 그 참변에 마차는 산산이 부서져 나갔고 갖가지 보석들이 산지 사방으 로 흩어졌다. "으으……." 간신히 목숨을 건진 다섯 명의 만 리표국 표사들은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신음부터 흘렸다. "이건 분명 어떤 놈의 수작이다." "어떤 놈들이냐? 나서라!" 표사들은 사방을 돌아보며 악을 썼 다. 그러자 다소 거만한 듯한 음성과 함께 한 줄기 인영이 나타났다. "안 그래도 뒷마무리를 하려고 나 설 참이었다." 전신을 흰 붕대로 칭칭 감고 눈만 빼꼼 내놓은 괴인이었다. 표사들은 상대방이 한 명이라 일단 자신감을 가지며 냉갈차게 소리쳤다. "웬 놈이냐?" "만리표국의 표물을 강탈하려 들다 니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괴인은 허리에 멘 백색 검을 뽑으 며 뇌까리듯 말했다. "염라대왕 앞에 가면 할 얘기가 많 을 것이니 그때를 대비해서 말을 아 껴야지." 다섯 명의 표사들은 말로써 해결된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표사들은 서로 눈치를 교환한 뒤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십 여장 허공 위에서 각기 병기를 뽑음과 동시에 일제히 괴인을 덮쳤 다. 개개인의 무공 수위도 그리 녹녹한 편도 아니거니와 오랜 세월 동안 함 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된 합 격술. 츠리리릿! 파파파파팍! 다섯 방위에서 빗살처럼 공세가 퍼 부어졌다. 그런데도, 괴인은 여전히 검을 내 려뜨린 채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다섯 줄기 공세가 막 머리를 다섯 등분 사이좋게 나누려 할 때였다. 자가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0 장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점 2 ) 2. 번쩍! 한 줄기 우윳빛 빛줄기가 한차례 원을 그리는가 싶었다. 표사들은 자신의 몸이 괴인의 검이 만들어 낸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 느꼈다. 가슴이 시원하다고도 느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섯 명의 표사들은 땅바닥에 고꾸 라졌다. 비명도 없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저승행 마차를 탄 것이다. 괴인은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관해영이란 사람을 적으로 둔 놈 의 수하였다는 건 더럽게도 재수없는 것이지……." 허공에는 어느새 까마귀떼들이 먹 이를 찾아 날아와 있었다. 탕! "뭐라고?" 예순의 나이에도 들소처럼 당찬 체 격의 황의노인이 탁자를 내리치며 호 통을 터뜨렸다. 태행무적도(太行無敵刀) 나웅(羅 雄)! 만리표국의 국주인 나웅은 열화 같 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근 두 달 사이에 만리표국 산하 서른 두 개 지부에서 두세 건씩 사건 이 발생했다고?" 나웅의 양편으로 도열해 있는 핵심 수하들은 그저 숨소리만 죽이고 있었 다. '죽었어!' '누군가 나서서 뭐라 변명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나웅의 고리만한 눈에서 냉광(冷 光)이 폭사되었다. "그런 연속적인 사건이 터졌는데 이제 와서 보고하는 이유는 뭐냐?" "……." "왜들 말이 없느냐?" 그제서야, 좌측 선두에 서서 식은 땀을 뻘뻘 흘리던 수석 표두 귀견수 왕유가 입을 더듬거렸다. "근자에 들어 국주께서 시간이 없 으신 듯해서, 얼굴 뵙기도 두 달만에 처음이고……." 나웅은 무조건 화만 냈다. "그걸 이유라고 지껄이느냐?" 이렇게 목청은 돋우었지만 사실상 나웅으로서는 수하들에게 할 말이 없 었다. 두 달 전에 우연히 만난 교궁(橋 宮)이란 여인에게 흠뻑 빠져 아예 바 깥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웅은 그런 생각 때문인지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사고 보상액은 어느 정도냐?" 표두들은 그 물음에 전신을 떨며 말을 하지 못했다. 나웅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사고를 냈으면 책임을 쳐야 할 게 아니냐? 왕유 네가 말해라." 왕유는 자신이 지목되자 별 수 없 이 입을 열었다. "황금으로 따져서, 그러니까……." "그래서?" "백이십만 냥 조금 못 됩니다. 잘 하면 백만 냥으로 깎을 수도 있 고……." 나웅은 말이 없었다. 말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만리표국 전 재산을 통틀어도 십 오만 냥 정도밖에 안 되는데……. 끝 났어!' 왕유는 내친 김이라 용기를 내서 말했다. "처음 사고 났을 때 보상액은 황금 천냥이었습니다. 사실 대단한 액수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커다란 물품 수송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 "대가가 황금 천이백 냥 정도로써 사고 보상액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 는 액수였습니다. 물론 분실시에는 그에 비해 엄청난 보상액이 요구되지 만 또다시 사고나리라고는 전혀 예상 치 못했습니다." "……." "그런데 또 사고를 당하고 그 보상 액만큼 수송 의뢰가 들어오고, 그리 고는 또 사고가 나고……. 급기야는 백이십만 냥이라는 거액으로 불어나 게 되었습니다." 나웅은 힘없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 들었다. "어리석은 것들, 그 따위 조작에 넘어가다니……. 하지만, 나 하나 책 임이고 가면 그만이겠지……." "그게, 저……." 왕유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 다. "죽여 주십시오, 국주님. 인장(印 章)을 도용하여 대륙금사를 보증인으 로 책정했습니다." "헉!" 나웅은 갑자기 헛바람을 터뜨리며 빙그르 돌며 쓰러졌다. 멀어지는 뇌리 속에 자신의 육체를 불처럼 달구던 교궁의 요염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웅은 미처 몰랐으리라. 교궁이란 여인이 석달 전만 해도 엽전 석 냥이면 마음대로 걸터앉을 수 있었던 홍등일번지의 여자였음 을……. 만상전장(萬象錢莊). 대륙금사의 중추적 기둥인 만상전 장은 원하기만 하면 염라대왕 그것도 사고 팔 수가 있다. 만상전장이 있는 사방 오백여 리는 항상 돈 냄새가 진동한다. 그런데, "으으!" 만상전장주 황금탑왕 전노야(全老 爺)가 태사의에 앉아 신음을 터뜨리 고 있었다. 하마와 버금가는 몸통이 우스꽝스 럽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만상전장의 재산 십분의 일을 투 자하여 매입한 황실 전답 문서가 가 짜라고?"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전노야의 얼 굴이 하얗게 떠 있었다. "거금을 들여 사들인 보석들이 모 두 가짜고 할인해 준 어음도 몽땅 가 짜라니……." 전노야는 버석버석 타들어 가는 입 술에 침을 바르며 냅다 고함을 터뜨 렸다. "감정사 추원사를 당장 끌고 와 라!" 그 말에, 언제 자신한테 불똥이 튈 까 노심초사하던 총관 마도치는 화들 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추원은 어젯밤 자신의 침실에서 자결했습니다." "뭐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장주님 앞 으로 한 통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마도치는 품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전노야에게 바쳤다. 전노야는 뺏다시피 서찰을 받아 펼 쳐보았다. <장주님 귀전(貴前). 이십여 년 동안 장주님 그늘 아래 에서 살아 온 저로서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근 한 달 사이에 제 가 감정한 것은 모두 가짜였습니다. 제 사리사욕을 위해 가짜를 진짜라 감정한 것은 아닙니다. 한달 전 여인 한 명을 만났습니 다. 난생 처음 대하는 정숙한 귀부인 이었으며, 밤에는 뼈골을 녹이는 요 화(妖花)였습니다. 그러나, 이제사 깨달은 건 그녀의 고고한 귀품은 가면이었으며 저를 옭아매기 위한 함 정이었습니다. 가짜를 진짜라 둔갑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 은 그녀의 사주였습니다. 어떠한 물건의 진부도 정확히 감 별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저도 여인만큼 감정하지 못 했습니다. 책임을 통감하며 스스로 자결 을…….> 와작! "네 놈은 뒈지면 그만이겠지만 나 는 어떡하란 말이냐?" 전노야는 서찰을 와락 움켜쥐며 독 백처럼 뇌까렸다. 소리칠 힘도 남아 있질 않았다. 상황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회복하 기엔 불가능한 한계선을 넘은 상태였 다. 전노야는 멍한 상태에서 일어났다. 흘러간 인생이 아련히 떠오른다. 대륙금사에 투신하여 오늘날까지 살얼음판을 걸으며 언제 닥쳐올지 모 를 파국의 불안에 기를 쓰고 여체와 술을 탐닉했던 지난 날……. 전노야는 두어 걸음 떼어놓다 휘청 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졌 다. 그리고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다. 대륙금사는 팔 다리가 떨어진 거대 한 몸뚱아리만 남은 괴물로 변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까물어치 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반해 새롭게 등장한 흑전상련 은 급격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흑전상련은 뭐든지 대륙금사보다 싸게 팔았으며 비싸게 사들였다. 흑전상련의 물귀신 작전에 가뜩이 나 휘청거리는 대륙금사는 풍지박산 날 지경에 이르렀다. 실로 노련한 호광의 상술과 관해영 의 신속불란한 행동이 어우러져 대륙 금사의 초토화는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관해영과 호광은 이미 대 륙금사에는 신경을 끊고 있었다. 좀더 가공한 음모를 진행시키며 의 미심장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천하를 담아 기울이는 술맛은 과 연 어떠할까? 자가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1 장 (실타래 끝을 잡고 있는 그림자 1 ) 제 41 장 실타래 끝을 잡고 있는 그림자 1. 개봉부(開封府)! 관해영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청성 산을 떠난 지 나흘 후 정오 무렵이었 다. 그는 북적이는 인파들 사이를 누비 며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륙금사의 총단은 이곳 개봉부에 있다. 또한 복마성도 개봉부에서 멀 지 않은 상원평에 위치해 있으니 나 로서는 잘 된 일이다.' 관해영! 그는 대륙금사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주작대로를 따라 구중궁궐 같은 장 원(莊院)들을 지나면 평민들이 살고 있는 허름한 집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만적금장(萬積 金莊)이란 현판이 걸린 전장(錢莊) 하나가 제법 반듯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관해영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 만적금장 안으로 망설임없이 발을 들 여놓았다. 넓은 대전 안은 깨끗하기 이를 데 없었고 한가운데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팔선탁자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 다. 관해영이 안으로 들어서자 점잖게 보이는 중년인 한 명이 걸어오며 공 손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습 니까?" 관해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잔뜩 거 드름을 피웠다. "물건을 좀 사려고 왔네." 중년인은 관해영의 태도가 심히 못 마땅했음인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이런 종류의 인물을 어떤 식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더욱 공손한 목소리 로 물었다. "어떤 물건을 사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나, 관해영은 시종일관 그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주인을 좀 만나 보아야겠네." "제가 관리를 맡고 있으니 웬만하 면……." "난 자잘한 일에는 신경을 쓰는 사 람이 아니야." "대체 얼마 정도의 물건을…….?" "황금 백만 냥 가량!" 관해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자 중년인은 귀신 본 사람처럼 입 을 떡 벌리고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 했다. '내, 내 평생 이런 거액의 거래는 처음이다.' 그는 좀 전에 막 폭발하려던 노기 를 억눌러 참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며 관해영을 향해 더할 수 없 이 깍듯한 태도를 취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오. 장주님 에게 연락을 하겠습니다." 이어 그는 내실을 향해 손뼉을 쳤 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지 극히 아름다운 여인이 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사뿐히 걸어왔다. 중년사내가 간사한 웃음을 흘렸다. "무료하신 시간에 이 아이와 잠시 환담을 나누십시오. 그동안 제가 장 주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그는 여인을 향해 눈을 껌벅인 다 음 부리나케 내실 안으로 사라졌다. 관해영은 여인이 가져온 찻잔을 집 어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오백 냥의 미끼로 대륙금사와 복 마성은 완전히 궤멸되는 것이다.' 이때 여인은 야릇한 시선으로 관해 영을 바라보다가 색정적인 미소를 띠 며 말을 건넸다. "날씨가 덥죠?" 관해영이 느끼기에는 결코 더운 날 씨가 아니었다. 눈을 돌려 창 밖을 보니 누렇게 변색된 정원수의 잎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매운데 덥다니, 이 여인은 추위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 로군!' 그가 이렇게 생각할 때 여인은 앞 단추 두 개를 풀며 손바람을 일으켜 정말 덥다는 듯이 더위를 식히고 있 었다. 여인이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관 해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저씨, 참 미남이다." 관해영이 선웃음을 흘렸다.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더군!" "훗! 아저씬 말도 잘 한다. 많이 놀 아 본 것 같애." "집 한 채 값은 날렸지." "집도 집 나름이지 뭐!" "내 하루 술값이 은자 일만 냥이 니, 집 크기야 네가 상상해 보아라." 여자가 두 눈을 동그렇게 치떴다. "그럼, 태산만 하겠네?" 관해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생긴 건 그럴 듯하다만, 배운 게 없어 천박하군!' 여자가 바짝 다가앉으며 조심스런 눈길로 내실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저씨! 나 데리고 가지 않을래?" "내가 널 데리고 가서 무엇에 쓰려 고?" "에이! 난 뭐든지 잘 한단 말이야." 관해영이 억지로 난봉꾼 행세를 하 며 심술궂게 물었다. "뭘 제일 잘 하느냐?" "밤일." "뭐야?" 관해영이 그녀의 노골적인 말에 헛 기침을 터뜨릴 때였다. 내실 쪽에서부터 중년인이 부리나 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관해영 앞에 이르러서는 일 부러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보이며 공 손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장주님께서 안으로 모셔 오시랍니 다." "알았소." 관해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여 인이 중년인 모르게 슬쩍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관해영은 내심 기가 막혔으나 모른 체하고 중년인을 따라 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극히 호화스런 내전(內殿). 오순 가량의 노인이 관해영을 맞이 하고 있었다. 가슴까지 늘어진 시커먼 수염, 날 카롭기 이를 데 없는 두 눈에서는 상 인다운 교활함이 번뜩거리고 있었다. 그는 태사의에서 일어서며 관해영 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본인은 대륙금사의 장주를 맡고 있는 신양모(申陽謀)라고 하오." 관해영 역시 예의를 갖춰 마주 포 권으로 답했다. "본인은 평수해(平秀海)라고 하는 사람이오." 인사가 끝나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평대인께서는 황금 백만 냥의 물 건을 사러 오셨다구요?" 관해영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헌데 대륙금사에 그만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겠구료." 신양모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대륙금사에는 없는 물건 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대체 어떤 물건을 원하십니까?" "사람이오." 신양모의 신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는 한편 관해영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사람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요?" "약 만 명의 무사가 필요하오. 고 용무사를 사려고 이곳에 온 것이오." "용병을 원하신단 말입니까?" "그렇소. 난 남지나의 소국(小國)에 서 왔소이다. 알다시피 남지나에는 항시 국지전이 끊이지 않는데 우린 지금 강한 적의 위협을 받아 망국의 위기에 놓여 있소. 백만 냥이 모자란 다면 황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가 있소." "사람을 취급해 본 적은 없는 데……." 신양모가 난처해 하자 관해영은 노 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안 되면 할 수 없군. 흑전상련으 로 가는 수밖에……." 순간, 신양모가 깜짝 놀라 일어서 는 관해영을 꿇어앉히고 황급히 물었 다. "흑전상련도 갔다 왔소이까?" "그렇소. 그들은 무사를 구해 준다 고 했지만 본인 생각에는 아무래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륙금사가 나을 것 같아 이리로 온 것이오." 신양모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지금 흑전상련과의 상권싸움으로 거의 문을 닫을 판국에 와 있다. 더 구나 흑전상련이 이 자의 자금까지 흡수하면 앞으로 대륙금사는 더욱 힘 들어진다. 할 수 없다, 복마성에 연락 을 해 보자.' 신양모는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황급히 내실을 빠져나가자 관 해영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용만후에게 연락을 하러 가 겠지. 결국 응낙을 하고 말 것이다. 용만후는 자금 압박을 받고 있으니 지금쯤이면 매우 초조해 있을 테니 까…….' 이때 밖으로 나갔던 신양모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서며 회색이 만면했다. "대인! 거래를 하겠소이다." 관해영 역시 기쁜 얼굴이었다. "그럼, 무사들을 보여 주시오." "물론이오. 하지만 조건이 있소이 다." "조건이라니? 황금을 지불하는 일 외에 또 다른 일이 있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요구하 는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곳의 일이 끝나면 무사들을 돌려 달라는 것이오." 관해영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 를 끄덕였다. "핫핫! 내가 무림인들을 잡아 두어 서 무엇에 쓰겠소. 일이 끝나면 반드 시 돌려 드리리다." 관해영이 흔쾌히 응낙하자 신양모 는 적이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해영이 지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 르고 있었다. '후후! 이렇게 되면 손쉽게 복마성 에 접근하게 되는군. 용만후! 어지 간히 다급했던 모양이지.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 키운 무사들을 보낼 모 양인데……. 이는 필시 대륙금사의 자금이 다른 곳으로 유통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륙금사가 아무 리 고전한다 해도 이토록 다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륙금사! 이 거대한 황금광맥이 다른 곳으로 자금을 유통한다면 과연 그곳은 어디 란 말인가? 관해영이 일부러 들뜬 사람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사들은 어디에 있소?" 신양모가 이때서야 신비로운 웃음 을 지었다. "곧 모시러 사람이 올 것이오." 그때였다. "장주! 복마성에서 마차가 도착했 습니다." 굵직한 중년인의 목소리에 신양모 는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나가시죠. 마차를 타고 가시면 곧 복마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還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1 장 (실타래 끝을 잡고 있는 그림자 2 ) 2. 하늘을 찌를 듯한 고루거각(高樓巨 閣). 성체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높이 는 무려 오장(五丈)에 달했으며 그 길이만도 자그마치 오십여 리에 달해 있다. 멀리서 보면 구름 아래 태산인 것 같고 가까이서 보면 지붕이 하늘이 요, 땅이 성체인 것 같았다. 바로 이곳이 사대벌왕 중 동목벌왕 에 해당하는 이 시대 최강의 세력 복 마성인 것이다. 때는 황혼 무렵. 한 대의 마차가 뿌연 황토먼지를 휘날리며 복마성을 향해 바람처럼 질 주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는 하늘은 복 마성의 육중한 대문을 더 한층 위엄 스럽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마차가 성문 앞에 이르자 위에서 파수보던 자가 소리쳤다. "어디서 오느냐?" 위맹해 보이는 마부가 소리쳤다. "신장주가 보낸 손님이오." 그러자 이미 연락을 받고 있는 듯 파수병이 아무 말없이 밑을 향해 하 얀 깃발을 흔들었다. 순간, 끼이이익! 육중하기 이를 데 없는 대문이 서 서히 열렸다. 마차가 다시 안으로 들어서 청석이 깔린 정원을 지날 때였다. "얍!" "이얏!" 좌우 양편의 드넓은 연무장에서 수 많은 인물들이 윗통을 벗어제친 채 무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관해영이 흔들리는 주렴 사이로 밖 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 다. '어마어마하군. 복마성을 꺾기가 쉽지는 않겠는데? 다른 사대벌왕들 도 이 정도가 될까?' 마차는 수많은 고루거각을 지나고 있었다. 커다란 향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있 는 연못. 수면은 불타는 하늘을 담아 푸른 듯 붉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손바닥 보다 더 큰 연잎들이 구월(九月)의 저녁을 더 한층 싱그럽게 만들어 놓 고 있었다. 취한 듯이 호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 명의 인물. 등을 돌리고 있어 그 용모를 알아 볼 길이 없으나 탄탄한 어깨와 곧게 펴진 등은 어딘지 모르게 강한 느낌 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한 명의 인물이 오체복지를 하고 있었다. 각진 턱에 교령의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더할 수 없이 위엄스러워 보 였다. 그리고 부리부리한 두 눈에 쭉 뻗 어내린 콧날은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압도하는 일파종사의 기도가 풍기고 있었다. 문득, 등을 돌린 채 수면만을 응시 하고 있던 인물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만후! 흑전상련이 대륙금사의 상권을 얼마나 장악했느냐?" 용만후! 그는 바로 복마성의 주인이 아닌 가? 그렇다면 용만후가 오체복지를 할 만큼 육중한 기도를 풍기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 가? 용만후가 얼굴에 불안함을 띄웠다. "죄송하옵게도 이미 삼분의 이 이 상이 침식되었습니다." 순간, 뒷짐을 지고 있는 인물의 입 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보 같은 놈! 대륙 금사의 금력 이 사라지면 본계의 야망에 얼마나 심한 타격을 주는지 알고 있느냐?" 용만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 렸다.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 동안 대륙금사의 자본이 워낙 본계(本界) 의 세력확장에 투입되어 자금 압박이 심합니다." "으음! 대륙금사에 대항할 상대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흑전상련에게 타격을 줄 자금원 을 구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용만후는 일단 문제의 핵심이 마무 리되자 적이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런 눈길로 사내의 등 을 바라보았다. "하온데 어떤 일로 이곳까지 손 수……." "곧 등세욱을 제거할 것이다. 그렇 게 되면 통천계는 곧바로 천하패권을 움켜쥘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나머지 세력들을 제거할 만반의 준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순간, 용만후의 얼굴은 더할 수 없 는 격정으로 떨리고 있었다. "드, 드디어 그 날이……." 그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예의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이제 천하는 머지않아 본 통천계주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통천계주! 그렇다면 바로 이 신비의 인물이 바로 통천계주란 말인가?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십 인의 초절정 고수들을 뽑아 놓아라. 천마별부에 들어갈 때 데려가야 되겠다."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 모용벽경의 행방을 알아보았느냐?" 용만후가 죄스러운 듯 머리를 조아 렸다. "강호오패의 겁천혈괴군이 알고 있 는데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 습니다." 통천계주가 침음성을 터뜨렸다. "크음! 겁천혈괴군을 빨리 찾아라. 모용벽경이 혈사무에게 잡히면 우린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노력하겠습니다." 통천계주가 수면 위로 입을 벙긋거 리고 있는 잉어들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다음은 파사철부로 가 보아야겠 군. 용만후나 동방백인은 본좌가 두 사람을 다 수하로 두고 있음을 모른 다. 본좌가 자신들만 돕는다고 생각 해야 철저히 충성을 바친다.' 용만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는 통천계주가 뒷짐을 진 채 손 가락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고 그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사철부에는 사운악이 위혜군과 결합되지 못하게 방해를 하라고 지시 를 해야 되겠다. 사운악이 밀반의 반 주가 되면 본계가 타격을 받게 된 다.' '우리도 황궁으로 첩자를 밀파시켜 밀반에 버금가는 금의위를 장악하게 했으니 사운악의 밀반주 선출은 반드 시 저지시켜야 한다.' 스윽―. 갑자기 통천계주의 신형이 그 자리 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제서야 오체복지하고 있던 용만 후가 범이 기지개를 펴듯 일어서며 얼굴 가득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곧 사대벌왕의 전쟁이 시작 되는군. 등세욱만 없으면 천하는 사 대벌왕의 것이 된다. 사대벌왕의 격 돌은 필연적……. 그렇지만 통천계가 돕는 이상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 것 이다." 용만후의 두 눈은 엄청난 야욕으로 인해 횃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 었다. "이제 사대벌왕의 전쟁이 목전에 있기에 더욱 통천계주에게 잘 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하들을 팔 아 흑전상련을 무너뜨려야 한다." 바로 그때였다. 지극히 음산해 보이는 중년인 한 명이 소리도 없이 용만후의 옆에 나 타나며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성주님! 만적금장의 손님이 와 계 십니다." 용만후가 빙글 신형을 돌렸다. "가자." 구나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1 장 (실타래 끝을 잡고 있는 그림자 3 ) 3. 관해영은 대전에 마련되어 있는 의 자에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용만후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 다. 용만후가 얼굴 가득 보기좋은 웃음 을 흘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본인은 복마성의 성주인 용만후라는 사람이오." 관해영이 황송한 듯 허리를 숙였 다. "그렇습니까? 만나 보니 신태가 헌 앙해 믿음직스럽습니다." "핫핫! 과분한 칭찬이오. 어서 자리 에 앉아 본론을 이야기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관해영이 자리에 앉으며 용만후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놈이 인면수심의 인물 용만후란 말인가? 겉보기에는 그럴싸하군!' 용만후 역시 관해영을 보며 두 눈 을 교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은 지금 무사를 구하는 일에 초조해 있으니 많은 값을 불러야겠 다.' 그는 한 사람 당 얼마를 불러야 할 까를 궁리하며 관해영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신장주로부터 연락을 받았소이다. 미리 일러두지만 저희 무사들은 값이 비싼 편이오." 관해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 인당 얼마요?" "황금 두 관." 용만후가 딱 잘라 말하며 재빨리 관해영의 신색을 살폈다. 그것은 그의 표정 변화에 따라 값 을 정하자는 태도가 다분했다. 관해영이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날강도 같은 놈. 톡톡히 장사 를 하려 하는군!' 관해영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 냈다. "그건 너무 비싸지 않소?" "결코 그렇지가 않소. 그만한 실력 들이 있으니까요. 저희 무사를 만 명 만 가지고 있으면 아마도 대인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남지나의 모든 소국 들을 병합하여 왕이 될 수도 있을 것 이오." 관해영이 기쁜 표정을 금치 못했 다. "그게 정말이오?" "못 믿겠다면 보여 드리지요." 용만후가 밖을 향해 손뼉을 두 번 울리자 한쪽 문이 열리며 넓은 연변 장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연변장에는 관해영이 들어왔을 때 보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연습에 열중 하고 있었다. '용만후! 다급하긴 다급했던 모양 이군.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수 하들을 처음 보는 내게 대여하다니? 망조가 들면 그 징후가 보이는 모양 이야.' 관해영은 용만후의 시선을 의식하 고 일부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정도라면 본인이 처음 보는 고 수들이오. 당장에 계약을 합시다." 관해영이 미친 사람처럼 날뛰자 용 만후는 득의해 마지 않았다. '흐흐! 만 명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합쳐 황금이 이만 관이다. 그 정도면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만회할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관해영이 성큼 황금 오천 관 전표 를 내밀었다. "우선 계약금으로 황금 오천 관을 지불하겠소. 대신 일단 무사는 데려 갈 테니 그리 아시오." "물론이오." 용만후가 전표를 건네받고 확인해 보았으나 신용이 가장 확실한 전표라 쾌히 승낙했다. '사람을 떼먹고 달아날 수는 없는 법. 잔금을 지불 못하면 수하들을 불 러들이면 된다. 그렇게 되면 계약금 만 나에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손 해될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해영의 내심을 모르 고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진 흙탕으로 만든다는 옛말이 있지. 재 미있는 일이야.' 문득 용만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 다. "먼길을 와서 피곤할 테니 하룻밤 쉬고 떠나시오." "나는 오늘 당장 떠나고 싶소 만……." "핫핫! 아무리 바빠도 저들에게 부 모와 처자를 만나 사정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줘야 되지 않겠소?"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하룻밤 신세를 지는 수밖에……." "핫핫! 정히 뭐 하시다면 여자를 보내 드릴까요?" 관해영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지라 황급히 사양했다. "저는 세 가지를 금기로 삼고 있는 데 하나는 외도를 하지 않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며……." "핫핫! 되었소. 그만하면 알만 하 오. 그럼, 편히 쉬시오." 용만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 실을 빠져나가자 관해영은 싸늘한 웃 음을 머금었다. '용만후! 그 웃음도 얼마 가지 못 할 것이다.' 달이 없는 밤이라 별빛이 유난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무월적적한 야공은 검은 장막처럼 복마성 전체를 덮어씌우듯 지척에 내 려와 있었다. 삼라만상이 쥐죽은 듯한 고요한 시 간. 휘익! 복마성 내를 박쥐처럼 움직이는 한 명의 인영이 있었다. 바로 관해영이었다. 그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두 눈 을 빛내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왔으니 복마성의 구조 와 단 한 가지의 비밀이라도 캐내야 한다.' 그는 낮에 시녀로 하여금 알아두었 던 용만후의 커다란 저택을 향해 신 형을 움직였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내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만후 는 한 명의 중년인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중년인은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 으며 지독히도 잔인해 보였다. 더군다나 불빛을 옆으로 받고 있어 그늘진 그의 얼굴은 음산하기까지 해 보였다. 용만후의 얼굴은 약간 걱정스러워 보였다. "총관(總官)! 가주께서 모용벽경의 행방을 알아내라고 했소."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관해영은 하마터면 경악성을 터뜨릴 뻔했다. '모용벽경!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 의 존재와 맹노형의 존재를 잠시 잊 고 있었군. 더군다나 그녀가 있는 도 예촌(陶藝村)이 이곳 개봉부에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녀에게 무슨 비밀 이 있기에 모두들 그녀를 노리는 것 일까?' 관해영은 두 사람의 대화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때 용만후는 통천계주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중년인에게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총관이라는 중년인 은 용만후의 신임을 단단히 받고 있 는 인물이며 모사에 상당히 뛰어나다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해영은 용만후의 얘기를 들으며 내심 의혹을 금할 수가 없었다. '통천계라고? 냉고가 말한 통천계 가 복마성을 움직이고 있다니……. 그렇다면 용만후는 허수아비라는 얘 기가 아닌가?' "……." '더군다나 등세욱을 친다면 혹시 타미가 염기제령무(艶氣制靈舞)를 사 용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관해영은 한 가지 생각을 떠 올렸다. '십 인의 고수를 뽑아 놓으라 했으 니 그 중 한 명으로 변장하여 천마별 부인가 하는 곳을 따라가 보아야 되 겠다.' 날이 밝자 복마성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용병의 행렬이 대문을 나 서고 있었다 . 선두에 선 인물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관해영이었다. 그의 옆에는 전혀 무공을 모르는 듯한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삼십대 중년인으로서 전 혀 특징 없는 얼굴에 병약한 모습을 하고 있어 영락없는 관해영의 하인으 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개봉 분타주인 유가량 이란 인물이었다. 관해영이 전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유분타주! 내 계획에 한 치의 차 질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유가량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복마성! 서서히 무너뜨려 주마. 사 대벌왕 중 너희들이 첫 번째 희생물 이다. 그리고 나는 도예촌으로 가 보 자. 맹노형님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는 없다.' 모용벽경! 과연 그녀는 어떠한 신비를 안고 있는 여인이란 말인가? 育�!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2 장 (배신자의 눈물 1 ) 제 42 장 배신자(背信者)의 눈물 1. 두두두두―. 복마성에서 착출된 만 명의 기마군 단은 옥문관을 벗어난 지 하루가 지 났음에도 쉴 새 없이 진군하고 있었 다.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 그야말로 초열지옥(焦熱地獄)을 방 불케 하는 무더위에 복마성 기마군단 은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헉헉거리 며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졸지에 용병으로 타락 하여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성질대로 하자면 지금 당장 돌아 가고 싶다만 성주님 엄명이 있는 터 라……. 제길!" 맨 선두에서 앞길을 재촉하던 유가 량은 뒤에서 들려오는 불평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가량은 손을 번쩍 치켜들어 앞을 가리켰다. "앞으로 한 시각만 달리면 술과 계 집이 준비되어 있는 휴식처가 있소." 그 말이 떨어지자 기마군단의 진 군 속도가 갑자기 두 배는 빨라졌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폐허의 성터. 비록 여기저기 성곽이 무너지고 기 왓장이 뒹굴고 있었지만 복마성 기마 군단이 쉬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미리 쳐놓은 천막과 미주가효, 그 리고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 계 집들이 교태를 흘리고 있었다. 복마성 기마군단은 극심한 여독끝 에 베풀어진 휴식과 주육(酒肉)에 초 저녁부터 곤드레가 되었다. "하하! 제장들! 마음껏 드시고 즐 기시기 바라오." 유가량은 상석에 앉아 복마성 기마 군단의 수뇌부 열 명을 대접하고 있 었다. 용만후의 특별 지령을 받은 초절 정고수 십 인. 그들은 탁월한 무공만큼이나 의심 도 많았다. '성주께서는 이 놈들 저의가 다소 의심스럽다 하시며 마음을 놓지 말라 하셨다.' '속전속결! 놈들의 요구를 되도록 빨리 끝내 주고 복마성으로 원대 복 귀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다. 우리가 빠져나간 사이 외부의 기습공격이 있 으면 낭패다.' '어쨌든 대단한 재력을 가진 놈들 이다. 이런 사막 한가운데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도 그러하거니와 이렇듯 많은 미녀들을 동원한 능력도 그렇고…….' 열 명의 제장들 사이 사이에는 꽃 처럼 화려한 미녀들이 앉아 갖은 교 태와 아양을 떨고 있었다. 중원의 여인과는 달리 가슴과 치부 만을 가린 대담무쌍한 복장에서부터 느껴지는 이국적인 냄새, 비릿한 육 향(肉香)이 아리도록 코끝을 자극한 다. 반라의 이국녀들이 눈웃음을 치며 술잔을 권한다. "호호호! 전에부터 중원의 영웅호 걸을 모시는 걸 평생의 소원으로 삼 아 왔었는데 소녀에게 있어 오늘 밤 은 행운이네요." "중원의 사내는 과연 밤에 여자를 어떻게 다룰까? 전에부터 그게 궁금 해서 미칠 지경이었어요." 귓가에 속삭이는 간드러지는 음성, 의도적으로 밀착해 오는 팽팽한 젖무 덤의 감촉, 벌써부터 꿈틀거리는 허 리……. 열 명의 제장들은 서서히 의심과 긴장의 끈을 풀고 사내 특유의 본성 을 드러내며 즐기기 시작했다. 유가량은 뭐가 그리 유쾌한지 연신 대소를 터뜨리다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차르륵! 천막 주렴이 걷히며 일곱 명의 반 라여인이 들어왔다. 삘리리―, 리리―. 꿈결인 양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무 희(舞姬)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 기 시작했다. 제장들의 초점이 몽롱하게 풀려 갔 고, 붉게 충열된 눈동자가 불을 뿜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희들의 율동 역시 점차 고조되어 갔다. 또아리 트는 화사(火蛇)인 양 꿈틀 거리는 여체, 폭풍에 시달리는 듯한 엉덩이 하며……. 제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내라도 숨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는 광란의 현장이었다. 유가량은 군침을 목아프게 삼키고 있는 제왕들을 눈여겨보며 내심 회심 의 미소를 지었다. '떨어졌군. 하긴 이런 상황에서 사 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사내로 태어 난 죄야.' 정오가 휠씬 지나 중천에 뜬 태양 은 또다시 이글이글 불덩어리를 태우 고 있었다. 그런데도 밤새도록 주지육림에 뼈 골 늘어진 복마성 기마군단은 도통 일어날 줄을 몰랐다. 유가량은 그늘가에 앉아서 인내심 좋게도 그들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 었다. 그의 좌우에는 비범해 보이는 청년 고수들이 이십여 명씩 기러기 날개 형식으로 늘어서 있었다. 유가량은 마냥 한가로웠다. "푹들 자 둬라. 일어나는 순간부터 고행이 시작될 테니……." 그때였다. 복마성 기마군단의 제장들이 빠른 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유가량을 보자 겸연쩍은지 헛기침을 했다. "험험! 유대인, 이거 미안하외다. 간밤의 대접이 하도 융숭했던 터라 그만 늦잠을 잤구료." "그런데, 계집들이 도통 보이질 않 는구료." 유가량은 히죽거렸다. "미친 자식들! 눈뜨고 잠꼬대하지 말고 어서 떠날 차비들이나 해라." 일순, 제장들은 어이가 없는지 서 로를 쳐다보다가 유가량을 향해 살기 를 띠었다. "유가량! 이번 한 번은 참는다만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 라." "우리가 비록 지금은 너희들의 임 시용병 신세지만 하인 취급하면 가슴 에 바람구멍을 내줄 수도 있다." 유가량은 혀를 찼다. "쯧쯧! 철없는 것들 같으니……. 어 디가 예쁘다고 간밤에 물과 계집들을 적선했겠느냐?" 제장들의 안면이 일시에 굳어졌다. "그런…….?" "무슨 야료를?" 제장들은 안면 가득 흉험한 살기를 띠며 유가량에게 다가섰다. "독(毒)으로 우리를 제압하려 했다 면 계산 착오다." "유치하게 독 따위를 믿고 설치려 고 하다니……. 그 대가는 죽음이 다." 아차 하면 유가량의 하나 뿐인 목 이 어깨와 작별해야 될 판국이다. 하지만, 유가량은 여유 있는 태도 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독에 대해서 대충 알고들 있다니 얘기가 쉽겠군. 자웅독고에 대해서 들어보았겠지?" 순간, 제장들의 안면이 시퍼렇게 질려 버렸다. "저, 정말 흑혈독고를……?" "우라질 놈!" 곳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2 장 (배신자의 눈물 2 ) 2. 자웅독고! 암수 한 쌍이 언제나 붙어 다니며 상대방에게 시전할 때는 암수 중 한 마리만 침투시킨다. 평소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나 만약 누군가가 체외(體外)에 있는 암수 중 한 마리를 죽이면 그 중 하나가 잠복 해 있는 상대방은 절명한다. 단점이라면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 을 만큼 크기 때문에 시전하기가 용 의하지 않다. 복마성 십 인의 제장들을 선두로 만 명의 기마군단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착잡과 절망, 그리 고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유가량 은 높은 성곽에 걸터앉아 시원하게 부채질하고 있었다. "어허! 인상들 피라니까? 어려운 문제일수록 고민하지 말고 간단히 결 정 내리는 것이 현명한 거야." 기마군단 내부에서 이빨을 가는 소 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우리가 어쩌다 덫에 걸 린 쥐가 됐지?' '별 볼일 없는 놈에게 목숨을 저 당 잡히다니……. 어이가 없군!' 유가량은 타이르듯 자상히 말했다. "백 일 동안만 내 말에 죽고 살면 자웅독고를 해결해 주겠다. 뿐만 아 니라……." 유가량은 말끝을 흐리며 손뼉을 쳤 다. 딱! 딱! 그러자 네 명의 장한이 커다란 상 자를 들고 왔다. 덜컹! 뚜껑이 열리자 기마군단의 무사들 은 상자 속에서 반사되는 강렬한 광 채에 눈을 가렸다. 상자 속에는 갖가지 보석들이 즐비 했다. 유가량은 씨익 미소를 띠었다. "백 일 동안만 내 말에 절대복종하 면 자유의 몸이 될 뿐만 아니라 평생 을 호화롭게 살게 해주겠다." 기마군단의 여기저기에서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장 중 한 명이 탐욕스런 시선으 로 보석상자를 훔쳐본 후 유가량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우리는 당신에게 임시 채용된 용 병이오. 어느 시기까지는 명령만 내 리면 따를 것이오. 그런데 이런 편법 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유가량의 대답은 간단했다. "알 필요 없다." 태양신궁(太陽神宮)! 열사의 나라 대막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광의 상징. 중원의 어느 강력한 세력도 감히 침공을 꿈꾸지 못하는 태양신궁은 사 막의 신기루처럼 경외의 상대였다. 그런데, 두두두두―. 복마성 기마군단이 어느 날 새벽 이유도 사전 통고도 없이 태양신궁을 기습공격했다. 아닌 밤중의 홍두깨에게 뒤통수를 얻어터진 태양신궁은 어이없이 허물 어지며 정신차리기에 급급했다. 전격적인 도발작전! 번뜩이는 창검과 소나기처럼 빗발 치는 화살세례가 계속됐다. 한 시간이 지나갈 무렵, 태양신궁 은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맹렬한 공 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잠자다 수염 뽑힌 사자의 분노라고 나 할까? 태양신궁은 소름끼치는 파괴력으로 복마성 기마군단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복마성 기마군단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퇴각 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더니 모래언덕 저 너머로 순식간에 꼬리를 말아 버 렸다. 벙―. 태양신궁의 인물들은 도무지 어이 가 없었다. 뒤로 넘어지고 코가 깨지면서도 각 기 병기를 잡아들고 한바탕 살풀이를 하려니까 정작 상대방은 손 흔들며 안녕해 버린 것이었다. 뒷간 가서 밑 안 닦고 나온 기분이 랄까? 태양신궁의 인물들은 제풀에 기운 이 쭈욱 빠져 버렸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보았나?" 사자갈기 같은 은빛 머리를 허리까 지 기른 장대한 체격의 중년인이 복 마성 기마군단이 사라진 모래언덕을 주시하며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그는 바로 태양신궁의 궁주 철탑하 였다. 뭐라 그럴까? 셋째 첩년한테 어느 날 졸지에 안 방자리 뺏긴 조강지처 마나님 기분이 랄까? 태양신궁의 군사(軍師) 율목격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중원에서 요즘 설치고 있는 복마 성의 졸개들 같은데, 이유가 뭔지 모 르겠습니다. 허참, 어이가 없어서 ……." 철탑하가 태양을 직시하며 어금니 를 지그시 깨물었다. "복마성의 이번 행위는 태양의 자 손인 우리를 명백히 무시한 처사다. 이대로 묵과한다면 후손들에게 치욕 을 남길 것이다." 결정! "출전 준비를 하라! 목표는 쥐약 먹은 복마성이다!" 늦잠�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2 장 (배신자의 눈물 3 ) 3. 복마성의 기마군단은 태양신궁을 집적거린 후에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 다. 비단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분란을 야기시켰다. 덕분에, 만 명의 복마성 기마군단 은 오천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복마 성은 새외의 문제아로 등장했으며,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천여 년 동안 새외의 각 거점을 장악하고 찬란한 무명(武名) 을 날리던 세력들이 연수 동맹을 맺 기에 이르렀다. 대막 태양신궁(太陽神宮) 묘강 독녀문(毒女門) 서역 소뢰음사(小雷音邪) 신강 검각(劍閣) 등등……. 새외 연합세력은 공동명의로 작성 된 선전포고문을 작성했다. 일단의 복마성 무리들의 새외침공 은 지극 히 야만적인 도발행위이다. 명분도 없으며 사전에 한 마디 선 전포고도 없는 전격적인 기습은 어 떠한 변명으로도 해 명될 수 없는 새 외 모독 처사이다. 이에 새외 연합세력은 첫 단계로 복마성을 단호히 응징하겠거니와 중 원무림의 정중한 사과문을 요구한다.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전면전이라도 불사하겠다. 제독부! 대명제국의 수군(水軍)을 감독, 지 휘하는 총본영. 육지의 장군부(將軍府)와 더불어 군권(君權)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 는 제독부에도 어느덧 밤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삼라만상과 더불어 모두들 단꿈에 취해 갔다. 그런데, 한 인물만은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안주도 없이 독하기 이를 데 없는 죽엽청으로 가슴을 태우고 있는 사나 이가 있었다. 단강! 그는 제독부 외각에 있는 삼층 누 각 창문가에 앉아 죽엽청을 병째 비 우고 있었다. 얼마 흐르지 않은 세월 동안 단강 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허름한 삼베옷에 가려진 육체는 푸 석푸석한 모래로 만든 듯이 허약하게 만 보였다.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보기에도 앙 상한 얼굴은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차지하고 있었다. "벌컥! 벌컥!" 단강은 죽엽청 한 병을 비우고 미 친 듯이 흐흐거렸다. "빌어먹을! 술 먹으면 취한다고 지 껄이는 놈이 있으면 걸레를 물려야 되겠어." 단강은 술병을 집어들어 입에 박았 다. "없군, 젠장할!" 휘익! 단강은 빈 술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며 다른 술병을 집어들었다. 조 갈증이라도 걸린 듯이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그런데 이상했다. 술병이 날아갔으니 당연히 와장창 소리가 나야 되거늘 전혀 깜깜 무소 식이었다. 단강은 힐끗 뒤돌아보다가 더러운 걸 보기라도 한 듯 고개를 홱 돌렸 다. "눈알을 빼버리든가 해야지. 염병 할! 역겨운 걸 보고 토하기라도 하면 순전히 내 손해거든." 탁! 탁자에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단강 의 맞은 편에 앉은 인물. 해왕단 혈법당주였던 만계량군 사 마수였다. 사마수는 예전에 비해 생활이 활짝 핀 듯이 보기 좋게 살쪄 있었다. 개기름이 번드르한 얼굴에 묘한 미 소를 담고 이죽거리듯 말했다. "자신의 몸을 잘 돌봐야지! 힘들여 잡은 부귀영화를 즐길 줄은 모르고 제몸을 학대하다니……. 어리석은 바보로군." 단강은 가래침을 바닥에 퉤 뱉았 다. "눈알도 그렇지만 귀까지 막아 버 리든가 해야지……." 사마수는 단강의 야유에 면역된 듯 태연했다. "단강! 사람이라면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지. 나 아니었으면 부귀영화는 커녕 지금쯤 해골이 됐을 거야." 단강은 사마수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 고 입가에는 잔인할 정도로 조소가 짙게 깔려 있었다. "사마수, 너는 네가 인간이라고 생 각하느냐? 내가 생각할 때 너와 나는 개새끼 발 도 핥을 자격이 없어." "으……." "개도 삼 일만 먹이면 주인에게 꼬 리를 흔들거든." 사마수의 안면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강, 말조심해라. 어쨌든 나는 예 전의 네 상관이었다." "지저분한 과거로군." 단강은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와작! 술잔이 깨지며 손에서 핏물이 흘러 내렸다. 단강은 안면을 떨며 힘들게 말했 다. "배신자라는 낙인은 지옥 끝까지 나를 쫓아올 거야." "사치스런 감정이군.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야." 사마수는 약올리듯 말하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문 밖으로 나가며 그가 툭 말을 던 졌다. "아참! 전해 줄 말이 있었는데 그 냥 갈 뻔했군. 두더지 마냥 방구석에 만 처박혀 있는 너라 못 들었으리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 "단주가 살아 있다더군." 순간, 단강의 전신이 폭풍을 만난 듯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탕! 사마수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단강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양볼을 타고 눈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돌연, 단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더니 미친 듯이 웃어댔다. "으하하하핫……!" 渼鳴�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3 장 (비밀의 여인 1 ) 제 43 장 비밀(秘密)의 여인(女人) 1. 개봉성의 동구밖에 자리한 도예촌. 오랜 세월 동안 도자기를 만들어 생활해 오는 이곳은 가히 부유한 편 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다 쓰러져 가는 초옥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고 집보다 더 큰 굴뚝들이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관해영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는 정 오 무렵이었다. 그는 도처에 들어서 있는 허름한 집들을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 보았다. '아직도 그 여인이 이곳에 있을까? 이십 년이 흘렀는데…….' 이때 한 명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 고 힘겨운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 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망태기가 들려 있었는데 여러 가지 약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관해영이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 다. "말 좀 물읍시다." 노인은 경계의 눈초리로 관해영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해영은 시골사람 특유의 경계심 이라 생각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 다. "이 마을에 모용벽경이란 여인이 살고 있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용벽경……, 그런 여인도 있 나?" "이십 년 전 이곳에 왔을 텐데 ……. 혹시,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 오?" "모용벽경……, 모용벽경……." 노인은 연신 입으로 중얼거리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하! 병든 여인을 말하는군. 저리 로 가 보시오." 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제 법 반듯해 보이는 기와집이었다. "고맙소이다, 노인장." 관해영이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나는 듯이 달려 그 집 대문을 두드렸 다. 삐익!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노인이 얼굴 을 빠끔히 내밀었다. 관해영이 초조한 신색으로 물었다. "이곳에 모용벽경이란 여인이 있습 니까?" 순간, 노인이 관해영의 아래위를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군데 그 여인을 찾는 것 이오?" 관해영은 노인의 말 속에 모용벽경 이란 여인이 이 집에 있다는 것을 느 끼며 뛰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그 여인을 맡긴 사람의 심부 름을 온 사람이오." 그러자 노인이 대문을 활짝 열어젖 히며 두 눈을 부라렸다. "이십여 년 동안이나 내 속을 썩이 더니 이제야 나타났군!" 관해영은 노인이 갑자기 길길이 뛰 는 것을 보고 의혹을 금치 못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노여워하는 것이오?" 노인이 버럭버럭 악을 썼다. "맡길 때는 금방 찾는다고 하고서 는 벌써 이십 년이란 세월이 지났소. 그 동안 약값이며 음식값이 얼마나 든지 아시오. 그것 때문에 우리 집 대들보가 흔들릴 정도요." 관해영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군!' 그는 품속에서 한웅큼의 은자를 꺼 내 노인에게 주었다. "지금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훗일 더 주겠소." 은자를 받아든 노인은 엄청난 횡재 를 했다는 듯이 입이 찢어지도록 벌 어졌다. '흐흐! 이게 웬 횡재냐? 그때 이미 많은 돈을 받았는데…….' 노인이 관해영을 안내한 곳은 다 쓰러져 가는 토방(土房)이었다. "바로 이 방이니 들어가 보시오." 노인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고 는 이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토방 안. 침침한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구석구석마다 가난에 찌든 냄새가 역 력히 묻어 있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는 누더기 같은 이불을 덮고 있는 여인 한 명이 누워 있었는데 나이를 알아 볼 수 없 을 만큼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비록 의식을 잃고 있는 얼 굴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은은한 기 품과 고귀함이 엿보였다. 관해영이 가까이 다가가 여인의 얼 굴을 바라보다 흠칫 몸을 떨었다. '병 때문에 야위어 보이긴 하지만 타미의 얼굴과 거의 흡사하군!' "……." '혹, 이 여인이 냉고가 말한 여인 이 아닐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그럴 확률이 많다고 느껴졌다. '그럼, 등세욱이 이 여인을 좋아했 단 말인가? 이 여인과 등세욱은 어 떤 관계일까?' 그는 냉고가 등세욱을 죽이기 위해 타미를 데리고 떠났을 때 등세욱이 한 명의 여인을 사랑했다는 말을 떠 올리고는 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 이다. 관해영은 여인의 얼굴을 천천히 살 펴보았다. 비록 초췌해진 얼굴이나 실로 놀랍 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과연 등세욱이란 사람이 어떤 인 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여인은 한 남자의 사랑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여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으음! 이건 커다란 충격으로 몸 속에 울혈이 생겨 그게 병으로 도졌 다. 울혈을 제거해야 되겠다.' 관해영은 이불을 걷어붙인 다음 여 인의 신형을 돌려 명문혈(命門穴)에 다 진기를 주입시켰다. 파르르―. 엄청난 진력을 받자 여인의 전신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인의 신형 은 차츰 평정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이윽고 관해영이 손을 떼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틀 정도는 있어야 깨어나겠군!' 관해영이 무료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니 옷이며 책들이 어지럽게 널 려 있었다. 관해영은 대뜸 느끼는 것이 있어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고약한 늙은이가 값나가는 게 있 나 하고 뒤진 모양이로군!' 관해영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노 인을 집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여인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는 꾹 눌러 참기로 하고 물건들을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관해영이 하나의 책자를 무심코 집 어들었을 때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어, 이건?" 관해영의 손에 들려진 한 권의 책. 겉표지에는 한 송이 묵화(墨畵)가 그려져 있었는데 치고 긋고 하는 획 들이 가슴을 섬뜩하게 할만큼 전율을 불러 일으켰다. '이건 무공구결이다. 그림만 보아 도 압도당할 정도라면 펼쳤을 때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관해영은 한 번 펼쳐보고 싶은 마 음이 굴뚝 같았으나 이내 고개를 흔 들었다. '남의 물건이니 내가 건드릴 수는 없다.' 관해영이 쌓여진 서책 위에다가 책 을 올려놓으려다 두 눈을 빛냈다. 책 사이에 삐죽이 튀어나온 하나의 물체를 본 것이다. 그것은 누렇게 색이 변색된 하나의 서찰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서찰을 꺼내자 그것은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관해영은 여인의 얼굴을 슬쩍 바라 보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 서찰 의 내용이 이 여인의 신분을 가리키 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으로 황급히 서찰을 뜯어 읽어내려 갔다. 질이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3 장 (비밀의 여인 2 ) 2. <벽경, 날 원망하겠지만 본좌는 너를 사 랑한다. 한때는 천하를 발 아래 두고 하늘 을 우러러 천하 제일인자임을 자부하 던 나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늙은 몸이 너를 사랑 하는 것이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유희를 즐기자고 함 이 절대 아니다. 그 날, 본좌와 그대가 맺어진 후, 후회도 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책도 심했지만 솔직히 본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마지막 소원도 이 루었다는 기쁨도 있었다. 물론 그대는 어찌 보면 처참한 인 생의 나락 으로 떨어졌을지 모르지 만, 그 때문에 본좌 는 그대를 위해 서라면 뭐든지 할 셈이다. 그 날의 충격으로 요지궁(瑤池宮) 에 틀어 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그대 를 보면 본좌의 마음이 미어지도록 아프지만 스스로 충격을 이겨낼 때까 지 조금도 방해를 않기로 결심했다. 무료할까 봐 화책을 보낸다. 화책엔 다라십삼수(多羅十三手)의 묘리에 의해 그려져 있지만 사실 그 것은 그냥 눈에 뜨이는 것이고 그 안 에는 다시 두 가지의 무공이 들어 있 다.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으로 그 두 가지의 무공을 찾기 바란다.> 그것은 여인이 아니면 도저히 짐작 할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관해영은 서찰을 접어 다시 봉투에 집어넣으며 편지의 내용을 곰곰이 되 새겨 보았다. '누군지 애틋한 정이 절절히 맺혀 있는 편지를 보냈군!' 관해영은 다시 화책을 집어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이 그림 속에 두 가지 무공 이 있다니? 난 아무것도 발견을 못했는데…….' 그는 화책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 아도 무공구결이라는 것을 도시 찾아 낼 수 없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내 지혜가 이토록 형편없는 것일까?" 그는 화책을 팽개치려 하다가 오기 가 치밀어 올라 화책을 다시 살펴보 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자 관해영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야 원, 조금의 단서도 잡을 수가 없으니……. 관해영은 눈이 피로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이빨을 깨물고 화책 을 줄기차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 득 관해영의 두 눈이 더할 수없이 반 짝거렸다. '그렇다. 꽃의 줄기와 잎사귀에 그 려진 미세한 선과 줄기들을 나타내는 고대의 문자들이다.' 관해영이 심혈을 기울여 글자들을 해독해 보니 그것은 바로 태극육합일 주공이었다. '어떻게 태극육합일주공이 이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관해영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 며 의혹을 금치 못했다. '과연 나에게 태극육합일주공을 전 해 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이 편지를 보낸 사람과 나에게 구 결을 알려준 노인이 동일인이 아닐 까?' 해영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으 나 단 하나의 확신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무공, 현천쌍 극기공(玄天雙極奇功)에 전력을 기울 였다. '이것은 공령귀원신공에 버금간다. 이건 대단한 수확을 얻은 셈인데 …….' 관해영은 흡족한 얼굴이었다. '이 현천쌍극기공(玄天雙極奇功)으 로 인해 대연신공은 팔성까지 올라갈 수 있다.' 현천쌍극기공! 그것은 바로 천지간에 자신을 중심 으로 모든 기를 운용시키며 심중행 (心中行) 즉, 마음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는 식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초식이 펼쳐지는 절대불가사의한 무 공이다. 관해영이 현천쌍극기공의 묘리에 심취되어 있을 때였다. 스슥! 미세한 음향이 울리며 지극히 절제 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귀뚜라미가 풀잎을 스치는 소리 와도 같이 극히 미세하기 이를 데 없 었으나 거의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른 관해영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 다. '이건 초일류급 고수들이다.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은데?' 관해영이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밖에서 두런거리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이봐! 이곳에 모용벽경이란 여인 이 있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쭈삣 할 정도의 살기를 띤 음성이었다. 이어, 노인의 겁먹은 듯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그……. 그렇습니다만, 대체 무엇 때문에?" "알 필요 없다. 어느 방이냐?" "저쪽입니다만, 이미 데려갈 사람 이 왔는데요." "뭐라고? 누가 왔다는 말이냐?" "왜 그런 눈으로……?" "빨리 누가 왔는지 말해 보아라." "처, 청년이었는데 얼굴이 아주 잘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스으으으―. 뱀이 모래밭을 미끄러지는 듯한 소 리가 들려왔다. 관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이 여인을 찾다니……. 어 디서 온 자들일까?' 바로 그때였다. 파앗! 방문을 통해 한 명의 인영이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져 들어오며 검초를 펼쳐 관해영의 가슴을 쑤시고 들었 다. 관해영의 얼굴에 싸늘한 냉소가 번 져 오르며 뒤이어 그의 죽검이 일섬 지간(一閃之間)에 허공을 갈랐다. 스파아악! "으악!" 쏘아져 들어오던 인영이 피를 뿌리 며 허리가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 관해영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자신의 죽검을 바라보며 쓴웃음 을 지었다. '역시 다라십삼수의 난화불소(亂花 拂掃) 초식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군!' 난화불소! 그것은 바로 다라십삼수의 제 이초 였던 것이다. 스스스슥―. 방 안으로 다섯 명의 인물들이 소 리 없이 들어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죽립을 깊숙이 눌 러쓰고 있었으며, 몸에는 착 달라붙 는 흑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동료의 시체를 바라보는 순 간 더할 수 없이 싸늘한 눈길로 관해 영을 바라보며 허리에 찬 넓은 도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관해영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철저한 살인수업을 받은 놈들이 다.' 죽립인들이 번뜩이는 눈길로 관해 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해영은 앉은 자세 그대로 죽입인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 로 소리쳤다. "누구냐?" "알 필요 없다." "그렇다면 죽는 수밖에 없겠군." "건방진 놈이군. 베어라!" 제일 앞에 섰던 흑의인이 소리치며 검을 휘둘러 관해영의 목을 쳐나갔 다. 것은 �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3 장 (비밀의 여인 3 ) 3. 쐐애애액! 검풍이 찢어지게 울리는 가운데 네 명의 죽립인들이 전후좌우에서 합세 를 가해 공격해왔다. 도처에 번뜩이는 검광이 가득하고 천라지망 같은 도세가 관해영의 전신 을 에워싸듯 밀려들었다. 그 기세는 더할 수 없이 날카롭고 무게가 실려 있어 천하의 그 누구라 할지라도 감히 피해낼 것 같지가 않 았다. 절대절명의 순간! 관해영은 앉은 자세 그대로 허공으 로 뛰어올라 밀려오는 검세와 어느 정도 차이를 두고 죽검을 풍차처럼 휘둘러 교탈십팔도결과 다라십삼수를 연달아 펼쳐내었다. 순간, 고우우우우―. 태풍이 밀려오는 듯한 섬뜩한 음향 이 울리며 성난 파도 같은 검세가 연 속적으로 밀려나가 다섯 명의 죽립인 을 휘감았다. "아앗!" "피, 피해라!" 다섯 명의 죽립인이 저마다 경악성 을 터뜨리며 급히 신형을 날려 검광 의 범위를 벗어나려 했으나 이미 검 광은 그들의 전신을 휘감은 상태였 다. "으아아악!" "크윽!" 다섯 명의 죽립인들은 하나같이 가 슴에 피를 뿌리며 불신에 찬 눈빛으 로 관해영을 바라보며 떠듬거렸다. "네, 네놈이 어떻게 등세욱의 무공 을…….?" 쿠웅―. 그 말을 끝으로 다섯 명의 죽립인 들이 차례대로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등세욱의 무공을 알고 있는 이 다 섯 명의 죽립인들. 과연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순시간에 다섯 명을 처치한 관해영 은 죽립인들의 말에 곤혹스러움을 나 타냈다. '대라십삼수가 등세욱의 무공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바로 서찰의 주인…….' 관해영은 무언가 떠오르는 듯하다 가 막상 생각을 해보면 아무 것도 알 아낼 수 없었다. '결국, 어디서 온 자들인지도 알지 못했군!' 바로 그때였다. "대단한 솜씨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청 년이 바람처럼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시커먼 구레나 룻을 기르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모 르게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관해영은 청년의 기도가 범상치 않 음을 보고 경각심이 생겼다. "넌……?" 청년이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 였다. "내 이름은 섬전신도(閃電神刀) 낭 원평(浪元平)이라고 한다. 의성보의 소보주(小堡主)이지." 관해영은 흠칫했다. '의성보! 그렇다면 벽력마도 낭초 민의 아들이란 말인가?' 문득, 관해영은 한 인물을 떠올리 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맹 노형에게 들었다는 것, 맹노형은 절 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인데 입을 열 었다는 것은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이 아닐까?' 관해영은 더할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며 섬전신도 낭원평을 뚫어질 듯 이 바라보았다. "이들도 너의 수하들이냐?" 낭원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아니라는 뜻도 되는군!"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그러나 확실한 게 하나 있지. 이 여인을 데리고 가지 못한다는 것!" 관해영이 잠들어 있는 모용벽경을 가리키자 낭원평이 의미심장한 미소 를 흘렸다. "흐흐!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군." 이어, 그는 허리에 찬 도(刀)를 뽑 아 들며 관해영의 가슴을 향해 겨누 었다. 관해영은 도끝에서 밀려오는 싸늘 한 경기에 그의 무공이 상당한 수준 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이한 일이군! 이 자의 무공이 낭초민보다도 더 강한 것 같으니 ……!'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 낭원평 은 검끝을 풍차처럼 돌리며 다가들었 다. 윙윙―.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도 끝에서 가공할 도광이 눈부시게 밀려왔다. 관해영은 즉시 죽검을 펼쳐 도광을 차단하는 한편 신형을 날려 그의 머 리를 쳐나갔다. 낭원평은 급히 신형을 날려 피하면 서 빠른 속도로 도를 휘둘러 왔다. 관해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교 탈심팔도결의 초식으로 낭원평의 하 단전을 쓸어 갔다. 낭원평은 기겁을 하며 가까스로 검 초를 피해냈다. 그의 얼굴은 온통 식은땀 투성이었 다. '믿을 수 없다. 당금에서 나와 평 수를 이룰 자도 몇 안 되는데 이 자 는 나보다 우위가 아닌가?'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그 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에게 패배란 없다!' "이영(二影)!" 낭원평이 소리치자 난데없이 싸늘 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소보주! 흑백이영(黑白二影)은 여 기에 있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장에서 쇠 그물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촤아아아―. 관해영은 즉시 일갈노호를 터뜨렸 다. "폭풍(暴風) 뇌정(雷霆)!" 쐐애액! 죽검이 종횡으로 무수한 화선을 그 리는가 싶더니 벼락불 같은 검광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쇠그물을 산산이 잘라 버렸다. 그 순간, 천장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리며 두 명의 인영이 피떡이 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아!" "끄윽!" 그러나 관해영이 멈칫하는 순간을 이용해 낭원평은 모용벽경을 옆구리 에 끼고 창문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서라!" 관해영이 노호를 지르며 창 쪽으로 몸을 날리려 하는 순간, 푸드득―. 날개 치는 소리가 울리며 싸늘한 흙바람이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관해영이 바라보니 거대한 대붕(大 鵬)이 낭원평과 모용벽경을 등에 태 우고는 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관해영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멍하니 대붕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실수로 이런 과오를 저지 르다니!' 그의 얼굴은 점차 짙은 살기를 띠 었다. '의성보! 네놈들이 나에게 많은 빚 을 남기는구나. 내가 의성보를 찾는 그 날이 너희들이 지상에서 없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관해영은 묘용벽경을 빼앗기자 더 할 수 없는 살심이 치솟아 올랐다. 죽립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4 장 (고금 제일인 1 ) 제 44 장 고금 제일인(古今 第一人) 1. 밤(夜). 땅위에는 미친년 머리카락처럼 치 렁치렁한 어둠이 스물 거리고, 하늘 에는 영롱한 별빛이 빛나는 밤이다. 복마성(伏魔城). 위선과 기만으로써 중원무림을 우 롱해 온 이 악의 성체도 밤의 정적 속에 고요히 묻혀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복마성의 가 장 깊숙한 전각 앞에서 박쥐처럼 몸 을 숨긴 채 실내를 엿보고 있는 사람 이 있었다. 그는 바로 관해영이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 다. '타미가 본의 아니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그냥 둘 수가 없다. 비 록 그 상대가 등세욱일지라도…….' '내가 천마별부에 잠입을 하여 타 미를 구하고 통천계의 음모를 좌절시 켜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해영의 눈빛은 깊숙이 침잠되어 갔다. '나에게 있어 등세욱이나 통천계는 모두 적이지만 비겁한 수단에 의해 등세욱이 죽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등세욱은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돼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관해영은 등세욱이 자신의 운명 중에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라는 것을 직감해 왔었다.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었던 수 많은 기인들이 그에게 등세욱을 꺾을 것을 원해 왔던 것이다. 관해영이 엿보고 있는 실내에서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의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내는 하나에 뱀처럼 사내의 몸에 뒤엉켜 있는 여섯 명의 여인들……. "으…….음!" 사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중력 공간을 헤매듯 허위적거리 는 시선 속에서 달아오른 절정의 쾌 락을 엿볼 수 있었다. '오래도 노는군!' 관해영의 눈에 알 수 없는 불평이 서렸다. 이미 이곳에서 저 애꾸눈 사내를 기다린 지가 반 시진이나 되었던 것 이다. '혈수(血手) 상지준(常志俊)이라는 저 자, 천마별부로 들어가는 십 인의 고수 중 일 인이다.' 관해영이 내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상지준이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나섰다. "흐흣! 역시 회포를 푸는 데에는 여자보다 좋은 게 없다니까? 두 달 만에 맛보는 상쾌한 기분이군." 아무리 생각해도 상지준은 이번처 럼 온몸을 녹이는 경험은 일찍이 맛 본 적이 없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그의 귓전을 파고드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 다. "후후후! 그렇다면 당장 죽는다 해 도 여한은 없겠군." 상지준의 신형이 홱 돌려졌다. 이 복마성 안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하지만 저 음성은 그 사람의 목소리와 전혀 틀린 것이었 다. "웬 놈이냐?" 슷!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는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염라사자." "……!" 상지준은 나타난 관해영을 빠르게 살피더니 입가에 사이한 미소를 머금 었다. "네 몸이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 어르신은 염라대왕 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후후후! 과연 그럴까?" "그렇다, 죽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지준의 몸 이 한 줄기 섬광처럼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그의 몸놀림도 빨랐지만, 손 안에 들린 핏빛 쇠사슬은 더욱 빨랐다. 몸이 허공에 솟구쳐 오르는 순간에 이미 그의 손에 들린 쇠사슬은 관해 영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그러나 상 지준이 죽으면서까지 믿을 수 없는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그의 쇠사슬이 관해영의 전신을 막 가루처럼 날려버릴 순간에 자신의 생 명처럼 믿어온 쇠사슬이 무처럼 잘라 져 버린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온 전신에 오싹한 전율을 주는 한 줄기 빛무리를 그는 보았던 것이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의 죽음은 결정 지어졌다. 관해영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 올랐다. "후후후! 말은 거창하게 하더니 손 은 형편없는 친구였군." 슷! 관해영이 가볍게 한 손을 휘젓자 상지준의 시체가 허공으로 떠오르더 니 그대로 벽면을 파고들었다. 돌아서는 그의 모습. 그런데 관해영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영락없는 애꾸눈의 상지준이 서 있었다. 만약 상지준이 이런 관해영의 모습 을 볼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을 했을 것이다. 내 얼굴을 도둑 맞았다! 휙! 휘이익! 어둠의 장막이 길게 가로놓인 허공 을 섬단하는 열 개의 빛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복마성에 나타났던 열 명의 복면인들이었다. 그 가운데 비정한 애꾸눈의 복면인 도 있었다. 그는 바로 상지준으로 모습을 바꾼 관해영이었다. 공동묘지. 떠다니는 혼령과 망령이 너울거리 는 죽음의 땅. 십 인의 복면인들이 내려선 곳이었 다. 그때 불현듯 그들 앞으로 한 가닥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통천만세." 맨 앞에 선 용만후는 더 나직한 음 성으로 말했다. "군림천하." 용만후의 음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주위로 갑자기 환한 횃불이 기다렸다는 듯 올려졌다. 그들의 바로 일 장 앞에 있는 무덤 위에는 얼굴에 청동가면을 쓴 인물이 밤의 천신(天神)인 양 우뚝 서 있었 다. 가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은 으스 스한 한광을 줄기줄기 쏟아내 접하기 만 해도 오금이 저려 왔다. "계주님을 뵈옵니다." 관해영의 눈에 은은한 놀람의 빛이 어렸다. '저 자가 신비의 통천계주(通天界 主)?' 통천계주는 나타난 십 인을 한 차 례 음유롭게 직시한 후 중후한 음성 을 흘려냈다. "너희들도 이들과 합세하라." 슷! '이들은 어디서 온 자들일까? 통천 계는 복마성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세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통천계주의 나직하면서도 육중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지금부터 주의할 일은, 앞으로 여 하한 경우에도 절대로 입을 열지 마 라. 서로 말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명을 어길 시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 아라." 관해영은 이 한 마디에 이미 통천 계주의 속셈을 간파했다.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뜻이 군. 또한 계주는 복면인들의 신분이 서로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 다.' 그렇다면 이들 복면인 이십 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인물이라는 뜻 이 된다. "따라 오너라." 슷! 통천계주가 가볍게 몸을 움직였나 싶더니 그는 이미 십 여장 밖을 쏘아 가고 있었다. 그의 신법으로 보아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알 수가 있었다. '나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 지 않구나.' 통천계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관해영은 내심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변장한 게 밝혀진다면 통천 계주와 복면인들의 합공을 결코 이겨 낼 수 없을 것이다. 스슷! 그림자 없는 인간들인 양 그들은 통천계주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질이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4 장 (고금 제일인 2 ) 2. "멈춰라." 통천계주는 어느 거대한 절벽 앞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이어 장난하듯이 한쪽을 쓰다듬었 다. 그그그그긍! 그러자 육중한 마찰음과 더불어 절 벽의 한쪽이 밀려나며 하나의 통로가 나타났다. '굉장한 기관장치군. 이런 곳에 은 거지를 만들어 놓다니! 그런데 이런 기관을 해 놓았다는 것은 남들이 쉽 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일 텐데…….' 의문은 또 있다. '통천계주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이 정도의 기관까지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그때 통로 안으로 막 걸음을 옮겨 놓은 통천계주는 또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절대로 소음을 내지 마라. 등세욱 의 이목은 너무 예민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이미 지하석 실에 이르러 있었다. "……!" 통천계주는 한 손을 들어 조용히 일행을 정지시켰다. "이곳에서 분산해서 숨어 있어라." 통천계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십 인의 복면인들은 각기 안개처럼 흩어 졌다. 문득 흩어지는 인물들을 바라보며 통천계주가 속삭이듯 음성을 흘려냈 다. "냉고(冷姑)!" 순간 여인의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 다. "전 여기 있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듯 한 여인이 통천계주의 앞에 나타났다. 여인의 음성을 듣는 순간 관해영의 눈에는 놀라는 기색이 번졌다. '냉고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틀 림없이 타미도 있겠군!' "등세욱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타미와 함께 있습니다." "타미를 벽경으로 알고 있느냐?" "계주님의 분장이 너무도 고명하고 또 행동이 벽경과 한 치의 틀림이 없 기 때문에 등세욱도 꼼짝없이 속고 있습니다." 통천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毒)과 염기제령무는?" "벽경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별 의심이 없는 모습으로 납이 든 음식 을 그 동안 꽤 먹었습니다." "……!" "그리고 타미가 은근히 염기제령무 를 펼치고 있기에 모르긴 해도 등세 욱의 기(氣)가 많이 손상되었을 겁니 다." 통천계주의 입술 사이로 득의에 찬 흉소가 흘러나왔다. "흐흐…….! 그 정도면 등세욱과 격 돌해도 나에게 승산이 있겠군." 두 사람은 서서히 석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석실의 한쪽 벽에 몸을 숨기 고 있던 관해영의 눈빛이 음유로운 광채를 뿌렸다.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겠군.' 관해영은 석실의 내부를 빠르게 응 시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십 명의 눈이 지금 이 순간에도 빛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석실만 지켜보고 있어서 움직이는 날에는 저들의 눈에 발각되기 십상인 데…….'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모험을 하는 수밖에 별 도 리가 없다. 이곳에 온 자들 중에 나 의 영형환위(影形換位)의 신법을 눈 치챌 자는 용만후 정도 뿐이다.' 관해영의 눈빛이 결단으로 굳어졌 다. '이미 시작된 일이다. 운명은 하늘 이 정해 준다.' 스으으으으―. 돌연, 관해영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트러지는가 했더니 이내 그 자리에 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마치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 린 극고의 신형. 그러나 끝내 염려했던 대로 용만후 의 눈을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 다. '으응! 저 놈이……?' 이어 막 신형을 움직이려는 순간에 그 보다 한 발 앞서 관해영이 사라진 곳으로 또 한 명의 복면인이 나타났 다. 스슷! 용만후의 눈에 은은한 기광이 스쳐 갔다. '이 자도 방금 들어간 자의 신형을 간파했다는 말, 그렇다면 이 자 또한 절대 나의 하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 주쳤다. "……!" 그 순간 용만후는 이 시선이 어디 선가 많이 본 듯한 눈빛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눈에 익은 눈빛이다.' 그러나 계주의 엄명이 궁금증보다 는 무서운 것이기에 참아야만 했다. 그들은 눈빛만을 교환하고 관해영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석실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 다. 석실로 들어선 관해영은 일시 방향 을 잡지 못하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 다. '냉고와 계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 가?' 그는 귀를 땅바닥에 밀착시켰다. 이른 바 천리신통(千里神通)이라는 지청술을 펼친 것이다. '왼쪽 두 번째 석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늘 그래왔지만 그의 행동은 항상 생각을 앞지르는 것이었다. 잠시 후, 관해영의 신형은 왼쪽 두 번째 석실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銓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4 장 (고금 제일인 3 ) 3. 석실. 한 명의 여인과 청수한 노인이 있 었다. '저 노인은……?' 막 두 사람을 발견한 관해영의 눈 이 심하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 나에게 태극육합일 주공을 전수해 준 저 노인이 바로 등 세욱이었다니!'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태극육합일주공을 전수해 주었기에 은인으로 생각해 온 저 노 인이 그토록 자신이 꺾으려고 애써 왔던 인물이라니……. 거기다가 사운악의 사부이니 자신 에게는 숙명의 적이 아니던가? 관해영의 시선이 노인과 마주선 여 인을 향했다. '저 여인은 바로 타미가 분장한 여 인일 것이다. 등세욱 같은 고수에게 는 어설픈 역용술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 그래서 얼굴이 흡사한 타미를 나 이가 들게 분장시켜 등세욱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때, 노인 등세욱은 타미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벽경! 네가 돌아와 주니 무척 고 맙구나." "……!" 벽경, 아니 벽경으로 분장한 타미 가 아무런 말도 없자 등세욱은 긴 한 숨을 들이쉬었다. "음! 이곳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너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구 나." 어쩐지 무수한 고뇌가 서려 있는 음성이다. 타미는 젖은 듯한 눈을 허공에 던 지며 허탈한 음성을 토해냈다. "저는 할말이 없어요." "아직도 이 등세욱을 원망하느냐?" "……!" "이곳에 있기 싫으면 언제든지 이 곳을 떠나도 된다. 청운이 널 강제로 데려온 모양인데 조부의 명(命)이라 고 보기 싫은 날 억지로 대할 필요는 없다." 타미의 시선이 등세욱의 얼굴을 향 했다. "어쨌든 당신은 저의 부군이 아니 신가요?" "……!" "제가 당신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이십 년 동안 당신을 괴롭혔으니 이제라도 당 신을 곁에서 돌보아 주는 것이 아내 된 여자의 도리라 생각해요." "아내로서의 도리뿐인가?" "미안해요. 당신을 좋아했던 마음 보다는 당신을 원망했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 같아요."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관해영은 또 다른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모용벽경이 등세욱의 부인이라니! 기이한 일이군. 저토록 나이 차이가 많거늘 어떻게 결합을 했을까?' "……." '헌데 저 두 사람의 대화로 보아 등세욱과 모용벽경은 정상적으로 결 합된 것이 아닌 듯하군!'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천하의 등세욱이 이젠 한 여자의 동정이나 받아야 할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묘한 허무가 앙금처럼 깔린 음성이 다. "벽경! 그대가 돌아왔을 때 본인이 왜 그대와 부부의 정을 나누지 않았 는지 아시오?" "…….!" "당시 당신이 염기제령무를 추게 됨에 따라 우리는 결합이 되고 결국 부부가 되었지만 사실 나는 염기제령 무의 섭혼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오." "……!" 가늘게 흔들리는 타미의 눈빛. 누가 보더라도 모용벽경의 행동과 지극히 닮아 보였다. "그렇지만 당신이 염기제령무를 추 었기에 그대가 나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고, 본인 또한 그대에게 마음 이 있었기에 일부러 공력을 끌어올리 지 않아 염기제령무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오." 창연히 허공을 응시하는 등세욱의 시선 속에서 무수한 고뇌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그 후, 난 당신이 염기제령무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춤을 추었다는 것을 알고 무척 놀랐었소. 때문에 그 섭혼무를 가르쳐 준 사람을 누차 물 었지만 그대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았던 것이오." "……!" 여인의 눈빛이 또 한 번 흔들렸다. "본인이 과거를 들춰내는 것은 당 시 나의 오판으로 인해 그대의 인생 이 얼룩졌기 때문에 다시 만난 지금 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당신의 손목을 가까이 하는 것도 그 대에게 죄악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 오." 등세욱! 천하를 오시하고도 남을 이 위인에 게도 이런 절실한 사랑의 감정이 있 었다. 관해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세욱은 진실로 모용벽경을 사랑 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나이를 떠나 저토록 강한 집착력을 요구하는 것일 까?' 상황은 확실해진 것이다. 등세욱. 그 희대의 마웅은 결국 모용벽경에 게 자신의 의지를 전하기 위해 행동 의 억제를 해왔던 것이다. 문득 등세욱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 앉으며 서서히 타미를 응시했다. 銓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5 장 (충격의 비사 1 ) 제 45 장 충격의 비사(秘事) 1. "벽경! 한 가지만 묻겠소. 이 등세 욱을 사랑하시오? 아니면 지금도 본 인을 원망하시오?" 타미는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음성 으로 말했다. "저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요. 예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기에 앞서 당 신을 하늘처럼 존경했을 뿐이고 지금 도 존경해요." 그 말을 들은 등세욱의 얼굴에 일 말의 허무감이 서렸다. 그래도 그는 모용벽경이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 차이를 떠나 그 는 사랑에 목마른 뜨거운 심장의 사 내일 뿐이었다.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운명에 순종할 뿐이란 말이 군." " !"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기묘한 침 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괴로웠던지 등세욱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몇 번씩 묻는 말이오만 아이는 어 떻게 되었소." "말씀드렸잖아요. 이리로 올 것이 라고 !" "아들이라고 했었지 그 녀석이 빨 리 보고 싶소." 중얼거리는 등세욱의 얼굴에 희미 한 미소가 번졌다. 이 일대마웅도 부 모의 정만은 어쩌지 못하는 것 같았 다. 더구나 평생 고독과 벗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사랑을 느끼고 또 거기서 얻은 사랑의 산물이니 애착이 유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관해영은 그런 등세욱의 모 습을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 다. '고금 제일의 절대자에게도 혈육의 정이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이 군. 그것을 이용하는 통천계주는 더 욱 악랄한 인간이고 !' "할아버지가 올 때가 되었는데?" 타미는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듯 석 실의 입구를 응시했다. 등세욱도 덩달아 석실 입구를 응시 하더니 가볍게 시선을 돌렸다. "운기조식을 해야겠으니 그만 나가 보시오." 타미의 시선이 의아로운 빛을 발했 다. "왜 운기조식을 자주 하세요? 전엔 볼 수 없었던 일인데 ." 그녀의 말에 등세욱의 입가에 허전 한 미소가 영글었다. "벽경, 몰라서 묻소?" " ." 처연한 등세욱의 물음에 타미는 할 말이 없었다. 뭘 모른다는 것일까? 정체가 발각되지 않으려고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 그녀로서는 섣불리 아 무 말이나 꺼낼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염기제령무 때문이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자꾸 염기제령무를 추는지는 몰라도 이젠 그만 두시오." 그의 말에 타미는 흠칫 놀랐다. 혹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일까? 하비난 그렇다고 보기엔 등세욱의 태 도는 너무 부드러웠다. "사실 당신에게 싫은 내색을 않기 위해 참아 왔지만 피곤하오. 나의 공 력으로 염기제령무에 완전히 걸리지 는 않았지만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의 욕정은 감내 해야만 했었소." " …!" "욕정을 느끼면서 해소를 하지 못 하면 기(氣)가 상하기 마련, 기(氣)를 중시하는 절대고수에게는 조금의 기 (氣)라도 상하는 것이 엄청난 타격이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 이오." 그렇다. 기(氣)란 자연스런 흐름이 다. 그런데 그걸 억지로 누른다면 정신 의 피로와 함께 육체의 피폐가 찾아 온다. 염기제령무의 유혹이 너무 강하기 에 그걸 누르려고 많은 진력을 소모 하고 다시 그 진력을 보충하기 위해 등세욱은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자주 운기조식을 하는 것 은 그 잃어버린 기를 찾기 위해서 요." 그런데 타미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 며 나직이 흐느끼는 것이 아닌가? "흐흑!" 돌연한 타미의 울음에 등세욱은 당 황하고 말았다. "왜 우시오?" "죄...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 고 단지 매력 있게 보이기 위해 그 랬던 것뿐인데……." 놀라운 연기력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현숙한 한 여인이 마음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흐느끼는 것이었다. 이미 사랑을 목마르게 갈구하고 있 는 등세욱은 이런 타미의 연기력을 눈치챌 수가 없었다. 사랑엔 눈이 먼다고 했던가? 천하 의 등세욱이라도 모용벽경 앞에선 한 낱 필부의 감정을 벗어날 수가 없었 다. 모용벽경의 마음을 얻는 게 급했으 므로 그는 눈 앞의 상대가 가짜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고의 기재라는 그가 이토록 감쪽같이 속을 수는 없 는 것이다. "그만 우시오. 이는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의 그 마음이라면 이 등세욱은 이미 괜찮은 것이나 다 름없소." " !" 타미는 말없이 등세욱의 얼굴을 응 시했다. 젖은 듯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관해영은 그런 타미를 지켜보며 내 심 감탄했다. '타미의 연기가 기가 막히군.' 그러는 사이에, 등세욱은 어느덧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 갔다. " !" 타미는 슬쩍 등세욱을 응시하고는 석실을 빠져나갔다. 관해영은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가 엉거주춤 결정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타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끄러지듯 석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 이 아닌가? 이어, 그녀는 고양이처럼 등세욱 의 등뒤로 다가갔다. 헌데 그녀의 손엔 한 자루의 날이 시퍼런 비수가 들려져 있었다. 관해영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타미가 등세욱을 암습하려 하고 있다.' 운기조식 중에 암습을 받는다는 것 은 아무리 개세고수라도 치명적인 타 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윽고, 타미의 손에 들린 비수가 섬광처럼 내리꽂혔다. 비수가 향하는 곳은 등세욱의 백회 혈. 절대절명의 순간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 었다. "타미! 멈춰라!" 관해영이 한 소리 외침과 함께 타 미에게로 날아갔다. 이때, 등세욱은 관해영의 외침에 위기감을 느끼며 무인 본능의 감각으 로 자신도 모르게 사력을 다해 몸을 틀었다. 허나, 그는 너무도 방심하고 있었 기에 타미의 암습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팟! 등세욱의 어깨에서 피가 한 줄기 치솟았다. 급해 몸을 트는 바람에 등을 향하 던 비수가 어깨를 찌른 것이다. 주르 르 석벽으로 밀려난 등세욱의 눈에 불신의 격랑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벽경, 이것이 무슨 짓이오?" 그러나, 타미는 등세욱의 불신 서 린 물음보다는 관해영의 얼굴을 응시 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군데 저를 알고 있죠?" 너무도 놀라서인가? 지금의 타미는 자신이 모용벽경으 로 변신한 것도 잊고 본래의 음성으 로 묻고 말았다. 모용벽경의 젖은 듯한 중년 여인 의 음성은 사라지고 소녀의 청아한 음성이 터져나온 것이다. 관해영은 얼굴의 복면을 벗어 내렸 다. 순간, 등세욱과 타미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 그 안에서 나타났 다. "관해영!" 타미의 음성이 반가움과 놀라움의 탄성을 토했다. "자네는?" 등세욱은 너무도 뜻밖이어서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요, 노인 어르신." 등세욱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네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자세한 것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 니다. 노인 어른! 지금은 이곳을 빨 리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가?" "지금 이곳에는 노인장을 노리는 무리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실 저 도 그들 중 일 인이었죠." 등세욱이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저 었다. "믿을 수 없네. 이곳은 아무도 들 어올 수 없는 곳이거늘 !" "본인의 말은 불행히도 사실입니 다. 그리고 또한 이 여인은 모용벽경 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처음엔 흠칫 놀랐으나 등세욱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음 성이 결코 모용벽경의 음성이 아니라 는 걸. "타미! 분장을 지워라." 타미는 관해영의 말에 잠시 머뭇거 렸다. 하지만 그녀가 어찌 관해영의 말을 거역할 수가 있는가? 그녀는 이내 얼굴의 분장을 지우고 말았다. 순간, 등세욱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 러졌다. 현숙하고 청결해 보이던 모용벽경 의 사십대 얼굴은 어디로 가고, 대신 모용벽경과는 흡사한 십팔구 세 가량 의 소녀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등세욱의 얼굴에는 분노의 물결이 노도처럼 일어났다. "감히 어떤 자가 이런 짓을 !" 그것은 자신에 대한 통탄이기도 했 다. 남의 음모에 빠져 사람도 구별 못 하다니……? 등세욱으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이때, 밖에서 석실 쪽으로 걸어오 는 이 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摸� 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5 장 (충격의 비사 2 ) 2.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통천계주 와 냉고였다. "흐흐! 등세욱! 오늘이 네놈의 최 후가 될 것이다." 통천계주의 음침한 조소에 등세욱 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는 상대가 이 음모의 주관자라는 걸 짐작한 것이다. "넌 누구냐?" 무섭게 침잠된 음성이었으나 상대 방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이 절대고수는 이미 부상을 당한 몸이 아닌가? 통천계주의 입장에선 부상당한 등 세욱이라면 결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흐흐! 궁금하겠지. 감히 고금 제일 인으로 불리는 등세욱을 이렇게 우 롱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 통천계주는 음침한 괴소를 지으며 얼굴에 썼던 청동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 놀랍게도 청수하기 이를 데 없는 학자풍의 노인이었다. 얼굴에서 풍기는 은은한 기품과 인 자한 생김새는 공포의 통천계주라는 신분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다만 눈에서 번들거리는 살기가 그 가 음험한 인물이란 걸 말해 주고 있 을 뿐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등세욱은 너무도 놀라 몸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움쩍도 않을 등세욱이 아닌가? 그런데 상대가 누구기에 이토록 놀 라는 것인가? "모용청운 그대가?" 등세욱의 경악성을 듣는 순간 관해 영도 놀라고 말았다. '모용청운이라면 모용벽경의 조부 가 아닌가? 이것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 역시 혼돈에 빠져 멍하니 통천 계주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침묵이 잠시 석실 안을 짓눌렀다. 그것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모 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문득, 등세욱은 허탈한 표정으로 모용청운을 응시했다. "천하에 오직 한 명뿐인 지기라고 여겼던 그대가 음모의 조종자였다니 , 믿을 수 없군." 관해영은 그때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등세욱은 오직 천하에 단 한 사람 모용청운만을 믿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 던 이곳의 기관작동법을 그에게는 알 려주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의문이 풀려 가는 순간 이다. 등세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그대는 예전부터 이 등 세욱을 없앨 음모를 꾸미고 있었군. 모용벽경과의 사건도 그대가 획책한 것이고!" 모용청운은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 에 떠올렸다. "그렇네." 부르르―. 모용청운의 확인에 등세욱의 신형 이 마구 떨렸다. 아마도 그는 상대가 부인해 주기 바랐는지도 모른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엔 등세욱이 겪을 충격은 너무도 컸기 대문이다. "노부는 원래 야심이 많은 몸, 헌 데 너 등세욱이 나타남으로 인해 노 부의 야심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 다." "그랬었군." "흐흣! 해서 노부는 장구지계를 쓴 것이지. 무림의 현자로 변신을 한 것 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고, 그로 인 해 너에게 접근하여 관포지교를 맺게 된 것이다." 실로 무서운 말들이다. 그리고 무 서운 인물이었다. 야망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때 를 기다린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벽경을 이용한 것은?" "그대를 이 중원에서 은퇴시키기 위해서지. 평생 독신으로 지낸 너에 게 벽경을 옆에 있게 했다. 너는 노 부의 예상대로 나이를 떠나 벽경을 사랑하게 됐고, 그 사랑 속에서 괴로 워했었다." 등세욱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더불어 전신에 흘러내리는 분노의 물결은 거칠고 사나웠다. "으음, 모용청운! 네놈이 자신의 혈 육까지 야욕의 재물로 삼을 정도로 비열한 인간일 줄은 몰랐다." "흐흣! 날 높이 평가해 주니 고마 울 따름이군." 모용청운은 등세욱의 분노 따윈 신 경도 쓰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본인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으음!" "벽경과 너를 염기제령무로 결합을 하게 한 후 노부는 너를 단호히 윽박 질렀다. 기억하느냐?" "그렇다." 분노가 너무 극에 달하면 이토록 침착해지는 것일까? 등세욱의 눈빛과 음성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가 고 있었으니. 그건 그가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른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벽경을 좋아해서 그녀 와 결합은 하였지만 친구의 손녀와 맺어졌다는 죄의식 때문에 무척 괴로 워했었다." 돌아보기 싫은 과거. 그러나, 등세욱으로서는 그때처럼 세상에 태어나 고심하고 그 고심 속 에서 사랑을 감수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계획된 음모였다 니……. 그로서는 땅을 치며 통탄할 일이었 다. "헌데, 그대가 날 인면수심의 인간 으로 몰아 버리자 노부는 그 죄책감 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때 그 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 등세욱! 그대의 죄를 씻으려면 그대가 이룩 한 마도천하를 모두 없애라. "그래서 노부는 마절궁을 해체하고 수하였던 사대신장을 사대벌왕으로 만들어 천하에 악인을 모두 응징한 것이다." 오! 그랬단 말인가? 얽혔던 실타래가 풀리듯 술술 풀 리는 비사(秘事)! 무림인들이 가장 궁금해 하던 의혹 은 이렇게 밝혀지고 있었다. 관해영은 이순간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 오는 것을 느꼈다. '아! 마절궁이 갑자기 사라지고 사대벌왕이 나타난 연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그렇게도 의문 투성이었던 사건들. 그 사건 뒤엔 사랑과 음모가 뒤엉 켜 있었고 고금 제일이라 불리는 절 대자의 사련(邪戀)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모용청운은 얼굴 가득히 음 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자신의 장구지계가 성 공한 데에 따른 만족의 표시였다. "그때 넌 조금도 의심치 않고 노 부의 말을 이행했기에 노부는 힘들지 않고 무림을 장악할 기반을 만들 수 가 있었다." 등세욱은 처연한 얼굴로 입술을 깨 물었다. "그렇군. 모든 것이 너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셈이군." "흐흐흐 !" 모용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희열에 찬 괴소를 흘렸다. 무림이 열린 이래 로 가장 뛰어나다는 등세욱. 그 등세 욱을 자신이 마음껏 농락했으니 스스 로가 생각해도 대단했던 것이다. 등세욱이 눈빛을 빛내며 모용청운 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알아두어라. 사대벌왕에 의해 무림의 정기(正氣)가 다시 살아 났기에 너의 그 더러운 야욕은 분쇄 되고 말 것이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모용 청운의 입가에 한 줄기 비릿한 조소 가 서렸다. "노부가 그렇게 어리석은 자인 줄 아느냐, 등세욱?" " !" "사대벌왕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노 부의 조정을 받고 있었다." "그럴 리가?" 등세욱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흐흐흐 너를 없앤 후 나와 함께 천하를 지배하기로 약조를 한 것이 다." "사대벌왕이 네놈과 " 등세욱은 정신이 아득해 옴을 느꼈 다.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5 장 (충격의 비사 3 ) 3.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자신이 가장 아꼈던 사대벌왕이 이 미 이 모용청운과 손을 잡고 있었다 니 말이다. "놀랐느냐, 등세욱?" "역시 너는 무서운 놈이군." "흐흐흐,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겠다." " ?" "사실 사대벌왕에 의해 잡힌 악인 들은 응징되기는커녕 사대벌왕에 의 해 더욱 고강한 고수로 키워졌다. 그 들은 곧 천하를 마음껏 유린할 것이 다." 이건 충격이었다. 그동안 자신은 무림에 대한 죄를 씻고 있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도리 어 악을 키워 온 것이 아닌가? 지난 세월의 고심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그는 인생만 낭비한 것이다. 회한과 분노에 등세욱의 안면이 참 담하게 일그러졌다. 바람도 없는데 떨리는 턱 밑의 수 염. 태어나 이토록 바보가 되어 본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노부는 결국 무림에 더 큰 화를 불러들인 셈이군." 무엇 때문인지 모용청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셈이다. 사대벌왕이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했으니 말이다." "사실 사대벌왕는 모두 나와 손잡 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근자에 이르러 의성보와 현정금도문 은 혈사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혈사무!" "암중으로 무림의 패권을 노리는 세력이다. 그들이 사대벌왕 중 두 곳 만 손잡음으로써 무림의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차라리 사대벌왕이란 존 재가 없었으면 너와 나의 싸움으로 끝났을 텐데 말이다." 다시 모용청운의 뇌까림이 이어졌 다. "도대체 혈사무주가 누구이기에 사 대벌왕의 두 세력을 포섭했는지 아직 도 모르겠다." "……." "하지만 상관없다. 그 누구라도 내 앞을 막는 자는 죽음뿐이니까." 모용청운의 얼굴엔 상대에 대한 조 소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 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등세욱을 무너뜨린 그에게 그 누가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때, 등세욱의 얼굴이 차갑게 굳 어지며 그의 전신에서는 구름 같은 신위가 피어올랐다. "모용청운! 너의 음모는 완벽했다." 이 뜻밖의 변화에 모용청운이 놀라 며 등세욱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너는 한 가지 실수를 한 것이 있다." "실수라고 ?" "바로 이 등세욱이 살아 있다는 것 이다. 그대나 사대벌왕은 결코 이 등 세욱의 적수가 아니다." 자신에 찬 등세욱의 말에 모용청운 은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과거에는 그랬었지. 그 러나 너는 너의 처지를 좀더 자세히 알았어야 했다." " !" "너는 이미 염기제령무에 의해 본 신의 기(氣)가 많이 상해 있고 부상 을 입었다." 그의 말에 등세욱의 안색이 변했 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절대고수의 싸움에 있어선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차이라도 내기가 손상 되었다는 것은 이미 승기가 절반쯤 상대에게 넘어갔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등세욱은 어깨에 상처까지 입고 있으니 더욱 불리한 것이다. "거기에 넌 이미 독(毒)에 중독되 어 있다." 순간 등세욱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 들렸다. 독이라니 ? 등세욱은 자신도 모르 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냐? 이 등세욱이 스스로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없 는 독도 있단 말이냐?" 등세욱의 의문에 찬 물음에 모용청 운은 단호히 대꾸했다. "없다." "없다고 ?" 등세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 다. 독에 중독되어 있다면서 중독을 느낄 수 없는 독은 없다니……. 설마 모용청운이 이 상황에서 말장 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 같은 고수라면 어설픈 독은 통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식물 속에 조 금씩 섞어 넣은 납이라면 너로서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납 !" "납은 당장 생명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지만 진기를 운용할 때는 신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등세욱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했 다. 그제서야 등세욱은 일이 심상치 않 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납이라면 자신도 눈치챌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아는 모용청운이 라면 능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기 때 문이다. "등세욱!" 흔들리는 등세욱의 심경을 읽어서 일까? 그를 부르는 모용청운의 음성 은 단호하면서도 힘이 차 있었다. "고수와의 대결에서는 조금의 빈틈 도 곧 생명과 직결선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노부는 지금 노부 의 무학이면 능히 너를 이길 수 있으 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으나 마음 한 구석 억년 기암처럼 짓 눌러 오는 이 압박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모용청운은 품 안에서 하나 의 단봉을 꺼내 들었다. 챙! 그가 단봉의 하단부를 가볍게 뒤 틀자 보잘 것 없던 단봉은 순식간에 하나의 찬란한 금창(金槍)으로 화하 는 것이었다. "좋은 무기군." "흐흐흐 등세욱, 너의 생명을 끊어 줄 탈명금창(奪命金槍)이다." "아……!" 등세욱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는 탄 성이 새어나왔다. 탈명금창! 호신강기만 전문적으로 파괴한다는 고금 삼대신병 중의 하나로 사용하는 사람의 내력에 따라 그 위력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전설의 무기 였다. 우우웅! 모용청운이 탈명금창을 가볍게 내 저었는 데도 웅혼한 소리와 함께 차 가운 예기가 퍼져나왔다. 등세욱도 방심을 못하고 진기를 끌 어올렸다. 순간 등세욱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 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그런 등세욱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모용청운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지금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다 고 생각하겠지?" 속을 들여다본 듯 물어 보는 모용 청운의 질문에 등세욱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 지만 납의 효능은 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발휘될 것이다. 즉 십이 성의 공력을 끌어올릴 때 영향을 주 는 것이다." 모용청운의 자신만만한 말에 등세 욱의 안색은 침중해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오늘 고전을 면치 못하게 뻔했기 때문이다. 스으으으으―. 터질 듯한 긴장의 와류가 두 사람 사이에 소용돌이쳤다. 절대고수들답게 무형의 기운이 석 실을 잔뜩 압박하고 있었다. " !" 두 사람은 이미 운명을 건 대치에 들어선 것이다. 고금무적의 고수라는 마황천자 등세욱과 무서운 야욕을 가 슴에 숨기고 있는 효웅 모용청운. 천 하제일좌를 건 건곤일척의 승부인 것 이다. 등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6 장 (혈전속의 무공수련 1 ) 제 46 장 혈전(血戰) 속의 무공수련(武功修鍊) 1. 스― 스슷―! 최초의 움직임은 모용청운의 탈명금 창에서 시작되었다. 허공에서 한 번 용트림을 하듯 빙글 회전시킨 금창은 그대로 등세욱의 전 신을 수십 방에서 찔러 오는 것이었다. 콰우우우우―! 대기를 섬단해 가는 섬전류와 더불 어, 수백 개의 환영을 창출하며 밀려드 는 창극은 이미 인간의 몸에서 펼쳐진 무학이 아니었으니 . 그러나, 상대는 불세출의 무인이라는 마황천자 등세욱이었다. 추릿! 뱀이 숲을 빠져나오듯 그의 허리에 서 종잇장처럼 얇은 연검이 오싹하도 록 검은 검신을 드러내는가 했더니, 파츠츠츠츠! 어둠을 삼켜 버린 악마의 이빨처럼 그의 손에 들린 한 자루의 연검이 눈 부신 속도로 허공에 수많은 검화(劍花) 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치치칫! 기와 기(氣)가 엉켜붙으며, 두 사람 의 검과 금창에서 오싹한 소음과 불꽃 이 일렁거렸다. 한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빠르게 움 직였다. 금창에선 수십 줄기의 광망이 폭사 되고 연검에서 파도 같은 검기가 쏟아 져 나갔다. 탕! 탕! 불꽃이 번뜩이며 두 사람의 몸이 수 십번 붙었다 떨어지곤 했다. 옆에서 보고 있는 관해영으로선 두 사람이 무슨 수법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신형이 환상 처럼 엇갈리는가 싶었더니, 등세욱의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모용청운! 네가 마갱(魔坑)의 후예 였다니 !" "흐흐흐 역시 등세욱다운 안목 이다." 그의 말은 등세욱의 말을 시인한다 는 뜻이었다. 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던가? 마갱(魔坑). 천 년 전의 무림인들이라면 . 아니, 그 당시에 무림인이었던 그 후 예들이 있다면 이 공포와 전율의 이름 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죽음과 피. 인간이 어찌 그토록 잔인할 수 있으 며 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당시 무림인들의 공포요, 의문이었다. 장강의 물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중 원십팔만 리 광대한 대지는 널려진 시 신으로 악취를 풍겼으니 …. 그러기를 백 년, 역사의 흐름이었을 까? 아니면 달이 차면 기울 듯이 대자연 의 철칙의 생태였을까? 마갱은 자파의 분열로 멸망했다는 소문만을 남기고 중원에서 영원히 자 취를 감추어 버렸다. 헌데 말이다. 이 모용청운이 그 마갱의 후예라니. 번쩍! 독사의 혓바닥처럼 오싹해 보이는 등세욱의 검이 가공무비한 속도로 모 용청운의 전신을 향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콰우우우우―. 또다시 일어나는 희대의 대거력. 잘못 한눈을 팔다가는 뼈 한 조각도 추릴 수 없는 절대고수들의 격돌! 꽈지지지직! 우르르르 꽈꽝! 사방의 석벽이 두부처럼 잘라져 나 가는가 했더니, 요동치는 기류에 의해 두 사람의 장포 자락이 찢어질 듯이 펄럭이는 것이었다. 오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 겠는가? 한 번의 움직임에 백팔 번의 방위 이동과 몸놀림이 숨막히게 이어졌고, 검이 한 번 움직이니 그것은 또 서른 여섯 번의 공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 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등세욱은 전신의 기(氣)가 서서히 흐트러지고 있 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납의 중독으로 인해 진기가 흐 트러지고 있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은, 한 위대 한 마인의 위태로운 목숨처럼 영글고 있었다. 이때, 모용청운과 함께 나타난 냉고 는 관해영에게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관해영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등세욱 은 지금쯤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해영 때문에 그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녀로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이런 곳에서 네놈을 또 만나게 되 는구나." 이를 가는 듯한 그녀의 음성에 관해 영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 네놈이 어떻게 살아 왔는 지는 모르나 다시는 본녀의 앞에 나타 날 수 없게 만들어 주겠다." 관해영은 싱긋 웃었다. "후후후, 무슨 소리를 . 그때는 본인이 선물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보 답은 당연히 이 관해영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의 빈정거림에 냉고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그 주둥이는 여전하군." "당신의 그 잔인함도 마찬가지요." 관해영은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그 모습에 냉고의 분통이 더욱 터졌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눈앞의 관해영이 예전의 관해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네놈의 그 주둥아리부터 부숴 주겠 다." "얼마든지 !" 휘류류류류―. 돌연, 냉고의 몸이 풍차처럼 회전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지옥 문턱을 휘몰 아쳐 가는 싸늘한 냉기가 관해영을 향 해 회오리처럼 밀려드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 어마어마한 폭풍 속에서 냉고의 소수(素手)가 춤추듯이 수십 갈 래의 수영(手影)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은 무거운 음강지기(陰 之氣)였 다. 관해영의 그녀의 음강이 자신을 단 숨에 박살낼 듯이 덮쳐 들어도 눈 하 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호호호!" 냉고는 관해영이 얼어붙었다고 판단 하고는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가라!" 그녀는 일장에 박살낼 양으로 관해 영의 정수리를 향해 희디흰 소수를 쭉 뻗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삼일 후, 괄목상대라고 무림인에게 있어 적을 경시하는 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그 사실을 말 이다. 없�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6 장 (혈전속의 무공수련 2 ) 2. 스스슷! 관해영의 손에 들린 죽검이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어린아이가 막대기를 휘 젓듯 가벼운 손놀림, 하지만 바로 대연 일검인 칠금교탈이 펼쳐지고 있는 것 이다. 파아팟! 냉고가 전력을 다해 펼쳐 낸 음강지 기는 관해영의 검세에 의해 장막이 갈 라지듯 와해되고 그 사이로 밀려드는 것은 뼈를 에이는 듯한 검기였다. '헉!' 냉고는 이 기막힌 현실에 그녀의 교 구를 떨었다. '이 이럴 수가? 놈이 단 몇 달 사이에 이렇게 강해져 있었다니 말도 안 된다.' 사실, 인간이라는 속물은 어떤 놀라 움을 보면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불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 는 법이다. 그녀는 자신이 관해영보다 약하다는 걸 느끼고 피했어야 했는데 불신으로 인한 반발 때문에 자신의 소수음공을 극성까지 끌어 올렸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공격이 관해 영을 물리치진 못해도 자신의 몸 하나 는 지킬 수 있다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란 걸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 지 않았다. 그녀의 맹렬한 공격에 관해영의 죽 검에서 일어나던 검기가 잠시 주춤하 는 것 같더니, 어느 한 순간을 빌어 하 (下)에서 상(上)으로 벼락같이 그어 올 려졌다. 번쩌억!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는 천홍월성이 그 끔찍스런 위력을 드러낸 것이다. 순간, 냉고는 보아야만 했다. 무엇인가 창백한 빛이 느닷없이 나 타났다가 환상처럼 사라진 것을 . 그 빛이 무엇인가를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덩달아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 지는 선렬한 피보라를 보았다. "악!" 여인의 비명은 짧고 날카로웠다. 쿵! 둔탁한 괴음에 이어 냉고의 신형은 두 가닥으로 갈라진 채로 허무한 죽음 을 맞이하였다. 쓰러진 그녀의 두 눈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라움을 담고 한껏 치켜져 있었다. "윽!" 갑자기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관해 영의 시선이 등세욱에게로 향했다. 상대의 장세에 격중되었는지 등세욱 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흐흐! 천하의 등세욱도 별수 없군." 모용청운이 나직한 괴소를 터뜨리며 물러서는 등세욱에게로 덮쳐 들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강기가 쏘아질 때, "여기도 있소." 관해영의 죽검이 허공을 날았다. 까까깡! 무수한 섬광이 일렁이며 모용청운의 신형이 주춤거렸다. 그 실날 같은 순간에 관해영의 손이 품안으로 더듬었고 생전 사용한 적이 없는 혈류금봉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 을 날았다. 찰나, 슈슈슈슈슈! 허공을 섬광처럼 나는 혈류금봉 안 에서 수백 종의 가느다란 빛이 사위를 뒤덮는 것이니 . 그 가공할 가세엔 여유 만만하던 모 용청운의 얼굴도 창백하게 변하고 말 았다. "혈류금봉……!" 모용청운은 급히 신형을 날려 뒤로 피했다. 동시에 모용청운의 두 손에서 검은 빛 암경이 뻗어 나왔다. 암경은 혈류금봉을 휘감으며 무섭게 회오리쳤다. 회오리엔 말린 혈류금봉들이 서로 부딪치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 렸다. 그 모습에 관해영도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설마 모용청운의 무공이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모용청운이 냉고의 시신을 힐끗 보 고는 관해영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네놈은 누구냐?" "내가 누군지보다 자신의 앞길이나 염려하시지." 관해영의 비웃음에 모용청운이 분노 했다. "네놈은 본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 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일……." 관해영은 태연히 모용청운에게로 다 가갔다. 모용청운은 너무도 침착한 관해영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태도로 보나 냉고를 해치운 거로 보 나 만만한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 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녀석과 등세욱이 합세를 하 면…….' 그는 언제나 불길한 예감부터 먼저 떠올렸다. 그건 신중한 사람들의 천성 인지도 몰랐다. "삐익!" 모용청운이 급히 휘파람 소리를 냈 다. 밖에 있는 부하들을 부르기 위한 것 이다. 휘파람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두 명의 복면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아까 관해영이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석실로 스며드는걸 발견한 용만후와 다른 복면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계주님!" 모용청운은 어째서 그들이 이토록 빨리 나타났는지를 의심할 여유가 없 었다. 그의 정신은 온통 등세욱 제거에 쏠 려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을 제거해라." 모용청운이 관해영을 가리켰다. 관해영은 용만후와 또 다른 복면인 이 다가오자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사실 용만후만 해도 그의 무공수위 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자신을 낮추고 있어 그렇지 그의 야 심이라면 어쩌면 모용청운과 버금갈지 도 모른다. 더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복 면인도 일견해도 절도가 있는 게 보통 인물이 아닌 게 분명하다. 휘류류! 강맹한 경기가 관해영에게 휘몰아쳤 다. 예상한 대로 두 사람의 협공은 관해 영으로서 막아내기가 힘들 정도로 강 했다. 관해영은 대연신공을 펼쳐 내며 두 사람의 협공을 막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 었다. 더구나 모용청운의 신호를 듣고 석 실 밖의 복면인까지 몰려들어 상황은 더욱 불리할 뿐이었다. 관해영은 용만후와 의문의 복면인의 공세를 막아내며 등세욱의 옆으로 다 가갔다. 지금 등세욱은 복면인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이미 부상당한 몸에 복면인들 자체도 일류급을 넘어선 자들이었기 때문이 다. "괜찮습니까?" 등세욱의 옆으로 다가간 관해영이 복면인들의 공세를 대연칠검으로 막아 내며 물었다. "이 등세욱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네." 불굴의 투지가 어린 말이었으나 현 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복면인들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온 듯 연격(連擊)이 물흐르듯이 자유로 우면서도 날카로웠다. 관해영은 자기 한 몸을 보전하고 싶 은 생각도 있었지만 결코 등세욱을 놔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거늘 가는 데까 지 가 보자.' 관해영은 등세욱의 등에 자신의 등 을 대고 복면인들과 격전을 치르기 시 작했다. 등을 맞대자 좁은 공간이었기에 제 법 효율적인 수비를 취할 수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포위되었을 때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등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6 장 (혈전속의 무공수련 3 ) 3. 문득, 등세욱의 시선이 용만후와 그 의문의 복면인에게 꽂혔다. 그는 두 사 람이 다른 복면인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 던 것이다. "이놈들은 너무 강하군. 더구나 모용 청운은 평상시의 노부와 몇 수 차이가 없는 고수이거늘 !" 그는 오늘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느꼈다. 설사 자신의 예전의 상태라도 이들 을 이겨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한참 복면인들을 살피던 등세욱의 눈 에 짤막한 기광이 서렸다. 이어, 그는 전면에 있는 두 명의 복 면인을 향해 벼락 같은 고함을 내질렀 다. "네놈들은 바로 용만후와 동방백인 이구나." 벼락 같은 외침에 두 사람의 신형이 움찔했다. 그때, 한 걸음 다가서는 모용청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서렸다. "역시 네놈의 눈을 끝까지는 속일 수 없군." 모용청운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두 사람은 각기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바로 복마성주 당천 신군 용만후와 뇌영무제 동방백인이었 다. " !" 두 사람은 복면을 벗은 즉시 서로를 응시했다. 사실 이 순간 그들의 심정 또한 착 잡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 이제 보니 계주는 나만 돕는 것 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모용청운이 사대벌왕 중 자신만 손 잡은 줄 알았는데, 암중으로 또 다른 자와 손잡고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 두 사람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등세욱이 자신들의 정체를 안 이상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등세 욱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이놈들 ! 감히 나 등세욱을 배신 하다니 !" 불같은 등세욱의 노호에 용만후는 한 줄기 착잡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 다. "등세욱! 당신은 위대했소. 그리고 나 용만후는 당신의 위대함을 존경했 었소. 그러나 !" " !" "당신은 우리를 너무 강하게 키운 것이 실수였소." 용만후의 비웃음에 등세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흐흐흐 ! 인간이란 강하면 누 구에게나 야심이라는 것이 생기게 마 련인 것이오. 그 유혹에 강자들은 약하 오. 우리가 당신을 존경했던 감정보다 는 야심이라는 유혹이 더 강렬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오." "으음!" 등세욱은 무거운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가장 신임해 왔 던 수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그의 목숨을 요구하는 적이 되어 앞에 나타난 것이 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자신 의 불찰이었다. 힘이 커지면 야심도 커 진다는 걸 간과한 게 후회될 뿐이었다. 아니, 자신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는 자신감이 오늘의 화를 부른지도 몰랐 다. " !" 이 순간 등세욱은 빠르게 염두를 굴 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상황이 그에게 절대적 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일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방법이 있다니 ? 아직도 그에겐 이 밀폐된 석실에서 세 명의 초절정 고수와 그 수하들의 합격을 막아낼 최후의 절기라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다만 저 아이가 얼마나 해주는 가가 운명의 열쇠다.' 그는 힐끗 시선을 들어 관해영을 응 시했다. 벼락 같은 전음성이 관해영의 귓전으로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지금 상태로 저들을 이길 확률은 전무하네." "후후후 , 그렇다고 이대로 죽기 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소. 솔직히 노인 장이야 세상을 살 만큼 살았으니 별 문제가 아니지만 , 나는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 바둥거리는 데 까지는 바둥거려 봐야지요." " !" 등세욱의 얼굴에 왠지 웃음기가 떠 올랐다. 알 수 없는 인물. 저 나이에 하늘을 뒤엎을 무학을 지 닌 것만도 놀라운 일이거늘 .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초연할 수 있 다는 것은 그의 인간된 그릇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네. 노부도 문득 살고 싶은 마음 이 생겼네." "방법이 있겠소?" "한 가지 있다." "후후후 , 죽은 다음에는 늦을 것 이니 빨리 말해 보시오." "노부가 지금부터 한 가지 검법(劍 法)을 전수해 주겠다. 이름은 천지검법 (天地劍法)이다." 순간, 관해영은 실로 어이없다는 투 로 웃었다. "후후후 ! 아니, 지금 이 시기에 검법을 익혀 염라대왕의 호위사자라도 뽑히겠다는 것이오." " !" "언제 놈들이 달려들지 모르는 판에 검법을 전수하다니 !" "너는 할 수가 있다." 그의 단호한 말에 관해영은 흠칫했 다. "노부는 어쩐지 너를 처음 보는 순간 에 너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고 간파했다. 그래서 짜낸 방 법이다." " !" 관해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고 개를 끄덕였다. "좋소, 말해 보시오." "천지검법은 수비전문의 검법이다. 우리 두 사람이 만약 합벽검진을 펼치 면 천 명이 아니라 만 명이라도 우리 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천지검법(天地劍法)! 전설(傳說)은 말하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검법이 있으니 이는 바로 천지검법이 다. 천지검법의 특징은 오직 수비뿐인 검법으로 .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검법이 펼 쳐지는 날에는 목숨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검법의 특수성으로 인해 공격 을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 터 노부가 검법의 구결을 말해 줄 테 니 그대로만 따라 해라."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목숨을 내걸고 있는 이 와중에 검법 수련이라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이들은 지금 시도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므로 . � 물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6 장 (혈전속의 무공수련 4 ) 4. 츠팟!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복면인들. 맨 처음 뛰어든 것은 관해영의 왼쪽 을 파고드는 여덟 자루의 검이었다. 동시에 관해영의 귓전으로 파고드는 등세욱의 전음성이 있었다. "한당학도(寒塘鶴渡)! 검세를 좌(左) 로 옮겨 우(右)로 보강한다." 전음이 끝나는 순간, 스― 스스스슷! 관해영의 손에 들린 죽검이 해일의 파장처럼 음유롭게 좌에서 우로 쓸어 가는 것이었다. 츠츠츠츠츠! 그러자 두 사람의 요혈을 노리고 덤 비던 여덟 자루의 장검이 한순간에 목 표를 잃고 엉켜 버렸다. 마치, 어떤 무형의 거대한 암벽에 가 로막힌 듯 밀려나는 검들, 관해영은 직 접 그 광경을 보고도 해연히 놀랐다. '이럴 수가? 이 정도의 위력이라면 능히 수비검법으로서는 천하제일이다.' 말이 좋아 천하제일이다. 관해영이 서슴없이 천하제일이라고 단정을 할 정도의 검법이 천하무림을 통틀어 몇 개나 있겠는가? 그 위력이 너무도 뛰어나서일까? 관해영은 입가에 싱그런 미소를 지 으며 등뒤로 등세욱을 응시했다. "후후후 , 어떻소. 그럭저럭 흉내 는 내는 것 같소." 등세욱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흉내 정도가 아니다." 어떻게 내뱉은지 모르는 말이다. 사실, 등세욱으로서는 인간이 단 한 번 구결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완 전하게 검법을 펼쳐 내리라고는 상상 도 못했던 것이다. '무섭다. 인간의 능력이 이 정도일 수도 있다는 !' 할말은 아니지만 등세욱이 이 검법 을 삼십 년이나 수련해 십성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면 지금 관 해영의 능력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가 어찌 알랴! 관해영은 한번 본 것이면 모든 것을 소화해 버리는 무서운 창의력을 지니 고 있다는 것을. 과거 남들이 펼치는 무학을 보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 던 관해영이 아닌가? 거기에 구결까지 전수해 주는 바에 야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때, 또다시 열두 명의 복면인들이 두 사람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드는 것 이었다. 고오오오! 츠파팟―. 대기를 가르는 파공음도 각양각색,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관해 영의 귓전을 파고드는 천지검법의 오 묘한 구결. "공유세교(空惟細交)! 검(劍)은 동호 정중(動好正重)하고 천지(天地)는 혼연 이라." 전음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에 관해 영의 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스― 스슷―! 흔들리는 검. 그에 따라 일어나는 섬검류. 광란하는 파도라면 파도요. 회오리쳐 막는 바람이라면 그 검세 는 또 바람일지니 . 파파파팟! 두 사람을 향해 밀려들던 거대한 암 류는 관해영과 등세욱이 움직이는 검 세에 따라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윽!" 기세 등등 하던 복면인들은 짤막한 신음성을 토하며 주춤주춤 밀려나는 것이었다. " !" 도대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사 람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에 서린 것은 온갖 불신의 파랑이었다. 신나는 사람은 따로 있다. 관해영은 등세욱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 그거 괜찮은 검법이구 료. 천지검법이라는 그 이름도 그런대 로 마음에 들고 말이오." "앞으로는 더 마음에 들 것이다." 등세욱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도리어 등세욱은 가슴 저미는 배신 의 늪과 음모의 수렁 속에서도 유쾌하 게 웃을 수 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죽음의 유혹 속에서 이 청년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도 그는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자신을 위해서 검 을 잡았고, 이렇듯 기발한 방법으로 자 신이 전수한 무공을 완성해 가고 있으 니 그는 지금 이 순간 죽는다 해도 웃 을 수 있었다. 그때, 그런 그 두 사람을 지켜보는 모용청운의 눈에 놀람의 빛이 서렸다. '저 어린 놈의 내력이 무엇이기에 등세욱의 버금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 믿을 수가 없는 것은 또 있다. '저들이 펼치는 검법, 수비검법으로 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검법이다. 시 간을 끌면 좋은 일은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번쩍! 금창과 혼연일체가 되어 두 사람을 질 러가며 대갈을 터뜨렸다. "전력을 다해 저들을 주살하라." 그것은 곧 잔인한 살인명령이었다 쿠오오오오―. 석실이 모조리 겁난을 만난 듯 뒤흔 들리고, 하늘과 땅이라도 한꺼번에 난도질을 해버릴 듯한 각종 병장기가 아낌없이 두 사람을 향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이런 공세를 두고 흔히들 천붕지괴 지세라 하는가 본데, 모용청운인들 어 찌 상상이나 했으리오. 그들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때 두 사람 또한 인간한계의 무서운 지경으 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놈들 이 승부수를 던진 것 같으니 !" "후후 , 본인에게는 또 한 가지 검법을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저들이 마련해 주고 싶은 모양이오." "그렇게 되는가?" 등세욱이 피식 웃고 관해영도 따라 웃었다. 그 죽음의 숨막히는 수세 속에서 또 다시 전음은 이어지고 있었다. 억겁의 공(空)을 누비는 듯한 혼이 요, 나락을 모르는 심처를 헤매는 검 (劍)이라. 관해영은 거의 본능적으로 검을 움 직였고, 이제는 아예 등세욱의 전음이 이어지고 있는 순간에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천지검법으로 둔갑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츠츠츠! 파파파! 얼마나 지났을까? 석실의 사방은 거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날아가 있었고, 이들의 격돌이 얼 마나 무서웠는지는 그들 사이의 지면 이 형편없이 파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입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관해영. 거듭되는 대결로 인해 그는 드디어 천지검법을 어느 정도 완숙하게 시전 할 수 있었다. � 물었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6 장 (혈전속의 무공수련 5 ) 5. 그때였다. 한참 검을 바쁘게 서두르고 있는 등 세욱의 또 다른 전음성이 들려온 것 은? "지금부터 노부는 노부의 내력을 절 반만을 사용하겠다." "무슨 말씀이오. 전력을 다해도 시원 치 않을 판에 반만을 사용하겠다니 . 나머지는 지옥에 가서 쓰려는 것이 오?" "노부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 !" "이제 네 능력이라면 능히 저들을 제압할 수는 없으나 막을 수는 있 을 것이다." 문득, 관해영은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럼 독을 몰아내려고……?" 등세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 우리가 살 수 있는 방 법은 그것밖에 없다." 관해영이 얼굴에 은은히 놀라는 기 색이 서렸다. '과연 고금무이(古今無二)의 절대무 인이라 불릴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독 을 밀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 늘 !' 내심으로 스쳐가는 생각은 그러했으 나 그는 싱긋 웃어 주었다. 아무리 천지검법이 개세의 무학이라 도 혼자서 이들을 상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등세욱에게 나약한 면 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될 수 있으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후후후 , 이제 보니 본인더러 보 초를 서라는 말씀이군요." "허헛! 그런 셈인가?" "하기야! 세상에 어찌 공짜가 있을 수 있겠소. 마땅히 배웠으니 그만한 대 가를 치르는 것이 도리이니 별 수 없 을 것 같소." "좋다, 그럼 부탁한다." 또 하나의 거대한 작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대결을 펼치면서 몸 안의 중독을 해 소한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작업이 진 행되고 있는 것이니 . 서서히 등세욱은 전신의 공력을 끌 어올렸다. 이어 내력의 반은 검에 모았고 다시 반은 단전으로 몰아 몸 안에 응결되어 있는 납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부시시시시―.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등세욱은 싸우면서 몸 속에 잠재되 어 있는 납의 성분을 열강 진기로 녹 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실로 목숨을 걸어 놓고 하지 않으면 안 될 모험인 것이다. 모용청운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 낌을 가졌다. 등세욱의 검기가 약해졌 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그가 알기로 등세욱은 아직 십이성 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직 납이 체내에서 발작을 일으킬 때 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등세욱의 검세가 현 저하게 약화된 것인가? 모용청운은 효웅답게 조심스런 사람 이다. 등세욱의 검세가 약해지고 더불어 관해영이 검세를 등세욱 족에 더 실어 보내는 걸 눈치챘다. '분명히 뭔가 있다.' 모용청운은 용만후와 동방백인에게 분짓을 하고는 세 사람이 일제히 관해 영을 공격했다. 관해영이 진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천지검법의 만상개라(萬象蓋羅)를 펼쳤 다. 하지만 천지검법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 절대고수의 합공을 막기는 역부족 이었다. 탕! 관해영의 목검이 짤려나가며 세 사 람의 병기가 그의 삼대요혈을 노리고 들어왔다. '피할 길은 없다.' 죽음을 느끼는 순간 관해영은 도리 어 세 사람의 짓쳐 오는 공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반토막의 목검으로 대연칠 검을 펼쳤다.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한 공격이기에 그 위력은 사뭇 살벌했다. 대저 검법에는 공격과 더불어 수비 초식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수비초식을 버리니 그 위력이 배가 될 수밖에 없 는 것이다. "헉!" 이 뜻하지 않은 공격에 세 사람은 다급성을 토하며 분분히 뒤로 몸을 날 렸다. 자신들이 계속 공격을 한다면 관해 영을 죽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들도 다친다. 이 동귀어진의 수법을 맞받을 배짱 은 그들에게 없는 것이다. 야심이 있는 자는 목숨을 아끼는 법 이다. 상대가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빈다는 것을 알자 세 사람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관해영은 자신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실력이 아닌가? 모용청운은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 으려는 걸 보자 복면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관해영의 입장에선 그들 세 사람보다 복면인들과의 격전이 훨씬 편했다. 숫적인 우세로 인해 가끔 등이며 어 깨에 칼이 스치고 갔지만 그건 아무래 도 좋았다. 세 사람과의 대결은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복면인들과의 싸움은 신체의 일부분만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복면인 들의 공격은 언제든지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등세욱은 전신에 퍼져 있는 독기가 서서히 자신의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또 한 명의 초인. 그래서였을 것이다, 등세욱의 입가 에 가느다란 미소가 피어나는 것 은……. 그것을 본 모용청운은 또 다시 의혹 에 빠졌다. 등세욱의 미소가 결코 허장성세가 아 니란 걸 느꼈기 때문이다. '저 저 놈이 !' 그토록 무서운 웅지를 지니고 있는 효웅도, 이 순간만은 등세욱의 입가로 스치는 미소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놈이 무슨 수작을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모용청운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별거 아니더라도 후환은 자르고 봐 야 속이 시원한 법이다. 우우우! 돌연 그의 전신에서는 먹장구름 같 은 암경이 피어올랐다. 오!그 기세라는 것은 망망대해를 휘 감은 해일이요, 하늘을 가리는 소낙비 의 구름과 같은 것이니……. 덩달아 그의 장포자락도 공처럼 부 풀어 오르고 있었다.. '단 일초에 놈들을 쓸어 버릴 것이 다.' 천지를 섬단해 버릴 듯한 살기와 마 기(魔氣)가 막 두 사람을 향해 뻗어낼 순간, 어디선가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소리 삭막한 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모용청운!" 모용청운은 느닷없는 음성에 흠칫 놀 라며 급히 시선을 돌렸다. "천하제일현(天下第一賢)이라고 불리 더니 , 미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는구나." 지금 모용청운의 시선엔 부서진 석 실의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동시에 삼십여 명에 달하는 복면인 들도 이 뜻밖의 불청객들로 인해 손을 멈춘 채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흡사 지옥사자의 사자처럼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들. 그 맨 앞에 있는 사람은 핏빛 혈포 를 걸친 노인이었다. 모용청운의 눈빛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것도 그때였다. "너 넌 사군휘!" � 수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 1 )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天魔帝王氣) 1. 혈사무주(血死霧主) 사군휘(謝君輝)! 마침내 그가 천마별부에 모습을 드 러낸 것이다. 그 뒤의 두 인물, 의성보의 벽력마도 낭초민, 현정금도문의 금도무적 유수 극. 바로 과거 사대신장이었고, 지금은 사대벌왕 가운데 두 주인인 그들이었 다. 그들 가운데 낭초민의 모습을 발견 한 관해영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낭초민이 나타났으니 혹시 모용벽 경도 온 것이 아닐까?' 그때, 용만후가 낭초민과 유수극을 보고 살기 머금은 미소를 떠올렸다. "흐흐흐 . 낭초민, 유수극, 오랜만 이다." 유수극은 조소를 띠며 응수하였다. "기이한 곳에서 만났군. 상전을 죽이 고자 한곳에 모였으니 말이다." 일이 이상하게 틀어져 가고 있음을 느낀 모용청운은 사군휘를 응시하며 침음스레 음성을 흘려냈다. "네가 어떻게 이 천마별부에 ?" "모용청운, 제일현자라는 이름이 아 까운 소리를 하는구나." " !" 모용청운은 사군휘의 비꼬는 말에 그만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지고 말았 다. "본좌가 누구와 함께 나타났는지를 보고도 짐작 가는 게 없단 말인가?" 모용청운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네가 혈사무주(血死霧主)……?" "흐흐! 이제야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군……." 낭초민과 유수극이 혈사무와 손을 잡았으니 그 두 사람을 끌고올 자는 혈사무주밖에 없다. 하지만 사군휘가 시인하자 모용청운 은 충격을 느꼈다. 암중으로 자신과 대립하던 혈사무주 가 사군휘라니……. 천하에서 자신의 이목을 피해 갈 자 는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사군휘 에겐 꼼짝없이 당하고만 것이다. 모용청운의 놀라움과는 달리 사군휘 는 그의 존재를 무시하듯 시선을 등세 욱에게 돌렸다. "등세욱, 오랜만이다."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대마저 나를 노리고 있을 줄은 ." 등세욱은 차라리 씁쓸한 느낌에 젖 어드는 고소를 띠었다. 사군휘는 담담한 눈길로 사위를 쓸 어 보고는 문득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등세욱 , 자신이 결정적인 실수 를 저지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한 번쯤 회고해 본 적이 있느냐?" "실수라 ?" "흐흐 , 물론 아몽사란 여인을 잊 지 않았겠지." "포달랍궁의 옥녀(玉女) ?" 언뜻 등세욱은 처음으로 얼굴에 긴 장을 떠올렸다. 사군휘는 음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실수는 자신의 외로움을 이기 지 못해 그녀에게 천마별부를 드나들 수 있는 기관작동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럼 아몽사는 ?" "흐흐 , 걱정 말게. 이 사군휘는 어린 계집아이를 어찌 하지는 않는다." 등세욱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였다. 적어도 사군휘 정도의 인물이라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라 아몽사의 목숨만은 아직 큰 위험이 없으리라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모용청운이 사군휘에게 음랭한 음성으 로 물었다. "사군휘, 방금 전에 네가 나에게 미 련하다고 말한 뜻이 무엇이냐?" "후훗 , 아직도 모르는가? 등세욱 은 지금 체내에 쌓인 독을 몰아낼 시간을 벌고 있다." "말도 안 돼!" 모용청운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싸우면서도 독을 몰아내다니 !"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다. 적어도 자신과 같은 고수나 강적을 맞이하고 싸우면서 독을 몰아낼 수 있 는 초인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흐흐 , 모용청운. 그대가 미련하 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는 아직도 등세욱의 능력 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모르 고 있으니까." " ?" "만일 그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벌써 천하제일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으음 " 모용청운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토하고 말았다. 기실 , 전세가 자신에게 불리하 게 틀어지면서부터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그였던 만큼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모용청운 ! 그대와 내가 천하제 일좌에 지금까지 오르지 못했던 점은 그의 능력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 !" "그런 만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 현자인 그대는 알 것이 다." 순간, 모용청운의 눈이 빛났다. "손을 잡자는 것인가?" "천하제일좌를 위해서는 !" "흐흐 , 그러나 사군휘에게 이 모 용청운이 뒤통수를 맞을 수야 없지." "모용청운, 천하제일이라는 그대의 지혜다.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천하제일좌를 얻는 것이 강호의 세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잘 생각해 보아라." " !" 모용청운. 그가 누구인가? 음모와 지혜에 있어 제일이라고 꼽 히는 그인만큼 판단을 내 리는 데에 는 오랜 시간이 걸릴 리 없다. "좋아 , 천하를 놓고 셋이 다투는 것보다도 둘이라면 아무래도 기회가 더 많아질 테니까." 사군휘와 모용청운은 입가에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동상이몽의 눈빛이지만, 지 금의 상황과 이해득실에서는 다른 길 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미소였다. 상황은 이제 더더욱 급전되었다. 모용청운과 혈사무주 사군휘, 그리 고 사대벌왕과 그 수하 오십여 거세고 수들을 한꺼번에 맞아 싸워야만 하는 생사박전이 시작된 것이다. "현황장홍!" "천지개합(天地開合)!" 쐐애애액! 파츠츠츳! 가장 완벽한 수비의 천지검법. 그것이 펼치는 완벽한 검망의 그늘 이 석실을 어망처럼 휘감았다. 그러나 그 완벽한 검법도 지금 그 실효를 거 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대벌왕과 모 용청운, 사군휘의 합공은 태산을 밑 뿌 리째 뽑아 버리고 사해를 뒤엎을 가공 한 것이다 관해영의 공력과 이제 싸우면서 배 운 천지검법으로서는 그 위력을 다 발 휘할 수 없거니와, 등세욱은 아직 몸에 서 독을 다 발산해 내지 못하여 자신 의 진정한 무위를 발휘할 수 없는 상 황이다. '음 !'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모 으며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벌써 일곱 번째의 부상이다. 유수극의 금도가 자신의 대퇴부에 깊은 상처를 주고 도혼을 남겼다. 허나, 등세욱의 심기를 흐트러뜨리 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것도 드러내기 에는 상황이 너무도 긴박한지라 이를 악물고 죽검으로 맹렬하게 호선을 그 었다. 파파파앗! 일순 부챗살처럼 죽검의 환영이 그 려지며 가공할 검기가 폭출하였다. 유수극과 낭초민은 맹렬한 공세를 가하다 상황이 좋지 못함을 알고 황급 히 뒤로 물러서며 도초를 발휘했다.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섬전과도 같은 금광이 허공 을 갈랐고, "헉!" 유수극은 섬뜩한 느낌에 금도를 휘 두르며 몸을 틀었다. 탕! 금속성과 함께 유수극은 손아귀가 저리는 충격에 하마터면 금도를 놓칠 뻔하여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들이 켰다.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 2 ) 2. 그 순간, "크아아악!" "으아아악!" 처절한 단말마가 연속적으로 울리며 예닐곱의 수하가 피를 뿌리며 고꾸라 지는 광경이 그의 망막에 투영되었다. 더불어 한 줄기 금빛 섬광이 허공에 호선을 그으며 관해영의 손 안으로 빨 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 게 수중의 금도를 살폈다. "이럴 수가 !" 금도(金刀), 자신의 금도 중앙에 구 멍이 생긴 걸 보았던 것이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 유수극은 눈에 분노를 담고 관해영 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 들어갔 다. 그러나 조금 전의 그 공포를 느꼈기 때문인지 감히 완전한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설 자리를 대비하고 있는지라 그의 공세는 관해영에게 위 협을 주지 못했다. 자연 관해영은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잡았고 내심 봉왕(蜂王)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봉왕이 준 혈류금왕 적절히 사 용하는군.' 그러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관해영의 상처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등세욱도 모용청운과 사군 휘의 공세 아래 막바지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돌연 관해영과 등을 맞대고 천지검 법을 시전하던 등세욱이 사군휘와 모 용청운에게 몸을 날리며 검 대신 쌍장 을 맹렬하게 내뻗는 것은……. 쿠우우우! 콰르르르릉―! 금광(金光)! 차라리 눈이 부시도록 휘황한 금광 이 등세욱의 두 팔을 감싸며 폭풍처럼 폭사하였다. 뒤이어 등세욱의 굉량한 일갈이 석 실을 뒤흔들었다. "천마제왕기(天魔帝王氣)!" 모용청운과 사군휘는 안색이 대변하 여 동시에 전력을 다한 쌍장을 내밀었 다. 콰르르르릉! 쿠쿠쿠쿠우우 우우우! 일순 세 줄기 힘이 허공에서 뒤엉키 며 가공할 강기( 氣)의 회오리가 휘몰 아쳤고, 석실 전체가 무너질 정도로 흔 들렸다. 주변에 있던 고수들이 가랑잎에 휩 싸인 듯 사방으로 튕겨나며 석벽에 몸 을 박으며 피를 튀어냈다. 비명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석벽에 부딪치기도 전에 금광에 오장이 파열되어 버렸던 것이다. "천마제왕기 !" "등세욱! 이미 독을 체내에서 몰아냈 구나." 사군휘와 모용청운은 이미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직감하고 안색이 일그러졌다. 등세욱은 흔들리지 않는 석주처럼 호방 부동하게 선 채 강기의 회오리 속에 옷을 휘날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 , 이 등모는 평소 두 분의 무공을 흠모해 왔소. 다행히도 오늘 견 식할 수 있어 금생에 다시 없는 영광 이오!" 말은 담담하고 느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천만 근의 중압 감으로 두 사람의 심혼을 찍어 내리려 누르고 있었다. 스스스스―! 돌연 등세욱의 얼굴이 기이하게도 금광에 휩싸여 갔다. 이어 그의 쌍장이 서서히 허공을 가 르며 하나의 호선을 만드는가 싶자, 콰아아아아! 엄청난 금광이 그의 쌍장에서 폭사 하며 모용청운과 사군휘를 휩쓸어 갔 고, 두 사람의 그림자는 이내 금광 속 에 묻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때부터 등세욱의 신형마저 금광 속에 묻혀 분간해 낼 수 없었다. 콰르르르 르르릉! 쿠우우우! 너무나 가공할 금광의 압력과 모용 청운과 사군휘가 펼쳐내는 강기( 氣) 의 회오리에 관해영과 사대벌왕을 제 외하고는 전권 밖으로 물러나 몸을 사 려야만 했다. 관해영의 눈에도 언뜻 놀라움이 스 쳐갔다. '과연 등세욱이다. 천하를 휘어 잡는 이 고수들을 상대로 우세를 점해 가고 있으니 ' 관해영은 진정으로 등세욱이란 인물 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등세욱을 꺾을 수 있 는 날이 올까?' 문득 자신에 대한 회의가 뇌리를 덮 어 눌러 왔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지금까지 무공 을 익힌 게 등세욱을 꺾기 위해서가 아닌가? 죽어도 잊지 못할 사운악의 스승이 기에 그는 언제나 최후의 대결 상대로 등세욱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때였다. 쐐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언뜻 덮쳐 오는 것을 느끼고 관해영은 황급히 옆 으로 몸을 날려 이 장이나 물러섰다. 금도무적 유수극. 그는 관해영의 눈빛이 흐트러지는 한 순간의 방심을 노리고 기습을 가했 고 그 맹렬한 위세로 인해 관해영의 소맷자락은 섬뜩한 느낌과 함께 한 자 나 베어져 나갔다. 관해영은 팔등에 도흔이 났고, 선혈 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방심에 자책했다. '고수의 한 순간 방심은 영원히 돌이 킬 수 없다!' 관해영은 죽검을 꼭 움켜쥐며 다시 금 전력을 다해 공세를 유수극을 향해 펼쳐 냈다. "천지개합(天地開合) 칠금교탈(七禽 巧奪)!" 파아아아! 천지검법과 대연일검이 동시에 펼쳐 졌다. 수비와 공세가 적절하게 배합된 공 세. 그 짧은 순간에 두 가지 무공을 자 신의 것으로 혼합한 관해영의 오성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한순간에 유수극은 죽검의 그림자 속에 갇히고 말았다. "벽력개도(霹靂開刀)!" "단천혼섬(斷天混閃)!" 그 순간 벽력마도 낭초민과 단천신 군 용만후가 측면에서 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관해영은 두 사람의 공격이 있자 예상이라도 한 듯 몸을 빼며 뒤 편의 뇌영무제를 덮쳐 갔다. "천홍월성!" 파아아아! 극쾌의 주검이 환영을 그려내자 졸 지에 공세를 받은 동방백인은 황급히 몸을 빼며 반격을 가했다. 사대벌왕답게 그도 호락호락한 상대 가 아니었다. 뜻밖의 역습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관해영의 공격을 모조 리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찌 알겠는가? 이 역습은 단지 관해영의 계산된 행 동일 뿐이란 걸……. 낭초민과 용만후가 유수극을 돕고 그 틈에 관해영이 동방백인을 공격함 으로써 그는 기선을 잡을 수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네 사람의 합공 은 잠시 흐트러지고 관해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공격을 가했 다. 싸움에 있어 기선이란 승패의 절반 을 차지한다. 관해영이 그들은 상하게 하진 못해 도 기선을 잡고 쉴새 없이 공격을 함 으로써 그들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 을 봉쇄시켜 버렸다. 비록 이 공격이 오래 가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시간을 벌 수가 있다. 관해영은 그걸 노리고 네 사람을 사 납게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공격보다 더 좋은 수비는 없다고 했 던가? 관해영의 끊임없는 공격에 사대벌왕 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싸우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해영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없었 다 어찌 됐든 한 번의 기선 제압으로 사대벌왕과 평수를 유지했고 그 사실 이 또 그들을 놀라게 했다. '놈 , 이토록 새파랗게 젊은 놈이 우리와 평수를 이루다니 !' 그들의 놀라움은 다시 살기로 변했 다. '훗날 시일이 지나면 등세욱 못지 않 게 우리를 위협할 놈이다.' '만일 지금 살려 보낸다면 후환이 될 놈이다.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말은 안 했지만 네 사람의 마음은 일치했다. 허나 천지검법의 정수를 서서히 싸 우면서 깨우쳐 가는 그를 단숨에 어쩌 지는 못했다. 관해영도 일시 호기를 잡고 평수를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대벌 왕의 공세가 가열해 지면서 서서히 정 세가 불리해져 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사대벌왕을 상대로 싸우기에 는 내공이나 무공, 그리고 상처입은 체 력이 딸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 3 ) 3. 한편, 등세욱의 가공할 공세 속에서 반격의 기회를 잡으려는 모용청운과 사 군휘도 그리 좋은 전세를 유지하고 있지 는 못했다. 혈사무주는 눈에 광기를 서서히 담 아 갔다. '등세욱 , 놈은 나에게 영원히 오 를 수 없는 하늘이란 말인가?' 한순간이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해 그와 모용청운은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한번쯤 등세욱과 자웅을 겨 룰 만하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이 무섭게 흔들리며 무너 져 가는 순간이다. 혈사무주 사군휘의 눈에 떠오르기 시작한 광기, 그것은 어느 한 순간 섬 광처럼 튀어올랐고, 동시에 그의 입에 서 일성벽력성이 터져나왔다. "천마제왕기(天魔帝王氣)!" 일갈보다 그의 두 손이 더 빨랐다. 쿠우우와! 사군휘의 쌍수가 맹렬한 속도로 허 공을 가르며 뻗어 나갔고, 태양보다 더 강렬한 금광이 그의 손에 뇌전처럼 폭 사하였다. 콰콰쾅 콰르르릉! 천지가 전복하는 것인가? 뇌성과도 같은 벽력음이 석실을 무 너뜨릴 듯이 울렸고, 금광이 광기를 동 반한 채 사방으로 폭사해 나갔다. 일순, 등세욱의 얼굴에 불신에 가까 운 경악이 떠올랐다. "제왕기 ! 네가 어떻게 천마제왕 기를 !" "크하하하 전설의 천마제왕기가 특정인의 몸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 이 아니란 것을 모른단 말인가?" 사군휘는 광소와 함께 다시금 맹렬 한 공세를 가했다. 콰콰쾅! 콰아아아아! 실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 아니,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일대 광 세절학끼리 생사를 가늠하며 서로를 충돌해 갔다. 천마제왕기대 천마제왕기! 혈사무주 사군휘. 그가 천마제황기를 시전할 수 있다 니? 등세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 앞에선 분명 자신과 똑같 은 천마제왕기가 덮쳐 오고 있지 않은 가? "으음……!" 등세욱은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실에 침음성을 터뜨릴 뿐이었다. 일대격돌! 천마제황기와 천마제왕기의 격돌은 석실을 금광의 파장 속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일시간 눈부신 금광에 시선 이 가려지는 사이에 사군휘의 신형이 휘청하며 두 걸음 밀려나갔다. 사군휘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 다. 낭패를 본 것이다. '만사일월수라공(萬邪日月修羅功)과 천마제왕기라면 한번 해볼 만하다고 자부했는데 .' 정면 격돌에서 밀리자 사군휘는 일 시간 무력감에 잠겼다. 언제나 충분하다 싶으면 등세욱은 저 멀리 달아나 있고 이번이다 싶으면 여전히 격차가 있다. 과연 등세욱은 넘을 수 없는 산인 가? 오늘이야말로 반드시라고 자부했던 그로서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 게 이 상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사부님 !" 대갈성과 함께 하나의 인영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다름 아닌 사운악이었다. 그의 안색은 흉험하게 일그러져 있 었고, 전신에는 적잖은 양의 피를 뒤집 어쓰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확인한 관해영의 안색 이 확 변했다. 한시라도 잊어본 적이 없는 얼 굴……. 그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 이다. '사운악 ! 마침내 네놈도 천마별 부에 돌아왔구나!' 일순 그의 뇌리에 과거의 침상이 그 림처럼 스쳐갔고, 심장 깊숙한 곳으로 부터 뜨거운 열기가 머리 위로 확 치 밀어 올랐다. 허나 사대벌왕과 대치하고 있는 그 가 아닌가? 몸을 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 지였다. 등세욱! 일대 무신인 마황천자도 상황이 상 황이니 만큼 그의 등장에 미소를 떠올 렸다. "하하 너까지 왔으니 오늘의 승 리는 내 것인 것 같구나." 사운악은 눈을 부릅뜨고 사대벌왕을 향해 쏘아 나갔다. "사대벌왕! 네 놈들이 감히 사부님을 배반하다니 !" 말보다 그의 행동은 섬전을 방불케 하듯 빨랐다. 사대신장 가운데 뇌영무제 동방백인 과 단천신군 용만후가 황급히 전권에 서 몸을 빼며 사운악을 맞이해 갔다. 동시에 지금까지 권외에서 관전만 하고 있던 오십여 고수들이 사운악을 협공해 갔다. 그러나 전세에서 약간의 변화가 큰 흐름을 바꾸어 주듯이 사운악의 가세 는 등세욱과 관해영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관해영은 비록 크게 숨을 쉴 수 있 었지만 그래도 두 벌왕의 무공 앞에는 몸을 빼낼 수 없었다. "크아아악!" "으악!" 사운악의 맹렬한 대공세. 그것은 두 신장의 공세를 약화시켜 놓았고 오십여 고수들을 하나씩 처치 해 가기 시작했다. 기이한 것은 두 벌왕의 공격이 수하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다지 맹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모용청운과 혈사무주가 데려온 양쪽 의 고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명 이 피를 뿌리고 처절하게 죽어갔다. 사운악은 서서히 공세를 휘하며 앞 으로 나아갔고, 그 거리는 등세욱과 점 점 가까워져 마침내 서로 등을 맞대고 양쪽 고수들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헌데 그때였다. 미소. 사운악의 입가에 소리 없이 피어오 르는 것은 전율이 절로 일어날 섬뜩하 고도 사이한 미소였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섬전처럼 돌았 고, 슈슉! 그의 쌍수가 뇌전과도 같이 맹렬하 게 등세욱의 등을 때리는 것이 아닌 가? 펑! 마치 북이 터지는 듯한 둔탁한 파공 음과 함께. "음 !" 등세욱은 묵직한 신음을 토하며 휘 청하니 앞으로 주르르 세 걸음 밀려났 다. "흑 !" 뒤이어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은 한모금의 선혈이었다. 등세욱의 눈에 불신을 담고, 그것이 곧 형용할 수 없는 분노의 화광으로 변하며 몸을 돌렸다. "사운악 네가 감히 이 사부를 !" " !" 사운악은 자신의 전력을 다한 공세 에도 불구하고, 마황천자 등세욱이 불 과 세 걸음만 물러난 채 건재한지라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네 사�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 4 ) 4. 등세욱의 신형이 섬전처럼 물러서는 사운악을 쫓아갈 때, 우우웅 ! 모용청운과 혈사무주는 한순간의 방 심을 노리고 전력을 다한 공세를 펼쳤 다. 콰앙! 두 줄기 장력은 등세욱의 등을 그대 로 때렸고, "으윽 !" 등세욱은 비명과 함께 주르르 밀려 나 석실에 등을 부딪쳤다. 이미 등은 뼈가 드러날 만큼이나 극 심한 외상을 입었고, 오장육부가 제 자 리를 이탈하는 내상(內傷)을 입었다. 불세출의 무신 마황천자 등세욱. 연거푸 당하는 배신의 고통이 분노 로 화하여,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무 너지고 만 것이다. 허나 자신이 당한 상처보다 배신이 라는 쓰라린 고통이 화한 분노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모용청운과 사군휘에 대한 경계를 잊은 듯 사운악을 번갯불 같은 광망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 네가 무 엇이 부족해서 !" "등세욱!" 등세욱의 말머리를 자르며 나선 것 은 혈사무주 사군휘였다. "너는 그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구나." 등세욱이 의아한 얼굴로 사군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 다는 것을!" " !" "사운악, 저 아이는 바로 이 사군휘 의 손자라는 사실이다." "뭣 ?" 등세욱은 미간을 치켜올렸다. 사운악이 이미 계산된 음모 하에서 자신의 제자로 들어온 것임을 안 그로 서는 분노와 환멸을 동시에 느꼈던 것 이다. "등세욱! 사대벌왕 가운데 두 명을 내가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손 자가 모용청운의 음모를 나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하나 풀려져 가 는 순간이었다. "모용청운 ." 사군휘의 시선은 등세욱에게서 모용 청운의 얼굴로 옮겨졌다. "박람현유라 불리는 그대도 결 국은 재주만 부릴 줄 아는 곰에 지나 지 않을 뿐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 에게 어부지리를 안겨 주는 !" 모용청운은 얼굴의 근육을 실룩거렸 다. 천하제일의 모사라 자부하여 왔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나 결과는 사군휘의 수중에서 놀아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등세욱의 침음성이 울려나온 것은 그때였다. "으으 ! 스스로 마를 버리고 선을 추구해 온 나의 모든 노력과 이상이 결국 이렇게 배신으로 귀결되 고 말았단 말인가?" 절망!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을 회오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 간부터 몸서리치게 가슴 깊숙이 밀려 들어왔고, 또한 그것은 이내 처절하기조차 한 분노로 표출되고 말았다. 한순간 그의 오른손이 허공으로 올 려지는가 싶자 그대로 자신의 왼팔을 내리쳤다. 퍽! 촤아아아! 둔탁한 소리가 일며 그의 한 팔이 힘없이 잘려 나갔다. 어깻죽지부터 잘려 나간 팔에서 선 혈이 분수처럼 분출되며 바닥을 적셨 다. 헌데 보라! 그 순간부터 등세욱의 남은 한 팔이 무섭도록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 하는 것이 아닌가? 일순, 사군휘의 안색이 무섭도록 창 백하게 변했다. "암천열황마적수(暗天熱荒魔赤手)!" 무엇인가? 천하의 마상천사 사군휘마저 경악으 로 물들게 만든 그 이름은……? 암천열황마적수(暗天熱荒魔赤手). 단언하건대 , 인간의 영역을 벗 어난 절학 가운데 천마제왕기의 가공 할 위력을 누를 수 있는 무학은 오직 암천열황마적수밖에 없다. 아무리 극심한 중상을 입더라도, 단 한 가닥의 진기만 남아 있다면 펼칠 수 있는 가공할 마학으로, 신체의 일부 를 잘라 내면서부터 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지옥마(地獄魔)의 마공 (魔功)인 것이다. 내공이 미약한 자일수록 신체의 일 부를 많이 잘라야만 단전(丹田)에 진기 를 모을 수 있는 이 마학은, 내공이 강 할수록 그 위력은 배가 된다. 헌데 지금. 등세욱과 같은 광세 고수가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한 팔을 잘라 냈으니 그 위력은 가히 상상할 수 없 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조리 죽이리라!" 대갈과 함께, 번쩍! 등세욱의 팔이 가공할 열기를 담고 허공을 갈랐다. 쿠우우우우! 일순 사람의 심흔을 삼켜 버릴 기이 하고도 엄청난 굉음이 울렸고, 활화산 에서 토해지는 듯한 가공할 열기(熱氣) 를 머금은 강기( 氣)가 회오리를 일으 키며 휩쓸어 갔다. 모용청운과 사군휘도 더할 수 없이 침중한 안색으로 쌍장을 밀어낸 것은 동시였다. 콰콰콰쾅! 굉음! 아마 천지개벽 할 때의 그 환상의 소리가 있다면 바로 이러할 것이다. 일순, 암천열황마적수의 가공할 열 기가 사방으로 회오리쳐 나갔고, "크아아아악!" "으으아아악!" "커억!" 그 열기와 강기에 스친 쌍방의 고수 는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며, 채 허공에 서 떨어지기도 전에 전신이 갈라지며 피를 토해냈다. "흐흑 !" "으음 !" 사군휘와 모용청운. 그들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뒤로 밀 려나갔다. 이미 입가에 흘러내리는 실낱 같은 핏줄기가 그들의 혈류(血流)를 역으로 뒤집고 내부에 극심한 중상을 주었다 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들의 표정은 불세출의 절대자들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암천열황마적수 ! 두 개세의 절대자마저 단 일장에 밀 려나가게 만든 마예(魔藝), 그 끔찍한 위력이 증명된 순간이다. 사군휘는 내심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이토록 어렵단 말인 가? 등세욱 저 놈의 한계는 도대 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무공에 앞서 등세욱의 가공할 능력 앞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공포라고 해야 옳았다. 등세욱은 일단 암천열황마적수를 시 전하고 내심 결단을 촉구해야만 했다. 단 한 번의 시전으로도 엄청난 내력 이 빠져나간 것을 느낀 것이다. '암천열황마적수를 세 시진 이상 사 용한다면 나도 내력의 고갈을 일 으켜 영원한 폐인이 되고 만다.' " !" " !" "사군휘, 모용청운 너희도 오늘 이후 살아간다는 아니 살겠다는 망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군휘와 모용청운. 그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이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이 결코 허세의 위협이 아니라는 것도 .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암천열황마적 수의 위력을 실감했기에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문득 사군휘의 입가에 음사한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등세욱 너의 능력과 무공 , 그리고 재지 등에는 나 사군휘도 실로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 " !" "천하를 오시하는 이 사군휘도 감복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너는 마지 막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한번쯤 생각 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등세욱은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이미 극도로 분노한 그가 아닌가? 사군휘의 말에 놀아날 그가 아니었 다. 그러나 사군휘는 태연하게 낭초민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그대는 그녀를 데려와라." "예!" 낭초민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석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세욱이 그가 또 무슨 수작을 꾸밀 까 하는 의문을 가질 사이도 없이 낭 초민이 다시금 나타났다. 한순간, " !" 등세욱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튀 어오른 것은 낭초민이 다시 들어섬과 동시였다. 낭초민은 한 여인을 데리고 나타났 다. "그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7 장 (두 사람의 천마제왕기 5 ) 5. 여인(女人)! 그녀를 보는 순간 등세욱은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 었다. 단지 두 눈만 휘둥그래져 나타난 여 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벼 벽경 !" "등가가 !" 그렇다. 낭초민이 데려온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등세욱의 부인 모 용벽경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실로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눈에 머금은 눈물과 등세 욱의 시선을 받고 외치는 음성의 서글 픔은 일시간에 등세욱의 전신에 찬물 을 끼얹었다. 부르르! 바람도 없는데 등세욱의 장포가 펄 럭이기 시작했다. 그건 그가 극도의 분노를 느끼고 있 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그가 사군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사군휘! 빨리 그녀를 풀어줘라!" 화르르륵 ! 무서운 분노의 불꽃을 접하자 사군 휘는 일시간 전신이 굳어지는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사군휘는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머 금고 나직하게 말했다. "흐흐 ! 등세욱! 그녀를 그하고 싶다면 암천열황마적수를 거두어라." 뻔한 수작이었지만 등세욱은 일시 주춤하였다. 비록 모용벽경이 음모에 의해서 자 신과 맺어진 여인이기는 하나 피와 살 을 나눈 부부가 아니던가? 이 시간에 , 석실은 팽팽한 살기 를 머금은 채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관해영과 두 벌왕의 싸움도 이 급전 된 상황 속에서 더 이어질 수가 없었 다. 관해영보다 이대벌왕이 먼저 물러났 던 것이다. 그로써 일단의 혈전은 멈추어졌다. 그러나 그 정적이 머금은 살기 그것은 차라리 처절한 혈전을 벌일 때보다도 더 심혼을 무서운 압박으로 죄여 왔다. 그 속에서 , 돌연 모용벽경이 미 친 듯 소리친 것은 극히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난 뒤였다. "안 돼요! 저 악마의 말을 듣게 되면 당신은 그들 손에 죽고 말 것이에요!" " !" 하지만 등세욱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라고 어찌 그녀의 말뜻을 모르겠 는가?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따를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게 모 용벽경이 아닌가? 그런 등세욱의 내심을 읽었는지 사 군휘는 여유 만만한 미소를 떠올렸다. 모용벽경은 등세욱이 갈등하자 더욱 안타깝게 소리쳤다. "저를 저를 상관하지 말고 이 악마 같은 자들을 ." "벽 벽경 ! 내가 어떻게 그 대를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에게 너무도 많은 죄를 지었소 " "아니에요! 당신은 결코 죄를 짓 지 않았어요.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죄 라 할 수 있어요? 나는 결코 당신이 나 때문에 죽는 것은 원치 않아요." " !" "등가가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 어요. 사랑의 힘이란 자신보다 상대를 더 위해야만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 다는 것을 ." 일순, 등세욱의 미간이 미미하게 파 동쳤다. "그럼 , 그대는 나를 !" "저도 이렇게 고백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처음에는 당신이란 분을 단 순하게 존경심에서 모셔 왔지만 사랑이란 것을 지금은 분명히 깨달았 어요." "벽경 !" 철보다 강하다는 등세욱의 눈에 물 기가 어렸다. 그는 단지 참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면 그는 어린애처럼 목놓 아 울었을 것이다. 아무리 개세의 고수고 나이가 많다 해도 그 역시 뜨거운 심장을 가진 한 남자일 뿐이었다. "당신의 사랑이 내 몸 어디 구석엔가 배어 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저는 이 제서야 깨달았어요. 사랑해요, 등가가 !" 한순간 등세욱의 얼굴이 처절하다 싶을 만큼이나 일그러졌다. 더불어 그 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뜻밖에 도 한가닥 허탈한 감정과 기쁨 그리고 흥분이 어우러진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그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 다니 . 이제 더 이상 인간 세상의 미련은 없소." "등가가 !" 모용벽경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 리를 질렀다. "벽경! 사람이 나이 들면 주책이 일 어나나 보오. 지금 이 순간 어떠한 희 생이 따르더라도 당신만을 살리고 싶 으니까 말이오." "안 돼요! 당신의 모든 노력이 바로 나 때문에 무너진 것임을 잊지 마세 요." 모용벽경은 필사적이었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그녀도 자신보 다는 등세욱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벽경 ."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 여인이에요." 모용벽경은 어디서 그런 야무진 힘 이 나왔는지 고개를 거세게 도리질 쳤 다. "할아버지!" " !" "제발 부탁이에요. 이 손녀의 마지막 소원이라 여겨 주시고 저 분을 살 려 주세요. 제발 저 분을 구해 주세요, 할아버지!" 모용청운은 얼굴을 실룩거리고는 냉 랭하게 말했다. "안 된다!" "할아버지, 당신이란 분은 저를 야망 의 도구로 이용하시고도 저의 소 원 하나 들어 주지 못한단 말인가요? 이렇게도 비열한 분이란 말인가요?" 눈물로 호소하는 모용벽경이지만 모 용청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서 마음이 흔들린다면 그는 이 런 음모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흐흐! 네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어 쩔 수 없다. 나는 평생을 바쳐 오직 천 하제일좌를 원해 왔다. 그 모든 것을 희생시키며 나에겐 혈육보다 나의 야망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것도 안 중에 없다!" "오, 할아버지는 으흐흐흑 !" 모용벽경은 지금의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란 것을 알자 스스 로의 자재력을 잃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군휘는 입가에 음사한 미소를 띤 채 등세욱을 윽박질렀다. "등세욱! 결정을 빨리 해라. 나는 참 을성이 없는 사람이니까." "으음 !" 등세욱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침 음성을 토하며 암천열황마적수를 거두 었다. 승리를 확신했음인가? 사군휘는 그가 손을 거두자 통쾌하 다는 듯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자고로 영웅은 여인 때문 에 죽어간다는 초패왕의 예는 고금불 변의 진리로군!" 순간이다. 휙휙! 사대벌왕과 사운악이 장검을 휘두르 며 무서운 속도로 등세욱을 덮쳐 갔다. 이미 극심한 중상을 입은 데다 암천 열황마적수를 거둔 등세욱이 어찌 그 공격을 피할 수 있겠는가? 츠츠츳! 파아아아! 다섯 개의 장검은 섬뜩한 기음과 함 께 잔인하게 등세욱의 심장을 파고들 어 갔다. " !" 불세출의 영웅은 단 한미 신음조차 발하지 않은 채 몸을 부를 떠는가 싶 자 힘없이 무너졌다. "등가가!" 모용벽경은 자지러지는 외침과 함께 스스로의 충격을 이기지 못한 듯 혼절 하고 말았다. 관해영은 이 너무도 허무한 사실 앞 에 마치 자신의 넋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양 망연히 선 채 죄책감의 회 오에 싸였다. '그날 내가 낭초민에게 모용벽경을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죄책감에 싸인 그는 일시 간 거대한 분노에 자신의 몸을 실은 듯 대갈성을 토하였다. "으아아아아!" 순간, 그의 신형은 무서운 속도로 사 군휘에게 덮쳐 갔다. "가소로운 놈 , 만사일월수라공!" 사군휘는 가볍게 쌍장을 내 뻗어쳤 고, 콰앙! 두 줄기 강맹한 힘이 부딪치자 굉음 과 함께 관해영은 힘없이 주르르 밀려 났다. 일순 미간을 모은 것은 오히려 사군 휘였다. '단 일장이면 박살날 줄 알았는데 !' 의외의 결과 때문인가? 미간 사이로 떠오른 것은 무서운 살 기였다. 관해영은 가슴에 바위가 내리 누르 는 듯한 충격을 느꼈으나 이미 자제력 을 잃은 듯 다시 덮쳐 갔다. 허나 그 순간, 한 줄기 미미한 음성 이 그의 귓가에 파고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망동 부리지 말고 달아날 생각이나 해라." " !" 너무 뜻밖의 음성인지라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흠칫 굳고 말았 다. 등�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8 장 (기연의 연속 1 ) 제 48 장 기연(奇緣)의 연속(連續) 1. 음성의 주인공! 그건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 음성은 등세욱의 음성 !' 그렇다. 그의 귀에 파고들어 온 음성은 다름 아닌 등세욱의 음성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 확실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가슴에 칼을 찔리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금 그의 눈에 의혹이 떠오를 때, 등세욱의 미세한 전음성이 다시금 그 의 귀에 파고들어 왔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나는 태 어날 때부터 심장이 오른 쪽에 있었 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심장이 오른쪽에 있다니…….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나의 왼 쪽 가슴을 찌른 것이다. 폐혈대법(閉穴 大法)을 이용하면 두 달 후 나는 다시 금 소생할 수 있다." " !" "왼쪽 벽을 더듬으면 미미하게 돌출 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곳의 기관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장치다. 빨리 도주하 여 목숨을 부지해라."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모 으며 전음을 펼쳤다. "하지만 당신은 ?" "이곳의 인물들은 누가 무어라 해도 최강의 고수들이다. 나를 구해 나가려 한다면 차라리 화약을 입에 물고 불을 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 !" "비밀통로를 따라 가면 하나의 금불 상이 나온다. 그 금불상의 왼쪽 귀를 두 바퀴를 돌리면 내가 연공하던 밀실 이 나온다. 일단 그곳에 숨어 있다 이 들이 물러가면 삶을 도모해라." 그때 사운악이 서서히 관해영 앞으 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흐흐흐! 관해영, 질긴 목숨이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죽어 주어야만 할 것 이다." 관해영은 내심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에 놈들과 승부를 결하고 싶다만 이곳에서 죽으면 수많은 원혼들이 눈을 감지 못할 것이 다.' 그는 염두를 굴리면서 왼쪽 벽을 날 카로운 눈으로 재빨리 훑어보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 할 수밖에 없구나.' 관해영은 기관이 작동하는 돌출된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 거리와 각도를 계산했다. 그리고는 돌연 쌍수를 번쩍 치켜올 렸다. "대연신공!" 꽈아아아! 전력을 다한 그 뜻밖의 공세에 사운 악은 흠칫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쌍장을 뻗어냈다. "흐흐! 이제 발악을 하는구나." 콰아앙! 다시 한 번 두 줄기의 강기가 허공 에서 격돌하며 굉음을 토했고, 관해영 의 신형은 가볍게 뒤로 튕겨나갔다. 헌데 그 순간에 벌어진 일련의 상황 들. 그것은 사운악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 반탄의 힘에 날아가던 관해영은 타 미의 손을 잡아챘고, 가볍게 두 발로 벽을 차며 왼쪽 벽으로 몸을 꺾어 쏘 아 가는가 싶더니, 그의 손은 정확히 돌출된 부분을 눌렀다. 그리고는 둔중한 굉음과 함께 석벽 이 빙글 회전하며 관해영과 타미의 신 형을 삼켜버렸다. "아니 !" "여우 같은 놈!" 사운악은 그제서야 상대방의 선공이 어떤 의도였는지 알고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관해영과 타미를 삼킨 석벽 의 비밀문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빨리 문을 열 수 있는 기관을 찾아 라!" "놈은 어떻게 해서든 죽여야만 한다. 어쩌면 등세욱보다 무서운 놈이 있다 면 바로 그 놈일 것이다." "놈은 우리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 고 있으니 후환덩어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대벌왕이 아우성을 치며 주위로 흩어졌다. 기관을 찾기 위해서다. 약 일다경이 지나 그들은 통로를 여 는 기관을 찾아냈고 곧이어 그들은 비 밀통로로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허나 모용청운과 사군휘의 눈빛은 추격자가 지닌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음모를 꾸미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흐흐! 사군휘 , 네놈이 그 놈을 잡으려고 안달이지만 만일 나에게 한순간의 방심만 보인다면 !' '모용청운 , 네놈의 속셈은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나 단 한순간의 틈만 보이면 네놈을 없애고 천하의 패권을 움켜줠 것이다. 네놈만 없애면 천하는 나의 것이니까.' 그들의 속셈. 그것은 그 눈빛만으로도 읽을 수 있 는 것이었다. 그들은 천하를 노리는 모사(謀 士)로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효 웅들로서 서로의 속셈을 접어 두고 있 는 것이다. 금불상(金佛像), 관해영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거대한 금불상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통로도 있었으나 타미를 허리째 안고 있는 그는 금불상 앞에 멈추어 섰다. 석실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는 약 백여 장. 관해영은 등세욱의 전음대로 금불상 의 왼쪽 귀를 두 바퀴 돌렸다. 순간, 굉음도 없고 흔들림도 없이 금 불상이 뒤로 밀려났고, 사람 하나가 들 어갈 수 있는 지하 돌계단이 드러났다. 그들이 들어가고 난 후, 금불상은 다 시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금불상의 움직임은 실로 기묘하게 조금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밀실(密室). 관해영이 들어선 곳은 두 개의 밀실 이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약 냄새 !" 관해영은 코를 찌르는 약 냄새를 느 끼고 먼저 들어선 석실의 광경에 아연 해졌다. 석실 안은 대략 삼십여 평의 넓이로, 사방을 돌아가며 각양각색의 백옥병과 옥함들이 들어 차 있었다. 헌데, 그 옥병과 옥함들에게 백색 종 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 써 있는 글은 실로 놀라 운 것들이었으니 소림회천단(少林廻天丹), 무당금액정 (武當金液精), 화산단속고(華山丹續膏) , 포달랍궁건원단(布達拉宮乾元丹). 놀랍게도 , 각문 각파에서 성약 (聖藥)이라 일컬은 기약(奇藥)들의 이 름이었다. 그뿐이면 관해영도 그다지 놀랄 바 가 아니었다. 터뜨�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8 장 (기연의 연속 2 ) 2. 설산만년삼왕(雪山萬年蔘王), 장백산 (長白山)의 인면교사(人面交蛇) 내단(內 丹)……. 수없이 써 있는 그 명칭들. 무림인이라면 그 가운데 하나만으로 도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희 귀의 영약과 내단들이 아닌가? 무림기보들을 발견한 관해영은 망연 함에 빠져들었다. '황궁의 약고가 이 자리에 옮겨 왔단 말인가?'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지 않은가? 그때였다. 지금까지 말이 없던 타미. 그녀가 곱게 아미를 모으며 눈을 하 얗게 흘겼다. "흥! 당신은 그 영약들에 넋을 잃고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군요?" "아 !" 그제서야 생사관두에서 빠져나 오기에 정신없었고, 이 엄청난 영약과 기사회생의 기약들에 정신이 빠져 있 던 관해영은 자신이 안고 있는 타미를 내려놓았다. "미안하오. 그만 내가 ." 허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반짝! 타미의 추수 같은 눈망울에 매달린 눈물을 본 것이다. "해영 , 당신이 살아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말을 들어 보니 내가 살아 있 는 것이 몹시 억울하다는 듯한데 ." " !" 타미는 눈을 하얗게 모로 흘기며 입 에 함박 미소를 지었다. 관해영은 그녀의 웃음에 자신의 상 처에 대한 고통을 잊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아몽사가 당신을 구해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기실 그녀는 마음이 선한 여인이 오." "쳇! 그만 해도 제가 잘못한 것을 알 아요. 이젠 그녀를 만나면 다시는 그녀 와 다투지 않겠어요. 당신을 살려준 고 마운 분이니까요." 타미가 눈을 하얗게 흘기며 말하자, 관해영은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빙긋 웃었다. 그러자 타미는 버럭 화를 냈다. "왜요? 내 말이 말 같지 않다는 뜻 인가요?" "무…무슨 말을 !" 관해영이 기겁하자 타미는 돌연 까 르르 웃으며 그에게 덥석 안겨 왔다. "농담이에요." "그대는 정말 ." 관해영이 어이없이 실소를 터뜨리자 타미는 그의 품속을 더더욱 깊이 파고 들어왔다. "어유, 이곳은 밀실이라서 그런 지 매우 더우니 ." 타미는 말과 함께 거침없이 자신의 웃옷을 벗어 갔다. " !" 관해영은 그녀의 대담한 모습에 어 리둥절해졌고, 타미는 그런 그를 흘기 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린 이미 한 몸인데 왜 그렇게 옹 색하게 몸을 움츠리지요?" 말과 함께 더더욱 밀착해 오는 타미 에 관해영은 어이없기보다 기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헤어지면 그래도 그립고 걱정되지 만 만나야 골치아픈 여인임에는 틀림 없군 .' 관해영은 미간을 모으다 돌연 흠칫 했다. 안겨오는 타미의 어깨가 떨리고 있 음을 느낀 것이다. '울고 있구나 !' 정말이지 뜻밖이 아닐 수 없다. 타미와 같이 활달한 여인이 운다는 모습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 이다. 그때, 타미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 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없이 운다고 욕하지 마세요 .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그토록 사람을 아프게 만들다니 사랑해요 사랑 ." "타미. 그래, 당신은 ." "말하지 마세요. 말하는 것조차 두려 워요. 당신이 살아 있다는 실감만 저에 게 느끼도록 해 주세요." "타미 ." 관해영은 벅찬 슬픔이 감격으로 치 밀어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찾으며 그 녀를 으스러지도록 힘차게 끌어안았 다. 뒤이어 부는 바람은 ? 너무도 진하고, 너무도 뜨거운 바람 이었다. 연공실. 또 다른 하나의 석실은 평소 등세욱 이 연공을 해 오던 연공실이었다. 관해영은 그곳에서도 수많은 기연을 싫어도 만나야 했다. 연공실을 돌아가며 쌓여 있는 서책. 그 모두가 무서(武書)들이었으며, 또 한 무림에서 한결같이 희구해 마지않 는 광세절학의 비급이었다. 그 가운데 전설적으로 전해 오고 등 세욱이 자랑하던 광세절학인 천마제왕 기도 들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관해영과 타미가 이 비밀석실로 들 어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관해영. 그는 밀실 중앙에 놓여 있는 침상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 아, 보라! 놀랍게도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관해 영의 전신은 휘황한 금광이 서기처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한순간, 우우우우웅―. 형용할 수 없는 기음이 일며 전신을 감싸고 있는 금광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 금광은 놀랍게도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 듯 빨려 들어가고 있었 다. 그리고 반쯤 내리감고 있던 그의 눈 이 완전히 떠졌을 때, 아! 심현의 고요함과 무한의 공간이 그러한가? 그의 눈. 그것은 더할 수 없이 깊이 침잠되어 있는 가운데, 사람의 심혼을 빨아들일 듯 담담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무공을 연성한 자의 그런 신광(神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어라 할까? 유리알처럼 한없이 맑고 투명하면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현한 눈……, 바로 그것이었다 . 문득 관해영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 가 떠올랐고, 동시에 그의 담담한 음성 이 흐릿하게 정적을 깨고 흘러나왔다. "천마제왕기 , 전설의 무학이라 불리는 그 무공을 나는 완전히 연성했 다." 무슨 말인가? "이로써 대연신공을 십성까지 끌어 올렸다." 그럼 , 그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천마제왕기를 연성하고 있었고 그것을 완전히 익혔다는 말인데 . "단 보름 그 짧은 시간에 천마 제왕기를 십이성까지 연성할 수 있었 던 것은 이곳에 있는 수많은 기약 과 연단을 이용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 내가 얼마만큼의 영약을 먹었다고 말한다면 , 아마도 사람 들은 나보고 미친 놈이 헛소리한다고 할 것이다" 서서히 관해영은 몸을 일으켜 세웠 다. "이젠 나 관해영도 능히 등세욱과 겨루어 볼 만하다." 그렇다. 천마제왕공을 연성했고, 대연신공을 십성까지 끌어올린 그라면 능히 등세 욱과도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을 것 이리라. "나 관해영 . 이제부터 지금까지 의 원한을 모두 되돌려 주리라." 그 말 한 마디. 그것은 폭풍을 담은 한 마디였다. 아무도 모르는 밀실에서 그러나 훗일 천하가 전율할 폭풍을 담고 조용 히 울려나간 것이다. 壺坪�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9 장 (죽음의 광채 1 ) 제 49 장 죽음의 광채 1. 어둠, 산하(山河)를 영묘롭게 밝히는 보름 의 달밤이었다. 복마성은 은가루 뿌려지는 달빛에 대낮보다 더욱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 고 있었다. 성루(城樓)의 파수꾼은 따분한지 연 신 하품을 하며 투덜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팔자라니, 이왕이면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면 오죽이나 좋았을 까?" "나는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어 서 교대 시간이 되어 고것 엉덩이나 두드리러 갔으면 좋겠어." 시간 때우기 가장 좋은 음담패설을 주절주절거리는 파수꾼들. 시간은 이경을 지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심심해 죽겠구만. 뭐 재미 나는 일이 없을까?" "이럴 때는 그저 한바탕 푸닥거리라 도 해야 속이 좀 풀릴 텐데 ." 푸닥거리 ? 말(言)이 씨가 된다고 했다. 휘익! 밤바람을 타고 스며드는 연기인가? 한 줄기 인영이 복마성 드높은 고루 전각 지붕을 교묘히 타넘으며 내성(內 城)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 잠룡비상의 신쾌한 신법과 은신술을 함께 병행하며 거미줄 같은 경계망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는 인영. 그는 다름 아닌 관해영이었다. 휘리릭! 복마성 내성 대전각(大殿閣) 지붕에 내려서며 몸은 완전히 밀착시킨 관해 영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그 속에서 번뜩 이는 감시의 눈초리들, 과연 복마성은 당금 중원무림을 사 등분하고 있는 사대벌왕의 하나답게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그러나 관해영이 일단 침투키로 마 음먹은 이상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관해영은 입가에 손을 대고 나직한 음향을 발출했다. 스스로 정체를 노출시키려 하는가? 허나 관해영이 발출하는 음향은 여타 의 소리와는 전혀 틀렸다. 카웅! 카우웅! 심야에 달을 보며 수컷을 찾는 암여우 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 관해영이 발출하는 암여우의 울음소 리는 나직이, 그러나 적막한 어둠을 타 고 멀리 멀리 울려퍼졌다 . 요소요소에 은밀히 잠복해 있던 감 시병들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요사스럽군. 하긴 저 암여우도 어딘 가 근질근질 하겠지." "내 마누라도 밤마다 저 여우처럼 발정이나 하면 다른 계집 엉덩이 쳐다 보지 않지. 이건 살만 뒤룩뒤룩 쪄서 해만 떨어졌다 하면 코부터 드르렁 골 아대니 ." 사람은 일단 윗자리를 차지하고 볼 일인 모양이다. 복마성은 외성(外城) 총순찰 무심살 도(無心殺刀) 척요상은 수하들이 밤이 슬 맞으며 사타구니 붙잡고 청승 떨고 있을 때 편히 쉬고 있었다. 비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사내들이 말하는 오락을 땀까지 흘리 며 즐기고 있었다. 척요상은 평생 무공으로 단련된 강 인한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며 침상을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그 밑에 깔린 여체는 숫처녀처럼 고 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표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는 그야말로 발정한 암코양이의 헐떡거림이었으며, 놀랍도 록 발달된 하체는 거친 파도와 평생 싸워 온 어부의 노젓는 솜씨를 눌리게 할 정도였다. 척요상은 처음 느껴 보는 쾌락의 절 정에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허나, 나중에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끝낼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척요상이었 다. 척요상은 이 같은 여체를 갖게 해준 하늘에게 감사했다. 그때였다. 카우우우웅! 요사스런 어딘가 음울한 암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으며, 계집의 고통 과 환희에 뒤범벅이 된 얼굴에 언뜻 긴장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척요상의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계 집의 손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갔 다. 계집의 좌수(左手) 가운뎃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 반지가 등불에 영롱한 빛을 반사했다. 척요상은 급기야 입에 거품을 물고 끄르륵거리고 있었다. 계집은 손끝으로 비취 반지를 살짝 돌렸다. 실처럼 가느다란 침이 소리 없이 튀 어나왔다. 계집은 척요상 척추에 침을 찔렀다. 순간, "허억!" 척요상은 갑자기 상체를 번쩍 치켜 들며 전신을 경직시켰다. 안면이 무참히 일그러지며 푸득 경 련을 일으켰다. 사내가 여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맛보는 순간 찾아온 죽 음.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양극의 감정이 어우러지는 모순에서 오는 쾌감을 뭐 라 설명해야 할까? "끄르륵 ." 척요상은 섬뜩한 숨넘어 가는 음향 을 토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로 계 집을 가리켰다. "너 너 ." 털썩! 척요상은 너라는 한 마디를 끝으로 이 승의 희로애락을 끝냈다. 순식간에 숯처럼 시커멓게 변해 버 린 척요상. 아니, 조만간 흙이라 불리는 시체는 이제 복마성 외성 총순찰이란 감투도, 황금도, 어떤 계집도 전혀 필요치 않은 편안한 존재가 되었다. 계집은 시체를 밀어내며 다소 주눅 든 음성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미안해서 이를 어째? 나는 홍 등일번지 열린 여자였어요. 한 번 여는 데 엽전 두 푼이었어요 ." 계집은 서둘러 옷을 입으며 두려움 을 앗으려는 듯이 종알거렸다. "어느 날 홍등일번지를 운영하시는 최고 높은 상전한테 착출됐어요. 천 명 정도였죠 아마? 나는 훈련 받은 대로 했을 뿐이에요." 계집은 습관적으로 화장을 고쳤다. "암여우 울음소리가 들리면 반지를 사용하라나? 하여튼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귀신이 돼도 날 괴롭히지 는 말아요." 계집은 엉덩이 씰룩거리며 미련 없 이 방을 빠져나갔다. 사검혈군(死劍血君) 백리공(百里公) 복마성 서열 이위로써 검(劍) 이외에 는 아무런 취미도 없고 어떤 것에도 홍취를 느끼지 못하는 냉혹비정한 검 귀(劍鬼). 백리공은 복마성 깊숙한 혈연지 중 앙에 있는 명화정(冥火亭)에서 애검(愛 劍) 혈사검(血死劍)을 손질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숫돌에 갈리는 혈사검. 백리공은 정성스럽게 갈은 혈사검을 눈앞에 들어 보았다. 휘황한 달빛이 혈사검에 반사되며 서늘한 한광(寒光)을 뿌렸다. 호흡을 멈추고 바라보는 백리공의 눈동자의 엷은 미소가 어렸다. '노부 평생의 친구 혈사검, 너로 인 해 나는 살아 있고 오늘의 위치를 차 지했다.' 헌데, 문득 백리공의 주름진 얼굴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불안! 오십 평생 느껴 보지 못한 이 불안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된 것이 란 말인가?' 찌잉―. 혈사검이 떨리며 나직한 울음을 토 한다. 백리공의 전신이 경직되었다. '혈사검이 스스로 울다니? 한 번도 없었던 불길한 징후 .' 언뜻 백리공은 태산이 다가오는 듯 한 위압감을 느꼈다. 백리공은 자신도 모르게 땅과 연결 되어 있는 월교(月橋)로 시선을 돌렸 다. 구름에 달 가듯 표표히 월교를 건너 오는 인영. 관해영은 마치 오랜 친구를 방문하 듯 백리공 면전에 섰다. 백리공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진한 살기를 느꼈다. '건방진 놈! 나를 무시할 자 세상에 한 명도 없다.' "흐음! 언제부터 복마성이 미꾸라지 멋대로 드나들 수 있는 허깨비 소굴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관해영은 빙긋 미소를 띠었다. "복마성은 애초부터 허깨비였소. 당 신은 여태까지 그 사실을 몰랐었나 보 구료?" 백리공의 안면에 살얼음이 깔렸다. "그랬었나? 하지만 노부의 친구인 혈사검은 그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데?" "만용이오. 그 따위 쇳조각이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최소한 네놈의 심장에 바람 구멍은 낼 수 있다." "호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구 료?" "시험해 봐라." 백리공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혈사검을 가슴에 비스듬히 세웠다. 등�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49 장 (죽음의 광채 2 ) 2. 위기일발. 일순, 버언쩍! 관해영의 허리 어림에서 한 줄기 빛 줄기가 환상처럼 반원을 그렸다. 천지사방으로 발출되는 자신의 검기 를 뚫고 한 줄기 섬광(閃光)이 가슴에 작렬함을 백리공은 보았다. 백리공은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시 원하다 느끼며 기우뚱 쓰러졌다. 쿵! 관해영은 느릿하게 돌아섰다. "너무 오래 살았어." 얼굴은 살찐 돼지 형상이지만 분명 사람인데 몸통은 하마를 능가한다. 염라백돈(閻羅百豚) 우거(牛巨). 복마성의 형법당주. 살찐 사람이 마음 좋다는 통설을 여 지없이 깨버린 변태성 살인귀. 우거의 손에 한 번 걸리면 저승사자 도 다시 한 번 죽을 도리밖에 없다. 헌데, 달도 밝은 오늘 밤 우거는 몹 시 흐뭇했다. 욕탕. 우거는 보통 사람 세 명은 뒹굴어도 좋을 나무 침대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뚱 아리는 실로 가관이건만, 소녀는 정성 스럽게 우거의 살덩어리를 닦아 주고 있었다. 우거는 두 눈을 실낱같이 뜨고 소녀 를 훑어보고 있었다. 소녀는 벌거숭이었다. 알맞게 살찐 암사슴이라고나 할까? 특히 유난히 가는 허리에서 돌출되 는 하체는 사내를 목마르게 하는 바로 그 자체였다. 우거는 저절로 굴러 들어온 소녀를 음충한 실눈으로 훔쳐보며 자신도 모 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육체의 향연. 우거의 거대한 몸체가 인정사정없이 짓누르는 데도 소녀의 가냘픈 여체가 놀라운 탄력을 보이며 열락의 수렁에 서 헤매게 만들었었다. 소녀는 코먹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으리, 혹시 누군가가 숨어 들어와 서 여기를 엿보는 건 아니겠죠?" 우거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모르지. 총각귀신이 와서 너를 훔쳐보며 아랫도리를 떨고 있을지." "아이 몰라아 ." "그렇지 않고서는 쥐새끼 한 마리 숨어들어 올 수 없다. 복마성은 염라전 보다 더욱 무서운 곳이야." "그런 복마성에서 나으리처럼 높으 신 분을 모시는 저는 행운아예요. 저한 테 싫증나신 건 아니겠죠?" "싫증이라니?" "있잖아요, 단물 빠진 사과라고 하며 다른 계집을 ." "천만에, 너는 다시는 얻을 수 없는 보물 같은 노리개니라." "호호 ." 소녀는 안심했다는 듯 교소를 흘렸 다. "헌데 저 말이죠 ." 소녀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좀전에 암여우 울음소리 들으셨 죠?" "응 ." "정말 들으셨어요?" "그렇다니까." "그럼 , 이곳에 굴러 들어온 계집 이 이백한 명이니까 복마성에서 쟁쟁 하다는 거물 이백 명이 황천으로 터잡 으러 갔겠군요." "그렇겠지 ." 무사히 뇌까리던 우거가 언뜻 의아 스러운지 눈을 떴다. 순간, 우거의 눈에 비친 것은 소녀의 손에 들린 비수의 퍼런 광채였다. "어?" 우거는 어안이 벙벙해지며 용수철 튕 겨지듯 상체를 일으켰다. 허나, 푹! 소녀는 비수를 우거의 하체 어딘가 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커억!" 우거는 돼지 멱따는 비명을 터뜨리며 전신을 퍼드득 경련했다. 소녀는 손을 툭툭 털었다. "네 몸은 금광불괴인가 하는 쇠뭉치 인데 거기만은 야들야들 하다더구나. 이로써 이백한 명이 공수래공수거가 됐군." "이 계집 ." 우거는 양손으로 한 바탕 허공을 허 우적거리다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소녀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큿큿! 내가 너 같은 하마 손에 공짜 로 굴러 들어왔을 때는 그 이유를 생 각했어야지. 계집이 사내를 태울 때는 절대 거저란 없거든." "으악!" "크아아악!" 밤공기를 뒤흔드는 처절한 비명소 리. 그것은 복마성의 외성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으와와와!" "단숨에 쓸어 버려라!" 단혈맹 인물들은 흡사 태풍처럼 복 마성을 짓쳐 들어갔다. 복마성 인물들은 속속무책 우와좌왕 하고 있었다. 용만후의 출타와 이백여 명에 달하 는 핵심 고수들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명령 계통의 와해된 복마성은 그야말 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천만대군인들 머리가 없으면 허수아 비에 불과한 터, 복마성의 수만 군마 (群魔)는 추풍 낙엽처럼 나뒹굴었다. 호산진 . 단혈맹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그녀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녀는 단혈맹 선두에서 서서 인간 벽을 쌓고 완강한 저항을 하고 있는 복마성 인물들에게 신형을 날렸다. "용만후의 졸개들! 너희들이 갈 곳은 오로지 황천뿐이다." 물찬 제비 같은 호산진의 검세(劍勢) 가 허공을 가르며 선렬한 피보라가 달 빛 아래 흩뿌려졌고, "컥!" "크악!" 외마디 처절한 비명이 합창하듯 울 려퍼졌다. 이미 대륙금사의 붕괴로 자체내 사 기가 갑자기 급강하된 데다가 용병으 로 만 명의 기마군단을 팔아먹은 복마 성. 팍! 한순간 백리공이 혈사검을 수직으로 세우자 돌연 혈사검의 형체가 사라졌 다. 백리공의 모습 또한 연기처럼 꺼져 버렸다. 허공에 핏빛 원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백리공은 처음 관해영을 보는 순간 감을 잡은 것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상전이며 평생의 적 수인 용만후보다 최소한 하수가 아님 을 . 관해영은 전신에 투명한 강막( 幕)을 형성하며 담담히 물었다. "용만후는 어디 갔느냐?" "출타중이시다!" 일음조각 같은 음성이 끝남과 동시 에, "파형혈사폭검(破形血死暴劍)!" 백리공의 냉갈찬 외침이 터짐과 동 시에 핏빛 원이 산산이 부서지며 핏방 울 같은 검기(劍氣) 사면팔방으로 폭사 되었다. 츠파파팍!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핏빛 검기에 서도 정신 핑 도는 독기(毒氣)가 함유 되어 있었다. 단혈맹의 십자포화에 산산조각이 났 다. 헌데, "후퇴!" 낭랑한 외침과 함께 호산진이 돌연 신형을 빼는 것이 아닌가? 단맹혈의 인물들도 신들린 듯한 떼 도륙에서 손을 떼며 일사분란하게 퇴 각했다. 어이없는 건 무차별 참사에게 목숨 을 구한 이만여 복마성 인물들, 그러나 살았다는 안도감을 채 느끼지 전에 복 마성 인물들은 두 눈을 부라려야 했으 니. "새외를 허깨비로 여긴 복마성의 방 자함을 죽음으로 심판하라!" "씨알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도륙하 라!"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새외 연합군단이 미친 야생마처럼 밀려 들 어왔다. 두두두두두! 삼만여 기마대를 선두로 노도와 같 이 진격해 들어오는 새외 연합군단. 복마성의 생존자들은 아예 싸울 의 욕을 잃고 말았다. 그저 말발굽에 짓밟히는 수밖에. ! 나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0 장 (여우 꼬리들 1 ) 제 50 장 여우 꼬리들 1. 중원대륙을 폭풍처럼 강타하는 소문 의 회오리! ― 복마성의 초토화! ― 사대벌왕은 간교한 위선의 무리 들이다. 정도(正導)를 수호한다는 명 목으로 잡아들인 악인군상(惡人群像) 이 사대벌왕의 중지에서 호의호식하 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 중원무림의 진정한 친구들이여! 단혈맹의 기치에 동참하여 빛나는 무혼(武魂)을 세우자! 더불어…… ― 새외연합군단의 중원정벌, 그들 은 광오한 사대벌왕을 징계한다는 명목 하에 중원에 혈족(血足)을 내디 뎠다. 낙양(洛陽). 열국(列國)이 흥망성쇠가 명멸해 간 천년고도(千年古都), 어스름한 땅거미 가 깔리는 시각. 천 년의 낙양은 고색찬연한 역사의 향내를 풍기며 잠들 채비를 하고 있었 다. 와우정사, 유림계(儒林界)에서 은퇴 한 오룡거사의 거처. 그러나 실상은 흑전상련의 낙양지부 를 총괄하는 거점! 단안한 내실, 사 인(四人)이 서로 마 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관해영과 타미, 연 숙상, 호산진이었다. "호수좌 복마성 초토화에 수고 많으 셨소." 호산진은 그녀답지 않게 사르르 얼 굴을 붉혔다. "수고랄 것까지 있나요. 용만후를 처 단하지 못한 것이 억울할 뿐이에요." 여기까지는 좋았다. 헌데, 호산진은 주책 없는 발언을 했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제가 고생 좀 했지요. 단혈맹의 조직화와 세 력배양, 그리고 ." " !" "대륙금사의 상권 장악에 있어 제 아 버님이 배후에서 지휘하셨잖아요? 자화 자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실 아니 겠어요?" 연숙상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차려 준 밥 누가 못 먹나? 그런 일 은 삼척동자도 시키면 할 수 있지 뭐 ." "뭐야?" 호산진이 발끈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관해영과의 오붓한 시간을 꿈꾸다 생각지도 않은 방해꾼 들 때문에 잔뜩 속이 상해 있던 차였 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사람이 여 기 있었군." 호산진의 비아냥에 연숙상은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물러날 연숙상이었으면 애 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공로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뻔뻔한 사람의 얼굴 가죽은 얼마나 두 꺼울까?" 호산진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허나 그녀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 하여 야유조로 말했다. "소문이 쫘아 하던데 사실인지 몰 라? 거짓이겠지 뭐 ." "뭐가?" "아, 글쎄 어떤 계집이 백주대낮에 사람도 많은 주점에서 옷을 벗었다잖 아.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완전히 까발렸다지?" 연숙상 얼굴이 핼쑥해졌다. "너 ." 호산진은 딴청을 피우며 계속 말을 이었다. "뭐라더라 소매치기 하다가 걸리니 까 결백을 주장한답시고 옷을 훌훌 벗 었다니 계집이 그 정도면 알 만하지 뭐! 자랑할 게 없다고 알몸뚱이 시위 람?" "으 ." 연숙상의 얼굴이 푸르락붉으락 썩은 돼지간처럼 변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호산진의 독설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하긴 그 자리에 있던 얼빠진 사내 들이 요즘 상사병에 걸려 밤이면 밤마 다 끙끙 앓는다니 배꼽 아래 어디엔가 색점(色點)이 있다고도 하더군 ." "야!" 연숙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났다. 삿대질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너 지금 누구 빗대고 하는 소리 야?" 호산진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떠 보 였다. "왜 그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소문의 그 계집이 혹시 너 아냐?" 연숙상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 었다. "그래 나다, 어쩔래?" 호산진은 뜻밖이란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맛! 그래? 축하해. 수많은 사내들 의 연인이 돼서. 헌데 그 사내들이 궁 금하다더라! 한 번 여는 데 얼마냐고?" "뭘 열어?" "육체의 문! 이왕 영업하려면 파격적 으로 싸게 되도록 많은 사내들의 친구 가 되도록 노력해 봐. 얼마나 멋진 인 생이니? 성공을 빌겠어." 연숙상은 마침내 손톱을 허옇게 세 우고 덤벼들었다. "너 죽고 나 살자!" 일순, 탕! 탕! 관해영이 탁자를 치며 화를 벌컥 냈 다. "도대체 뭣들 하는 거요? 나란 존재 는 안중에도 없소?" 관해영의 호통에 연숙상은 찔끔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연숙상은 호산진을 향해 치켜 뜬 눈 으로 파랗게 노려보며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두고 봐, 두고 보잖말야!' 잠자코 구경만 하던 타미가 관해영 의 어깨에 살짝 얼굴을 기대며 애교스 럽게 말했다. "이해하세요. 둘 다 철이 없어서 그 래요." 욕하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하나? 연숙상의 도끼눈이 타미에게 향했 다. '야만스런 계집! 저것들 풍습에는 나 그네에게 제 딸년을 바쳐 즐겁게 해 준 다지? 나중에 순결성 문제로 물고 늘어 져야지.' 타미 역시 불안한 의혹을 감추지 못 했다. '웬 불여우들일까? 관가가가 수하인 가? 아니면 남녀관계?' 타미는 어금니를 뽀드득 갈았다. '만약 그랬다간 살인나는 일이 생기 는 거지 뭐!' 호산진 역시 불만투성이었다. '도대체 무슨 꼬리들을 이렇게 많이 달고 다녀? 홍등일번지 육탄돌격이 있 어서 다행이야. 기득권이 있으니까 . 관해영은 소녀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목표는 파사철부요." 연숙상이 기회다 싶은지 감칠나게 교태를 떨었다. "파사철부로 정하신 이유는요?"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우며 새외 연 합세력 역시 그 점을 감안하여 파사철 부를 공략하리란 예상 때문이오." "아 ." "사실 새외연합세력은 우리가 빈껍 데기로 만들어 놓은 복마성을 깨고 상 당한 자신감에 들떠 있소. 애초의 목표 를 수정하여 중원정복까지 노린다는 소문이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한 결과 이지만 ." "아휴, 아휴! 어쩜 관가가의 명석한 두뇌를 누가 당하겠어요. 전 무지무지 기뻐요." 호산진과 타미는 갖은 교태를 떠는 연숙상을 흘겨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 다. '아예 치마를 벗지 그러냐? 저런 계 집 때문에 사내들이 여자를 우습게 보 는 거야.' '겉으로 봐선 나보다 엉덩이도 쬐그 만 게 어디서 저런 아양이 나올까? 어 쭈, 녹이는구나 녹여 .' 관해영은 노골적으로 나오는 연숙상 의 태도에 급히 자리를 떴다. "일이 있어 떠나겠소. 파사철부 공략 에 대비해 만전을 기하시오." 세 소녀의 양볼이 부어올랐다. '또 떠나?' '역마살이 끼었나?' '이번에 떠나면 또 다른 계집 하나 달고 나타날 거야.' 관해영은 문을 나서자 타미가 다급 하게 말했다. "저도 따라 가겠어요." 호산진이 가만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도 단혈맹을 파사철부 주위에 매 복해 놓으려면 어쩔 수 없이 따라 가 야 돼요." 연숙상이 질 여자인가? "나는 그곳 분타를 둘러봐야 되니 자연히 같이 가야 돼요. 대륙금사를 인 수해서 바쁘거든요." 타미는 심사가 뒤틀렸다. '뭐야, 나만 구실이 없잖아?' 그렇다고 닭 쫓던 개처럼 있을 타미 가 아니었다. "난 그쪽으로 혼수감 보러 가야 되 겠어요." 호산진이 샐쭉했다. "단혈맹 일 말고도 난 아기 귀저기감 끊으러 갈 일이 있군요." 연숙상이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난 며느리 패물 좀 알아봐야 되겠 군." 관해영은 그저 멍하니 세 여자를 보 는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졌다. 도무지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0 장 (여우 꼬리들 2 ) 2. 금릉, 중원 이대 색향(色鄕) 중 하나인 금 릉은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풍류객으 로 들끓고 있었다. 관해영이 금릉에 들어섰을 때는 정 오 무렵이었다. 그가 인파들 사이를 지날 때였다. 한 명의 소년이 그의 옆구리를 꾹 찌르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바라보니 이제 열 두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옷은 걸레가 되다시피 다 떨어지고 얼굴은 때자국이 끼어 자세한 용모를 알아볼 길이 없었다. 관해영이 의혹스런 눈길로 그를 바 라보자 소년은 소매로 흐르는 코를 쓱 닦으며 실실 웃는 것이었다. "아저씨! 무림인이죠?" 관해영의 얼굴에 언뜻 놀람이 일었 으나 소년의 눈길이 자신의 허리에 찬 죽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 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헌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소년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얘깃거리 사지 않을래요?" 관해영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얘깃거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사실 관해영이 모르는 일이지만 이 곳 항주에는 이런 소년들이 상당히 많 은 편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을 듣고 이 지방 사람이 아닌 듯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들려 주고는 한끼 밥값을 버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얘기들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얘기가 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얘깃거리는 값이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관해영이 물었다. "어떤 얘기들이냐?" "아저씨는 무림인이니까 무림에 관 한 얘기죠, 뭐 ." 관해영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 덕였다. "좋다, 네가 알고 있는 얘기들을 전 부 말해 보거라." 그러자 소년이 손을 쑤욱 내밀었다. "우선 엽전 한 닢을 주세요." 관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엽전 한 닢의 얘기라면 들을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 소년이 코를 훌쩍거리며 씨익 웃었 다. "그건 직업상 받는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에게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하면 더 얹어 주셔도 상관없어요." 관해영이 희한한 거래방법이라고 생 각하며 엽전 한 닢을 건네주자 소년은 허리춤에다 꾹 찔러 넣고 얘기를 시작 하는 것이었다. "우선 금릉의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 죠. 진회하 제일의 명기인 공손옥경이 곤경을 치르고 있어요." 관해영의 두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 였다. '공손옥경이라면 공손노인이 말했던 그 여인이 아닌가? 내가 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인가?' 관해영이 황급히 물었다. "그 여인이 무엇 때문에 곤경을 치 른다는 것이냐?" 순간, 관해영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 고 있던 소년이 다시 손을 쑥 내밀었 다. "아저씨 표정을 보니 그녀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돈을 더 내셔야죠?" 관해영은 소년의 눈치가 상당히 빠 른 것을 느끼고는 품속에서 은자를 꺼 내 소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어떠냐, 이만하면 흡족하냐?" 소년의 입이 쭉 찢어졌다. 그는 태어나서 이토록 큰 거금을 만 져 본 적이 없었다. "너무 과분한데요." 소년이 솔직이 말하자 관해영은 그 가 밉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대신 네가 알고 있는 얘기를 자세 히 들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좋아요." 소년이 쾌히 승낙하고 은자를 품속 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관해영은 소년이 들려 주는 얘기를 대충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았다. 공손옥경이 향주도둑이라는 사마수 의 유혹의 손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손옥경은 도저히 그의 유 혹을 뿌리칠 수 없다는 것 등, 그 외에 는 무림의 잡다한 이야기들이었다. 관해영은 소년이 인사하고 가는 것 도 모르는 채 검신을 부들부들 떨며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사마수! 그 놈이 해마단을 배반 하고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 을 줄이야 . 네놈을 결코 그냥 두지 는 않을 것이다.' 관해영은 해마단의 인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치 를 떨었다. '배신의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똑똑 히 보여 주마. 헌데 공손옥경과 사마수 와 함께 연관되어 있다니 공교로운 인 연이군.' 그렇다, 악연은 언제나 연속해서 반 복되는 법이다. '일단 공손옥경을 찾아가 보자.' 관해영이 결심하며 진회하를 향해 발길을 떼어 놓았다. 진회하의 푸른 물결 위에 수많은 화 선들이 둥실 떠 있었다. 그것들은 너무 밀접하게 붙어 있어 마치 육지 위에 집들을 연상시키고 있 었다. 관해영이 그 중 제일 커보이는 배로 올라서며 선실의 문을 두드렸다. 쾅! 쾅! 그러자 시비차림의 여인 한 명이 문 을 열며 툭 쏘아붙였다. "아저씨께서는 손님으로 받을 형편 이 못 되니 물러 가세요." 관해영은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쌀쌀맞은 얼굴로 대문을 닫으 려는 여인을 급히 불러세웠다. "이것 보시오, 아가씨!" 여인이 도끼눈으로 관해영을 바라보 았다. "손님으로 못 받을 형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되었지. 왜 사람을 못 살게 구는 ." 여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안색을 하얗게 굳은 채 전신 을 바르르 떨었다. 관해영의 두 눈에서, 가공할 살기가 면도날처럼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버릇없는 계집이군. 용건을 말하기 도 전에 사람을 쫓아 보내다니 ." " !" 여인은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관해영이 다시 말했다. "들어가서 네 주인에게 공손중명이 라는 노인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이 있다고 전하거라." "자, 잠시만 ." 여인은 대문을 닫는 것도 잊고 황망 히 선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다시 나오며 지극히 공 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시랍니다." 관해영이 여인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 선 곳은 단아한 실내였다. "어서 오세요." 창 밖에서 서서 진회하의 푸른 물결 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이 신형을 돌리 며 관해영을 맞이했다. 순간 여인을 바라보는 관해영의 시 선이 가볍게 흔들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보는 군.' 사실 관해영을 응시하고 있은 여인 의 얼굴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그린 듯한 아미, 휘어진 눈썹 아래 반짝이는 두 눈은 흑백이 뚜렷했고, 콧날은 섬세하며 입 술은 연분홍이었다. 헌데, 이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은 짙 은 우수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 주고 있었다. 공손옥경은 지극히 우울한 음색으로 관해영을 향해 물었다. "아버님을 어떻게 알죠?" 관해영은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솔직히 대답했다. "지옥귀사역에 같이 있었소." 순간 공손옥경은 흠칫했다. "그럼, 당신도 죄수 ."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공손옥경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실수했군요. 아버님이 당신에 게 나를 찾아보라고 했다며 당신은 분 명 무슨 곡절이 있을 거예요. 헌데, 그 곳은 한 번 들어가면 영혼마저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곳인데." 관해영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난 탈옥을 했소이다." 공손옥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근심스 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시죠?" "지옥귀사역은 여타 감옥들과는 틀 려 노인의 몸으로는 견디지 어렵지만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오." 공손옥경의 두 눈에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어 그녀는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며 떠듬거렸다. "불쌍하신 아버님 억울한 누명 을 쓰시고 얼마나 고생이 심하실까?" 관해영이 코끝이 시큰해지며 그녀의 등을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고 싶은 마 음이 일었으나 처음 보는 사이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관해영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 했다. "당신 아버님의 부탁이 복수 따위는 포기하라고 했소. 평범히 살아가라고 하더군요 ." 공손옥경이 창백한 얼굴로 관해영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가 없어요. 가문이나 명예 따위에 연연해 복수를 하고 싶지는 않 아요. 다만 평생 쌓은 아버님의 덕망이 형편없이 실추된 것이 원망스러울 뿐 이에요." " !" "성호경! 그 자는 아버님에게 누명을 씌우고도 대명의 학자인양 하는 그 놈 을 절대로 용서할 수는 없어요." "난 부탁을 전했으니 이만 ." 관해영은 떠날 것을 알리고 신형을 돌리려 할 때였다. "아가씨! 사마대부께서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오 자 공손옥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끈질기군 끝까지 괴롭힐 심산이니 ." 순간, 관해영의 두 눈에 싸늘한 한광 이 뿜어져 나왔다. '사마수 그 놈이 .' 摸� 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1 장 (멋진 사나이 1 ) 제 51 장 멋진 사나이 1. 관해영이 공손옥경과 작별을 고하고 내실을 빠져나오는 체하다가 빠르게 몸을 숨겼다. 그곳은 창문을 통해 공손옥경의 방 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관해영이 숨을 죽이며 바라보자 팔 척 장신의 사마수가 신색이 훤한 얼굴 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일신에는 화려한 비단 금의를 걸치 고 옥대(玉帶)에는 금방울을 달고 있어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마수! 그는 이미 옛날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으리만큼 변해 있었다. 그는 예전보다 몸이 비대해져 있어 걸음걸이도 이상할 뿐만 아니라 눈빛 또한 이미 풀어져 있었다. "공손옥경, 이젠 마음을 돌렸느냐?" 공손옥경은 다가오고 있는 사마수를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변할 수 없으니 사 마대부는 포기하세요." 사마수의 검미가 꿈틀 솟아올랐다. "끝내 내 비위를 건드리는군. 나에게 밉게 보였다가는 네가 이곳에 있기도 힘드는 것을 모르느냐?" "알량한 권력을 가지고 날 위협할 생각은 말아요." "발칙한 년, 네년이 날 이토록 업신 여기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 나." "돌아가세요. 난 더이상 할말이 없으 니까." "네년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겠다." 사마수가 이빨을 갈며 밖을 향해 소 리쳤다. "여봐라!" 순간, 건장하게 생긴 다섯 명의 장한 들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비록 평복을 하고 있으나 눈빛이 날 카로운 것으로 보아 무공께나 하는 자 들 같아 보였다. 사마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노갈 을 터뜨렸다. "저 년을 끌고 도독부로 가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섯 명의 대한들이 일제히 대답하 고 공손옥경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공손옥경이 가볍게 손목을 뿌리쳤 다. 순간, "억!" 양쪽에서 공손옥경의 손목을 잡고 있던 대한들이 허공을 날아 선실 벽에 부딪치며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 닌가? 이 돌연한 변화에 사마수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네년이 무공을……. 용서할 수 없 다. 저 년을 생포해라. 내 반드시 저 년 을 첩으로 삼고 말겠다." 세 명의 대한이 허리에 찬 검을 뽑 아들고 공손옥경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일류 고수라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이 펼쳐내는 검망은 날카로운 기세로 공 손옥경의 전신을 휘감았다. 허나, 공손옥경은 마치 나비가 너울 대는 듯이 신형을 뽑아 검망을 모조리 피해내는 것이었다. 세 명의 얼굴에 언뜻 두려움이 떠올 랐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사마 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 없는 표정들이었 다. 사마수가 귀청이 윙윙 울리도록 고 함을 쳤다. "무얼 망설이고 있는 것이냐? 어서 사로잡지 못하고……." 한 차례 호통을 듣고 난 세 명의 장 한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공손옥경을 향해 덮쳐 들었다. 쐐액! 파츠츠츠―. 싸늘한 검풍이 이는 가운데 번뜩이 는 검망이 허공을 메우며 우두커니 서 있는 공손옥경의 옷자락을 펄럭거렸 다. 공손옥경이 냉소를 터뜨렸다. "흥! 내 손속이 맵다고 후회한다 해 도 이제는 늦었다." 공손옥경이 우수를 뒤집자 엄청난 장력이 세 사람을 동시에 쓸어갔다. 세 명의 대한은 가슴이 답답함을 느 끼며 피하려 했으나 이미 가슴에 일 장을 얻어맞고 삼 장씩이나 허공을 날 아 벽에 부딪친 다음 정신을 잃었다. 이 일수는 사마수의 안색을 흑빛으 로 만들어 놓았다. 공손옥경이 사마수 앞으로 다가가자 사마수는 얼굴 가득 두려움을 띠고 뒤 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에게서는 이미 예전의 해적다운 모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풍요로움이란 인간을 가장 나태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일지도 몰랐다. 사마수가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깨닫고 이마에 식은 땀을 흘렸다. "가까이 오지 마라." 공손옥경이 우뚝 걸음을 멈추며 차 가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젠 널 살려 보낼 수가 없다. 만약 네가 살아가면, 그들이 내가 무공을 지 닌 것을 알게 되면, 일이 시끄러워진 다." 그들? 누굴 말하는 것일까? 순간, 사마수의 입가에 음산한 웃음 이 번져 올랐다. "흐흐 이제야 꼬리를 드러내는 군……." 그런 그의 얼굴은 공포 따위는 추호 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신, 그의 두 눈은 신광이 번쩍거리 고 있었고 평상시에는 바다 사나이 특 유의 굴강함이 뿜어져 나왔다. 공손옥경이 흠칫했다. 그녀는 사마수의 달라진 모습에 무 엇인가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혹시…… 금의위(錦 衣衛)의……." 사마수가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 성호경 기찰원주(機察院主) 겸 금위대장(金衛隊長)의 명으로 너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지금까지 연극을 편 것이다." 공손옥경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 들었다. '조금 더 참았어야 하는 건데……. 아버님의 소식을 대하니 나도 모르 게……. 잘못 하다가는 일을 그르치고 말겠다.' 사마수가 두 눈을 음침하게 가라앉 혔다. "네년이 모란회주(牡丹會主)임이 분 명하겠지." 모란회(牡丹會)! 언제부터인가 고관대작들의 부인을 포섭하여 그 부인과 또 다른 부인들을 통해 고관대작들을 조정하는 신비의 단체가 나타났다. 이들은 지극히 은밀해 도저히 그 꼬 리를 밟을 수도 없으며 한 사람 이상 을 알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있었기 때 문에 그 누구도 모란회의 정체를 파악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헌데, 그 회주가 공손옥경이라 니……. 공손옥경은 더 이상 당황해 하지 않 았다. "성호경도 냄새는 잘 맞는군. 그 놈 을 없애려고 모란회를 조직했는데 도 리어 날 주시하고 있었다니……." 사마수가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넌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다." 순간, 슈욱! 방 안으로 두 명의 인물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이들의 신법은 워낙 신출귀몰해 두 눈을 뜨고 있는 공손옥경조차도 어디 로 들어왔는지를 몰랐다. 두 명의 노인. 이들의 키는 불과 오척(五尺)에도 미 치지 못했으며 오관이 뒤틀린 얼굴은 보기에도 소름끼치도록 끔찍스러워 보 였다. 공손옥경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경 악성을 터뜨렸다. "무산쌍왜(巫山雙矮)!" 아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1 장 (멋진 사나이 2 ) 2. 무산쌍왜! 대내(大內) 서열 오 위에 올라 있는 인물들. 살인하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하고 한번 눈독을 들인 상대는 반드시 죽이고야 마는 지독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일찍이 황궁에 들어가 그들 을 아는 사람은 무림에서 극히 드물었 다. 이들의 실력은 정종십종에 버금간다 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그런 인물들을 대하자 공손옥경의 신색은 암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틀렸어……. 여기서 모든 일이 수포 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비참한 생각이 드는 공 손옥경이었다. 무산쌍왜가 두 눈에 살기를 띠면서 공손옥경을 향해 다가들었다. 공손옥경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무산쌍왜가 으스스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도망가 봐야 우리들의 손을 벗어나 지는 못한다." 공손옥경이 그들의 말이 맞다고 생 각하며 일전(一戰)을 불사하겠다는 심 정으로 허리에 찬 연검을 풀었다. 챙! 맑은 금속성이 울리며 면도날보다 더 얇은 연검이 새파란 빛을 뿌렸다. 그러나 무산쌍왜는 조금도 두려워하 는 빛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은 고양이가 쥐를 놀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웃기는군. 우리 앞에서 장난 같은 무 공을 쓰려 하다니……." "어린애 장난 같은 무공인지 아닌지 는 보아야 아는 것……." 공손옥경이 소리치며 돌연 연검을 휘두르며 두 사람의 허리를 쓸어갔다. 무산쌍왜가 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 만마(萬魔) 위에 등세 욱이 있다고는 하나 서열 오위에 올라 있는 우리들이 너 같은 계집애의 검을 받으려 하니 손이 부끄럽구나." 그들은 슬쩍 몸을 비틀어 공손옥경 의 검을 피해냈다. 공손옥경은 무산쌍왜가 힘 하나 안 들이고 자신의 검을 피해내자 죽음에 앞서 오기가 치솟아 올라 이를 악물고 다시금 두 사람을 향해 덮쳐 갔다. 쐐애애액! 싸늘한 검풍이 찢어지게 울리는 가 운데 더할 수 없이 강렬한 검광이 사 방을 휩쓸어 나갔다. 이번의 일초는 좀전보다 서너 배의 위력이 깃들여져 있는 듯 주위의 공기 가 회오리를 일으켰다. 허나, 무산쌍왜는 두 발을 땅에서 떼 지도 않고 여유롭게 공손옥경의 검을 피해내는 것이다. 공손옥경은 연달아 십 초를 공격해 도 그들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지 못 하자 거친 숨을 몰아 뒤로 물러섰다. 바로 그때였다. 무산쌍왜 중 한 명이 벼락같이 우수 를 뻗어 공손옥경의 완맥을 움켜잡았 다. 공손옥경은 그야말로 두 눈을 버젓 이 뜨고도 완맥을 잡히자 어처구니없 어 하는 한편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 쳤다. "흐흐……, 죽음이란 바로 코앞에 있 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느냐?" 사마수가 두 눈을 부라렸다. "무얼 망설이시오. 어서 죽여 버리시 오." 무산쌍왜가 힐끗 사마수를 돌아보았 다. "네놈이 나에게 명령할 권리는 없다 는 것을 명심해라." 사마수가 찔끔거리자 무산쌍왜가 더 할 수 없이 싸늘한 목소리를 터뜨렸다. "이제 영원한 잠 속으로 가거라." 그가 손에 진기를 주입시키려 할 때 였다. 쐐애애액! 금빛 벌 한 마리가 방안을 어지럽게 날며 무산쌍왜의 머리 위를 맴도는 것 이 아닌가? 무산쌍왜의 두 눈이 빛났다. 그들은 이 금빛 벌이 결코 평범한 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무산쌍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품속에서 제각기 비수를 꺼내 들어 눈 빛을 교환했다. 순간, 스파아앗! 그들의 손을 떠난 비수가 정확히 금 빛 벌의 몸을 산산이 찢어 버렸다고 생각되었을 때이다. 엥―. 벌은 비수를 피하며 순식간에 두 사 람의 목을 스쳐 지나가며 창문을 넘어 사라지는 것이었다. 무산쌍왜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분명 보통 벌은 아니라고 생각했으 나 아무런 일도 없이 사라지니 그들로 서는 도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서로를 바라보던 무산쌍왜의 얼굴이 흑빛으로 굳어졌다. "모, 목에……." "너 역시……." 무산쌍왜! 그들의 목에는 실보다 가는 혈선이 나타나 있었으며 그것은 시간이 지남 에 따라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들의 목은 힘없이 지 면으로 떨어 내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쓰러지는 목 없는 시체에 서는 더운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순간, "으으……." 사마수가 귀신을 본 사람처럼 안색 이 하얗게 질린 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것이었다. 공손옥경은 그가 왜 그러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사마수가 떠듬거렸다. "단주…… 용, 용서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손옥경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고개 를 돌려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관해영이 더할 수 없이 살 벌한 얼굴로 사마수를 죽일 듯이 노려 보고 있었다. "다, 당신……." 공손옥경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느 냐고 물어 보려다 쓸데없는 말인 줄 알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그보다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뭇 궁금했 던 것이다. 관해영이 냉소를 터뜨렸다. "용서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 네놈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다 니……." "……!"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느냐?" "……." "사랑하는 처자식을 잃고 절규하던 형제들의 모습을 상상이나 해 보았느 냐? 네놈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단 말이 다." 사마수가 사색이 된 채 뒷걸음질쳤 다. "단주! 난 아닙니다. 단강이 자꾸 부 추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관해영이 한 발로 선실 바닥을 굴렀 다. 쾅! 커다란 배가 좌우로 거침없이 흔들 렸다. 사마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을 쓰고 있었다. "네놈! 배신의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가르쳐 주마." 관해영이 이빨을 갈며 다가가자 사 마수가 버럭 악을 썼다. "단주! 날 죽이면 단강의 거처는 모 를 것이오." "네놈부터 죽인 다음 물어 보겠다." 관해영이 두 눈에 살기를 띠자 사마 수가 돌연 신형을 박차고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순간, 쐐애액 관해영의 신형이 곧 바로 사마수의 뒤를 따르며 우수수 등을 후려쳤다. "으아아악!" 사마수가 처절한 비명을 토하며 갑 판 위를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가슴은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으며, 오장육부가 그곳을 통 해 흘러나왔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관해영이 그의 신형을 발로 차 강물 로 던져 버리고는 암울한 시선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 넘어 해왕도의 그리운 얼굴 이 하나 둘 스쳐 지나가며 자신을 향 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요. 헌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1 장 (멋진 사나이 3 ) 3. 관해영이 이빨을 갈았다. '단강! 항상 선두에 서던 네가 배신 할 줄은 몰랐다.' 이때, 공손옥경이 밖으로 나오다가 나직한 경악성을 터뜨렸다. "저…… 저것……." 관해영이 그녀의 시선을 쫓아 바라 보니 주위에는 대형의 깃발을 단 십여 척의 배들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의혹 어린 얼굴로 물었다. "저들이 누구요?" 공손옥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저들은 성호경의 수하들이 에요." "그가 왜 당신을 노린단 말이오?" "내가 모란회를 조직하여 자신을 노 리고 있고, 또 내가 공손중명의 딸임을 알고 그냥 놔두지 않으려는 거죠." "흠! 그가 사사로이 금의위로부터 자 신의 적을 살해하려는 것을 보니 비리 가 많고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있 는 인물이겠군……."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그들 뒤에 는 무림의 세력이 있어요. 성호경은 그 세력의 사주를 받아 기찰원(機察院)과 금의위를 장악하기 위해 아버님을 모 함하여 물러나게 한 것이에요." 순간, 관해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 어 들었다. '무림의 세력…… 통천계와 혈사무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십여 척의 배들을 완전히 부서 버리기로 마음먹 었다. "저들을 침몰시켜 버려야 되겠소." 그러자 공손옥경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무공이 입선지경에 이르렀 다고 해도 저 배들을 침몰시킬 수 없 어요. 만약, 당신이 신형을 날려 갑판 위에 오르는 순간 수십 개의 화포(火 砲)가 당신의 몸을 형체도 없이 날려 버릴 거예요." 화포라는 소리에 관해영도 입을 다 물었다. '화포를 가지고 있는 배들이라면 나 로서도 접근할 수 없다. 젠장, 그렇다 면 이곳에서 꼼짝할 수 없다는 말인 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하늘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십여 척의 배들이 시뻘건 화염을 뿜으며 가 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 닌가? 이 돌연한 변화에 관해영과 공손옥 경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 절해 하고 있었다. 시커먼 화염이 하늘을 가리고 배의 파편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순간, 두 개의 손이 관해영의 뒤쪽에 나타나며 배의 한 모서리를 거세게 움 켜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 하나가 천천히 나타나 고 뒤이어 그의 신형은 소리 없이 간 판 위로 올라서는 것이었다. 헌데, 그는 바로 단강이 아닌가? 그는 회한이 어린 얼굴로 관해영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 끝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털썩 무릎을 꿇으며 떨리 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단주!" 관해영은 적인 줄 알고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그 소리에 신형을 홱 돌려 단강을 바라보았다. "단…… 단강……." "그렇습니다, 소인 단강입니다." 단강이 고개를 숙이며 흐느꼈다. 관해영은 흠뻑 젖은 그의 몰골을 보 고 물었다. "저 배들은 네가 폭파시킨 것이냐?" "그렇습니다. 단주님을 배신하고 도 저히 견딜 수 없어서 기회를 보아 화 약고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고 왔느냐?" "삼십 년을 단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단주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널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 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것입니 다." 관해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녕 내 손에 죽고 싶다는 말이 냐?" 관해영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는 굵 은 눈물 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여 주십시오. 그래야지만 저승에 있는 형제들 앞에 고개라도 들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관해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될 지 관해영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어간 해왕도의 인물들을 생각해서는 단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해영은 죽검을 뽑아 들었다. "단강! 형제들에게 가서 용서를 빌어 라." "고맙습니다, 단주님." 단강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검게 탄 얼굴. 그 얼굴에 부서지는 저녁놀은 어딘 지 모르게 단강의 얼굴을 슬프게 보이 게 했다. 관해영이 검을 높이 치켜 들었다. 쪽빛 노을을 가르고 한 때의 철새들 이 날아갔다. 순간, 스파아아악. 관해영의 죽검이 허공을 갈랐다. '…….' 단강은 조용히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육지로 향하는 긴 나무다리 위로 관해영이 한 여인을 데리고 걸어 가는 것을 보았다. "단주!" 단강이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러자 관해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강! 시간이 있으면 너의 아들을 한 번 데리고 오너라. 널 닮아 멋진 남 자일 테니까 말이다." 단강은 노을빛 속에 파묻혀 언제까 지고 움직일 줄 몰랐다. 그 찬란한 노을빛 속에 단강은 부귀 와 영화보다는 허리의 띠를 졸라매더 라도 마음에 안식을 찾기로 결심했다. 강변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에 억새풀 들이 몸을 비비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공손옥경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진실로 감사하 는 빛이 역력했다. 관해영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무 겁게 입을 뗐다. "이만 가보겠소." 관해영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 공손옥경은 관해영이 떠나려고 하자 문득 초조해졌다. "저……." "……?" 막 발걸음을 떼려던 관해영은 몸을 돌려 의아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 보았다. 공손옥경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꽃잎 같은 입술 을 꼭 깨물었다. "도와주세요. 부탁이에요……?" "……!" "혼자의 힘으로는 성호경을 상대하 기가 어려워요. 제겐…… 당신 같은 고 수가 필요해요." 그녀의 음성엔 애절할 정도로 간절 함이 듬뿍 담겨 있었다. 관해영은 난처했다. '공손노인의 억울한 신세를 생각하 면 마땅히 도와주어야 한다. 허나…….' 그에게는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 우선 해야 할 일은 모용청 운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은 한시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일이 아닌가? "미안하오……. 내게 바쁜 일이 있 어……." 공손옥경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더욱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곧 도와 달라는 것은 아니에 요……. 공자께서 해야 할 일을 마친 다음에 도와줘도 돼요……." "하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인 데……?" 그러다 문득, 그는 무슨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최선을 다해 봅시다." "……!" 요. 헌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1 장 (멋진 사나이 4 ) 4. 귀녀곡(鬼女谷). 휘이이잉―! 억울하게 죽은 여귀(女鬼)들이 우글 거린다는 황량한 계곡, 양옆으로 치솟 는 절벽은 구름을 뚫고, 음습하게 불어 오는 바람에 누렇게 시들은 잡초가 서 로 몸을 부비며 스산하게 운다. 이따금 들려오는 섬뜩한 귀곡성(鬼 哭聲)……. "으아아악!" 귀녀곡 깊숙한 곳, 놀랍게도 사방 삼 백여 장 가령의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 는데……. 목불인견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쩔그덩― 쩔껑―. 양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자신보다 큰돌을 운반하는 사내들. 누렇게 찐 얼굴은 산송장 그것이었 고, 갈비뼈 앙상한 가슴은 짓눌리는 중 량에 할딱할딱 뛴다. 그런 사내들을 소 녀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암팡지게 소 리친다. "빨리 빨리들 움직여! 여자 피만 빨 아먹다가 이런 짓 하려니까 죽겠지?" "여자의 천적들! 엄살부리지 마라." 휘이― 착! 소녀들이 휘두르는 채찍은 사내의 가슴에 사정없이 감기며 살덩어리를 뜯어내고, 탁한 비명을 토하던 사내는 비틀거리다가 자신이 짊어진 돌에 깔 려 즉사한다. 그러나 소녀는 코방귀만 날렸다. "머저리 같은 자식!" 중노동에 시달리는 오백여 명의 사 내들과 그들을 가축처럼 다루는 소녀 들. 인륜(人倫)과 도덕이 무시된 사건의 현장. 그 현장을 바라보는 한 소녀의 눈동 자에는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궁전(宮殿). 사내의 죽음을 대가로 세워진 화려 한 궁전 현판에는 이런 글씨가 멋들어 지게 휘갈겨져 있었다. 독녀궁(獨女宮)! 아! 여기가 바로 여인 제국(女人帝 國)인 독녀궁인 것이다. 흑란, 그녀는 궁전 삼층 누각에서 중노동 에 고통당하는 사내들과 채찍 들고 날 뛰는 소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계집들은 아비도 없나? 사내란 존재를 부정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흑란은 방문을 나서서 아래층으로 향하는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미쳤어, 시집 안 가고 씨 안 받 으면 여자 손해지…….' 문득 들려오는 야릇한 교성. 흑란은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호화로운 침실, 중년여인 하나에 사 내 둘이 붙어 있었다. 허나, 사내 둘이 중년여인을 강간한 다는 따위가 아니었다. 중년여인은 즐기고 있었다. 두 사내는 중년여인을 황홀하게 하 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안간힘을 쓰 고 있었다. 중년여인이 짜증을 냈다. "사내들이 왜 이리 시원찮아?" 흑란은 고개를 돌리며 피식 고소를 흘렸다. "저럴 때는 사내 찾지, 언제는 사내 아닌가?" 그녀는 추잡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 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양쪽 통로에 있는 침실은 모 두 역겨운 변태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 다. 그것도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적나 라하게……. 흑란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계집이 타락하면 사내보다 더욱 더 럽다더니……. 여인을 사내의 독재에 서 해방시킨다는 그럴 듯한 명분 하에 벌어지는 역겨운 행위라니…….'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는 후질후 질한 헐떡거림……. 흑란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여자라 할 수 없는 암캐들 이다. 해영, 어디서 뭐하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자금성……?" 관해영의 눈에 의혹이 서리며 공손 옥경을 바라보았다. 공손옥경은 달콤한 미소를 베어문 채 그를 주시하며 홍작약 같은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이제부터 당신은 한 사람으로 위장 해 금의위에 가입하여 성호경의 신임 을 얻는 것이에요." "이를테면 변신을 하라는 이야기인 데……, 그 대상자는 누구요?" "당신도 들어왔을 거예요. 장백철수 방표랑이라고……?" "장백철주 방표랑……?"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장백철주 방표랑은 장백파(長白波)의 제일 고수로 그의 철수는 천근 거암이 라 할지라도 계란을 쪼개듯이 단숨에 박살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무섭다는 것까지……. 게다가, 장백철주 방표랑은 중원에 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대단한 음적(淫賊)으로, 양가의 규수들만을 전 적으로 강간을 해 그 숫자가 오백이 넘는다고 하던가? 아무튼 그로 인해 장백산 일대의 처 녀들은 씨가 말랐다고까지 전해질 정 도였다. "하필이면 왜 그런 인물을……?" 그가 고소를 떠올리며 묻자, 공손옥 경은 기오한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호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당 신도 대단한 여성편력을 지녔다고 하 시던데……?" "후후!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소. 헌 데, 그 후에는 어찌 하자는 것이오?" "그 후 당신은 금의위의 인물들을 포섭하여 성호경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에요……." "흠! 괜찮은 계략이오. 헌데, 금의위 는 대내에 어느 정도 위세가 있는 것 이오?" "한 마디로 대단하지요. 그들의 명이 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요……." "음…….!" "황궁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두 개의 세력이에요……." "바로 금의위와 밀반이겠구료……?" "똑똑하시니 말을 하기도 편하군요. 그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들로 이루어 져 있는데 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 가 하는 것은 황제를 제외하고는 아무 도 몰라요." 그때 관해영은 문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지금 밀반의 수뇌는 누구요?" "얼마까지는 위재상이었는데……, 지 금은 위재상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는 사운악을 밀반주로 임명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순간 태산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까 딱하지 않을 관해영의 눈에 언뜻 놀람 의 빛이 스쳤다. '몰랐다. 설마 사운악이 밀반주였다 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세월 꿈속에서조차 잊지 않았 던 불구대천의 원수…….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의 머 리는 독사처럼 영활하게 움직이고 있 었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금의위를 움직일 수 있다면 사운악에게 치명적 인 타격을 입힐 수 있겠군!' 그는 물었다. "허면 금의위의 힘으로 밀반의 활동 을 저지할 수가 있소?" "두 세력은 서로 독자적으로 행동하 고 있어요. 또한 세력의 힘도 엇비슷해 요. 그래서 둘은 항상 주도권을 잡으려 고 서로 견제를 하고 있지요." 그때 문득, 관해영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의혹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 를 바라보았다. "헌데 내가 알기엔 사운악과 위혜군 은 혼인을 올렸을 텐데 어째서 당신은 위재상이 사운악을 사위로 생각한다는 표현을 썼소?" 그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실상은 혼인식을 거부하고 위혜군 이 무슨 이유에선지 돌연 집을 떠났다 고 해요. 위재상과 위장천이 노발대발 하여 많은 사람들을 풀어 은밀히 그녀 를 찾으려 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 충격! 관해영은 그 순간 심신이 벼락에 맞 은 듯 심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위혜군……, 그녀가 누군가? 바로 그의 가슴에 여인으로서는 첫 번째로 자리잡은 여인이 아니던가? '혜군……!' 그는 위혜군이 사운악과의 약혼을 파기하고 스스로 집을 뛰쳐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녀가 가련하기도 했 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감동이 가슴속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감지했다. '혜군! 당신이 만일 나 때문에 가출 을 했다면 반드시 당신을 찾아 세상에 서 가장 행복하게 해 주겠소. 나의 혜 군……!' 불(火).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불길 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나 고�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1 장 (멋진 사나이 5 ) 5. 자금성(紫金城).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성지(聖地)이 자 당금의 황상(皇上)이 기거하는 성 역. 이 위대한 성지로 스며드는 어둠 속 에 하루의 고단한 여정의 날개를 접은 채 편안한 하루의 안식에 빠져들고 있 었다. 어둠이 본격적으로 몰려드는 해시 경.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자금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밀실에서는 이 시대의 운명을 가름할 회동이 벌어 지고 있었으니……. 한 사람. 대략 오순 가량 되었을까? 약간 비대한 몸집은 눈부신 황금장 포로 휘감고 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불그스레한 동안의 혈색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눈웃음을 짓고 있는 초로 의 사내였다. 언뜻 보아서는 시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이 사내 가 바로 성호경이었다. 허나, 아는 사람은 알리라! 그의 이런 특징 없는 모습에 감춰진 그의 소름끼치도록 가공할 능력을 ……. 그리고 그 앞에는 미남의 대명사, 그 러나 눈빛이 음침한 삼십대의 청년이 정중히 앉아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장백철수 방표랑. 죽음의 소매라 일컬어지는 철수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관해영이 변장한 모 습이라는 것을……. 사실, 진짜 방표랑은 이미 삼 개월 전에 장백산에서 공손옥경의 손에 의 해 이승을 떠난 지 오래인 것이었다. "자네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네. 자네 철수의 위력이 대단하다 고 하더군!" 성호경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자단목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관해영을 바라보며 입을 떼 었다. 방표랑으로 변장한 관해영은 청동화 병에 꽂혀 있는 장미를 바라보다가 그 의 말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소문이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인 법입니다. 허나 이 방표랑, 절대 대감 을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겸손한 듯 보이나 실로 광오하기 이 를 데 없는 말. 그것은 평상시 살아 있을 때의 방표 랑의 성격과 똑같은 것이었다. "허허! 역시 소문대로 시원시원해서 좋군! 헌데 자네의 실력이라면 강호에 서도 꽤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본좌의 금의위에 들어오려는 이 유가 무엇인가?"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묻는 듯한 표 정이었으나 그 순간 그의 동공 깊숙한 곳에서 어른거리는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기 광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것이었다. 인간의 눈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한 눈빛, 관해영은 음사한 미소를 흘 리며 대답했다. "흐흐! 무림에서 성공해 보았자 결국 무림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도 나이인 만큼 제 후손들에게 자 랑스런 신분을 남기고 싶어진 것입니 다." 너무도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성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잘했네. 헌데 자네도 잘 알 겠지만 본 금의위의 임무는 실로 막중 한 것이었네. 그런 만큼……."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를……." "……!" "후후……!" 관해영은 음사한 미소를 지으며 문 득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청동화병을 집어들었다. 높이가 석 자 가령의 비교적 큰 청 동화병은 그의 손이 몇 번 주물럭거리 자, 순식간에 우그러들며 공처럼 동그 랗게 말아지는 것이 아닌가? '저…… 저런……!' 이제껏 무수한 초절정 고수들의 무 공을 수도 없이 봐온 성호경이었으나, 기억하건대 그는 이토록 엄청난 내공 을 지닌 인물을 본 적은 없었다. '어…… 엄청난 내공이다. 이 정도라 면 상상 이상이다!' 허나 그의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 았다. 슷―! 관해영은 청동화병을 공처럼 말더니 그것을 가볍게 수도로 내려치자 마치 두부가 베어지듯 정확하게 양쪽으로 베어지는 것이 아닌가? 잘라진 쇳덩어리의 단면은 마치 예 리한 칼로 무를 벤 듯 매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호경의 눈이 귓볼까지 찢어지며 크게 부릅떠졌다. '저 정도라면 사운악의 무학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나, 결코 그의 아래는 아닐 것이다.' 그는 놀랬다. 그가 놀란 것은 결코 관해영의 놀라 운 무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관해영의 무학이 초절하다는 것이었 다. 다시 말해 이 방표랑이란 자는 지금 까지 자신의 진면목을 보인 적이 없다 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런 관해영은 용의주도함은 그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이 사실이 었다. 그가 원하는 사람은 결코 무공이 강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되, 자기의 삼 푼을 항상 숨기고 있는 지혜를 가진 자를 원했다. 그런 자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이 며 그가 안심하고 모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단하네. 내가 알고 있는 자 네의 소문은 진실한 자네의 실력을 반 의 반도 전하지 못했네……." "후훗……, 과찬이십니다. 모쪼록 대 감의 마음에 드는지나 모르겠습니다." 어찌 마음에 들다 뿐이겠는가? 성호경은 입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핫핫!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내가 보아온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 일세. 무공과 심기 두 가지 면에서 다……." 다음 순간, 그는 문득 지금까지와는 달리 안색을 무겁게 하며 진중한 음성 으로 말했다. "이제부터 자네는 나를 도와주어야 겠네……." "후후!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감의 명리라면 설사 지옥에 가라고 해도 서 슴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리도 좋은가? 성호경은 그 순간 관해영이 얼마나 좋은지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은 심정이 었다. "하하!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자 네를 지옥에 보낼 것이 아니라 자네를 본좌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금의 위의 일호통령을 맡아 달라고 부탁할 참이네……, 핫핫……." 금의위의 일호통령! 그것은 황궁의 절대적인 권력을 지 닌 금의위를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최 고의 통수권자라는 막중한 지위였다. 성호경. 그는 관해영에게 반해도 단단히 반 한 것이었다. 허나 만일 그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관해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무튼 금의위에 일호불통령이라는 것은 관해영조차 상상하지 않았던 파 격적인 대우였다. 그때 성호경은 문득 소매춤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그에게 펼쳐보였다. "자네가 맨 먼저 나를 도와줘야 할 일은 이것일세……." 관해영은 슬그머니 서찰을 바라보았 다. <성호경대감 천전, 본계에서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사운악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 로 생각되고 있소. 사운악은 오는 삼월 보름에 있을 홍예공주의 사냥을 이용해 금의위의 대장직을 자연스럽게 얻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 그 방법은 다음과 같소이다. 사운악은 홍예공주의 사냥시에 자 신의 부하를 산적으로 변장시켜 습 격하도록 한 다음 결정적인 시기에 사운악이 나타나 공주를 구해줘 공 주의 신임과 함께 황제의 신임을 얻 어 금의위 대장직을 주청할 계획 임.> "이것을 자네가 맡아 주게……. 사운 악이 만일 금의위의 대장이 된다면 본 금의위의 몰락은 물론이고 대명의 황 실은 그 날로 끝장일세." 성호경의 음성은 무거운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후후! 거꾸로 생각해서 내가 공주를 구한 후 황제의 명이 있어 나를 밀반 주로 임명을 한다면 위재상도 꼼짝을 하지 못하겠군!' 다음 순간, 그는 성호경을 향해 미소 를 던졌다. "후후!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코 대감 을 실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점 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후후! 황궁에는 양귀비 뺨칠 만한 미인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순간 성호경은 무슨 뜻인지를 알아 차린 듯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핫핫핫……! 자네의 소문은 들었네. 풍류를 매우 좋아한다고……, 걱정하 지 말게. 이번 일만 잘 수습해 준다면 황궁에서 가장 예쁜 계집이 그대의 첩 이 되어 그대를 위해 평생 봉사를 하 게 될 것일세……." 관해영이 변정한 장백철수 방표랑. 그는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희 대의 색광(色狂)이었다. 藉坪�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2 장 (남 좋은 일 시키기 1 ) 제 52 장 남 좋은 일 시키기 1. 사냥터. 북경(北京) 외각에 있는 이 사냥터는 그 규모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경관 수려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냥터는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엄금되어 있는 황실 전용인 것이다. 지금도 광활한 사냥터의 주위는 경 비 무사들이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서 있다. 소녀. 몸에 착 달라붙는 정장 차림이라 전 신의 굴곡이 터질 듯 드러나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 팔 세. 반짝이는 두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 님을 닮았고, 수려한 콧날과 화편(花 片)을 쪼개 문 듯한 입술……, 화사한 아름다움과 야생마 같은 생기 발랄함 이 넘치는 소녀. 이 소녀의 이름은 홍예공주 주혜설 (朱慧雪)이다. 당금 황상(皇上)의 수염 잡아당기는 말괄량이 삼공주(三公主)로서, 황궁의 무법자라 불릴 정도로 도발적인 성격 에다가 사냥을 광적(狂的)이라 할 만큼 즐긴다. 한 마리 노루가 초원을 가르는 것을 바라보며……, 홍예공주 주혜설은 활 시위를 당겼다. 때앵! 시위를 떠난 화살은 경쾌한 파공음 을 동반한 채 멀리 달아나는 노루를 향해 쏘아 갔다. 하지만 화살은 목표물을 벗어나고 말았다. "치이!" 주혜설의 아름다운 입술이 삐죽 튀 어나왔다. 노루는 껑충 뛰어올라 화살을 피하 며 주혜설의 체면을 영 아니올시다로 만들고 숲 속으로 달아났다. "제까짓 게! 이럇!" 주혜설은 말을 몰아 노루를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그녀 옆에 대기하고 있던 무관(武官) 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공주마마! 위험합니다!" "돌아오십시오!" 허나, 주혜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으로 말을 몰며 외쳤다. "대기하고 있어! 나 혼자 힘으로 잡 아 올 테니까!" 사냥터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 정 상. 한 인물이 사냥터 광경을 느긋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운악, 바로 그였다. 야망의 재물로 홍예공주를 선택한 그의 음모가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귀여운 노루로군. 일을 쉽게 풀어 주느라 공주를 유인하고……." 사운악은 흐뭇했다. "이제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는 일만 남았군." 그때였다. 한 줄기 비릿한 음성이 들려온 것이 다.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지옥으로……." 일순 팽이처럼 신형을 돌인 사운악 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은……." 그의 눈앞엔 관해영이 한 자루 검을 안고 유유히 서 있었다. "공주를 이용해 금의위를 차지하려 는 계략 따위나 생각해 내고……. 쯧 쯧, 유치한 놈!" 사운악의 얼굴에 음산한 살기의 그 늘이 드리워졌다. "목숨이 고래 힘줄만큼이나 질긴 놈 이로군. 오냐, 잘했다. 그러잖아도 네놈 의 시체를 확인하지 않아 소화에 지장 있던 중이었는데……." 스르릉! 사운악은 검을 뽑으며 잔인한 살소 (殺笑)를 흘렸다. "흐흐,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을 따 주마!" "요망사항일 뿐이다." 비록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었으나 관해영의 심장의 피는 지금 이 순간 무섭게 고동치며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어 버린 원수! 그리고 수많은 원혼을 만든 장본인! 드디어 그와 다시 한 번 만나게 된 것이다. 천마별부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반드시 원한을 갚고 싶은 관해 영이었다.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 팽이 부풀어올랐다. 어느 순간, "타앗!" 일합 기함성과 함께 사운악의 신형 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으며, 그랬다 고 느낀 순간 이미 사운악의 장검은 무려 사십팔검(四十八劍)을 발출해 냈 다. 파스스스슥! 천공을 난도질하는 투명한 검강(劍 )은 소낙비의 엄밀함과 뇌전의 힘을 수반한 채 관해영 전신에 쏟아지니 그 것은 바로 죽음! 사인망(死刃網)이었다. 허나, 관해영은 이미 전의 그가 아니 었다. 거듭되는 기연을 통해 얻은 검도무 학(劍道武學)을 스스로 승화시켜 새 무 공을 창조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 한 초극무인이 아닌가? 휘리릭! 우뚝 서서 사운학의 검강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대연검법의 재 일초 인 칠금교탈을 시전했다. 고오―. 소음도 빛도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서 무서운 직강이 파도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은 마치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춤을 추는 듯했으나 사실 두 사람은 전신의 기(氣)를 검끝에 모 아 생사결(生死決)을 펼치고 있는 것이 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사운악의 얼 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점차 관해영의 신쾌막측한 검세(劍勢)에 밀 리고 있었던 것이다. 칠금교탈이라 했더니 쾌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천홍월성이요, 이어서 정과 중(重)의 최대 초식인 혜군앙모라…….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운악이 그토록 자신하는 검세를 모조리 차단해 버리는 천지검법의 오 묘한 수비초식. 사운악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으으!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놈에게 밀리다니…… 믿을 수가 없다!' 슈슈슈슈! 관해영의 죽검은 영활한 뱀처럼 사 운악의 전신 대혈을 노리며 뻗쳐오고 있었다. '잘못 하면 개죽음이다!' 카캉!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하는 순간, 사운악은 관해영의 엄청난 내력 에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휙! 그 여력을 빌어 사운악은 번뜩 신형 을 빼돌렸다. "관해영! 다음에 만나 끝장을 내주겠 다!" 관해영은 아차 했으나 때는 늦었다. 이미 사운악은 십여 장 밖을 쏘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활한 놈!" 관해영은 쓰게 입맛을 다셨으나 사 운악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미련은 버 려야 한다. 그에겐 아직 해결해야 될 문제가 남 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한 소리 중얼거림과 함께 관해영의 몸이 어디론가 쏘아 갔다. 홍예공주 주혜설.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구긴 노루를 찾아 숲 깊숙이 들어서 있었다. "이 녀석이 어딜 갔지? 좀 잡혀 주 면 안 되나." 철없는 소리를 뇌까리며 주위를 두 리번거리는 주혜설. 하지만 노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 았다. 그때, "공주, 말 한번 잘 했소. 우리에게 곱 게 잡혀 주시구료." 음흉한 음성과 함께 삼 인의 흑의인 이 나타났다. 음산한 살기를 뿌리며 나무껍질같이 아무 표정도 없는 중년의 흑의인들이 었다. 그들을 발견한 순간 주혜설은 노루 를 놓친 분함에 더해 교갈을 터뜨렸다. "멋들 하는 놈들이냐? 여기가 어디 라고 함부로 무단 출입이냐?" 중앙에 서 있던 흑의인이 음산하게 말했다. "공주, 그따위 위엄에 껌뻑할 우리가 아니오." "뭐라고? 너희들은 황법(皇法)도 두 렵지 않단 말이냐? 내가 누구라고 감 히!" 汰� 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2 장 (남 좋은 일 시키기 2 ) 2. 좌측의 흑의인이 머리통만한 바윗돌 을 집어들고 양손으로 눌렀다. 와삭! 바윗돌은 마치 과자처럼 부서져 버 렸다. 홍예공주는 경악했다. 흑의인은 능글맞게 말했다. "공주, 나는 성질 나면 누구 머리도 이렇게 해 줄 수 있소." 주혜설은 태어나 처음 두려움이란 걸 느꼈다. "너희들 목적이 뭐냐?" 우측의 흑의인이 알약 하나 던져 주 며 능글맞게 말했다. "그 약만 복용하면 물러가겠소." "이게……." "아, 목숨에는 전혀 지장 없소. 어떡 하겠소? 우리 인내심은 가히 훌륭하지 못하오." "난…… 홍예공주……." "성질 돋우는군. 안 되겠어. 머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 봐야지" 흑의인들이 성큼 다가섰다. "잠깐!" 주혜설이 다급히 소리쳤다. 순전히 느낌이지만……, 그녀는 눈 앞의 흑의인들이 어떤 끔찍한 일도 서 슴없이 자행할 수 있는 위인들이라고 생각했다. 시위무관들을 뿌리치고 깊은 숲 속 으로 들어온 자신이 잘못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던가? 주혜설 은 이 순간처럼 자신의 경솔이 후회된 적은 없었다. 주혜설은 약을 주워 들고 망설였다. "정말…… 이 약만 먹으면 물러가겠 느냐?" "믿으시오. 이래봬도 우리 신용은 확 실한 편에 속하오." 주혜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 닫고 알약을 삼켰다. 후회가 복받쳤다. '호위 무관들하고 함께 오는 건 데……. 나쁜 놈들…….' 헌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약을 먹자마자 몸 전체가 불에 달아 오르듯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 뿐 만이 아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허리가 저절로 비틀거리는 것이 기분이 야릇했다. 주혜설은 겁이 덜컹 났다. "이 알약이…… 무엇이냐?" 흑의인들은 팔짱을 끼며 느물거렸 다. "여자를 암캐로 만들어 주는 신통한 약이지." "귀한 약 공짜로 준 우리에게 고맙 다고 그러시오." 흑의인들은 서로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깝군. 탐스러운 먹이를 보면서도 침만 삼켜야 하다니." "팔자 소관이야. 저런 장난감은 아무 나 가질 수 없는 거야." "나타나실 때가 됐는데." 한 흑의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그래 왔다." 한 소리 냉막한 음성이 세 사람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흑의인들은 흠칫했다. 자신들이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선이 꽂힌 곳엔 냉기를 풀 풀 날리는 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이 녀석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에 세 흑의인은 미간 을 찡그렸다. 그들이 어찌 눈앞의 이 자가 장백철 수 방표랑으로 변신한 관해영이란 걸 어찌 알겠는가? 관해영이 냉막한 표정으로 그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하루살이들, 아무리 인간 측에도 끼 지 못하는 놈들이기로서니 감히 황상 의 금지옥엽께 무례를 범하다니." "건방진 놈! 죽어라!" 방해자라고 느낀 순간 그들의 행동 은 빨랐다. 곧장 관해영에게 살수를 펼치며 덤 벼든 것이다. 허나, 막 덮치던 흑의인들은 자신들 의 가슴이 시원해졌다고 느꼈다. 어느새 손을 쓴 것인가? 눈앞으로 뭔가 번쩍이는 걸 봤을 뿐 인데 자신들의 가슴엔 바람구멍이 생 기고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 다. "으악!" 흑의인들은 그제서야 비명을 지르며 나란히 모조리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으음……!" 이때, 홍예공주는 음약의 기운을 이 기지 못해 한 손으론 가슴을 어루만지 고 다른 손으로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스스로의 손에 의해 탐스런 두 가슴 이 드러나 있었고 말려 올라간 치마 사이로 희디흰 허벅지가 보였다. "하아! 나…… 나 좀……." 애원인지 교성인지 연신 가쁜 숨을 내뿜는 홍예공주를 보며 관해영은 난 처했다. "조금 빨리 도착했어야 했는데……." 주혜설은 지금 고귀한 신분의 공주 가 아니었다. 단지 발정난 암코양이일 뿐이었다. 그녀는 관해영을 끌어안고 애걸하고 있었다. "제발……." 관해영은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안타 깝게 말했다. "공주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혜설은 필사적으로 사내의 정복을 요구했다. "나…… 나 좀……." 관해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전신의 혈맥 이 터져 목숨을 잃게 된다. 하지만 상 대는 범접할 수 없는 지고무상의 신분 이 아닌가? 진퇴양난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가? 관해영은 태어나 지금처럼 난처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흑흑……." 주혜설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고칠 생각도 않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생가해 보라! 금지옥엽, 귀하디귀한 공주의 몸으 로 아닌 밤 홍두깨식으로 순결을 도적 맞았으니……. 관해영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사태가 곤란해 이런 지경이 되고 말 았군…….' 그는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딱 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원인이야 그쪽에서 제공했지만 어찌 됐든 그는 죄를 범한 입장이었기 때문 이다. 그로선 이제 주혜설의 처분만 기다 릴 수밖에 없었다. 求�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2 장 (남 좋은 일 시키기 3 ) 3. 주혜설은 흐느껴 울다가 일어났다.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하체의 통증 에 더욱 설음이 복받쳤다. 그러나, 주혜설은 역시 공주였다. 한동안 정신을 가다듬은 주혜설은 관해영을 불렀다. "그대는 누구신가요?" 관해영은 정중히 예를 올렸다. "금의위 제일통령인 장백철수 방표 랑입니다." "아, 그래요……." 주혜설은 다소 안심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 요. 물론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은 아니 에요." 순간적으로 관해영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게 아니라 니……? 당연히 없었던 일이 돼야 정상이 아 닌가? "나 역시 공주이기 전에 하나의 여 자, 순결을 잃어버림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요. 지금부터 그대는 제 주인이세 요." "공주마마……." 관해영은 주혜설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신분도 저와 어울리지 않아요. 황제께서 아시면 황 실의 체면을 생각하여 당신을 죽일지 몰라요." "공주마마! 그러시지 않아도……." 주혜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나보고 부덕도 쫓지 못하 는 여자로 만들지 말아요." 주혜설의 단호한 말에 관해영은 할 말을 잃었다. "우선은 당신의 신분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다음 우리 사이를 자연 스럽게 합법적으로 만드는 거예요." 관해영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 다. "알겠습니다." 주혜설은 해결 방안을 강구하고 나 자 다소 기분이 풀렸다. "당신…… 나를 거저 얻었다고 무시 하면 안 돼요?" "제가 어찌 감히……." 관해영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주혜설은 그런 관해영을 보며 나직 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운명인가? 이런 사람과 부부 의 연이 맺어질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자위했다. 나이가 조금 많기는 해도 어딘지 태 도가 당당하고 정기가 넘치는 인물이 었다. '얼굴도 이만하면 미남이고…….' 세상 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던가? 스스로를 자꾸 위로하다 보니 눈앞 의 이 사람도 괜찮아 보이는 주혜설이 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 는가? 눈 앞의 이 얼굴은 결코 진면목이 아닌 변장한 모습이란 걸. 성호경! 금의위 대장이라는 이 인물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느낀 일을 방표랑이 가볍게 해결하고 돌아온 것이다. "대단해. 난 자네가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네." 관해영은 어디까지나 충성파였다. "저야 그저 각하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성호경은 웃음을 헤프게 썼다. "그 겸손, 더욱 마음에 드는군. 황제 폐하를 뵙거든 밀반주(密班主) 자리를 요구해라." "그건 너무……?" "홍예공주 말이면 황제폐하께서도 거절치 못한다." "알겠습니다." 성호경은 만족했다. '흐흐, 저 놈도 인간이니 밀반주가 되면 욕심을 과하게 부릴 염려가 있다. 미리 쥐약을 먹여 놔야지.' 쥐약? 관해영이 졸지에 쥐가 되고 말았는 데 성호경이 말하는 쥐약은 과연 무엇 일까? 관해영. 그는 자금전 바닥에 깊숙이 부복해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 한 사람은 근엄하고 만인앙복의 패 도(覇道)가 서릿발 같은 당금 황제요, 다른 사람은 주혜설이었다. 황제는 지그시 관해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대가 공주의 생명을 구했다는 방 표랑인가?" 중후하면서도 인간으로서 갖출 최상 의 위엄이 깃든 음성이었다. 관해영은 경건하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대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 "이 천한 몸으로 과분하나……!" "기탄 없이 고하라." "소신께 밀반주 직책을 맡겨 주시면 성은에 신명을 바치겠나이다." 황제는 흠칫했다. "밀반주를?" "황공하옵니다." "흐음……." 황제는 난처한 듯 턱을 쓰다듬었다. 위재상이란 존재가 걸렸기 때문이었 다. 허나, 주혜설이 칭얼거렸다. "아바마마 거짓말쟁이시군요." "뭐라고?" "제가 원하면 하늘의 별을 따다 주 마 하시던 아바마마께서 제 목숨을 구 해준 은인에게 밀반주 자리 하나 주는 걸 아까워 하시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자식의 투정에 황제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 해도 당금 조 정을 떠받치고 있는 위재상을 신경쓰 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허! 그것 참……." "흥! 흥! 몰라요." "오냐, 알았다."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위재상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해도 신하는 어 디까지나 신하인 것이다. 신하의 눈치를 보느라 금지옥엽의 간청도 못 들어준다는 것은 황제로서 의 체통 문제인 것이다. 한 차례 분란은 있겠지만 황제는 공 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관해영은 잠시 미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내 신분이 전에 밀반주였다면 해왕 도 비극은 없었을 테고 위혜군과 도…….' 그것은 운명이다. 인간이 하늘을 거역할 수 없듯이 운 명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에 만일이란 없는 것이 다. 해왕도의 그런 비극이 없었다면 관 해영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니까……. 껐� 함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3 장 (끝나 가는 검로 1 ) 제 53 장 끝나 가는 검로(劍路) 1. 관해영은 일단 사운악의 황궁 기반 은 저지시켰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는 개인적인 볼일을 끝내고 오겠다는 이유로 성호경을 곁을 잠시 떠났다. 성호경은 굴러 들어온 꿀단지를 행 여 놓칠세라 잠시 떠나는 관해영을 위 해 성대한 잔치를 벌여 주었다. 더불어 이미 작정을 한 쥐약도 듬뿍 풀었다. 휘청거리며 관해영이 별채로 들어서 고 있었다. 성호경의 억지에 꽤 많은 술을 마신 그는 정신이 알딸딸했다. 그의 공력으로 아무리 많은 술을 마 셔도 정신을 잃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술은 술인 것이다. '도대체 나보고 별채를 들르라는 이 유가 뭘까?' 밤이 새기 전에 떠나겠다는 그를 억 지로 붙잡고 성호경이 밀다시피 이 별 채로 보낸 것이다. 별채의 방으로 들어서던 관해영은 깜짝 놀랐다. '이…… 이런…….' 너무도 당황하여 죽음이 닥쳐도 눈 하나 까딱 않던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놀랍게도 방 안엔 지금 세 명의 미 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꽃다운 미모에 풋풋한 육체를 가진 열 일곱 여덟의 소녀들. 그녀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 은 알몸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방대협!" 세 소녀가 일제히 간드러진 애교를 부리며 관해영에게 다가왔다. 하느적 거리며 다가오는 알몸의 여체는 보기 에도 탐스러웠다. 하지만 관해영은 술이 깨는 것도 아 닌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뿐이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호색한으로 변장해서…….' 관해영은 애꿎은 방표랑을 원망했지 만 죽은 방표랑은 도리어 관해영을 원 망할 것이다. 자신이 억울하게 죽지만 않았으면 이 미녀들이 모두 자기 차지가 아닌 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세 명 중 그래도 연장자인 듯한 소 녀가 관해영의 목에 팔을 걸었다. 잘 익은 수밀도 같은 가슴이 관해영 을 눌러 왔다. 관해영은 기겁을 했으나 소녀들은 이미 단단히 교육을 받았는지 아무렇 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렇다. 성호경의 쥐약은 다름 아닌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방표랑이 다시 없는 호색한이 란 걸 알기 때문에 최고의 여자를 뽑 아 관해영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만한 미인들의 시중을 받으면 또 다시 받기 위해서라도 결코 다른 생각 을 하지 않을 거란 계산과 함께 말이 다. 하지만 그도 미처 상상을 못한 것이 있다. 상대는 방표랑이 아니라 관해영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관해영 주위엔 이 여자들보 다 더 어여쁘고 더 매력적인 여자가 수두룩하다는 사실도……. 사실 여자라면 지긋지긋한 것이 관 해영이다. 관해영의 소녀들의 손이 자신의 몸 을 더듬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한 소녀의 손이 어딘가에 닿자 관해 영은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이 뜻하지 않은 행동에 소녀들이 깜 짝 놀라며 관해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들이 들은 방표랑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관해영도 몸을 빼고 나서 자신의 행 동을 후회했다. 지금의 행동이 성호경의 귀에 들어 가면 의심을 할 것이다. 그냥 떠나려 했던 관해영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아!" 들뜬 열락의 소리가 끊임없이 방에 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한 목소리가 아닌 세 사 람의 목소리였다. 하나같이 자지러지는 세 여자의 교 성……. 복도 쪽에서 방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성호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쥐약이 확실한 약효를 보증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열 여자 싫다는 사내는 없 지. 더구나 저 놈 같은 호색한에겐 말 해서 무엇하랴?' 자신의 계책에 스스로 만족하며 성 호경은 자리를 떴다. '자식! 힘 하나는 끝내 주는군…….' 쉴새 없이 들려오는 여자들의 비명 소리에 자신의 아랫도리도 불끈해짐을 느끼는 성호경이었다. 아마도 오늘밤 그 역시 힘 꽤나 쓸 것이다. 성호경의 멀어지는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있던 관해영은 그제서야 자리에 서 일어났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 가? 관해영은 탁자에 앉아 있었는데 세 소녀들만 침대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진짜 정사보다 더 환희에 들 뜬 얼굴로 말이다. 남자가 위에 있는 양 정신없이 허리 를 흔들고 엉덩이를 들썩이는 세 소녀 에게 잠시 눈길을 돌렸던 관해영은 이 내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섭혼미령술에 현혹됐으니 잠시 후 제풀에 지쳐 잠들 것이다. 물론 자신들 은 진짜 정사를 했다고 믿으며…….' 절정으로 치달리는 것인가? 세 소녀의 음폭이 더욱 높아질 때 관해영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방을 빠 져나왔다. 취운거. 양자강 지류인 석하천가에 세워진 취운기는 싱싱한 송어회와 수려한 경 치로 주객(酒客)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 다. 이층의 취운거는 한 소녀에 의해 통 째로 전세되어 있었다. 공손옥경은 정성스럽게 관해영을 대 접하고 있었다. 마치 지아비 대하듯 하는 공손옥경 의 대접에 관해영이 어색할 지경이었 다. 관해영은 그런 감정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소저, 성호경은 모종의 일을 끝낼 동안만 살려 주기로 했소. 허나 놈의 죽음은 기정사실이외다." 쪼르륵―. 공손옥경은 술을 따르며 고개를 끄 덕였다. "믿어 의심지 않아요." "고맙소." 관해영은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손옥경은 얼굴에 당황의 빛이 스 치고 지나갔다. "어이해…… 제가 무슨 실수라도?" "천만에 말씀이오. 단지 바빠서 ……." 공손옥경은 고개를 숙이며 물기 어 린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소녀가 실수 하지 않았다면 이렇듯 빨리 떠나시겠 어요? 죄송해요." 관해영은 엉거주춤 서서 어찌할 바 를 결정 못했다. 절색의 미녀가 노골적으로 붙잡으려 는 손길을 뿌리친다는 건 십만대군의 포위망을 뚫는 것보다 어려운 일인 것 이다. 관해영은 마지못해 주저앉았다. "소저께서 원하신다면 잠시 동 안……." 공손옥경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어리는 달콤한 미소와 눈동 자에 어린 투명한 이슬의 조화로 그녀 의 미모는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 다. "아버님을 억울하게 잃고 오직 복수 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소녀예요. 소녀 의 무지개빛 꿈도 포기하고……." "……." "그러던 어느 날 백마를 타고 왕자 님이 홀연히 제 곁에 나타나셨어요. 그 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는 소 녀에게 강한 믿음과 희망을 던져 주셨 어요." 관해영은 미녀의 사랑고백을 들으며 어색한 기분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 었다. 공손옥경의 얼굴은 도화빛으로 물들 어 있었다. "소녀는 그 분에게 사랑을 얻고 싶 었어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험험……." "하지만 소녀는 기다리기로 했답니 다. 만약 그 분의 사랑을 구하지 못한 다면 자살하리라 결심하니 오히려 마 음이 편해지더군요." "소저……." "아참! 부탁이 있어요." 공손옥경은 화제를 돌렸다. "제가 초상화를 그렸는데 아직 눈동 자를 그려넣지 못했어요. 상공께서 수 고해 주시겠어요?" 관해영은 생각 없이 말했다. "그럽시다."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화룡첨정이 라 생각하시면 되어요." 공손옥경은 초상화를 꺼내와 얼굴부 분을 펼쳤다. "전사를 그린 초상화예요. 몸은 눈을 그려넣은 후 보여 드리겠어요." 관해영은 이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헌데, 이 얼굴은 소저 자신이 아니 오?" "뭐가 잘못 되었나요?" "그런 건 없지만……." "됐어요." 관해영은 뭔가 떨떠름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초상화에 눈동자를 그 려넣었다. 공손옥경의 초상화는 비로소 살아 있는 얼굴처럼 생동감을 찾았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 숙이며 나직 이 말했다. "나머지도 보시지요……?" 관해영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초상화 두루마리를 풀어 보았다. 藉坪�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3 장 (끝나 가는 검로 2 ) 2. 아뿔싸! 관해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나신(裸身). 공손옥경의 알몸 전체가 그려져 있 는 초상화, 어찌나 정교하게 그렸는지 배꼽 아 래 점까지 표시되어 있었으며 육향(肉 香)이 풍겨나오는 듯했다. 공손옥경의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 다. "거울을 보며 제가 직접 그렸어요. 천박하다고 욕하시더라도 조금의 이해 는 해주시길……." 관해영은 난감했다. 비록 그림이나 실물과 똑같으니 이 는 공손옥경의 모든 비밀을 보았다는 것과 통하는 것. 공손옥경은 이미 결심하고 있었는 듯 대담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전 부……. 사랑에 실패하면 죽음이요, 성 공하면 사는 것, 도박이라 해야 될 이 일에 제 목숨을 걸었어요."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관해영은 은근히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는 없었다. 아차하면 한 소녀가 마음의 상처로 자결을 단행할 터이기 때문이다. 관해영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탄식 조로 말했다. "소저께서 아시다시피 나는 본의 아 니게도 여자가 많소. 그대를 거느리기 에는 벅차오." "당신을 따르는 여자들이라면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못 본 걸로 하면……." "돌이킬 수 없어요. 결정은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으음……." "어때요, 초상화와 똑같은가요?" 공손옥경의 느닷없는 질문에 관해영 은 언뜻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는 벌 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사랑은 여인을 이토록 대담하게 만 드는가? 외간 남자에게 종아리만 보여도 끝 났다고 난리치는 여자가 일단 문을 열 었다 하면 스스럼없이 요강에 걸터앉 아 볼일을 보니……. 관해영은 할말이 없었다. 그저 가슴에 안겨오는 공손옥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 복마성 기마군단. 용병이란 명목 아래 착출되었다가 새외를 벌집 쑤셔놓은 듯 헤집고 다닌 그들이 중원에 돌아오자 접한 소식은 복마성 초토화였다. 돌아갈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지금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계 약된 싸움을 끝내고 부자가 되는 것뿐 이었다. 사천여 명으로 줄어든 복마성 최후 의 기마군단.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거대하게 웅크 리고 있는 파사철부를 굽어보며 어금 니를 깨물고 있었다. '마지막 싸움이다.' '이번 일만 끝내면 흑혈독고에서 풀 려나면서 금은보화를 배당받을 수 있 다.' '지겹다. 이번에 살아 남는다면 배불 리 먹으며 계집 엉덩이 두드리는 것으 로 만족하겠다.' 하나같이 침중한 얼굴로 불안한 미 래를 걱정할 때 명령이 떨어졌다. "가잣!"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두두두두두! 죽음을 향해 치달리는 사천여 기마 군단. 그들의 기세는 태풍을 동반한 해일처 럼 거세지기 짝이 없었다. 파사철부는 복마성 초토화의 충격으 로 인해 삼엄한 경계망을 펼쳐 놓고 있었다. 헌데 느닷없이 들려오는 지축을 흔 드는 말발굽 소리. 경비무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 로를 쳐다보았다. "누구지? 설마 적은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미쳐 환장한 놈이라 해도 이렇게 꽹과리 치 듯 시끄럽게 쳐들어오겠어." "하긴 그래. 여기가 어디라고 감 히……." 허나, 사천여 기마군단은 파사철부 가 설사 지옥이라 한들 망설일 이유가 없는 죽음의 전초병들이었다. 꽈꽝! 선두의 기마군단이 끝이 뾰족한 쇠 기둥으로 파사철부 성문을 종잇장처럼 날려 버리고, 바로 뒤이어 전 기마군단 이 노도와 같이 파사철부 안으로 진격 해 들어갔다. 그제서야 사태를 직시한 파사철부의 졸개들이 당황하여 하허둥지둥 움직이 기 시작했다. "적이닷!" "전투태세에 돌입하랏!" 파사철부 인물들은 당황스럽게 외쳤 다. 둥! 두웅! 긴급한 사태를 알리는 북소리가 밤 하늘에 울려퍼졌고, 순식간에 밝혀진 횃불로 파사철부는 대낮을 방불케 했 다. "응?" 한참 계집과 기분 좋게 땀을 흘리고 있던 털투성이 장한이 상체를 일으켰 다. 파사철부 서열 십오 위 응력신장 조강 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떤 불나방 같은 잡놈들이 어르신 네 취미생활을 방해한단 말인가?" 계집은 코먹은 음성으로 교태를 부 렸다. "아이…… 졸개들이 어련히 처리하 겠어요. 그러지 말고 마저 끝내요." 고릴라를 연상케 하는 응력신장 조 강은 바지를 주워 들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밖을 정돈하고 나 서 스무고개를 넘어 주마." "그럼 이거나 먹고 가!" "뭘?" 뭐냐고 돌아서던 조강은 언뜻 눈을 부시게 하는 푸른 광채를 보았고, 푹! 재수 더럽게도 자신의 아랫배 중요 부위에 절사비(絶死匕)가 꼽힘을 느껴 야 했다. "으으……." 조강은 급격히 신형을 떨더니 그대 로 고꾸라졌다. 계집은 하품했다. "철인이라고 떠벌리더니 비수조가리 하나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쭉 뻗 어버려?" 계집은 노곤한지 기지개를 켜며 중 얼거렸다. "홍등일번지 생활이 그리워……." 홍등일번지의 열린 여자들 중에 착 출된 천 명의 색녀들, 단기간의 교육 끝에 귀부인의 기품 과 색(色)을 겸비한 천 명 중 이백여 명이 파사철부에 굴러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 역시 상황은 뻔하다. 복마성이 무너지듯 그들도 내부에서 부터 무너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계략이 미인 계(美人計)라 했다. 일례로 한나라 조정을 들었다 놨다 하던 동탁과 여포도 결과적으로 초선 이란 계집 때문에 비참하게 최후를 장 식하지 않았던가? 이 순간 달콤한 쾌락에 빠져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파사철부의 중 요 인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파사철부는 속빈 강정이 되 어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면 저절로 무 너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으악!" "크악!" 사천여 기마군단의 저력은 실로 놀 라웠다. 비단 죽음을 도외시한 이유도 있었 지만 새외를 떠돌며 치렀던 사투(死鬪) 가 결과적으로 급격한 전투력 배약의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교두보를 확보하랏!" "삼각 전투형태를 유지하라! 흩어지 면 죽는다." 서로가 일사불란하게 전투령을 전달 하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기마군단. 때문에 숫자면에서 거의 열 배에 달 하는 파사철부 인물들은 어이없이 황 천행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복마성이 깨졌으면 깨졌지 왜 우리한테 화풀이야……. 커 억!" "당주급 인물들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아직도…… 크윽!" 사방을 둘러보며 악을 쓰던 파사철 부의 인물들은 정신없이 번뜩이는 칼 날에 어깨에서 목이 분리되어 나갔다. 허나, 파사철부는 역시 종이 호랑이 가 아니었다. 비록 급습을 당하고 중요 인물들이 홍번일번가의 여인들에게 살해당했지 만 곧 전열을 정비하자 천하 사대세력 다운 위용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파사철부는 인원도 많았고 일류고수도 득실했던 것이다. 어쩌면 사천여 기마군단의 파사철부 침공은 처음부터 죽음의 도식이 그려진 불가 능한 도박이었는지도 모른다. "크악!" "으…… 억울하……." 파사철부가 반격을 개시하자 복마성 최후의 기마군단은 급격히 밀리기 시 작했다. "모조리 없애 버려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줘라." 밀릴 때는 정신이 없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공세를 취하자 숫적으로 우세 인 파사철부가 상대를 두려워할 이유 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되자 파사철부의 인물들은 용기백백해서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기마군단의 몰살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가소로운 놈들! 우리 파사철부를 종 이 호랑이로 알았더냐?" 고양이가 쥐새끼를 몰아가듯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고 기마군단의 무리를 도륙하였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지금의 싸움으로 전력의 반 이상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藉坪�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3 장 (끝나 가는 검로 3 ) 3. 파사철부가 굽어보이는 산 정상. 관해영은 선두로 호산진, 타미, 연숙 상, 공손옥경 등과 단혈맹의 인물들이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관해영은 착잡한 미소를 짓고 있었 다. "지겹군. 염라대왕도 골치 아파할 거 야." 그 말에 호산진이 꼬투릴 잡고 나섰 다. "골치 아픈 건 저예요. 지금 이 자리 에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일이 있어 요." "뭘?" "당신과 나 사이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해 주세요. 당신 내 치마 벗겼지 요?" '내가 벗겼냐?' "그런데 타미라는 여자가 몰상식하 게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자기가 당신 조강지처라잖아요." 타미가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호산진이란 여자 아세요?" "옆에……." "잘 모르시는군요. 뻔뻔스런 여자 같 으니라구. 관가가의 순결을 접수한 나 한테 첩으로 만족하라는 거예요, 글 쎄!" 연숙상은 속상했다. '그러고 보니 내 치마만 안 벗겼잖 아! 이러다가 첩자리 하나도 얻지 못하 고 따돌림당하는 거 아냐? 주검에서 옷 벗었던 약점도 있는데……. 하필 그 때 거기 있을 게 뭐람…….' 연숙상은 가자미 눈을 하고 하고 공 손옥경을 흘겨보았다. '저 계집도 설마? 아닐 거야. 저거나 물고 늘어져야지.' 연숙상은 공손옥경의 어깨를 톡톡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실례 좀 하겠어. 당신도 치마 벗었 어?" 공손옥경은 호산진과 타미의 말싸움 에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 다. "몰라요" "내숭떨지 말고 실토해 봐! 안 벗었 지? 그럴 거야.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마 라. 다음에는 틀림없이 네 차례니까." "열 달 후에 아기 낳을 거예요. 그 분 닮은 사내아기를 낳으면 좋으련 만……." "아, 미안해요. 따로 주인이 있었구 만. 그럼, 더더욱 잘 된 일이고……. 헌 데 그 분이 누구야?" 공손옥경은 수줍게 말했다. "관해영이라고……." "아, 그 사람 괜찮은 사내지. 관해영 이란 사람 나도 아는데 그런대로 쓸 만……." 연숙상은 말하다 말고 두 눈을 토끼 처럼 떴다. "관해영이라니……. 여기 이 사람 말 하는 거냐?" "그렇게 됐어요." 연숙상 얼굴이 샛노래졌다. '으! 으! 어떤 계집은 만나자 마자 접 수하고 나만……. 내가 아무리 옷 한번 잘못 벗었다지만……. 갑자기 연숙상이 땅바닥에 주저앉으 며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으앙! 지지라도 팔자 더러운 년아! 사내복이 아무리 없다고 이렇게 채이 고 저렇게 채여야만 한단 말이냐?" 공손옥경은 물론이거니와 얼굴에 철 판 깐 호산진과 타미도 돌연한 연숙상 의 통곡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 었다. '졌다, 졌어! 도대체 대책이 없어.' 단혈맹 인물들은 터져나오려는 웃음 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약간 질투도 하며……. 그건 그렇고 사천여 기마군단은 하 나도 남김 없이 살해당하고 말았다. 땅 바닥 가득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역겨 운 피비린내……. 파사철부 인물들은 한바탕 지나간 선무당 사람 잡는 굿판 끝을 보며 멍 하니 서 있었다. "이 자식들이 갑자기 왜 들이닥쳤 지? 뭘 얻어 처먹을 것이 있다고?" "우라질 놈들! 뒈지려면 곱게 뒈지지 물귀신처럼 우린 왜 물고 늘어진 거 야." 헌데, 그때였다. "새외가 중원의 장난감이 아님을 보 여 줘라." "파사철부를 지상에서 없애 새외의 무서움을 보여 줘라." 거대한 함성과 함께 새외 연합군단 이 파사철부 뒤통수를 쳐왔다. "이건 또 뭐야?" 한시름 놓고 있던 파사철부의 무리 들은 기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두두두두! 노도처럼 들이닥치는 새외연합군! 파사철부는 한숨도 돌리기 전에 다 시 한 번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가 없 었다. 하지만 이건 곤욕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들의 목숨을 노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규환! 악귀들의 잔칫날……. 파사철부는 도무지 정신차릴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복마성 최후의 기마군단에 의해 전력의 타격을 입은 터에 뒤이어 쳐들어 온 새외연합세력을 막는다는 건 무리였다. 추풍낙엽! 그들은 속절없이 도륙당하며 무너질 뿐이었다. "작전상 후퇴!" "일단 살길을 찾아라." 파사철부 이만여 생존자들은 가장 안전한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 지만 그들에게 탈출로는 어디에도 없 었다. "와와와!" "위선의 무리 파사철부를 심판하랏!" 북쪽 퇴로를 차단하며 태풍처럼 휘 몰아치는 막강한 군단, 그들은 단혈맹 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파사 철부의 쥐구멍을 막으며 떼도륙을 감 행했다. 앞뒤로 터지는 파사철부. 그것으로 끝이었다. 새벽. 여명이 움터 오고 있었다. 햇살은 온유로우나 파사철부의 폐허 자리는 더욱 황량한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 더미…… 끈적하게 흐르는 핏 물……. 관해영은 참살의 현장을 둘러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신(神)만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거 늘……. 동방백인을 잡았어야 했는 데……." 그때, 두두두두두! 대막 태양신궁의 궁주 야율탑을 선 두로 세외연합군단이 보두로 당당하게 나타났다. 단혈맹 인물들은 긴장했다. 여차하 면 벌어질 사태에 대비하여 암암리 전 력을 가다듬었다. 야율탐은 단혈맹을 훑어보며 당찬 음성으로 말했다. "누가 지휘자인가?" 관해영이 성큼 나섰다. "나외다." 야율탑은 의외였다. "젊군.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가 다 잡아 놓은 먹이를 가로챘는가?" 관해영은 담담히 말했다. "그대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시 오. 중원의 일은 중원이 해결할 터! 그 대들은 자존심을 회복했소." 야율탑의 은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협박하는 건가?" "충고외다." "건방지군." "이렇게 합시다. 당신과 나 둘이서 진 퇴를 결정하는 걸로……." 야율탑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허나, 분노 대신 호탕한 대소를 터뜨 리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관해 영을 직시했다. "그대가 중원을 대표할 수 있다 면……." "좋다." 야율탑은 말에서 뛰어내리며 성큼 관해영에게 다가섰다. 태산이 다가선다고나 할까? 거대한 중압감에 주위사람들 호흡이 곤란해졌다. 허나, 관해영은 검을 늘어뜨린 채 사 심 없는 눈으로 허공 한 곳을 지켜보 고 있을 뿐이었다. 야율탑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관 해영 앞 이 장까지 접근하여 태양도(太 陽刀)를 뽑으려 했다. 헌데 어느 순간, '으…….' 야율탑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신음 을 터뜨리고 말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자신의 주 위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저 무 공은 대체 뭐란 말이냐?' 야율탑의 넓은 이마에 땀방울이 맺 히기 시작했다. 태양도 손잡이를 잡은 손이 저절로 경련을 일으킨다. '천하는 넓다…….' 번쩍! 눈부신 금광이 벽력처럼 폭출되었 다. "천마제왕기 ― !" 천마별부의 기연 이후 최초로 펼쳐 지는 천마제왕기였다. "수라혈마공 ― !" 야율탑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신 의 내력을 끌어올려 악마의 불꽃같은 붉은 열강을 토해냈다. 꽈르르! 천지가 전복하는 굉음과 함께 두 사 람의 강기가 맞부딪치고 그 반발력에 의해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뽑혀 나갔 다. 이건 두 사람의 강기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 이었다. "으음! 이럴 수가……." 침음성과 함께 야율탑이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관해영은 천신인 양 그 자리 에 우뚝 서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 걸로 보아 이미 우열은 가려졌다. 새외의 절대자라는 야율탑도 결코 관해영의 적수는 아닌 것이다. 야율탑 은 그제서야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 고 중원 무학의 깊이를 알 수가 있었 다. "졌다……." 야율탑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한 마 디 건네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남자다웠다. 구차하게 명예를 지키느니 깨끗이 패배를 인정한 것이 다. 관해영은 빙긋 미소지었다. "무승부입니다." 관해영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성호경은 서둘러 관해영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관해영은 내심 의미 모를 미소를 지 었다. '통천계…… 너희들 운도 이제 끝이 군…….' 어느 강변. 관행영을 동반한 성호경은 강변에서 하나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파파악! 하늘 높이 솟구치는 불꽃에 이어, 쏴아아아! 은빛 물결을 가르며 화살처럼 쏘아 오는 한 척의 선박이 있었다. 관해영은 입맛을 다셨다. '의외로군…….' 摸� 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4 장 (멸, 통천계 1 ) 제 54 장 멸(滅), 통천계(通天界) 1. 대범선(大帆船)이었다. 길이 사십오 장에 넓이가 십이 장, 그리고 다섯 개의 거대한 돛대가 펄럭 이고 있었다. 범선은 한꺼번에 물살을 밀어 버리 는 듯한 환상을 자아내며 다가왔다. 관해영은 그 거대한 범선을 바라보 며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박을 총단으로 삼으니 행적을 알 기가 쉽지 않은 것도 당연하구나.' 그렇다. 이동하는 총단, 이것은 사람 들의 이목을 가리기에 더없이 좋은 것 이 아니겠는가? 성호경은 한편으로 선박에 신호를 보내며 부교(浮橋)를 내려 줄 것을 요 청했고, 관해영의 표정도 옆 눈으로 살 폈다. '흐흐! 놈의 표정을 보니 상당히 놀 라는 듯하구나.' 당연한 것이다. 의외의 통천계 총단 이였으니까. 그러나 성호경은 의외라는 것과 놀 라움의 차이를 잘못 착각한 것이다. 이윽고 부교가 내려졌고 성호경은 관해영을 돌아보며 득의의 미소를 띠 었다. "가지." "먼저 안내하시지요." 성호경은 사양하지 않고 앞서 부교 로 올라섰다. 선실(船室), 그것은 일반 선실과는 그 규모와 꾸밈 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흡사 대청을 보는 듯했는데, 바닥에 는 파사국의 양탄자에 특산품인 전천 비단으로 휘장을 쳤고, 온갖 기물이 더 해져 화려함의 극을 달렸다. 선실 윗단에는 하나의 태사의가 호 피(虎皮)로 덮인 채 배치되어 있고, 태 사의에는 금포인이 근엄한 자태로 앉 아 있었다. 박람현유 모용청운, 통천계주이자. 무림을 장악하고자 진면목을 드러낸 무림의 제일현자라 불린 그였다. 관해영. 그는 그를 다시금 만난 것이다. 성호경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옆으 로 물러서자 관해영은 그의 앞으로 다 가가 목례를 하였다. 모용청운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 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 뛰어난 놈이다. 쓸 만한 재 목감이 들어왔구나.' 단 한번 보고도 그는 관해영의 재목 을 가늠했다. 이어 그는 위엄 어린 음성으로 침중 하게 말문을 열었다. "방표랑! 그대를 이제부터 본 통천계 의 금붕당주(金鵬堂主)로 삼겠다." "……!" 일순 관해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렸다. "통천계……? 그런 이름은 처음이군 요." "하하! 그대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 이상할 거야 없지. 그러나 ……!" "…….!" "본 통천계는 이후 무림천하를 통치 할 세력으로 그대는 본 통천계에 선택 된 인물로 뽑힌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무림천하를 지배할 세력……?" 그의 얼굴에는 놀랍기도 하고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았다 면 그에게 이런 천재적인 연극솜씨가 있었나 하는 회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에 그가 지은 표정은 차라리 바보 같다고 느껴질 완 벽한 연극이었다. 모용청운은 오히려 그런 그에게 만 족감을 느꼈다. 상대가 모를수록 자신의 수하를 만 들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관해영에게 장황한 설명 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떻게 등세욱을 제거했으 며, 천하가 이미 자기의 수중에 태반 들어왔다는 등……. 그에게 어디서 그런 말솜씨가 나오 는가 싶을 정도로 그의 설명은 장황하 고도 자기 도취에 빠진 듯 과장이 섞 인 설명이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할 것 이지…….' 듣고 있는 관해영은 내심 어이도 없 고 웃음도 치밀어 올랐다. "어떤가, 이제 그대는 본좌의 말을 이해했을 줄로 믿는다." "소인은…… 계주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으나 당장 결정하기는 어렵군요."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띤 채 관 해영이 슬쩍 빼자, 모용청운은 눈에 정 광을 폭사하며 음성을 침중하게 흘려 내렸다. "방표랑, 그대가 설사 싫다 해도…… 본 통천계의 비밀을 안 이상 본계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오직 죽음 이외는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정광. 그의 눈빛은 기이하게도 정광(精光) 을 발하고 있어 흡사 유부 깊은 곳으 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광과도 같았다. 관해영은 그 눈빛을 접하자 짐짓 얼 굴을 창백하게 탈색시키며 두려운 표 정을 띠고는 고개를 숙였다. "만일…… 저에게 기회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라도……." 모용청운은 만족한 듯 짐짓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품속으로부터 하나의 물건을 꺼냈다. "그대가 본 통천계를 들어온다니 본 좌로서도 만족하다. 그대가 만일 진정 으로 본 통천계에 들어와 충성을 다하 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을 복용함 으로써 충성심을 실증해라." 붉은 환약. 모용청운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한 알의 환약이었다. 보기에도 선붉어 앵두를 연상케 하 는데, 보기 좋은 꽃일수록 독성이 강하 다는 말을 떠올리며 내심 염두를 굴렸 다. '이제 보니 통천계는 독약으로 수하 들을 통제하고 있었군. 만일 해약이 없 다면 죽음밖에 도리가 없으니 맹목적 으로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겠구나.' 관해영은 그 환약을 받아 선뜻 입에 삼켰다. 모용청운은 상대가 확실히 독약을 삼키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호경은 재빨리 관해영의 소매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모용청운은 입가 에 음사한 웃음을 떠올리며 나직한 독 백을 흘려냈다. "흐흐! 하늘은 나의 편인가 보군. 밀반 (密班)까지 내 수중에 들어왔으니 이제 혈사무는 통천계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어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전율스 런 시퍼런 정광이었다. "이제 혈사무를 먼저 선수를 쳐 쓸 어 버리는 것뿐이다. 등세욱이 죽고도 아무 쓸모 없는 벽경을 데려간 것은 인질로 사용할 모양이다만 그 계집은 이제 나에게는 쓸모 없는 거추장스런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추악한 야망, 그것이 혈육이란 정마저도 끊어 버 리고 드러나는 순간이다. 침실. 규모가 화려하고도 제법 큰 침실에 관해영은 누워 있었다. 그런 그의 양옆에는 보기에도 아찔 한 나신의 두 여인이 잠자고 있었다. 금봉당주로서의 신분과 새로운 신임 당주라는 환대를 받고 술을 거나하게 마신 그였다. 또한 두 계집은 그에 따른 신분의 대접으로 들어온 수발을 위한 여인이 었다. 허나 그녀들은 미처 수발도 들기 전 에 그에 의해 혼혈을 집힌 채 깊은 잠 에 빠져 있었다. '용만후와 동방백인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기실 그들 두 사람은 그를 환영하는 연회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관해영은 일단 모든 가능성 을 두고 움직여야만 했기에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는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침을 내뱉었다. 놀랍게도 그의 침에는 붉은 환약이 원형 그대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모용청운……, 너는 생각지도 못했 을 것이다. 나의 내공은 이미 내부를 조정하여 음식물이나 어떠한 극약도 침투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음 을……!' '나 혼자서 모용청운과 이대벌왕까 지 상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다른 방법 을 모색해야만 한다.'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 그는 이들 이 주로 독약을 이용해 수하들을 다스 린다는 것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렇군. 독을 이용한다면 될 것이다. 이들이 독을 저장하는 곳을 찾아내 면…….' 이어,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두 여인을 한곳으로 모아 이불을 덮어 자 신도 함께 자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위장을 시켜 놓고 은밀하게 밖으로 빠 져나갔다. 명왕부(冥王府). 그것이 대범선에 있는 약고의 이름 이었다. 선실 입구에 쓰여진 글씨를 보고 관 해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수작만큼이나 이름 한 번 사이하 게 지었구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며 그곳을 지키 고 있는 졸개 두 놈을 혼혈을 집어 간 단하게 제압했다. 약실에 들어선 그는 갖가지 독을 한 꺼번에 들고 나왔다. '놈들에게는 안됐지만…… 수없이 살인을 저지른 대가이니 동정할 필요 는 없다.' 그는 하나의 선실에 들어가 진기를 끌어올렸다. 화르르륵! 순간 그의 양손으로 삼매진화(三昧 眞火)가 일어나며 독을 태우기 시작하 는 것이 아닌가? 대체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 가? 摸� 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4 장 (멸, 통천계 2 ) 2. 치치칙―! 가공할 삼매진화에 싸인 독음 맹렬 하게 타오르며 무수한 연기를 피워내 기 시작했다. '독을 태운 연기…… 바로 독장(毒 )이 아니겠는가? 누구라도 이 독연 에 닿으면 눈이 멀고 말 것이다.' 그의 속셈을 그렇게 드러낸 것이다. 그는 대범선 각 선실마다 스며드는 독장을 바라보고 있다 몸을 날리며 대 사자후(大獅子吼)를 토해냈다. "적이 침입했다!" 흡사 백 개의 벽력이 한꺼번에 내려 치는 듯한 엄청난 대사자후, "적이라고……?" "대체 어느 겁없는 놈이 통천계 총 단에, 으아아아……!!" "내 눈이…… 내 눈이 안 보인다!" 통천계의 백여 명의 고수. 그들은 눈을 뜨자마자 독장에 의해 일시지간 눈이 벌에 쏘인 듯한 고통과 함께 세상 천지가 암흑 속으로 빠졌다 는 어둠만을 느껴야만 했다. 관해영은 한 석실에 뛰어들며 쌍장 을 내뻗었다. 콰쾅! "크아아악!" "으아아악!" 처절한 단말마가 찢어질 듯 울리며 선실 벽을 뚫고 나갔다. "적이다!" "놈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구나!" 일시에 맹인으로 변한 그들이니 만 큼 죽음의 공포 속에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며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시에 맹인으로 변한 두려 움에서 오는 본능이었지만, 자신들끼 리 살상을 벌이는 시초에 되었다. "차아! 누구라도 내게 가까이 오는 놈은 모조리 죽이겠다!" "으아아악!" 번쩍! 카카카캉! 비명과 광기에 찬 외침, 무기와 무기 가 부딪치는 금속성과 함께 장강(掌 ) 이 허공을 가르는 위맹한 파공음. 그것이 한꺼번에 일어나며 자신들끼 리 살상을 벌이기 시작한 그림은 그야 말로 일편의 지옥도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전율스런 광경이었다. '이제 놈들 차례다. 첫 번째는…… 동방백인! 바로 네놈이다!' 관해영은 지옥도의 도화선을 질러놓 고 몸을 날렸다. "적이라고……? 어느 미친놈이 죽고 싶어 스스로 이 지옥에 찾아온단 말인 가?" 동방백인은 자신의 애도를 접어들며 선실 문을 신경질적으로 확 열었다. 헌데 그때였다. 번쩍! 전율스런 섬단의 예기(銳氣)가 허공 을 갈랐고, "……!" 섬뜩한 감촉…… 아니, 싸늘한 감촉 이 자신의 목을 스쳐 갔다고 느낀 순 간, 죽검! 하나의 거무튀튀한 죽검이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 동방백인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 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목을 통해 전신으로 번져 오는 타는 듯한 이 고통……. 이건 분명히 현실이었다. 순간 동방백인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의 눈에 투영된 그림자 는…… 죽검의 자루를 잡고 있는 관해 영의 무심한 얼굴이었다. "……!" 목젖을 파고 들어간 죽검 때문일까? 동방백인은 눈을 부릅뜬 채 입술에 경련을 일으켰으나 단 한 마디도 나오 지 않았다. 말은 못하되 그 눈빛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네놈은 누구인데? 바로 그런 의문을 불신과 함께 말하 고 있었다. "관해영……. 나의 목소리는 잊지 않 았겠지." 관해영은 본래 자신의 음성으로 한 마디를 던지고는 죽검을 미련 없이 뽑 아 버렸다. "크으윽―!" 그제서야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동 방백인은 힘없이 고꾸라졌고, 툭 불거 져 나온 그의 눈에는 자신의 귀를 믿 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빛을 띠고 있었 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관해영은 방 표랑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한 차례 동방백인의 시체를 내려다 본 관해영. 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네놈은 누구냐?" 대갈성과 함께 하나의 그림자가 관 해영의 입을 가로막았다. "어디서 굴러온 놈인데 감히…… 아 니, 동방형제가……!" 그림자는 다름 아닌 바로 용만후였 고, 얼굴에 살기를 띠고 외치던 그는 동방백인의 처절한 주검을 보고는 눈 을 부릅떴다. 그의 눈에 불신보다 놀라움이 빠르 게 스쳐갔고, 이내 그것은 공포로 전신 을 휘감아 오는 전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방백인이 이 자의 손에!' "후훗! 용만후, 오랜만이구나." 관해영은 그의 놀라움을 느끼면서 흐릿한 조소를 머금었고, 귀에 익은 음성을 느낀 용만후의 시 선이 언뜻 피묻은 죽검을 보고는 안색 이 대변했다. "너…… 너는……." "관해영!" 관해영은 짤막한 음성을 토함과 함께 죽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죽검 끝이 미미한 파랑을 일으 켰고, 파아! 한 줄기 검기가 섬광처럼 용만후의 기해혈을 쏘아 갔다. "헉!" 기겁한 용만후는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허나 그의 판단은 빨랐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관해영의 무공이 예전과 틀려졌으며 피하려면 이척 더 뒤로 물러나야 했다 는 걸…….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는 순간에 검기는 그의 단전 아래의 기해혈에 격 중되었고, 허공에 떠올랐던 용만후는 진기가 흐트러지면서 그대로 곤두박질 치듯 굴러 떨어졌다. 일시지간에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느낌과 달리 용만후의 안색은 처절하 리만큼 창백하게 탈색되어 갔다. "용만후……, 내가 너를 죽이지는 않 겠다. 너와 빛을 청산할 사람은 호산진 이니까." 그는 서서히 죽검을 내리며 용만후 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크흐흐흐……!" 흡사 계곡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음침한 웃음이 사위를 누르고 울려온 것은. "네놈이 관해영이었다니……. 담이 부을 대로 부었구나. 단신으로 들어와 통천계에서 미친 망아지 마냥 망동을 부리다니!" "모용청운……!" 관해영은 안색을 침중하게 굳히며 서서히 죽검을 거두었다. 그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관해영의 앞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박람현유 모용청운. 그는 살광 어린 눈으로 관해영을 정 시하며 입가에 사이한 미소를 머금었 다. "크흐흐! 검기가 혈도만을 짚을 수 있다니……. 그동안 강해졌구나." "칭찬으로 듣겠소." "허나 너는 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와 망동을 부린 대가가 어떤 것이라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으로써!" "후훗! 과연 그럴까?" "흐흐! 아느냐? 나 모용청운이 단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죽음의 마공(魔功)이 있음을……." "……." "이름하여 혈정패엽강(血精覇葉 )!" 혈정패엽강! 스스스―! 혈광! 모용청운의 전신에서 서서히 폭사하 기 시작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실로 가공할……, 아니 차라리 전율 스런 광경일진대. 관해영은 서서히 천마제왕기를 끌어 올렸다. 금광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 으려 서서히 확산되어 갔고, 뒤이어 은 은한 백기가 금광 안으로 형성되어 가 며 하나의 막을 형성해 갔다. 대연신공(大然神功), 바로 자신이 창안해 낸 신공을 끌어 올린 것이며, 인간의 능력에서 그 한계에 이르는 십일성(十一成)의 경지일 때 나타나는 형상, 무언의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한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서로를 향 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혈광과 금광이 부딪치는 순간, 쿠쿠쿠쿠 쿠쿠쿵! 오, 천지가 대함몰을 일으키는 것인 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선박이 무섭 도록 요동쳤다. 강기의 폭풍에 휩싸인 돛대가 힘없 이 부러져 날아갔다. 실로 가공할 대격전일진대……. 혈광과 금광이 부딪치는 순간 혈광 이 금광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약간 흐트러졌다. 그 순간이었다. 백기의 기류가 무서운 속도로 혈광 을 덮쳤고, 파파파팟! 혈광이 산산이 허공 중에 흐트러져 버렸다. 다음 순간, "크아아악!" 처절한 단말마가 전율스럽게 허공을 찢어 발겼고, 핏방울이 분수처럼 튀어 오르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오직 그것뿐, 혈육 한 점도 남기지 않은 채 일대의 효웅은 너무도 허무하 게 산화되어 버린 것이다. 관해영.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입가의 한 줄기 선혈을 소매로 닦으며 나직한 독백을 흘려냈다. "만일 대연신공이 아니었다면 당한 사람은 오히려 나였을 것이다." 그는 눈이 먼 고수들이 아우성과 지 옥도를 연출하는 것을 한 차례 쓸어 보고는 소리쳤다. "이 배를 차라리 파괴해 버리는 것 이 나으리라. 약 삼천 근의 화약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콰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야공을 흐트려 버 렸고, 화르르르륵! 통천계의 총단인 대선박은 화염에 휩싸였다. 눈 못 뜨는 졸개들이 물 속으로 뛰 어들어 허부적거리고 불길은 사방 오 리를 훤히 비추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 폭의 그림 같겠지만 이는 야망과 탐욕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 모용청운의 야망은 이렇게 한 줌의 재와 연기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摸� 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5 장 (독녀궁의 소궁주 1 ) 제 55 장 독녀궁(獨女宮)의 소궁주(小宮主) 1. 어느 밀실. 습습한 습기가 감도는 밀신 안에 지 금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혈사무주 사군휘와 사운악이었다. 이 순간, 사군휘의 얼굴에 떠올라 있 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의 물 결뿐이었다. "관해영……! 그 놈 때문에 밀반주의 자리를 빼앗기다니. 애초에 놈을 계획 속에 넣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 "이제 그 놈은 등세욱보다 더 무서 운 적으로 떠올랐다. 놈은 통천계를 멸 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혈맹의 맹주 로서 복마성과 파사철부까지 괴멸시켜 버렸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이름…… 관해영. 더 분한 것은 애초에 별볼 일 없는 놈 이라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그런 놈 에게 자신의 야심이 흔들리게 되었기 때 문이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된 것이다. "더구나 놈이 금의위와 밀반까지 장 악을 했으니 호랑이가 날개를 얻은 것 이나 다름이 없다." 관해영이 금의위를 장악하다니……? 사실 관해영은 성호경이 죽고 그 후 임으로 금의위를 손에 넣은 것이다. 물론 홍예공주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사운악은 조심스럽게 사군휘를 응시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군휘는 시선을 허공으로 옮기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등세욱이 죽은 지금 관해영만 제거 한다면 천하는 우리의 손에 들어온다. 이제 밀반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 "예전에는 통천계 때문에 밀반을 장 악하려 했지만 통천계가 없어진 이상 그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됐군요." 허탈한 음성이다. 하기야 이미 손 안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는 천하를 관해영이라는 한 인물 때문에 와해됐으니 분통인들 안 나겠는가? 사군휘는 무엇을 결정한 듯 눈빛을 빛냈다. "이제 관해영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뭐냐?" "지금 의성보에는 그와 사랑하는 사 이인 아몽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의형인 맹환이 있습니다." "그들을 어쩌자는 말이냐?" "그들을 미끼로 관해영을 의성보로 끌어들여 없애는 것입니다. 거기에 예 전의 여자였던 곡주련까지 그곳에 두 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이 함정에 들 어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사군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연한 시선 속에 서려 있는 것은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깊은 심경. 뒤이어 지극히 어둡고 무거운 중얼 거림이 흘러나왔다. "의성보에 함정을 판다……!" 이어 그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번 졌다. 의성보! 이제 피는 그곳으로 번지고 있었다. "또 떠난신다고요?" 놀란 여인의 다급한 음성이 들리는 이곳은 자금성의 깊숙한 후원이었다. 지금 홍예공주 주혜설의 눈앞의 사 나이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 었다. 사나이는 다름 아닌 관해영이었는데 그 역시 난감한 표정이었다. 헌데 놀라운 것은 관해영이 방표랑 의 얼굴이 아닌 진면목으로 주혜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호에 은원을 해결할 일이 있 어……." "안 됩니다." 주혜설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된다면……?" 관해영이 놀라 주혜설을 쳐다보았 다. "소문에 듣자니 무림은 흉흉하기 이 를 데 없는 곳이라는데 자꾸 그런 곳 을 나다니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 관해영은 주혜설의 말에 뭐라 대꾸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녀의 말이 옳 아서가 아니라 너무 엉뚱했기 때문이 다. 사실 그는 통천계를 없애고 나서 자 신의 신분을 모두 밝혔다. 그렇기 때문 에 그녀가 의당 이해해 줄 줄로 믿었 다. 무림인이 무림 일에 간여하는 건 물 고기가 물로 돌아가듯 당연한 일이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줌으로써 홍예공주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걸 모 르고 있었다. 주혜설은 관해영이 방표랑의 신분일 때 몸에서 풍기는 기품이 나쁘지는 않 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흡족한 얼굴은 아니어서 내심 허전함 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해영의 진면목을 보는 순 간 그녀는 자신과 그가 맺어진 게 얼 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를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하는가? 그녀는 솟구치는 기쁨에 하늘에 감 사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관해영은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상태로 만났다면 황제의 권 한을 내세워 강제로라도 차지하고 싶 은 남자였는데 그 일로 인해 자연스럽 게 맺어졌으니 그녀가 어찌 하늘에 감 사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일이 이렇게 되자 그녀는 관해영을 황궁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언제까지나 둘만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나간다니 그녀가 억지를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까짓 무림 일 따윈 잊어버리세 요." 관해영인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겐 무 림인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흥! 거기만 책임이 있고 저한테는 책임이 없다는 거예요?" 주혜설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본심 을 드러내고 말았다. 관해영은 움찔했다. 사실 그도 주혜 설이 억지를 부릴 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시가 급했기에 그녀 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더 잡지를 않기를 바라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사랑에 눈이 멀면 용감해지는 가? 아니 맹목적이 되는 것인가? 그녀는 체면이고 뭐고 자신의 속마 음을 까발리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독수공방시키는 건 남자의 무책임이에요. 그 정도는 알 고 있겠죠?" "아…… 예……." 관해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 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가가에겐 무림의 여인들이 많다 면서요?" "누…누가 그런 소리를……?" 관해영은 당황했다. "흥! 천하의 그 누가 황궁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겠어요? 저도 조사를 해 봤죠." '이런 그럼 이번에 무슨 일로 나간다 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인가?' 관해영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 도였다. 그녀마저 투기를 부린다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이번 일까지는 모르 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인들이 모두 관가가한테 잘해 줘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림의 여인 들이란 억세기 짝이 없어 남자의 비위 를 맞추거나 마음을 사로잡는 덴 서툴 기 짝이 없습니다." 일단은 오리발을 내밀고 볼일이다. 관해영은 딱 잡아뗐다. 하긴 그게 그 의 속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가 여자들 때문에 골치 아픈 적이 한두 번인가? 그제서야 약간 안심이 되는지 주혜 설의 입가에 조그만 미소가 번졌다. "내가 듣기에도 무림의 여인들은 무 식하고 애교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나 무토막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여자 들을 상대하느라 관가가도 그동안 힘 들었겠어요." '제겐 공주님이 더 힘듭니다.'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관해영은 애써 참았다. 간신히 기분을 맞췄는데 그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暉� 단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5 장 (독녀궁의 소궁주 2 ) 2. "그럼 전 이만……." 이쯤하면 됐겠다 싶어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주혜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서의 지위도 있고 남자로서 의 체면도 있으니 제가 더 붙잡을 수 는 없겠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에 대한 책임도 생각하셔 야죠." 그녀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하긴 잠깐 사이에 자신의 목적을 망 각하는 멍청이로 봤다면 그건 관해영 의 잘못이겠지만 관해영이 얼굴을 일 그러뜨리며 물었다. "그 책임이란……?" 주혜설이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떨 구었다. "지아비로서의 의무를 말하는 것입 니다……."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 었다. 무림 여인을 욕하더니 주혜설 역시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녀의 신분 때 문에 관해영은 더 골치만 아플 뿐이었 다. "시간이 없어 그러니 다음 기회 에……." 관해영이 주혜설의 눈치를 살피며 어떡하든 위기를 모면하려 하자 주혜 설이 단호하게 말했다. "정 그렇다면 다음부턴 아예 황궁에 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겠다고 약속해 줘요. 그럼 당장이라도 보내드릴 테니 까." 추호도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다. 하긴 자업자득인지도 몰랐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었지만 그녀에게 죄 를 지었다고 생각해 너무 다정히 대해 준 게 탈이었던 것이다. 감미로운 분위기며 따뜻한 남자의 체취를 안 여자가 어찌 그 기분을 버 리고 싶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관해영은 주혜설 을 안아 주었다. 작은 새처럼 안겨들며 주혜설이 중 얼거렸다. "사랑해요……, 관가가!" 관해영은 다음날 아침에서야 주혜설 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몇 번의 사랑을 나 누었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 뿐이었다. 다만 관해영이 떠나기 전에 주혜설 은 억지로 두 꾸러미의 달걀을 관해영 에게 먹였다. 태원(太原)! 사대벌왕 중 복수벌왕인 의성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태원객점. 태원에 이런 호화로운 객점이 있을 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호사스런 분위 기를 갖추고 있는 객점이다. 태원객점의 창가엔 이미 오래 전부 터 한 사람이 먼 허공을 응시하며 술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관해영. 창천을 흘러가는 암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깊숙한 곳에서는 음울한 그 늘이 여울져 있었다. '비열한 놈들! 이제는 사람을 인질로 잡아 이용하다니……!' 그러고 보니 그의 손에는 사운악에 게서 온 서찰이 들려 있었다. 서찰을 받은 즉시 그는 엄청난 분노 를 터뜨리며 단혈맹과 금의위, 그리고 밀반의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것 이다. 쪼르르르―. 한 잔의 술은 고뇌처럼 따라지 고……. 한 고독한 영웅은 그 고뇌로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주련, 아몽사……. 그리고 맹환형님! 이 관해영은 당신들을 외면할 수는 없 소.' '…….' '의성보가 아무리 죽임의 오지로 불 린다 해도 이 관해영은 기필코 당신들 을 위험에서 구원할 것이요.' 술잔을 잡고 있는 손, 분노와 의지로 인해 이미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주 루 안에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 었다. 철썩! "어…… 어이구……!"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파공음 소리 에 이어 다섯 명의 사내들이 주루 바 닥을 엉금엉금 기고 있는 것이다. 헌데 이럴 수가? 지금 사내들을 개패듯이 패고 있는 사람들. 오오……! 그들은 바로 꽃처럼 아름다운 두 명 의 여인이 아닌가? 한눈에 반한다 해도 별 탈이 없을 이 미모의 여인들이 이 무슨 끔찍하고 눈살 찌푸려질 광경을 연출하고 있단 말인가? 여인들의 손길은 매섭고 추호의 사 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말들을 들어 보라. "네놈들처럼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 리는 놈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 다." 그 말을 들은 다섯 명의 사내는 얼 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소저……, 다시는 어떤 여인이라도 버리지 않을 것이니 한 번만 용서 를……!" 딴에는 용서를 빈다고 하는 말인데, 그 말에 여인의 얼굴에는 더욱 싸늘한 독기가 서렸다. "뭐! 버리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또 다른 여인을 사귀겠다는 말이냐?" "그…그것이 아니오라……!" "듣기 싫다. 우리는 사내라는 그 자 체를 혐오한다. 남자는 자고로 위선으 로 가득 찬 속물들이다. 그 위선에 우 리 여인들은 사내의 노리개로 전락을 하곤 한다." "……!" "그래서 우리는 여자들에게 사내를 혐오하도록 가르치나 그 이전에…… 여자들을 오락물로 생각하고 있는 사 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인들 이보다 더 오싹할 수 있겠는가? 사내들은 아예 사색이 되어 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 여인들은 설사 하늘이 두쪽이 난다 해도 한다면 하고 야 마는 여인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이 여인들의 무 서움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살기 위 해 발버둥을 치는 수밖에……. 연신 머리가 깨어져라 바닥에 처박 은 사내들, "예…… 예……! 앞으로는 어떤 여인 도 사귀지 않겠습니다." 두 명의 여인은 양손을 턱 허리에 갖다 올렸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 직 두 눈을 없애 앞으로는 어떤 여자 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집에서 밥짓고 빨래나 하는 여인들이라면 입에 떠올릴 수 없 는 말들이다. "아이구, 사…… 살려 주십시오." "다…… 다시는……!" 점입가경도 유분수지 장대한 체구의 장한들이 여인들의 치마폭 아래서 사 족을 못쓰는 그 광경이라는 것은 정말 눈뜨고는 못 볼 목불인견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관해영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소리 나 직한 뇌까림을 토해내고 말았다.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예 절이 엉망이 되었다 해도 여자들이 사 내를 저토록 업신여기니……. 쯧쯧! 정 말 한심한 일이로다." 관해영은 혼자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그녀들이 무림인이란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그녀들의 귀에 똑똑히 들 렸고 그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관해영 에게로 쏠렸다. 그렇지 않아도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그녀들이다. 시퍼런 불똥이 그녀들의 봉목 사이 로 떠오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뭐야!" 말을 하는 순간에 그녀들은 이미 관 해영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사태를 잠자코 지켜보던 객점 의 손님들은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쯧쯧! 저 사람은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군." "그러게 말일세. 감히 독녀궁을 건드 리다니……." 독녀궁이라고 했던가? 없는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5 장 (독녀궁의 소궁주 3 ) 3. 독녀궁(獨女宮) 한 마디로 여인천하를 주장하고 세 워진 이질단체다. 남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여인들의 집채, 관해영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독녀궁의 세력은 이미 태원에까지 미 쳐 있는 것이었다. 휙! 여인들의 공세는 잔인했다. 에워쌌다고 느낀 순간에 이미 그녀 들의 채찍은 관해영의 전신을 치렁치 렁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관해영은 여전히 술잔을 든 채 먼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드는 저 채찍의 존재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주…… 죽었다.' 객점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이어 막 두 가닥의 채찍이 관해영의 목을 감아 올린 순간에, 슷! 지금까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그 의 좌수가 꿈틀 하는 순간에 이미 그 의 손은 두 개의 채찍을 향해 휘저었 다. 극히 단조로운 손놀림인데, 그 단조 롭기 이를 데 없는 손에 의해 두 여인 의 채찍은 관해영의 손 안으로 빨려들 듯 잡혀지는 것이다. 단지 잡혀드는 것만이 아니라. 무서운 흡인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 으니……. "……!" 두 여인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 올랐다. 사력을 다해 온 기력을 쏟아 보냈지 만, 관해영의 손에 붙들린 채찍은 요지 부동일 뿐만 아리나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니……. '이…… 이럴 수가?' 두 여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온통 불신이요, 회의 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녀궁의 무공은 결 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 다면 독녀궁이 멋대로 행패를 부리고 다니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두 여인 역시 독녀궁에선 일류급의 고 수들이다. 그런데 상대방의 단 한차례 손속에 꼼짝을 할 수 없으니 그 놀라움이 오 죽하겠는가? 문득 관해영은 창가에서 시선을 거 둔 채 바둥거리는 두 여인을 향해 지 극히 음울한 시선을 보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 돌아가는 법, 그 돌고 도는 세상의 윤회 속에는 위 선자 허위가 모순의 조화를 이루는 것, 빙산의 일각을 보고 대자연을 판단하 는 그대들의 속단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닐까?" "……!" "당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합리적 이라 해도, 그것 또한 죄악의 굴레를 벗어 날 수는 없는 것……. 용서나 관 대가 승리보다 중요한 것을 한 번쯤 생각해 주시오." "……!" 관해영은 잡았던 채찍을 스르르 놓 았다. "……!" 거세게 숨을 헐떡이는 두 여인. 한껏 부릅떠진 그녀들의 시선은 온 통 불신과 경악뿐이다. 그때였다. "흥! 제법이군. 얼마나 간덩이가 부 었기에 감히 독녀궁에 도전을 하다 니……!" 찰나 사색으로 물든 두 여인의 얼굴 에 갑자기 득의에 찬 화색이 감돌았다. "소궁주께서 오셨다." "저 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그녀들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객점 안으로 들어서는 한 여인이 있었 다. 헌데, 그녀를 보는 순간 관해영은 해 연히 놀라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흑란이 아닌가? 놀라기는 흑란도 마찬가지다. 관해영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몸은 굳어 버리고 말았다. "……." 간절한 바람의 전율이 휩쓸었기 때 문인가? 비어 있는 시선과 시선 사이에서 두 사람의 눈빛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팔을 활 짝 벌렸다. "흑란……!" "해……, 해영……." 뜨겁게 뒤엉킨 그들의 긴 포웅 속에 서 기다림의 해후는 한껏 부풀어 있었 으니……. 얼마만의 만남이던가? 어두운 세월의 모서리를 돌아…… 환희와 격정의 순간들을 묻어두어야 했던 잔인한 시간들을 원망하며 또 베 갯잇은 얼마나 적셨던가? 두 사람의 포옹은 길고 뜨거웠다. 그때 아연해진 것은 독녀궁의 두 여 인이었다. 자신들보다 더 남자를 증오해야만 할 소궁주가 한 남자의 품에 안겨 한 마리의 순한 비둘기처럼 들먹이니 ……. "소궁주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궁주님이 아시는 날에는 그 노화를 어 찌 감당하신다고……!" 흑란의 시선이 두 여인을 향해 홱 돌려졌다. "난 이제 독녀궁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나는 이날을 기다리기 위해 일 부러 소궁주 행세를 했던 것이다. 사랑 하는 사람을 두고 뭣 때문에 평생 남 자를 혐오하며 재미도 없이 살아간다 는 말이냐?" 사랑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그 사랑 의 테두리를 벗어 날 수 없는 것은 당 연한 것……. 두 여인은 그저 멍하니 흑란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해영……, 그동안 널 찾았거늘 ……!" "흑란!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의아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말든, 두 사람은 오래 도록 빼앗겼던 사랑의 회포에 젖어 있 는 것이다. 문득 흑란은 슬며시 관해영의 품을 빠져 나온 후 단홍의 입술을 열었다. "헌데, 이곳에는 웬일로……!" 관해영은 대답 대신 서서히 신형을 문 밖으로 돌렸다. "가면서 이야기하겠다." "흑란! 놀라지 마라. 지금 내가 가는 곳은 바로 의성보이다." "그곳을 왜……?" "그 안에 사람이 인질로 잡혀 있다. 나는 그들을 구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흑란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떠올 랐다. "나도 데려가 줘." "후후후……, 그러다가 사부라는 사 람에게 혼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이미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어. 나 에게 있어서는 해영이 전부야." 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그들의 앞으로 호산진이 나타났다. 호산진은 관해영이 또 생면부지의 여인과 나타나자 얼굴색이 변했다. "험! 험!" 그런 호산진의 눈치를 알고 관해영 은 어색한 듯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질로 따지면 흑 란을 따를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대뜸 호산진과 관해영이 아는 사이임 을 알고 날카롭게 물었다. "누구냐?" 관해영은 흐릿하게 웃었다. "인사해라. 호광노인의 딸 호산진이 다." "깊은 사이는 아니겠지?" 너무도 노골적인 물음에 호산진의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관해영은 그만 씁쓰레히 웃고 말았 다. '여전하군. 이 안하무인격인 말투 는……! "그…… 그것이……!" 관해영이 더듬거리는 어투에 흑란의 눈이 불꽃을 당겼다. "왜 말을 더듬는 거야? 마누라라도 된다는 말이야. 나 외에는 어떤 여인도 사귀는 것을 용서 못해." 질투도 이만하면 특상품이다. 한편, 호산진은 이 순간 묘한 반항심 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꼭 이 사람의 마누라같이 말을 하는 군. 너무 당당하게 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일종의 경쟁의식이리라. 묘하게도 호산진은 흑란이 관해영의 행동을 간섭하는 것에 대한 감응을 일 으킨 것이다. "그래, 마누라라면 어쩔 거냐?" "뭐라고?" 일촉즉발! 성질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두 여자가 만났으니 어찌 평온히 넘어 갈 수 있겠는가? 관해영이 기겁을 하고 두 여자를 말 렸다. "자! 그만해 둬. 지금은 큰 일을 눈 앞에 둔 상황이잖아?" 두 여자는 마지못해 시선을 거두었 지만 그렇다고 적개심까지 거둔 것은 아니었다. '두고 보자.' 관해영을 따라가며 두 여인은 끊임 없이 서로를 흘겨보고 꼬투리만 잡고 있었다. 얼마를 가자 눈앞으로 웅장한 건물 들이 나타났다. 의성보인 것이다. 관해영은 황혼에 물들어 가는 의성보를 보며 이를 악물 었다. 고생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섣불리 움직여 적을 이롭게 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러운 놈들……! 관해영은 분노를 누르며 자신이 거 느린 세력들을 만나러 몸을 돌렸다. '사군휘……, 사운악……! 기다려라! 나 관해영이 간다.' 나으�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6 장 (오대철왕 1 ) 제 56 장 오대철왕(五大鐵王) 1. 의성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관해영을 따르는 세력들이 불어오는 마파람을 맞이한 채 하늘 높이 우뚝 치솟는 의성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해영이 의성보의 동태를 살펴보고 는 수하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어떤 함정이 있을 지도 모르니 내 가 먼저 들어가 보겠다. 내가 신호를 하면 공격하오." 흑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끼여 들었다. "나와 둘이 가면 되겠군……." 호산진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저도 가겠어요." 순간 흑란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넌 올 필요가 없다. 보아하니 무공 도 형편없는 것 같으니 이곳에 남아 있어……."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흑란의 목 소리에 호산진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 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하는 행동거 지가 꼭 깡패 같애…….' 급기야 그녀의 생각은 밖으로 튀어 나오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는 너의 무공이야말로 형편없는 것 같은데……" 흑란이 아미를 상큼 치켜올렸다. "뭐야? 참아 주니까 이제는 기어오 르는구나." "말 조심해." "안 하면 어쩔 테야." "그 못생긴 얼굴을 완전히 곰보로 만들어 버릴 테다." "뭐! 못생긴 얼굴……" 화산진이 악이 바쳐 두 눈에 살기마 저 띠고는 사생결단을 낼 듯이 덤벼들 지 천하의 여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흑란이 두 눈에 핏빛 살기를 띠고 한 발짝 다가들었다. 순간, "그만두지 못해." 관해영이 보다 못해 노갈을 터뜨리 자 두 여인은 그야말로 꿀먹은 벙어리 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럴 것이 관해영의 눈밖에 벗어났 다가는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내 이번 일만 끝나면 도망가 던지 해야지…….' 관해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신형을 날렸다. 쐐애애액! 관해영이 의성보를 향해 신형을 날 리자 흑란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신형이 순식간에 까마득 히 사라져 가자 호산진은 안타까운 얼 굴이었다. '명령이 안 떨어졌으니 갈 수도 없 고……, 이럴 때는 저 여인이 부럽 군…….' 의성보! 그곳은 쥐죽은 듯한 고요가 깃들여 있었다.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 자는 찾아볼 수 없고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숨통을 조여 오는 짙은 살기, 그것은 소름끼치도록 전율스러운 것이 었다. 관해영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 러보았다. '흐음! 마치 폭풍 전의 고요 같 군…….' 이때 흑란이 관해영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엔 하나의 목비(木碑)가 세워져 있었으며 일필지휘의 글씨가 큼지막하 게 써져 있었다. 관해영! 이곳에는 인질들이 있다. 목비의 밑에는 화살 표시가 하나의 전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관해영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주마.' 전각(殿閣)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 다. 관해영과 흑란은 내친 걸음이라 망 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문이 닫혀지며 지극히 음산한 목소리가 들 려오는 것이었다. "하하……, 관해영 스스로 무덤을 찾 아왔구나." 관해영은 그것이 사운악의 목소리라 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운악의 신형은 보이지 않고 침침한 어둠만이 도처에 깔려 있을 뿐이었다. 흑란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자식은 뭐야. 목소리라고는 꼭 올빼미가 울부짖는 것 같군……." 관해영이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떼 어 놓았다. 그그그긍―.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에 이어 벽의 한쪽이 열리며 다섯 명의 인물들이 안 으로 들어섰다. 전신에는 번뜩이는 철갑을 걸치고 죽음보다 더 깊게 침잠된 눈길로 관해 영을 주시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단 한 올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운악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 다. "관해영! 그들은 오대철왕(五大鐵王) 이라고들 한다. 그들이 입고 있는 철갑 은 어떠한 병기로도 뚫을 수 없는 것 이다. 나는 네가 오대철왕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가 끝났을 때였다. 쩌르르르릉―! 오대철왕이 미끄러지듯이 다가들며 손에 든 검을 휘둘러 왔다. 지극히 느리면서도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검초는 눈을 감고도 피할 수 있 는 것이었다. 흑란이 냉소를 터뜨렸다. "이까짓 것들 쯤이야." 그녀가 검을 뽑아 들고 오대철왕을 향해 짓쳐 들었다. 순간 오대철왕의 검이 돌연 변화를 일으키며 절대가공의 쾌검식으로 흑란 의 전신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관해영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흑란, 어서 물러서." 이렇게 소리친 관해영은 쌍장을 뒤 집어 장력을 발출시켰다. 펑! 펑! 관해영의 위맹한 장력에 정통으로 가슴을 얻어맞은 오대철왕은 상체를 조금 흔들었을 뿐 아무런 표정도 나타 내지 않았다. 이때, 흑란이 가까스로 신형을 뒤로 했으나 그녀의 어깨는 길게 베어져 검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해영은 급히 지혈시키며 염두를 굴렸다.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을 하여 아무 리 쳐도 끄덕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존비에 쾌검 월성을 사용하면 어떤 쇠라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관해영이 이렇게 생갈할 때 오대철 왕은 두 눈에 흉폭한 살기를 띠며 가 공할 검초를 휘둘러오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 다. 흑란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위험해요." 그녀의 외침이 끝나는 동시 관해영 은 품속에서 지존비를 꺼내 쾌검 월성 을 펼치고 있었다. 순간, 번쩍어억! 벼락불과 같은 일섬 광휘가 번져 오 르는가 싶더니 오대철왕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런 그들의 전신에선 걸치고 있는 철갑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끄으으……." 오대철왕이 제각기 신음성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단 일검에 오대철왕은 쓰러지고 말 았다. 지존비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관해영 의 무학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강하다…….' 신인과 같이 늠름한 관해영을 보는 흑란은 그저 가슴이 벅차 올 뿐이었다. 관해영이 뒤를 돌아보며 흑란에게 말했다. "뒤를 바짝 따라 붙어." 그것은 흑란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여인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6 장 (오대철왕 2 ) 2. 관해영이 어두컴컴한 통로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끼이이익―. 소름끼치는 음향이 울리며 십여 구 의 허연 백골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 며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스치기만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독강시들이다.' 관해영이 내심 전율을 느끼며 공력 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한편 폭갈을 터뜨렸다. "독강!" 순간, 고우우우! 관해영의 쌍장에서 엄청난 독기가 뿜어져 나오며 강시들을 향해 밀려나 갔다. 그러자 강시들이 맥을 못 추고 모조 리 흐물흐물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독엔 독을 사용하는 것이다. 휘이이익―. 관해영의 신형이 빛살 같은 속도로 통로를 따라 치달렸다. 문득 관해영의 신형이 우뚝 멈추어 섰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 한 명의 인영이 등을 돌린 채 무엇 인가를 찾고 있지 않은가? 인영은 인기척을 들었음인지 천천히 신형을 돌려 관해영을 바로 보았다. 헌데 그 얼굴은?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기에 관해영은 해연히 놀라고 말았다. 등세욱이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 지만 여기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을 못했던 관해영이었다. "노 선배님." 관해영이 이제는 반가운 마음으로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등세욱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타났군. 자네한텐 오대철왕이며 독강시 따위가 아무 장애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먼저 들어왔네." 관해영은 한쪽 팔이 끊겨 펄럭이는 등세욱의 장포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 을 지었다. "괜찮습니까?" "후후! 천하의 등세욱을 동정하는 사 람이 있는가?" 등세욱의 말에 관해영의 얼굴이 붉 어졌다. 자신이 등세욱의 자존심을 건 드렸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자자! 긴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할 일을 끝마치자. 자넨 인질을 구하게. 난 사군휘를 찾을 테니……." "그게 좋겠습니다." 관해영이 선뜻 승낙하며 등세욱과 헤어져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 동안 걸어갔을 때였다. 두꺼운 쇠창살이 앞을 가로막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쇠창살 앞에는 열쇠는 달려 있었으 나 관해영을 공력을 일으켜 쇠창살을 아예 녹여 버렸다. 관해영은 침침한 쇠창살 안을 들여 다보며 만면에 기쁜 표정을 띠는 것이 었다. 어둠침침한 뇌옥 안, 관해영이 안으로 들어서자 사물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직한 탄성들이 흘러나왔다. "관가가!" "아우야! 이 놈 기어코 나를 찾아왔 구나." 관해영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 보니 맹환을 비롯해 곡주련, 아몽사, 아극과, 모용벽경 등이 초췌한 얼굴에 기쁨을 드러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엄마!" 뒤따라오던 흑란이 돌연 모용벽경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모용벽경이 놀란 얼굴로 흑란의 등 을 다독거렸다. "네가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떨어져 있었으나 두 모녀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재회 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더 놀란 것은 관해영이었다. 흑란이 모용벽경의 딸이라니……. 그럼 등세욱의 딸이 되는 게 아닌 가? "엄마! 엄마가 어떻게 이런 곳에 ……?" 흑란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 기쁘기 도 했지만 넘치는 의혹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흑란아! 너에겐 할 말이 많다. 너도 궁금한 게 많겠지만……." 말을 하는 모용벽경의 얼굴엔 물기 가 어려 있었다. 그 얼마나 질곡의 세월을 보냈던가? 아직도 고통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 렇게 무사한 딸 아이를 보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모용벽경이 흑란의 얼굴을 어루만지 며 밝은 웃음을 지었다. "너는 무척 어른스러워진 것 같구 나." "그런 것 같아요." 흑란이 모용벽경의 앞가슴을 만지며 어리광을 부리자 모용벽경은 자연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어리광만 부리는 어린앤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나도 사위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 나……." 흑란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깜빡이 며 관해영을 가리켰다. 모용벽경이 우두커니 서 있는 관해 영을 바라보며 흑란의 귀에다가 속삭 였다. "저 정도의 사내라면 나도 흡족하구 나……." 허나 관해영이 경악 어린 시선으로 두 모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흑란이 등세욱의 딸이었 다니…….' 관해영은 지옥귀사역의 사자 바위에 서 있었던 그녀와의 얘기를 생각해 보 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과 그녀와는 너무나 현격한 차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후훗……, 흑란도 세월을 따라 변하 는군……. 그나저나 세월을 따라 변하 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관해영이 이렇게 생각할 때였다. 두터운 손길이 관해영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관해영이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맹환이 빙긋이 웃고 있지 않은가? "노형님!" 관해영이 반가움에 맹환의 손을 덥 석 잡았다. 맹환이 반가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네가 올 줄 알고 걱정을 하지 않았 다." "날 믿으셨습니까?" "핫핫……, 내가 널 믿지 않으면 천 하에 누굴 믿을 수 있단 말이냐?" "형님! 아우를 믿어 주셔서 고맙습니 다." 관해영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맹환 은 피곤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핫핫……, 아우! 내 한마디만 하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 노형은 말일세 부처님도 욕을 하는 성격이네만……, 하긴 그 어른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하늘 위에서 두 눈을 부릅뜨며 어허, 그 놈 고얀놈이로 구나.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도 이 우형은 천하에서 욕을 하고 싶 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아우일 세." "형님!" "그래, 내 아우의 마음 알고 있 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뜨거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몽사가 관해영의 품으로 뛰어들며 꿈결 같은 목소리를 터뜨렸다.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건 뭐야? 저리 비키지 못해……." 여인도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6 장 (오대철왕 3 ) 3. 흑란이 어느 새 다가와 아몽사의 머 리채를 잡고 뒤로 잡아 당겼다. "아앗!" 아몽사가 비명을 터뜨리며 대항하려 했으나 머리채를 잡힌 상태라 꼼짝을 하지 못했다. 흑란이 허리에 두 손을 척 걸치고는 아몽사를 노려보았다. "너 경고하겠는데 한번 더 내 낭군 에게 꼬리를 쳤다가는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아몽사가 가만히 있을 여인이 아니 었다. 그녀도 한번 성질이 났다 하면 포달 랍궁이 들썩할 정도의 성깔 있는 여인 인 것이다. "흥! 웃기는 소리 마라. 내가 알기로 는 관공자는 아직 누구에게도 정을 주 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뭐야?" 흑란이 발끈하지 아몽사가 두 눈에 독기를 뿌렸다. "왜 내가 바른 말을 하니 가슴이 찔 리는 모양이로구나……." "이 계집애가……." "계집애라니…… 그 말 취소하지 못 해." 아몽사가 대들 듯이 다가들자 흑란 이 드디어 소매를 걷어붙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관공자는 그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는 말 을 나도 믿고 싶지만 가장 극한 상황 에서 나와 관공자가 만났어. 그러니 네 가 들어올 자리는 없단 말이야." 아몽사가 흑란의 거센 기세에 주춤 거렸다. 바로 이때였다. 맹환이 모용벽경을 바라보며 선웃음 을 흘렸다. "저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띠고 있는 아이가 딸인가 보군요……." 맹환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붙인 것 은 그녀의 고귀한 자태 때문인 것도 있지만 등세욱과의 관계도 전혀 무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용벽경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말괄량이 같죠?" 맹환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핫, 딴은 그런 것 같소……." 이때 관해영은 곡주련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관해 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당신을 볼 면목이 없어요." 관해영은 콧등이 시큰해졌다. 어떤 말로 그녀를 위로하든 관해영 은 가슴속에 쌓였던 그녀에 대한 죄스 러움이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때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 이지 않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의 자신의 감정은 곡주 련을 사랑해 줄 마음의 여백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관해영은 될 수 있으면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주련! 미안한 것은 도리어 나다." 곡주련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 다. "전……,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 겠어요……." "알고 있다. 우리 앞으로는 서로의 아픈 상처는 건드리지 말기로 하자." 관해영이 이렇게 말하며 곡주련의 손을 가만히 잡을 때였다. 맹환이 좌중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 뜨렸다. "핫핫……, 천하를 움직이는 것도 어 려우나 여인의 마음 움직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지. 더군다나 곡주련 과 같은 미인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은……. 안 그렇소, 벽경?" 모용벽경이 밝은 웃음을 짓자 주위 에 있던 여러사람들이 박수로써 맹환 의 말에 찬성을 표시했다. 관해영 일행이 뇌옥을 빠져나와 밖 으로 나왔을 때였다. 날카로운 기합성과 더불어 두 사람 이 한데 어울려 의성보 인물들과 싸움 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동현곡과 목초관이었 다. 흑란이 얼굴 가득 의혹을 띠었다. "저들이 어떻게……?" 이때 두 사람은 의성보 인물들과 팽 팽한 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시간 이 흐를수록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삐익. 관해영이 긴 휘파람을 불었다. 순간, 휘이이익!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단 혈맹의 인물들이 유령처럼 관해영 앞 에 내려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도와 적을 소탕해라." 관해영의 명령에 단혈맹의 젊은 영 재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목초관과 동 현곡을 돋우자 팽팽하던 국면이 일시 에 깨지고 의성보의 인물들이 계속 쓰 러져 갔다. 관해영이 두 사람 앞에 내려서자 먼 저 동현곡이 그를 알아보고는 환한 웃 음을 짓다가 낯빛을 굳히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다, 관해영!" "그런 셈이지…… 지옥귀사역에서의 일은 고맙다." 관해영이 이렇게 말을 하자 동현곡 은 기어코 웃음을 띠었다. "그땐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다." "무슨 이유냐?" "바로 오늘과 같이 도움을 받기 위 해서지……." 그의 농담 같은 말에 관해영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이때, 들끓던 혈기를 누르느라고 운 기조식을 하고 있던 목초관이 벌떡 일 어서며 관해영에게로 다가왔다. "도와줘서 고맙네." 관해영이 죽검을 거두어들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괜히 후배가 뛰어들어 방해나 하지 않았나 모르겠군요." 관해영이 이렇듯 목초관의 자존심을 살려 주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 을 내쉬었다. "휴! 정도의 명숙들 중에는 친구가 많았네. 그들이 혈사무에게 피납되자 난 그들을 찾으러 왔네. 그러나 결국 혈사무주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지." "……!" "더군다나 명숙들이 거의 살해된 것 을 알았을 때는 난 혈사무에 대한 복 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허나 죽 을 목숨을 자네가 구해준 것이네." 관해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같은 의인들이 있 기 때문에 꺼져 가는 정도가 다시 부 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이 늙은이는 그 저 고마울 따름이네……." 목초관이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지 관해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굴만 붉힐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 있다." "죽여라." 의성보 현정금문도의 인물들이 벌떼 처럼 달려오며 관해영 일행을 향해 노 도처럼 밀고 들었다. 사군휘는 오늘 일전이 천하의 대세 를 가름한다고 여기고 현정금도문의 무리까지 불러들였던 것이다. 순간 관해영의 뒤에서 단혈맹의 젊 은 영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 정금문도의 인물들을 향해 쏘아져 나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금의위와 밀반의 인물들 역시 좌우 에서 협공을 가하기 위해 탄환처럼 쏘 아져 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관해영을 위시한 십여 명 의 절대고수들이 합세하자 현정금문도 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홍수에 모래가 떠내려가듯 지리멸멸하고 있었다. 의성보! 그리고 현정금문도는 관해영이 이끄 는 세력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으악!" "아악!" 악의 무리들은 이렇게 무너지고 있 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 다. 이를 일러 사필귀정이라 하던가? 겁을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7 장 (극의 종 1 ) 제 57 장 극(劇)의 종(終) 1. 대평파(大平坡). 의성보로부터 약 십여 리 떨어진 곳 에 위치한 평원(平原). 말이 평원이지 기실 산곡과 산곡 사 이에 약 사방 이십여 리의 평지로 일 련의 초지가 푸른 비단결같이 깔린 평 원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대 평파는 팽팽한 살기(殺氣)를 머금은 채 스쳐가는 바람 마저 얼음처럼 굳히고 있었다. 그 긴장 속에 사 인이 바람결에 옷 자락을 나부끼며 대치하고 있었다. 관해영과 등세욱. 사씨 조손이 나란히 선 채 진득한 살기를 머금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 다. 한순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관해영 이었다. "사운악……! 이젠 우리 사이의 은원 을 청산할 때가 온 것 같다." "흐흐흐! 네놈의 심장을 뽑아 이 산 야에 뿌려 주겠다. 네놈은 나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빼앗아 간 놈이니까." 사운악. 그의 눈빛은 상대를 튕겨낼 듯 가공 할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허나 관해영의 눈빛은 어디까지나 담담할 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심할 수 있는 그 의 평정심……. 옆에서 보고 있던 등세욱은 감탄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이미 날 뛰어넘었 는지도 모른다.' 사운악이 뭐라 악을 쓰든 관해영은 차분했다. 어찌 보면 이제 그에게 있어 복수니 은원이니 하는 말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사필귀정의 결과일 뿐이다." "흐흐! 건방진 놈……. 사랑과 나의 야망을 모조리 파괴한 네놈을 죽이는 것으로 나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찬란한 미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신감인가? 사운악의 음성은 살기를 머금었으나 의외로 담담한 일면도 엿보이고 있었 다. 관해영은 서서히 죽검을 들어 올리 며 나직하게 음성을 흘려냈다. "이 시간을…… 나는 수많은 고통의 나날 속에서 기다려 왔다. 그리고 마침 내 그 바램은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 "너와 나의 생사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것으로 우리 사이의 모든 은원은 청 산되리라." 그의 음성이 끝나는 순간, 죽검은 중 평세(中平勢)를 이루며 수평으로 섰다. 순간이다. "……!" 사운악의 미간이 미미하게 떨리며 눈에 흔들리는 빛이 스쳐갔다. 검(劍)! 그 순간 사운악은 우뚝 선 관해영에 게서 하나의 검이 서 있는 듯한 예기 (銳氣)를 느꼈고 이내 관해영의 신형이 죽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지는 환상을 느낀 것이다. 보이는 것은…… 오직 죽검의 끝! 그 하나뿐이었고 그 죽검의 끝에서 가공할 검기를 느끼며 전율했던 것이 다. '예상 밖이다! 놈이 이미 검의 최고봉 에 이르렀을 줄이야……!' 그 스스로도 무에 있어서 자부를 갖 고 있는 만큼이나 상대가 이미 어느 정도의 검도에 이르렀고 얼마나 강한 지를 간파할 수 있는 그였기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어느 사인가? 자신의 손에 땀이 배어 나오고 검자루 가 미끈하다고 느낀 순간,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불리해질 뿐이다.' 결정! 사운악은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이 내려진 순간 신형은 그보다도 더 빠르 게 죽검 끝을 향해 쏘아 갔다. 본시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삼 장, 그것이 한순간 이 장으로…… 그리 고 일 장으로 좁혀진 순간 사운악의 신형이 허공으로 약 오 척 가량 떠올 랐다. "다라천수검(多羅千手劍)!" 냉오하게 일갈을 토하며 검을 하나 의 긴 호선을 그리듯 내려쳤다. 순간, 카아아아! 악마가 부는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날카로운 파공성이 허공을 찢었고 섬 광이 뇌전과도 같은 가공할 속도로 공 간과 공간 사이를 섬단했다. 쾌(快)! 그 한 마디를 표현할 수 있는 가공 할 공세가 마침내 펼쳐진 것이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죽검의 그 끝. 그것이 미미하게 파랑을 일으키는가 싶자 지극히 완만하게 위로 향해졌고, 파파팟! 죽검과 사운악의 검이 교차하는 파 공음이 울렸다. 그 순간이다. 사운악은 그제서야 죽검 끝에서 관 해영의 실체를 잡았고, 자신의 검이 정 확하게 관해영의 정수리를 쪼개 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겼다!" 순간 사운악의 입가에 찬연한 미소 가 피어올랐다. 그 미소는 오직 승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찬연한 미소였다. 헌데 죽검의 끝이 미미한 파동과 완 만한 움직임에서 극쾌로 쭉 뻗어 나간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천지를 내려 덮듯이 찾아온 것은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이었다. 아아……, 보라! 일체의 정적 속에 벌어진 상황을! 죽검의 끝. 그 끝은 이미 시뻘건 선혈을 머금고 한 방울의 선혈을 매단 채 사운악의 목을 관통하여 공간 속에서 햇빛을 반 사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차라리 전율을 일으키는 아 름다움일진대……. 사운악의 검, 아직도 예리한 검망을 발하고 있는 그의 검 끝은 놀랍게도 관해영의 정수리 위에서 딱 멈추어져 있는 것이었으니……! 그 사이는 불과 일촌. 한 줄기 바람이 스쳐 가며 관해영의 한올 머리카락이 절단되며 바람에 실 려 날아간 것도 그때였다. 사운악의 얼굴. 죽음이 무섭도록 빠르게 내려앉는 그의 얼굴에는 아직도 찬연한 미소가 머문 채였다. 승리를 확신한 집요한 망상을 지옥 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슥! 관해영은 죽검을 미련 없이 뽑았고, 촤아아아! 피화살이 사운악의 목젖에서부터 분 출되어 나왔다. 허나 그 순간에 있어서도 사운악의 승리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사운악……, 알아둬라. 그대의 목을 뚫은 나의 검법은 대자연의 검법으로 이름은 천흥월성이라는 것을……." 마지막 패자의 주검 앞에 한 가닥 위로일까? 관해영의 음성은 그 순간 차라리 허 탈한 감을 주고 있었다. 스르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 채 사운악의 신형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 짙은 허무! 복수를 하였는 데도 관해영의 가슴 에 일렁이는 것은 허탈감 뿐이었다. �?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7 장 (극의 종 2 ) 2. 사군휘. 그의 눈빛은 무섭도록 흔들리며 번 갯불 광막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신의 손자가 죽어가는 광경이 너 무도 아프게 그의 망막을 파고 들어왔 기 때문이다. 그가 눈에 화염의 불꽃을 피어올리 며 살기를 발하기 시작했을 때, 등세욱 의 음성이 담담하게 정적을 흐트러 놓 았다. "사군휘! 이제 우리의 은원을 해결해 야 할 때가 아닐까? 너무도 긴 여정이 니 빨래 매듭 짓는 것도 좋을 것 같은 데……." "흐흐흐! 원하는 바다. 등세욱…… 나는 어쩌면 이 날을 위해 평생을 살 아 왔을지 모른다." "……!" "아느냐? 이인자의 괴로움을? 하나 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영원히 이인 자라는 불명예를 안은 채…… 그러나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고통 을?" "사군휘! 그 고통이 무섭다면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 "일인자의 자리……, 그것은 누구라 도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 인자의 괴로움은 상대가 없다는 고독 일 것이다. 일인자의 고독……. 그곳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싸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대는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에 서 패했던 것이다. 자신의 싸움에서 패 한 자……, 그것은 영원한 패자일 뿐이 다." "흐흐흐! 건방진 개소리! 이제 천하 는 나의 위대한 존재를 알게 될 것이 다. 너의 죽음이 나의 위대함을 인식시 키고 부각시킬 테니까." 파파파팟! 한순간 사군휘의 금포자락이 무섭도록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그가 평생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함이었 고, 등세욱도 동시에 서서히 진기를 끌 어올리기 시작했다. 살기(殺氣). 일순 대평파에 가공할 살기가 팽팽 한 시윗살처럼 공기를 경직시켰고, 바 람도 그 순간만큼은 숨을 죽인 듯 밀 려나갔다. 보라! 두 사람의 신형이 흡사 무형의 힘에 떠받들리는 듯이 허공으로 서서히 상 승하는 광경을! 그리고 그 가운데 두 사람의 전신에 선 찬연한 금광이 서서히 표출되기 시 작했고,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은 금광 속에 가려진 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한순간이다. 콰아아아! 굉음이 천지를 쓸어 버리듯, 두 줄기 금광은 맹렬한 속도로 충돌해 갔다. 쿠쿠쿠쿠쿠! 한 순간 하늘과 땅을 삼켜 버릴 엄 청난 굉음이 대평파 전체를 휘감았고, 꽈아아아아아! 찬연한 금광이 사방으로 뻗어났다. 격돌(激突)! 진정한 절대고수자들의 일대 격돌은 차라리 장엄하고도 위대함으로 이어지 는 장관이었다. 거기에 어느 어리석은 자들이 있어 과대하게 떠벌릴 것이며 미사여구를 동원해 이야깃거리를 삼을 수 있겠는 가? 어느 순간이었을까? "크으윽―!" 답답한 체증 소리와도 같은 신음 소 리가 울리며 찬연한 금광이 거짓말처 럼 걷혀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신형이 가 랑잎처럼 허공을 가르며 곤두박질 쳤 다. 퍼억! 둔탁한 기음과 함께 떨어진 인물. 그는 다름 아닌 이 시대가 주저 없 이 손꼽아 절대자라 칭송했던 일대 효 웅인 만상천사 사군휘, 바로 그였다. 등세욱은 흡사 구름다리를 밟고 내 려오는 양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고, 그 런 그를 칠공에서 피를 토하는 사군휘 는 발악처럼 고개를 들며 이를 갈았다. "등세욱……, 너는 내게 있어…… 영 원히 넘을 수 없는……벽이었단 말인 가……?" 죽음으로 흐트러진 음성의 여운 은…… 바람결에 실려 아득히 사라졌 고 사군휘의 얼굴에도 죽음이란 그늘 이 덮여졌다. 천하제일좌를 위해 평생을 손에 피 를 적신 채 걸어왔던 효웅의 말로, 그 것은 비참함도 위대함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한 인간의 서글픈 죽음에 지 나지 않았다. "……." 정적! 승리에 젖기에는 너무나 많은 인간 의 단면을 보아온 등세욱과 관해영이 었기에 그 죽음 앞에 오직 숙연한 침 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흑란 이 등세욱에게 다가서며 추수 같은 눈 동자에 맑은 눈물방울을 머금었다. 이미 그녀는 모용벽경으로부터 자신 의 출생에 대해 상세히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 그 미약한……. 그래서 부르기조차 힘든 한 마디와 함께 흑란은 와락 등세욱의 품으로 뛰 어들었다. "허허, 네가 진정 나의 혈육이었단 말이냐? 오직 고독이란 평생을 걸어온 나에게도 하늘이 내려준 혈육이란 말 이냐?" 등세욱은 흑란의 검은 머리를 쓸어 내리며 나직한 독백을 흘려냈다. 오직 그만이 진정한 고독이란 것을, 그리고 인생유전의 서글픔을 알고 있 기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 있는 한 마디였다. 흑란은 자신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 듯 그의 품에서 통곡을 터뜨렸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온 혈육의 그리움인가? 등세욱은 그녀가 실컷 울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두 눈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떨어졌고 흑 란은 얼굴을 붉히며 관해영에게 다가 갔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운다는 것은 그녀 아니라도 어쩐지 부끄러워지는 법이다. 그녀는 관해영의 손을 잡으며 이끌 었다. "아버지! 이 사람을 소개하겠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부친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처녀의 심리이겠 지만 막상 말을 꺼낸 흑란은 부끄러움 과 수줍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수 그리고 말았다. 모용벽경은 이미 그들 사이가 어떠 하다는 것을 모성 본능으로 감지하고 미소를 떠올렸다. "얘야, 너는 이 사람을 좋아하느냐?" 등세욱도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아야, 우리는 이미 서로를 잘 알 고 있는 사이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모용벽경 과 등세욱은 허공에서 눈길을 교환했 다. 무어라 해도 관해영이라면 자신들의 사위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 아 니던가? '사위가 될 놈이었다니…… 어쩐지 연이 닿는 놈이라 생각했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등세욱 은 시선을 하늘에 던졌다. '하늘이여, 감사하나이다. 이 늙은이 에게 마지막 순간에서나마 이러한 선 물을 주시어서, 이것이 설사 백 년의 고통을 고독이란 것으로 지내 버린 인 생의 보답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늘, 당 신께 감사를 드리오.' 하늘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인간 등세욱. 어쩌면 평생을 고독이란 상처로 지 내온 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해탈이었을 게다. 그의 노안에 서린 한 가닥 환한 미 소는……. 황제의 전격적인 황명(皇命)이 떨어 졌다. 지옥귀사역의 죄수 모두를 석방한 다. 이는 열 명의 죄수를 다스림보다 한 명의 무고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함이 니라! 홍예공주 주혜설의 막후 입김이 상 당히 작용한 황명. 물론 관해영은 삼일 밤낮을 시달려 야 했다. 그건 그가 약속한 날짜보다 세 시진 을 늦게 황궁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 세시진을 트집잡아 그녀는 삼일 동안 닦달했고 그 때문에 관해영은 석 달을 봉사해야 했다. "앞으로 나하고의 약속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해요.그렇지 않으면 백배로 당할 줄 알아요." 앞으로 당할 일이 너무 많기에 관해 영은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갈수록 해왕도 시절이 그리워지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거기선 자 기 말이 곧 법이었으니까……. 게 해 무협세계 출력일 :: 98/08/13 ─────────────────────────────────────── 제 목 : 혈해신룡 제 58 장 (사랑아, 사랑아) 제 58 장 사랑아, 사랑아 여인. 그녀의 직업은 천하디천한 행상이 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이슬 을 밟으며 과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채 이동네 저 동네를 돌며 살아가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행상(行商)이라는 직업이 다 그렇지 만, 이 여인 또한 코 흘리게 어린아이의 때묻은 동전 한 닢을 위해 갖은 수다 와 적당한 과장을 늘어 놓아야만 했다. 이 여인. 이 여인은 일년 전 사월의 싱그런 태양을 바라보면서 한많은 눈물을 뿌 리며 자신을 잊고져 이 험난한 행상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태어나 그날까지 물 한 방울 묻혀 보지 못했던 손으로 흙을 운명처럼 만 졌고, 일리(一里)도 안 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화려한 마차나 말의 등을 빌 렸던 그녀의 발길은 하루에도 수백 리 길을 걸어 부어 터지기 일쑤였다. 비단금침에 푹신한 이부자리도 짜증 을 부렸던 그녀가 길거리에서 오들오 들 떨었던 날들이 어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던가? 뿐이랴. 진수성찬의 밥상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가 어느 날 부터인가는 허 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풀 뿌리를 후 벼파야 했으니……. 그러나 그녀는 웃었다. 비록 육체의 고통이 무기력하게 전 신을 엄습해 올망정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정신의 안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끔 하늘을 바라보는 습성 이 있다. 아울러 그녀는 하늘을 바라볼 때마 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비록 내 처지가 이런 것일지라도 사 랑하지 않은 남자의 품에 안겨 눈물로 밤을 지새는 많은 여인들보다는 행복한 것이다. "꿀물 같은 사과예요……, 단감이 있 어요." 여인은 오늘 시장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사람이 우글거리는 장터에서 목청을 돋우고 있는 그 음성은 꾀꼬리가 지저 귀듯 격조 있는 음성이라 듣는 이의 심신을 말쑥하게 다듬어 내리는 청량 감이 서려 있었다. 음성 하나로만 따진다면 고관대작의 규수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기품과 단아함이 서려 있는 목소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앞으로 소리 없이 다가온 발 하나가 멈춰서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 했다. "잘 익은 감으로 열 개만 싸 주시 오." "예, 고맙습니다. 손님." 무릇 행상들이 다 그렇듯 이 여인 또한 손님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주섬 주섬 봉지에 과일을 담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 봄바람처럼 다가드 는 하나의 손이 막 과일봉지를 여미는 여인의 손을 포근히 감싸 쥐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손을 뺐다. 그리고는 상대의 따귀라도 갈길양 손을 쳐드는 데 무수한 격정으로 떨리 는 음성 하나가 무어라 말을 할 사이 도 없이 들려왔다. "사랑은 인간이 만들 수 있으되…… 그 사랑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 주는 법. 어이하여 그대는 운명을 거역하고 이리 험난한 길로 뛰어 들었을까?" 순간, 여인의 눈빛이 부르르 미진한 격랑을 일으켰다. "누구세요……?" 여인이 미처 의문으로 떨리는 시선 을 들어 음성의 주인을 확인하기도 전 에 또다시 그녀의 온 영혼을 뒤흔드는 말이 있었다. "군매! 정녕 이 관해영의 목소리마저 도 영영 잊었던 말이오?" "관…… 해…… 영……!" 해연히 놀라는 시선을 들었을 때 여 인은 보았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여명 위로 솟구치는 햇살처럼 미소짓고 있는 눈 부신 한 사내의 모습을……. 눈빛이 떨리는가 싶었는데, 그 떨림 의 물결은 얼굴로 번졌고 다시 온몸으 로 번져 주체할 수 없는 파랑을 일으 키니……. 주책없이 불현듯 흐르는 이 눈물은 가슴속에 묻어 두기에는 너무 부피가 큰 그리움의 갈망 때문이었을까? 마주한 시선과 시선이 침묵을 잉태 하고, 그 침묵의 공간을 타고 흐르는 오랜 애증의 열병은 긴 동면에서 눈을 뜨며 와락 울음을 터뜨린다. "해, 해영……!" "혜군……, 너는 결국 다시 나의 품 에 옛날처럼 안기고 말았구나." "흐흐흑……!" 여인은 갑자기 펑펑 젖먹이 어린아 이처럼 사내의 가슴에 안겨 울음을 터 뜨렸다. 엎어진 과일 바구니가 지나가는 사 람들의 발길에 짓밟혀도, 모든 사람들 이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라 도 그것이 어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하고 절실할 것인가? 꿈에라도 만나면……, 꽃길을 걸으 며 털어놓으려 했던 이 위혜군의 사랑 이었는데……. 너무도 보고 싶어 차라리 그 사람을 잊기보다는 이런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인데……. 문득, 두 사람은 젖은 시선으로 서로 를 응시했다. 고난의 언덕을 넘고…… 헤어져야 했던 아픔의 모퉁이를 돌아 끝내 만나 버린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가슴 벅찬 환희였으니……. 그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어서일까?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햇살이 환 한 미소를 짓는 것은. 그 햇살을 바라보면서 사내는 여인 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군매! 아름다움을 지녔기에 꽃은 병 드는 것이다. 군매 또한 아름다웠기에 시련을 감내해야 했던 것……. 어둠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아침은 찾아온 것 이다. 이제 우리는 이 아침을 지키는 것이니……. 이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 켜야 할 사내의 책임, 이로써 우리의 고난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그…… 그래요." 여인은 웃었다. 수많은 고통의 수채 속에서 간신히 찾은 웃음이기에 더욱 찬란하게 보이 는 멋쩍은 웃음으로……. "저…… 당신 아기를 낳았어요. 사내 예요……." "……." 순간적으로 관해영은 멈칫했다. 위혜군! 그녀가 죽을 수 없었던 이유 오직 하나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분신을 자신이 소 중히 가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수모와 멸시를 받더라도 그녀 는 견디어야 했던 것이다. 관해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 다. "내게 아기가?" "그래요. 당신을 닮아 영특하기 짝이 없죠.." 아이에 대해 말할 때는 그녀의 입가 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그건 그녀가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 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고 또한 아이의 아버지인 관해영에 대한 애정이 얼마 나 깊은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엄마!" 멀리서 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오 고 있었다. 티없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달려오 는 아이……. 판에 박은 듯 관해영을 닮은 귀여운 사내 아이……. 아이를 보는 순간 관해영은 아이에 게 달려가기보다 자신도 모르게 위혜 군을 다시 와락 안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연신 중얼거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것인가? 하지만 위혜군은 관해영의 심정을 알고도 남았다. 아이를 키워 준 게 고마운 게 아니 라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그녀에게 고마운 것이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그녀도 관해영을 힘주어 껴안았다. 그녀 역시 끝까지 자신을 잊지 않은 관해영이 고마웠다. 처음에 우리의 사랑은 고통스러웠지 만 그 나중은 심히 행복한 것이라. <大 尾> 게 해 ─────────────────────────────────────── PRINTER/CAPTURE를 정지하고 [Enter]를 누르십시오.